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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5일 인도양 구간 [1부]
오전 7시 조금 못돼 출항했다. 갈 길이 먼데 굳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1,748 해리, 14일 17시간을 가야 한다. 바람이 잠잠해 출항은 쉬웠다.
혼자 하는 항해라 출항 시엔 엄청나게 바쁘다. 엔진을 켜고 배를 다 점검한 후, 계류줄을 풀고 출항한다. 대개의 마리나 입구는 물이 얕아서 배가 바닥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빠져 나와야 한다. 그래도 출항 사진 몇 장은 남기자.
배가 마리나를 빠져 나오면 인터넷이 끊어지기 전에 밴드에 출항 소식을 올린다. 앞에 어부들의 그물을 조심하면서, 계류줄 사리기, 팬더 정리하기 (팬더를 근해 항해처럼 두어 번만 묶으면 거친 항해 시 다 풀려 나간다. 아주 단단히 묶어야 한다.) 수도 호스 정리하기, 육전 연결선 정리하기. 그런 것들이 일단 끝나면 어머님과 카톡 통화를 한다. 곧 인터넷이 끊어지고 14일 동안은 위성 전화 수신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와중에 작은 어선들과 그물도 피하면서 운항해야 한다.
가만 보니까 어선이 아니다. 작은 모터보트에 고객들을 태우고 돌고래 관광을 하고 있다. 바다 여기저기 돌고래들이 뛰어오른다. 이상하게 제네시스로 오진 않는다. 배들이 워낙 많이 구경하러오니 세일 요트 하나 정도는 돌고래들의 좋은 놀잇감이 아닌 모양이다.
오전 10시. 엔진 RPM 1,200, 선속 4.9노트. 오늘자 윈디 상엔 바다로 나오면 강한 스타보드 쿼터런이 되는 것으로 예보되어 있는데, 바람이 하나도 없다. 풍향계가 빙글빙글 돌고 세일은 젖은 빨래처럼 축 처져있다. 그래도 속도는 5,3노트로 조금 올라간다. 레이더를 보니 전방이 텅 비었다. 밀린 빨래 몇 가지 더 하자.
선실 화장실에서 빨래하며 생각한다. 점점 더 장거리 항해가 부담 없어진다. 물론 강릉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만, 비싼 파라다이스 Hawana 마리나에 있기 보다는, 어서 인도양으로 출발하고 싶었다. 항해가 길어질수록 내 속의 코어가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다 21년째 항해 중인 윌리엄 비슷하게 늙어 가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는 Seychelles 이라는 곳에서 2년을 머물렀다고 한다. 이번 수단 수아킨에서도 3개월 이상 머물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뿌리 없이 흘러 다니고 싶진 않다. 나는 유목민 아닌 정착민이 되고 싶다.
10시 45분. 우전방에서 아덴만 쪽으로 군함 한 대가 부리나케 진행 중이다. 아마 수단에 자국민 보호를 위해 작전하는 군함이겠지. 3일전 오만 살랄라에 있던 청해부대 이순신함도 수단으로 출항했다. 나는 청해부대 위치가 극비인줄 알고 함구 했는데, TV 뉴스에 청해부대가 살랄라에서 수단으로 간다고 방송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오만까지 오는 동안, 터키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홍해 건너오는 동안 앵커링 했던 수단 수아킨. 수단은 지금 쿠테타로 내전 중이다. 지금 인도양을 건너 스리랑카로 가는데, 아버지가 인도네시아 서쪽에 강도 7.1 규모의 지진이라고 쓰나미 조심하라신다. 나 하나 항해 하는데 온 식구가 세계 뉴스에 귀를 기울인다. 2월 20일, 이탈리아 마리나스베바를 출항해 2달 5일 째인데, 국제적인 큰 사건만 벌써 몇 번째다. 그래도 큰 탈 없이 인도양을 건너고 있다. 만약 수아킨에서 내전으로 정부 행정이 멈춰, 출국 클리어런스를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 국가의 항구에서 상황을 참작해 주겠지? 하지만 오만 살랄라 같으면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쩐지 지옥 목구멍까지 다녀온 느낌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고, 우리 인생은 언제, 무슨 일로 좌초될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12시 03분. 바람이 없다. 윈디가 첫날부터 헛 다리인가? 엔진 RPM 1,200, 선속 5.7노트. 바람은 없는데 속도는 좋다. 아마 조류를 잘 타고 있는 모양이다. 세일은 두 개다 그냥 널어놓은 빨래 같다. 일단은 선속이 좋으니 큰 염려는 안한다.
