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 알아차림으론 표현 불가능"
마인드풀니스 & 사띠 논쟁-12
법보신문 | 2010-02-19 | 김준호(부산대 HK전임연구원)
마음가짐․상태․반성적 사유 의미도 내포
사띠와 마인드풀니스 동일시해선 안돼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및 ‘사띠(sati)’의 번역과 이해를 둘러싸고 동방대학원대 교수 인경 스님과 김재성 서울대학원대 교수가 열띤 지상논쟁을 벌였다.
이어 자비선 명상센터 지도법사 지운 스님,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안양규 동국대(경주캠) 불교학부 교수, 이필원 청주대 강사 등이 이번 논쟁과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가운데 이번에는 김준호<사진>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HK전임연구원이 사띠와 마인드풀니스에 대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김 박사는 부산대대학원에서 『초기불교 선정설의 체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남북전에 나타난 사념처의 위상」, 「초기불교의 욕망론과 선」, 「사띠논쟁의 공과」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편집자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에 대한 의견과 삼빠잔나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가에 대한 설명을 요청받았다. 필자는 초기불교의 명상을 연구해오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여기서 비판적이란 제시된 하나의 주장에 혹 부당한 전제가 개입되지 않았는가를 먼저 반성적으로 살펴보려는 태도를 말한다.
명상수행이 강조되고, 나아가 심리치료와 결합되어 명상법이 좀 더 구체화된 프로그램으로 제시되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가 강조되면 다른 하나는 간과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임승택, 안양규 교수와 마찬가지로 필자 또한 초기불전에서의 사띠와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마인드풀니스를 구분해야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두 분이 지적을 했기 때문에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초기불교 명상법들에서 발견되는 중층의 구조와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말하고 싶다.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수많은 명상법들은 그대로가 과연 부처님의 직설인 것일까? 필자의 관심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 질문은 현존하는 초기불전 자체가 그대로 부처님의 직설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니까야는 말 그대로 특정 부파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오랜 논의를 거쳐 편집되고 가공된 흔적이 곳곳에서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나’(jhana 禪)라는 용어가 단독으로 서술될 때와 사선정이라는 체계 속에서 등장할 때, ‘자나’는 같은 용어임에도 그것이 의미하는 지평은 달라진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숫타니파타」, 「담마파다」 등의 운문계열 경전에서 잘 나타나듯이(졸고, 「초기불교 선정설의 체계에 관한 연구」 참고), 단독의 술어로 쓰인 ‘자나’는 계정혜로 치면 정학, 사마타-위빠사나의 짝으로 치면 사마타에 속하는 명상이지만, 사선이라는 체계화된 명상법 속에서의 ‘자나’는 정학이나 사마타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사선정이라는 명상법 자체 속에서 정혜의 성격을 포괄하고 사마타-위빠사나마저 포괄되는 듯한 구조화가 진행되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통적인(?) 잣대에 따르면, 팔정도의 정념에는 사념처를, 정정에는 사선을 각각 대입시켜 ‘사념처→위빠사나→지혜’ 그룹과 ‘사선(사마타)→삼매’의 그룹으로 엄중히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사선의 각 단계에서 나타나는 구성요소에는 사띠가 등장하며 그것도 ‘사념청정(捨念淸淨)’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은 결코 간과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사선의 각 단계를 성취할 때마다 곧바로 오온의 무상․고․무아관을 행하는 경문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MN.Ⅰ.64,p.435 ; 중아함경 권56 제205 「오하분결경(五下分結經)」(大1,p.778下), AN.Ⅱ.4.124,p.128.]에 기대어 말하면,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거칠게 도식적으로 선을 그어버릴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필자는 이같은 명상의 성격은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이 당시의 갖가지 명상법을 받아들이면서 취했던 태도와 부합한다고 믿는 편이고, 그 뒤 제자들이 좀 더 체계를 갖추려는 노력 등이 중첩되어 현존하는 초기불전에 반영되어 서술된 것이 아닐까 가늠하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생각은 필자의 의견으로서 가설에 불과하다.
‘사띠’ 역시 단독의 사띠에는 사마타-위빠사나의 어느 한 쪽에만 속할 수 없는 이중적인 성격이 내장되어 있지만, ‘사념처’ 체계 속의 사띠는 이미 위빠사나와 직결 내지는 거의 동일시할 수 있는 의미를 띠고 있다. 곧 사념처 안에서의 사띠는 사마타적 성격 및 정의적인 측면이 배제되고 인지적인 측면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는 설명인 것이다. ‘알아차림’이라는 번역어를 채택하는데 일단 동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사띠수행에는 ‘알아차림’만으로는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는 내용 또한 있다.
