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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5-17, 예수로 말미암아, 21.10.31, 박홍섭 목사
히브리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선을 행하며 서로 나눠주는 삶을 살라는 권면이 등장합니다. 거의 결론적인 마무리 성격이 있는 권면입니다. 이 권면의 대상인 독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의 위기 앞에 있으며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배교의 유혹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 때문에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하며 선을 행하라는 권면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예수교입니다. 이들이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교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 믿는 신앙에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결국 예수 믿는 신앙에 대한 무지와 이해 부족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내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고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한 이유는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 때문에 현실적인 이익을 보는 데 있지 않고 예수로 말미암은 삶에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시어 성령을 주셨는지를 알면 자기가 자기 삶의 근원이고 목표고 힘이 되었던 삶에서 예수로 말미암은 삶으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타락한 우리의 종교성 안에는 예수 믿는 신앙조차 고통은 면해주고 복을 불러오는, 그래서 자신을 이롭게 하고 자신을 강화해주고 증명해주는 어떤 비법으로 기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독자들이 왜 믿음의 시험을 겪고 있습니까? 왜 영적 침체 가운데 빠지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까? 그 기대가 충족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어지고 행복이 시작되며 자기가 더 강화된다고 기대했는데 정반대의 현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도 예수로 말미암은 삶, 예수 믿는 신앙을 그렇게 기대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병들었을 때 낫기를 기대하고 가난할 때 부해지기를 원하고 어려울 때 어려움이 물러가도록 기도하고 힘들 때 주를 찾아 위로를 구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 요소가 기독교 신앙에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비단 기독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도 다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종교성은 그런 기대로 온갖 종류의 종교를 만들고 심지어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마저도 그런 신앙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런 내용과 요소가 기독교 신앙의 목표와 핵심이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게 되고 누가 더 나의 소원을 잘 들어주는가로 종교를 비교하게 되어 자신의 현실적 기대가 무너질 때 의심하고 낙심하며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마지막 권면인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는 말은 그런 종교적 심리가 충족되고 현실적 요구가 채워지기 때문에 떨어지는 요구가 아닙니다. 이들은 지금 가진 것도 빼앗기고 갈수록 삶의 형편이 나빠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삶을 살라는 말은 그렇게 나의 외적인 모양과 조건과 환경이 그럴듯한 모습으로 증명되지 않아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내가 믿는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보다 부자가 되지 않고 지금보다 편안해지지 않고 지금보다 안락한 삶을 살 수 없고 어려움이 계속되고 힘든 고난의 삶이 사라지지 않아도 내 안에서 나를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하며 나를 편들고 있으며 나를 돕고 계시는 예수 때문에, 예수님이 인도하여 데리고 가는 진리와 생명의 가치 때문에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오해하지 않는다면 내가 보란 듯이 증명되고 치장되지 않아도 그런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증거를 무엇으로 기대합니까? 누가 봐도 부러워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힘과 성공을 갖춘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을 그런 그림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박수와 환호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인터뷰하는 그림 말입니다. 그런 그림을 기대로 갖고 있으면 내가 강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내가 약하면 하나님도 약해지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은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조건과 모습과 환경과 상관없이 높임 받고 찬송 받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오히려 내가 약할 때 주님의 강함이 드러납니다. 고후 4:7-11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질그릇이고 예수님이 보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의 질그릇을 더 화려하고 멋지게 치장해 준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내 질그릇이 어떻게 되든지 내 안의 보배 때문에, 그 보배의 가치 때문에 사는 삶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나로 인한 삶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는 삶, 그러하기에 오히려 나라는 질그릇이 깨트려 져도 내 안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고 그 생명을 더 분명하게 맛볼 수 있기에 불만이 없는 신앙이 예수 믿는 신앙입니다. 깨트려 진 자리에서 오히려 온전할 때보다 더 풍성한 예수의 생명을 맛보고 은혜의 비밀을 누리면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선을 행하며 나눠주는 삶을 잊지 않는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유능함과 외모와 상관없이 예수를 자랑하여 심히 큰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께 있음을 드러냅니다. 내가 깨트려 지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습니까? 깨트려 진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너무나 귀한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깨트려 져도 보배이신 예수님은 깨트려 지지 않고 나를 더 깊고 넓고 높은 영광의 세계와 보배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비밀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13). 내가 영문 밖의 고난의 자리에서 깨어질 때 생명의 주가 보배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자고 말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그때 보배 되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오히려 주님의 능력과 강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로 말미암은 삶의 비밀입니다. 역설이고 신비입니다. 기독교의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깊어지고 그 인격과 사람됨이 숙성되어 나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베어져 나오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내가 싫어하는 자들이 망하고 원수가 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 보란 듯이 하나님이 나를 편드시고 있음이 증명되는 그림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외적인 조건과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을 전하고 세운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힘과 외형을 가졌을 때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강화되고 내가 증명되고 내가 치장되어 내가 큰소리칠 수 있고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모습으로만 우리의 신앙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산되면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침체되고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찬양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합니다.