오후 3시. 새벽부터 잠을 설쳐서 인지 깜빡 잠들었다. 2시간가량 정신없이 자다가 일어나 보니 우현 12마일 밖에 LNG 선 같은 대형배가 지나간다. 늦은 점심으로 신라면과 찬밥을 말아 먹는다. 오늘 항해의 첫 끼다. 제네시스가 육지와 평행으로 가는 동안 계속 인터넷이 된다. 수단의 우리 교민들이 포트 수단을 통해 한국으로 귀국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우리 가족은 독일선장 마르코 가족과 함께, 포트 수단에서 장을 보고 레스토랑을 찾다가, 라마단 때문에 포기했었다. 직접 가본 데가 국제 뉴스에 나오니 뭔가 실감난다. 마침내 육지와 30마일 가량 떨어지니 인터넷이 끊긴다. 1,701 해리 남았다. 47해리 왔다.
오후 4시. 바람이 스타보드 빔리치 9노트로 안정이 되었다. 선속은 5.5~6.0노트. 세일이 더 이상 펄럭이지 않고 자리 잡았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파리를 벗어나는 일이오.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 다를 바 없거든.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사흘을 내리 굶고 지내야 할 때가 있다오. 그렇게 굶으면 몸도 상하지만, 의욕이 달아나요. 나는 그 의욕을 되살리고 싶소. 파나마로 떠나서 미개인처럼 살려는 것은 그래서요. 태평양에 있는 타보가라는 작은 섬을 알고 있소. 파나마 해안에서 가까운 곳이지. 인적이 드문 자유롭고 기름진 땅이라오." (아내에게 보낸 편지, 1887년 3월 말) - 고갱, 고귀한 야만인 중.
지중해 항해와 비슷한 느낌이다. 파도는 50센티 정도, 바람은 아직도 들쭉날쭉이다. 속도는 5.2노트. 나는 이번 항해에서 바람이 강하지 않은 한, 이정도 속도를 유지할 것이고, 엔진 RPM 1,300을 넘지 않을 작정이다. 범주로만 17일 가까이 운항할 여유를 가질 거다. 중간에 기름 떨어져서 표류하고 싶지 않다. 만약 운항 중 연료가 문제가 된다면, 윌리엄이 알려준 Cochin India, Bolgaty 마리나로 피항 계획도 가지고 있다. 바다 전체에 엷은 구름이 끼고 있다.
레이더에 작은 점이 나타났다. 그 점은 그대로 좌현으로 접근했다. 가시거리에서 보니 카타마란이다. 나와 비슷한 항로로 반대로 오고 있는 세일 요트다. VHF 12번과 16번으로 연결을 시도해 본다. 응답하지 않는다. 저 배가 오만으로 가는 거리면 하루도 채 남지 않아 정박하며 쉬게 될 것이고, 지부티로 간다면 7~8일을 더 가야 한다. 나는 홀로 카타마란에게 본 보야지!를 외쳐 준다. 망망대해에서 잠시 흥분했던 기록이다.
오후 5시 30분, 메인 세일은 풀, 집세일은 80% 로 줄였다. 두 세일 간의 간섭으로 슬롯 효과가 상쇄되는 느낌, 마침 스타보드 빔리치 풍속 11노트, 선속은 6.2노트로 올라간다. 윈디에 보였던 바람 지역에 온 모양이다. 이대로 3~4일은 갈 거다. 이후 2~3일 무풍지대. 그 후엔 뒷바람으로 빠르게 인도 서부해안에 접근한다. 윈디로 본, 항로 계획은 그렇다.
오후 6시. 브로드리치 풍속 13~14노트. 엔진을 끄고 선속 5.5~6.0 노트. 이대로 엔진을 끄고 갈까? 엔진 Rpm 1,200으로 거리를 빼 놓을까 고민 중. 일단 바람 맛이 너무 좋으니 몇 시간 즐겨 보자. 나는 이런 항해를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레이더에 잡히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다. 쾌적하고 행복한 범주다. 배 뒤편으로 지던 태양은 일단 구름에 먼저 숨었다.
오후 7시. 풍속 16노트. 선속 7노트. 드디어 윈디가 예보한 바람대를 만난 듯하다. 메인세일도 약간 축범 한다.
오후 8시. 오토파일럿 등 항법장치, 야간이라 등화도 켜야 하니, 배터리 충전에 의미를 두고 Rpm 1,000으로 엔진을 켠다.
오후 11시. 좌우측 4마일에 각각 대형 선박이 있다. 항로를 제대로 잡았나 보다. 풍속 빔리치 13~14노트. 선속 6.2 노트. 후방에 초승달. 예쁘다. 리나 눈썹 같으네.
오후 11시 15분. 배들이 많이 지나는 항로를 잡은 것은 그만큼 일반적인 항로를 잘 잡은 것이지만, 아무런 경보도 없이 배들 사이로 뛰어든 것이다. 계속 야간 견시를 해야 한다. 약간 절망적인 마음으로 플로터 스위치를 눌러보고 있을 때, 이게 웬일! 가드 존 스위치가 눌려졌다. 왓! 기적이다. 이제 가드존 경보를 들으며 운항 가능하다. 만세!
바람 소리가 거세다. 아덴만 탈출 항해 때 듣던 익숙한 바람 소리다. 다만 지금은 역풍항해가 아니라서, 배가 파도를 부드럽게 넘어간다. 파도도 옆에서 온다. 펀칭이 없다. 풍속 17노트 선속 7.0노트. 엔진은 충전을 위해 1,100Rpm.
