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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월)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사람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가 죽음의 세력 안에 갇힌 사람이며, 다른 이들과 친교를 나눌 수 없는 단절된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람이기에 다른 이들에게 공격성을 지니게 되고, 사람들은 그에게 꼼짝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더러운 영 하나의 영향력으로 죽음과 단절의 악취가 퍼지고 있는 곳이 바로 게라사인들의 지방이었던 것입니다. 그 영은 예수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돼지는 성경에서 불결한 짐승이며, 더러운 영이 갈 수 있는 곳이란 결국 더러운 곳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디 더러운 영이 들어와야 할 곳이 아니라, ‘성령의 궁전’이어야 하는 법입니다. 더러움의 상징인 돼지 떼가 물에 빠짐으로써 마을 전체가 정화되었습니다. 죽음과 단절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놀라운 은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돼지 떼의 손실만 보게 되었다는 경제적인 논리에 갇혀 구원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마을에서 쫓아냈습니다. 당장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심이 깊어 하느님께 스스로 정결을 서원하였다고 합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기간에 그 지방의 집정관이던 퀸티아누스(Quintinianus)가 그녀를 탐해 그녀를 소유하려는 계략으로 박해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녀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퀸티아누스는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그녀를 매음굴로 보냈으며,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죽을 때까지 이글거리는 석탄불에 돌리면서 구워 죽였다고 전해옵 니다. 후일 이것이 잘못 전해져 접시 위의 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성녀 아가타의 축일에는 빵을 축성하는 관습이 내려옵니다. 성녀 아가타는 처녀, 양치는 여자, 종 만드는 사람, 유리 제조공, 광부, 알프스 등반 안내자,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이자 불과 날씨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10여 세 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安土山)의 예수회 신학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22세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습니다. 수사가 된 성 바오로 미키는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후에 주교 마르티네즈(Martinez Pedro)를 따라 오사카(大阪)에서 활동하던 중 예수회 신부인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Soldi)의 눈에 띄어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함께 활동했습니다. 이후 그는 불교 승려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고, 자신이 저술한 교리서들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깨우치기도 하였습니다. 1590년 순찰사 발리냐노(Valignano Alessandr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96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금교를 무릅쓰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히데요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1597년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회 수사 3명과 일본인 신자 15명 등 24명이었습니다. 성 바오로 미키는 이때 오사카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1597년 1월 1일 교토의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어 그는 1월 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사카를 거쳐 1월 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하였고, 27일 동안 혹한 속을 걸어서 2월 5일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 일행은 도중에 일본인 신자 2명이 자진하여 체포됨으로써 모두 2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나가사키(長崎)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西坂)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습니다. 순교 직전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 프란치스코(Francisco Bosco)와 마르게리타(Margherita Occhiena)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두 살도 안 되었을 때 아버지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여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깊은 신앙과 근면한 노동 정신 그리고 순종의 덕을 배웠습니다. 카프릴리오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만을 배웠습니다. 15세 되던 해인 1830년에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 읍내의 한 초등학교에서 단기 과정을 이수한 후, 키에리(Chieri) 시의 인문학교에 진학하여 5년 과정을 마치고 1835년에 키에리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41년 6월 5일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사제 서품 후 성 요한 보스코는 그의 은인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 6월 23일) 신부의 도움으로 토리노(Torino)에 있는 사제 연수원에서 신학 연구와 현대 사목에 관한 연구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토리노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12-20세의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에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소년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844년 연수원을 졸업한 후 바롤라(Barola) 후작 부인이 경영하는 '소녀들 고아원'의 지도 신부로 부임하였으나 소년들의 사목에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독립한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100여 명이 넘는 소년들과 함께 거처도 없이 이동하다가 1846년 4월 토리노 시의 서북쪽 도라 리파리아 강변의 발도코(Valdocco)에 정착하였습니다. 1851-1853년에는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성 요셉 카파소 신부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발도코에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습니다. 일반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기숙사의 소년들을 외부 학교에 보냈으며, 1856년에는 불어나는 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기숙사 구내에 학교를 세우는 등 그의 청소년 교육 사업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각자의 개성과 신앙을 격려하여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길러냈습니다. 이 사업이 날로 확대되자 그는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사랑을 설교하러 다니는 한편 유명한 “예방 교육법”이란 저서를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사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교황 비오 9세(Pius IX)의 권고에 따라 1859년 18명의 제자들에게 수도 서원을 하게 하였고, 그들은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수도 서원으로 기초를 다진 성 프란치스코의 살레시오 수도회는 1869년 3월 1일 정식으로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으며, 1871년 4월 13일에는 회헌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1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는 한평생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간언할 때에도 그는 요한이라는 사람의 말을 두려워합니다. 그를 죽이고 싶기는 하지만, 요한에 대한 민중의 인기가 하도 높아 그것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 소녀가 요한 세례자의 머리를 요구하자, 헤로데는 민중의 시선이 두려워 몹시 괴로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잔치에 참석한 고관들의 시선이 더 두려워 그를 처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며 두려워합니다.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 권력자였지만, 늘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헤로데 임금에게 간언하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정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더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들다’(스플랑크니조마이, splangkhnizomai)라는 동사는 ‘배 속’, ‘내장’을 의미하는 낱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가엾은 마음’이란 속이 요동칠 정도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동사는 예수님의 마음 상태를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입니다. 한 사마리아 사람은 길에서 강도에게 폭행당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서는 속이 요동칠 정도의 연민을 느낍니다. 비록 비유의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한 탈렌트가 6천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니, 한 데나리온을 우리 돈의 5만 원으로 친다 해도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이 엄청난 빚을 그냥 탕감해 줍니다. 미리 유산을 받고 도망친 아들, 호화로운 옷을 입고 ‘먼 고장’으로 가버린 아들, 이제는 거지가 되어 누가 보아도 그 아들이라고 알아볼 수 없는 아들을 아버지는 알아봅니다. 그것도 멀리서 알아보고 가엾은 마음을 갖습니다. 상대방의 고통과 아픔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어 내 마음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예수님께서 느끼시어 꿀맛 같은 휴식도 포기하시고서 사람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예수님을 찾을 때 그분께서는 그러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출처-Good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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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가 간절히 예수님을 찾을 때
그분께서는 가엾은 마음-요동치는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