왜 히브리서 독자들이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예수에게 실망하고 유대교가 기다리는 메시아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진 메시아입니다. 아직도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그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을 가진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어간 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메시아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라고 증언합니다. 그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편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게 하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깨끗함과 존귀한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는 메시아지 우리의 욕심과 헛된 소망을 부추기고 만족시키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까지 하면서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고 있는 메시아를 단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 정도로 생각하고 대우하는 것은 무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말론 브란도가 뉴욕의 마피아 패밀리 보스 ‘돈 콜로오네’로 나오는 영화 대부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막내 딸 코니의 초호화판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인 말론 브란도에게 온갖 청탁을 합니다. 그중에 이태리 계의 장의사 ‘보나세라’가 말론 브란도에게 “제 딸 아이가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실려 왔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발 제 딸의 복수를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말론 브란도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이 무례한 친구야, 자네는 생전 처음으로 나에게 부탁하면서 존경심을 보이거나 우정을 구하기는커녕 나를 대부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다짜고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사람을 죽여 복수해 달라고 하니 황당하기 짝이 없구나. 그런 부탁이 아니라 내 식구가 되는 게 우선이지, 자네가 만약 내 식구였다면 자네에게 일어나는 일은 내 일이 되고 자네의 복수는 나의 복수가 되는 거야” 그러자 그 장의사가 무릎을 꿇고 “돈 콜로오네여 저의 친구가 되어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말론 브란도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십니까? “이제부터 너에게 일어난 일은 내게 일어난 일이고, 너의 적은 나의 적이 될 테니 걱정하지마!”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어떤 존재입니까? 혹시 우리도 그 장의사처럼 하나님을 향한 마땅한 존경심과 사랑과 친밀감은 조금도 없고 언제나 나의 복수와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을 가진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이해와 인식을 가진 믿음으로는 성도의 영광과 명예를 알 수 없고 예수로 말미암는 삶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이냐?” 너는 나로 말미암아 살고 있느냐? 너의 일이 나의 일이 되고 내 일이 너의 일이 되고 있느냐?
그리고 그런 신앙이 되기 위해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을 순종하라”고 지도자의 역할과 그 지도자와 그의 가르침을 대하는 교인들의 자세를 언급합니다. 나로 인한 삶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성경의 진리를 잘 가르치고 교인들은 잘 배워야 합니다. 아니 함께 성령께서 지도하시는 성경의 말씀들을 잘 배워서 따라가야 합니다. 지금 이들은 이런 지도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존중하지 않고 유대교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삶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로 말미암은 삶을 부추기는 인도자를 따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별하셔야 합니다. 진리를 분별하고 지도자를 분별해야 합니다. 사망과 생명, 의로움과 불의를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해서 맹목적 순종이 아니라 타당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단지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순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빈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목사라는 직함을 갖고 교회를 망치는 자들은 조금도 존경하거나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맹종하는 신자들이 있는 곳에 군림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들으려 하는 교인들 때문에 거짓 교사들이 추종을 받습니다. 귀를 즐겁게 하거나 자신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고 자극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이 주님 앞에 계산할 사람인 것처럼 깨어 경성하여 말씀을 해석하고 전하여 자기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로 말미암아 살게 하는 지도자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와 함께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골 1:24-29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함께 바울처럼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세워지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은혜를 주셔서 나로 인한 삶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는 믿음의 삶, 찬미의 제사로,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는 삶의 예배로 잘 드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