4월 26일 (수) 오전 5시 34분. 선속 7.8노트? 뭐지? 혹시나 싶어 핸드폰을 켜고 속도를 다시 확인한다. 맞다. 삼성패드와 핸드 폰 공히 7.8노트. 엔진은 끄고 풍속은 빔리치 15~18노트를 오르내린다. 현재 남은 거리 1609 해리, 139해리 왔다. 평균 속도 6노트 정도다. 목요일 까지는 이렇게 달리고 금요일부터는 거의 무풍지대다. 이번 항해의 관건은 연료 아끼기다. 엔진은 충전을 위해 잠깐씩 켜기로 한다. 이렇게 몇 자 적은 동안 선속 8.5 노트가 표시 된다.
고갱은 당당하지만 애절한 편지를 샤를 모리스에게 보냈다.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것이 못 됩니다. 고독을 이겨내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려면 뱃심이 있어야 합니다." -고갱, 당당한 야만인 중.
오전 6시 30분. 출출하다. 작은 빵 두 개를 버터와 딸기잼을 발라 간식.
오전 7시 10분. 오전 5시 30분에 엔진을 껐다. 현재 배터리는 12.2 DCV. 12.1 DCV 가 되면 엔진을 켜서 충전을 할 예정이다. 옆바람이 강하니 오토파일럿이 계속 작동중이다. 어쩌면 시동 끄고 2~3시간 밖에 배터리 이용을 못할 수도 있겠다. 제네시스는 전기를 많이 먹는 배인가? 8시쯤 다시 확인하고 충전을 위해 엔진을 켜자. 선속 8.0 노트. 청해부대에서 위성전화가 왔다. 좌표를 불러준다. 수단에서 활약한 것을 치하해준다. 날치가 많이 날아다닌다. 내 배에 뛰어 오르지만 마라.
8시 03분. 전방 4마일에 카고가 지나간다. 가드 존 경보가 날카롭게 울린다. 계속 주시한다. 바람이 12노트로 줄었다. 메인세일을 100% 전개한다. 엔진 끈 채, 속도는 7노트를 유지한다. 배터리 상태를 30분마다 확인한다. 현재는 12.3 DCV 다.
8시 45분. 밥과 카레를 만든다. 배가 많이 흔들려 요리하기가 수월찮다. 부엌 어딘가에 꼭 기대어 몸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장거리 항해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식량, 물, 연료, 어느 것 한 가지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어딘가에 들러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없다. 망망대해 한가운데다. 문제가 생기면 어디라도 가까운 데로 가야한다. 하지만 어느 곳이라도 가깝지 않다.
아라비아 해에서, 내 삶의 치명적인 실수들을 하나씩 꺼내 본다. 모두 정착민이 되고자할 때 발생한 실수들이다. 나는 이대로 유목민으로 살아야 하나? 그러나 그 실수들의 결과물들 중, 내 삶을 모두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것들이 있다. 결국 톨스토이가 맞았다. 인간은 자기에게 뭐가 유익한지 모르는 존재다. 지금 내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서, 정교한 개인적 손익계산표를 만든다고 해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기도하고 기다리자. 뭐가 어찌 되어 가는지 가끔은 내 삶의 구경꾼이 되어 보기도 해야 한다. 내 인생을 다각도에서 지켜보자. 풍속 11노트, 선속 6.1 노트.
오전 9시.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 콜을 받았다. 좌표를 불러드리니 많이 갔다며 놀라신다. 남은 거리 1,582 해리, 166해리 왔다. 어젯밤 강풍과 8노트 넘는 속도에 대해 말씀 드린다. 일단 5월 4일 까지 풍랑은 없다고 하신다. 오늘 하루 더 12~4노트 바람이 불고, 목요일부터는 남서풍이 더 강해진다고 하신다. 그럼 무풍지대 없이 하루 더 간다는 것인가? 좋은 예보다. 내일 오전 9시 쯤 다시 전화 주신다고 하고 끊었다. 재미난 것은, 나와 지인이신 전정범 선장님 (전자현미경 개발 회사 대표 박사님) 과 동창 이라고 하신다.
전화가 끊기자, 나는 밥과 카레, 양배추 김치로 아침 식사를 한다.
오전 9시 30분. 배터리가 12.1 DCV 다. 실은 11.9 DVC까지, 6시간 이상 시동 끄고 범주 할 수 있지만 굳이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 시동만 걸어 천천히 충전하며 가자. 이러다 다시 12.5 DCV 가 되면 시동 끄기를 반복하면 된다. 그러나 목요일 오후부터 바람이 가라앉으면 다시 기주를 해얄 것 같다.