‘늘 기억하여 잊지 않음, 주의를 불러일으킴 또는 주의력이 늘 살아있도록 마음을(이) 일깨우는(일깨워진) 또는 그러한 상태가 잘 이루어질 수 있는 마음가짐의 지속, 그 결과 알아차리는 기능이 또렷해짐 또는 주의가 깊어진 상태, 관조가 행해지도록 준비된 마음상태….’
인용한 내용은 초기불교 경전에서 사띠가 나오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이런 뜻이 아닐까 하고 정리해본 것이지만, 열거가 길어지는 사정에서 이미 드러나지만 한 두 마디로 사띠라는 용어를 풀어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아직 적절한 용어를 생각해내지 못한 탓에 앞선 이들이 쓰던 용어 중에서 ‘알아차림’과 ‘주의집중’을 번갈아 쓰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알아차림과 주의집중만으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의미가 사띠에는 또 있다.
한 경전에는 죽은 여인의 시체를 치우면서 무상의 이치를 깨닫는 게 아니라 성욕이 발동하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장면이 나온다(「테라가타」 게송315-317). 몸에 병이 들어 마음이 방일되려는 자신의 마음상태를 급히 다잡는 모습도 보인다(「테라가타」 게송30). 꾸지람을 들었을 때 자신을 돌이켜보고 충고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는 대목에서도(「숫타니파타」 게송973) 사띠가 등장한다.
이런 경우에 등장하는 사띠는 ‘병’, ‘병’ 하며 라벨링 하는 등의 요즘 권장되는 명상법의 적용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알아차리고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곧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마음의 상태를 놓치지 않는 힘 또는 그같은 능력이 발휘되는 토대로서 사띠가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어를 쓰고 있는 임승택 교수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인용한 경문을 보면, 주의집중과 알아차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성적 사유가 개입되고 있음도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에는 주의집중, 알아차림은 물론 그것이 이루어지는 마음가짐이나 상태 또는 (기억)능력 등이 작용하며 나아가 반성적 사유와 어울리면서 명상수행의 전체 과정을 구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사띠에는 알아차림(위빠사나적 성격), 주의집중(사마타적 성격)과 더불어 ‘사마타나 위빠사나 명상이 이루어지도록 준비된 마음가짐 또는 마음의 힘’이라는 사띠의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번역어도 필요하게 된다.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란 말을 써도 좋을 것으로 보이지만 어감상 온전한 표현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다.
다음으로 삼빠잔나의 해석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띠가 삼빠잔나와 결합되어 사용되는 용례는 물론 많다. 한역에서는 ‘정념정지(正念正知)’로 옮기지만 실제로는 ‘정념지(念正知, sati sampajañña)’이다.
인경스님의 주장에서 삼빠잔나에 ‘분명한 앎’의 뜻이 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지만, 남방 상좌부 스님들의 의견에 근거하여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사띠이고, 대상에 대한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인식 그래서 삼빠잔나가 성스러운 앎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초기불전에서 사띠와 삼빠잔나가 함께 쓰이는 용례는 전자에 명상의 집중을 포함한 정의적 성격을, 후자에 인지적 성격을 담아 한 짝으로 내세우는 상투적인 서술방식이라는 점이다.
임승택 교수의 지적처럼, 실제의 명상에서도 알아차림[삼빠잔나] 전에 주의를 모으는 것[사띠]으로 구분하는 정도가 타당하다고 본다. 삼빠잔나가 지혜와 연결되는 것은 사실일 터이지만, 지혜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정념정지를 통해 지혜로 나아가는 것과 삼빠잔나에 내재하는 지혜의 속성을 강조하는 것도 별 문제가 없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계율도 선정도 사띠도 지혜로 이어지는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삼빠잔나가 이루어지는 자체가 바로 성스러운 지혜라면, ‘정지(正智, sammapaññā)’라는 표현(「담마파다」 게송 96, 190)은 왜 필요할 것인가?
‘정념정지’란 하나의 특정한 사태 또는 상황에서 시작하여 그 사태를 여과 없이 그대로 알아차린 것이다. 이같은 상태는 지혜로 직결되는 훌륭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로서의 지혜와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호흡으로 출발했건 자애에서 출발했건 이제 한번 닦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닦음이 하나의 지혜를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성스러운’ 등의 수식어를 붙이는 데에는 조심스런 태도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수행이니 명상이니 하는 주제를 생각하다 보면 늘 두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첫째는 지혜의 트로이카인 문사수(‘聞思修)’ 중에서 문혜와 사혜에게는 왜 지혜 대접을 하지 않으려 할까이다. 둘째는 사띠나 삼빠잔나와 같은 개별 용어에 매달리다보면 마치 불교수행의 전부가 사띠나 삼빠잔나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는 점이다. 불교 수행의 근간은 계정혜 삼학을 온전히 갖추어 닦는 것일 터인데도 자꾸 잊어버리니 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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