오전 10시 30분. 풍속 브로드 리치 13노트, 선속 8.5노트. 선속이 몹시 빠르다. 나비오닉스 상으로 스리랑카 Galle 까지 8일 남았다. 지금 현재 바람과 조류가 잘 맞나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금 현재의 상태다. 곧 무풍도 되고, 조류도 바뀌고, 상황에 변수가 많다. 어쨌든 현재는 바람만으로 쾌속 항해 중이다.
오후 12시 29분. 방금 선속 9.1 노트를 찍었다. 예상 밖이다. 절대로 의도된 속도가 아니다. 남은 거리 1557해리, 191해리 왔다.
1시 15분. 참치 샐러드 통조림, 팩 주스 한통, 땅콩 비스킷 2조각으로 점심. 선속은 계속 8.5노트를 오르내린다. 무풍 때까지 계속 이러면 바랄 게 없겠네.
오후 1시 30분. 시동을 끈다. 충전용으로만 시동을 켰지만, 이제 다시 12.1 DCV 가 될 때까지 고요한 범주를 즐긴다. 조만간 샤워를 한 번 하고 싶은데, 힐 각이 커서 배가 많이 기울었다. 5~10도를 오르내린다. 해질녘에 개운하게 샤워 하자. 선속 8.2노트.
오만 Hawana 마리나를 출항하기 전, 2019년 같은 코스를 가셨던 김석중 선장님께서 엔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몰디브 울리가모에 가셨다고 했다. 그럼 지금 내가 범주로 달리고 있는, 이 8.5 노트의 속도로 가신건가? 스리랑카까지 3,000Km, 하루 240Km 로 계산해서 가셨다고 한다. 도착해서 SIM 카드를 사고 인터넷이 되면 꼭 여쭤보고 싶다. 5월 2일 크라비에서 출발 랑카위 까지 가신다고 하니 운이 좋으면 랑카위에서 만날 수도 있을 거다.
오후 3시. 바람은 스타보드 크로스 홀드 13~14노트 인데, 선속 8노트다. 제네시스가 원래 이런 성능인지는 모르지만, 놀라운 속도다. 날씨는 맑고 덥고 습하다. 배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 올린 항해 중이다. 나비오닉스에서는 앞으로 7일 17시간 후라는 말도 안 되는(!) ETA를 보여주기에 애써 기대를 외면 중이다. 너무 지나친 기대는 금물. 나는 원래 계획대로 앞으로 12일 반이 남은 것으로 항로를 예측한다. 김석중 선장님께서 앞으로 10일 정도는 날씨가 좋을 거라고 말씀 하셨으니, 앞으로 10일, 총 12일 만에 도착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배터리는 12.3 DCV다. 어딘가 가서 배터리를 또 갈아야 하나? 배터리가 문제다. 이게 12시간만 버텨줘도 쾌적한 항해가 될 텐데... 그러나 욕심을 버리자, 지금도 항해에 별 문제없다. 충전용으로 시동을 걸고, 약간의 디젤만 좀 더 사용하면 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후 4시. 연료게이지를 보니 아직 그대로다. 낯 설다. 아덴만 항해 시엔 매일 아침 마다 80리터를 새로 부어야 했다. 결국 제리 캔의 기름을 모조리 다 쓰고, 연료탱크에만 약 200리터 남았다. 지금 생각해도 필사의 대탈출이었다. 지금 브로드 리치로 편안한 항해중이다. 속도는 7,5노트. 바람세기에 따라 8노트 이상도 나온다. 쎄시봉의 노래를 듣고 있다. 이렇게 고요히 음악을 들으며 항해 하는 것도 지금 낯 설다. 가수 이장희 형님은 지금 북아프리카 스페인령 마리아나 제도까지 가셨다는데, 지금은 어디쯤일까? 형님이 탄 배는 스리랑카에서 두바이까지 3일 걸렸단다. 나는 14일 걸린다. 나도 이담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유람선 여행을 한 번 해보고 싶다.
오후 6시. 카레 밥과 오이를 깎아 된장에 찍어 먹었다. 레이더를 보니 직경 24마일(해리) 안에 오직 나만 있다. 인도양 항해 이틀째의 저녁이 오고 있다. 위대한 유산 – 찰스 디킨스를 읽고 있다. 책장이 잘 넘어 간다. 오후 내내 책을 읽었다. 항해는 억지로 교양이 쌓아지는 부작용이 있다. 장거리 항해 하시는 분들은 평소에 미루어 왔던 책을 여러 권 지참하시는 것이 좋다. 저녁 항해엔 엔진을 배터리 충전용으로 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항해등과 실내등, 오토파일럿, 레이더 등 온갖 장비를 다 켜야 하므로 배터리 소모가 빠르다.
오늘 엔진 끄고 범주하며 시험해 보니, 범주 운전 중 배터리를 5시간은 사용 가능하다. 범주 시엔 5시간 엔진 끄고, 4시간 충전용으로 켜고를 반복하면 되겠다. 실험해 보고 만든 이론이다. 물론 기주 시엔 이런 이론 하나도 필요 없다. 계속 충전이 되기 때문이다.
오후 6시 30분. 해는 완전히 지고, 석양이 구름 뒤로 비치고 있다. 남은 거리 1,510 해리. 238해리 왔다.
오후 8시 5분. 레이더의 위치 정보가 몇 번 꺼진다. 위성 신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양. 몇 분 있으면 다시 켜지는 데 경보가 울린다. 선속 7.4노트. 남은 거리 1,500해리, 248해리 왔다.
때때로 해수면이 낮아질 때면 돛들이 해안가 바닥 위에 뜬 채 여전히 바다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난파당한 배들처럼 말이다. 새하얀 돛들을 활짝 펼칠 채 해안가에서 앞바다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배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웬일인지 미스 해비샴과 에스텔라가 떠오르곤 했다. - 위대한 유산 중, 찰스 디킨스
4월 27일(목) 오전 3시 27분. 제네시스는 칠흑 같은 어둠을 지나고 있다. 상현달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런 어둠속 항해에서 나는 잘 존다. 때로 한두 시간 푹 잠 들기도 한다. 수에즈와 홍해 국제 커리도어 같은 복잡한 구간을 빼고는 바다에서 거의 다른 배를 보지 못한다. 레이더 검색구간을 24마일로 해놓고, 레이더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잠깐씩 잠드는 거다. 물론 가드 존을 설정해, 가드존 안으로 뭔가 장애물이 들어오면 경보가 울린다. 이런 식으로 밤에 쪽잠을 자며 항해 중이다. 항해 초반엔 거의 잠들지 못했다. 이젠 익숙해 진거다.
선속이 5.2 노트로 떨어졌다. 풍속 쿼터 런 9.3 노트. 엔진 Rpm 1,200 선속 5.5 노트. 바람도 약해졌지만, 역조류다. 간혹 바람이 조금 강해지면 선속 6.0노트까지 오르내린다. 남은 거리 1,454 해리, 294해리 왔다. 전체 구간의 17%다. 윈디 예보라면 곧 무풍지대다. 혹여 스리랑카까지 연료가 모자랄까? 하는 걱정이 마음 바닥에 깔려있다. 모든 장거리 항해는 걱정의 연속이다. 스리랑카 입국엔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매번 예상대로 된 적이 없으니...
오전 5시 30분. 바람은 쿼터런 6.5노트, 선속 5.2 노트. 정면에 엄청나게 큰 먹구름이 보인다. 비가 오나 보다. 선속이 5노트 이하가 되면 슬그머니 겁난다. 너무 느려서 결국 기름을 다 소모하게 될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무풍지대를 지나면 또 횡풍 이나 뒷바람이다. 그러니 무풍지대 통과에 4일이 걸리든 일주일이 걸리든 너무 두려워말자. 엔진 Rpm 1,300 미만을 유지해 기름을 적게 쓰면서 다시 바람을 기다리면 된다. 성급하면 안 된다. 선속 4.2노트. 흠...
정면에 먹구름이 기다리고 있고, 파도는 잔잔하다. 바람은 약하지만 파도와 함께 뒷 바람이다. 이대로 3~5일을 견디면 다시 옆바람이 온다고 윈디 예보를 보고 출항했다. 사이클론 예보도 없다. 지난 이틀간의 항해는 연료를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연료게이지가 그대로다. 이틀 절약한 기름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선속이 낮아지니 더럭 불안하다.
나는 살면서 두어 번 망해 봤다. 모두 성공 끝에 수성을 못한 케이스다. 고즈넉한 숲에서 말똥도 치웠고, 라면 박스 두 개에 옷가지만 겨우 챙긴 채 쫒겨나 보기도 했다. 결국 그게 나였다. 공작새처럼 크고 화려한 꼬리를 접으면,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다. 성공은 어렵지 않았다. 나를 갈아 넣고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성공이 행복은 아니었다. 돈은 많을수록 부족했다. 꿈꿀 때가 행복했고, 작은 성취들이 행복했다. 성공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곧장 추락에 직면했다. 나는 정착하려다 실패했고, 잘못된 곳에 초석을 놓았다. 내가 원하는 오직 하나가 절대로 손에 닿지 않았다. 그게 신의 의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 뜻을 거스르고 그냥 평범한 일상에 안착하기를 소망했다. 돌고 돌아, 그 결과가 지금이 세계일주 항해다. 인생사 새옹지마. 하나 교훈을 얻었다. 인간에게 돌아갈 거처를 만들지 마라. 인간은 믿음의 우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다. 믿음은 오직 신의 것이다.
호주머니가 소슬하면 고독하게 된다. 남는 이는 벗이고, 떠나는 이는 타인이다. 그러면 책을 가까이 하고 별을 보고 삶의 오류를 돌아보게 된다. 삶이 숙성되는 기간이다. 또는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 되는 시기다. 성공과 노력은 단순하다. 방향이 정해지면 좌우 볼 것 없이 집중하면 된다. 그러나 인생의 기저에서 모처럼 망중한을 가지게 될 때, 몇 가지 탈출로 중 어디를 선택할까? 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모든 아름다운 기억들이 대개 이 삶의 기저 상태에서 드러난다. 우물에 빠진 개구리처럼 하늘의 별을 집중하여 볼 수 있게 된다. 성공하면 쾌락이 다가오고, 실패하면 삶의 정수를 배울 수 있다. 인생은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이번 인도양 항해에서도 나는 끝까지 마음 놓지 못할 거다. 어쩌면 1/3 넘게 연료가 남을지라도, 나는 Galle에 도착할 때까지 걱정으로 불면의 항해를 할 거다. 나는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었다. 신의 도움으로 한국까지 잘 항해해 도착하더라도, 내게는 제네시스와 열심히 고객들에게 짧은 세일링 체험을 제공하는 일상이 남아있다. 날이 좋으면 열심히 벌 것이고, 날이 궂으면 가족과 함께 동네 맛 집을 찾아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받을 거다. 내 행복은 그게 다다. 이미 알고 있다. 풍속 4.0 노트, 선속 4.5 노트. 세일을 접을 때다.
오전 6시 30분. 현지라면, 찬밥, 양배추 김치(오래되어 군동내 나기 시작) 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늘 그렇지만 배는 하나도 안고프다. 무조건 규칙적으로 먹는 거다. 세일을 모두 접었다. 그냥 두면 떨그럭 떨그럭 시끄러워 못 견딘다. 세일을 접으며 땀이 나니 손목시계가 막 돌아간다. 손목도 살이 빠졌다 보다. 멀리 보이던 먹구름은 실은 여러 개의 구름들이 겹쳐진 것이었다. 중간 중간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있다.
엔진 Rpm을 1,300 으로 올린다. 표준 Rpm 표에 따르면 1,400 일 때, 시간당 2.1 리터니, 시간당 2.0리터 이하가 될 거다. 그러면 525시간, 21일 이상 운항 가능하다. 마음이 놓인다. 물론 이런 건 다 자기 위안을 위한 쓸데없는 계산이다. 2~3일만 이렇게 가다보면 다시 바람을 만날 것이고, 이 계산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가 될 것이다. 선속 4.7노트. 웨이 포인트 3번까지는 694해리, 6일 10시간 남았다.
장거리 항해는, 이미 시작 전에 성공여부가 다 결정된다. 풍향 풍속, 태풍 등의 일기예보 등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항로가 정해지면, 그에 따른 항해 예정일자와 풍향 풍속을 고려한 연료의 비축량. 식량 물 정도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피항지 한 두 곳. (외국 선장들은 대개 어느 무인도 같은 곳에 앵커링 한다. 며칠이면 지나갈 맞바람 때문에 일부러 입항하며 비용을 쓰지 않는다. 나이오닉스에 다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꼼꼼한 엔진 점검, 다음 입국지의 관광비자(ETA APPROVAL NOTICE.) 여부, 에이전트 연락, 물과 연료를 구할 수 있는지, 달러만 사용해야 하는지, VISA 카드나 ATM 사용가능한지, 웨스트유니언 사용여부 등이다. 그러면 구간 항해의 90%는 준비가 마무리 된 거다. 이후 바다에서의 항해는 늘 하던 대로 하면 된다. 풍속 6노트 이상이면 세일 펴고, 세일이 젖은 빨래처럼 처지면 접으면 된다.
청해 부대로부터 위치 문의 위성전화가 왔다.
오전 7시 42분. 레이더에 전방 10해리 지점 비구름이 보인다. 스타보드 30으로 비구름을 피해 가기로 한다. 피해갈 수 있는데 굳이 폭우 속을 뚫으며 가고 싶진 않다. 구름이 두꺼우면 위성전화도 먹통이 될 거다. 피하는 데까지 피해보자.
그러나 비구름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정작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경보가 계속 울리지만, 가드 존을 해제하는 스위치가 먹통이라 끌 수가 없다. 그래도 한밤에 가드 존 경보가 울리는 것이, 내겐 훨씬 나은 선택이다. 한두 시간의 번거로움은 생명과 비교할 수 없다. 동남아시아의 스콜 지역에 가면 익숙한 일이 될 거다. 랑카위에서 새로운 C-80으로 교체하면 이 고역도 마무리 될 거다. 나는 계속 울리는 가드 존 알람을 애써 외면하고, 책에 코를 더 깊이 들이 민다.
오전 9시 10분. 엇 바람이 분다. 그런데 맞바람 15노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바람이다. 일시적인 것일까? 맞바람이 22 노트 이상 올라가, 나는 일단 바람을 타기로 한다. 포트 40으로 침로를 바꾸고 바람을 탄다. 잠시 지그재그 항해를 해얄 것 같다. 역풍 항해에 대한 두려움이 확! 올라온다. 출항일 다운 받은 윈디를 다시 살펴본다. 역풍의 징조는 어디에도 없다. 비구름 때문에 잠시 만들어진 바람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여우비처럼 빗방울이 몇 개 떨어진다.
오전 10시 30분. 내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맞바람은 16노트가 되어간다. 머지않아 바람이 바뀔 거라고 확신하고, 나는 바람을 타고 크로스홀드로 일단 전진하기로 했다. 이런 맞바람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누구에게서 위성 정화가 오든 나는 윈디 예보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파도도 조금씩 높아진다. 가끔 펀칭이 있다. 젠장!
어차피 역풍항해라면 연료라도 아끼자. 기름 쓸 이유가 없다. 나는 엔진을 끈다. 집세일도 90% 펴고 메인세일을 다 편다. 엔진을 중립으로 두고 크로스홀드 항해를 시작한다. 풍속 18노트, 선속 7노트다. 바람이 바뀔 때까지 이대로 가자. 여기는 아덴만이 아니다. 인도양 한가운데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방향 전환이 가능하다. 원래 목적지에서 북쪽으로 30도 가량이다. 크로스 홀드 방향의 끝은 인도 뭄바이 아래 부분이다. 큰 문제는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여유다. 바람은 언제든 바뀐다.
오전 11시 30분. 바람이 점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뀐다. 나는 스타보드 10으로 COG 방향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 역풍은 전화위복, 곧 신의 한수가 될 전망이다.
지부티에서 얻은 프랑스제 참치 샐러드 캔과 우유로 점심을 먹었다. 무싸 사모님 감사합니다.
오전 11시 49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 콜을 받았다. 나는 한 번에 받았는데, 아마 거시는 분은 꽤 여러 번 하신 모양이다. 레이더 위치 데이터가 자꾸 꺼지는 것을 보니 인공위성 데이터가 끊기는 지역인가보다. 감사하고 미안하다. 역풍이 분다고 하니 놀라신다. 위치 데이터를 불러 드리니, 지금 제네시스가 지나는 곳에 바람 골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을 지나면 긴 무풍지대라고 하신다. 5월 5일 이후는 스리랑카 해역에 15노트 뒷바람이라고 하시니 그 또한 다행이다. 위치 데이터를 밴드에 올려 달라고 무리한 부탁을 드려본다. 많은 분들이 염려 하시니, 그렇게라도 하면 불필요한 걱정을 덜 것 같아서다.
오전 11시 55분. 집세일을 100% 펴고 바람을 타기 시작한다. 바람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가려고 엔진도 켠다. Rpm 1,200 선속 6.3노트. 이 바람이 사라지기 전에 달리자. 다만 파도가 0.6 미터 가량이라 약한 펀칭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까지 운이 좋다. 방금 전까지 나를 놀라게 했던 역풍이 방향을 바꾸면서, 선속 6.8 노트를 유지하게 만들고 있다. 풍속 쿼터 런 11노트. 남은 거리 1,410 해리. 338해리 왔다. 전체 거리의 1/5 온 거다. 기름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놀라운 속도다.
선실을 한 번 둘러보니, 아뿔싸, 앞 쪽 선실의 창을 닫기만 하고 잠그지 않았다. 바닥에 파도가 들이 쳐 있었다. 단단히 닦고 바닥을 훔쳐냈다. 여전히 이런저런 실수를 많이 한다. 기름통들은 잘 고정되어 있다.
오후 2시 25분. 빔리치 12노트. 나는 메일세일 시트를 풀어 바람을 더 잘 받게 있다. 집세일도 120%로 더 풀어 주었다. 선속 7.0노트. 바람은 점점 쿼터런 쪽으로 가고 있다. 무풍지대까지는 제네시스가 상당한 속도로 계속 질주할 거다. 오늘의 항해는 식겁에서 시작해서 대만족으로 가고 있다.
저녁 식사로 미리 감자튀김을 준비하려다, 양파가 한 개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냉장고를 샅샅이 뒤져도 양파는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10일 이상 양파를 사지는 못한다. 스리랑카에 도착하면 잊지 말고 양파와 감자부터 확보하자.
오후 3시. 풍속 빔리치 15노트, 선속 7.4노트. 무풍 해역이 나올 것으로 예상 했던 지역에서 강한 횡풍의 도움으로 빠르게 전진 중이다. 엄청나게 감사한일이다. 남은 거리 1,394 해리. 신의 도움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엔진을 끄고 6.6 노트로 달리고 있다.
오후 4시. 엔진을 켠다. 바람 좋을 때 거리를 확보해 두는 것이 옳은 것 같다. Rpm 1,200, 선속 7노트.
오후 5시. 밥과 요리가케(밥 위에 뿌려먹는 것) 감자튀김, 오이와 쌈장. 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오늘 전하 위복의 항해에 감사 기도를 한다. 기적의 힘으로 연료를 거의 소모하지 않고 7노트의 속도로 항해 중이다.
오후 6시 40분. 빔리치 풍속 8노트, 선속 6.2 노트로 항진 중이다. 아무래도 바람이 점점 약해진다. 그러나 오늘 낮 시간대, 예상 밖으로 완전히 쾌속 질주했다. 남은 거리 1,369 해리. 공교롭게도, 웨이 포인트 2번에서 웨이 포인트 3번까지의 구간이 1,000 해리다. 현재 3번까지 375해리 왔다. 총 항해 거리는 379해리다. 어둠이 석양을 누르고 바다를 정복했다.
오후 7시 30분, 칠흑 같은 인도양의 밤, 우울을 벗어나기 위해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한다.
0 지금 나 혼자지만 고향집에 내 딸 리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6월 말 고향집에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귀여운 내 딸의 볼에 뽀뽀할 수 있다.(당연히 수염을 깎아야 한다.)
0 7월부터 나는 제네시스로 내 요트체험 일을 계속할 수 있고, 여름에 열심히 장사해서 빚을 갚을 수 있다.
0 5월말, 랑카위에서 김기자님께 그간 촬영한 자료를 전달할 수 있다. 김기자님은 내게 필요한 보급품과 특히! C80 플로터를 전달해 주실 수 있을 거다.
0 말레이시아 랑카위에서 선저 페인트 작업과, 운이 좋으면 AIS 리시버를 저렴하게 장착할 수 있을 거다.
0 5월말이면 임대균선장과 안희원선장이 크루로 참여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 맘 맞는 세 명이 상당히 즐거운 동남아시아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0 김기자님과 임대균 선장이 가져오는 한국 식품 등, 보급품은 굉장히 행복한 선상 식사를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이다.
0 강릉원주대학교 생태환경연구회와 요트연구회에서 이번 항해의 과정과 결과를 세미나를 통해 발표할 것이다. 강릉 요트 문화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
0 (사)강릉항선주협회의 강릉요트마리나에 정박하여, 갑질과 부당한 계약 없이 합리적인 마리나 계류를 할 수 있다.
0 나의 항해 기록은, 그대로 다음에 같은 (지중해, 수에즈 운하, 홍해, 아덴만, 인도양) 코스로 오실 요트 선장님들께 살아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거다.
정리하다보니 이번 항해의 끝엔 상당히 즐거운 일들이 많다. 내게는 참 소중한 꿈도 많았네. 제일 중요한 것은 고향에서의 일상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거다. 날 좋으면 돈 벌고, 날 궂으면 부모님 모시고 맛난 것 먹으러 가자. 힘을 내자. 두 달만 잘 버텨내면 된다. 레몬 조각 같은 반달이 바다를 내려다본다. 저 달이 꽉 차기 전에 스리랑카에 도착하겠지.
오후 9시. Rpm 1,300, 풍속 6노트. 선속 6.0노트. 남은 거리 1,356 해리, 394해리 왔다.
오후 11시 21분. 뒤쪽 하늘에 여전히 같은 달이 걸려있다. 풍속 스타보드 빔리치 8노트, 엔진 Rpm 1,300, 선속 7.0노트. 청해 부대 위성전화 콜. 위치 데이터를 불러 주다. 레이더에 가드 존에 구름이 잡혀 경보.
4월 28일 오전 5시. 생각 보다 새벽이 차다. 담요를 덮고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다, 결국 졸음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Rpm 1,300 집세일 120%, 메인세일 Full. 풍속 7노트, 선속 6.6노트. 바람과 조류의 덕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남은 거리 1,303 해리. 445해리 왔다. 3일 만에 총 구간의 1/4 온 거다. 445해리 오는 동안 350리터 탱크의 1/4. 87.5리터 가량 소모했다. 가히 기적의 항로다. 내가 기름게이지를 보면서도 참 믿기 어렵다. 이대로 라면 350리터 탱크만으로 인도양을 건너겠다. 물을 체크하니 전체 140리터 가량 사용했다. 하루 35리터 사용. 첫날 세탁을 많이 해서 그렇다. 남은 물은 610리터. 지금처럼 편하게 사용해도 17일 이상 사용가능하다.
물론 세일 요트니 바람 좋으면 엔진 끄고 범주로 기름 하나도 안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덴만에서 매일 80리터씩 쏟아 붓고 온 기억이 있으니, 지금 항해는 기적 같다. 윈디 예보 상으로는 지금쯤 무풍지대였지만, 아직 7~8노트 횡풍이 있다. 어쩌면 이번 항해는 속도와 유류 소모에서 개인적인 기록이 될 것 같다. 집 세일을 130%로 전개한다. 호! 선속 7.2 노트. 바람에 즉각 반응하는 예민한 제네시스다.
오전 5시 10분. 화장실에 갔다. 구렁이는 아니지만 꼼장어 정도는 되는 쾌변. 다행이다. 오만 Hawana에서 맛난 맆아이 200그램 먹고 설사한 뒤, 장이 영 신통치 않았는데, 이제 정상이 된 모양이다. 준비해온 정로환을 먹지 않고도 회복된 걸 보면, 결국 담백한 음식을 소식하는 것이 건강에 더 나은 모양.
오전 5시 40분. 햄 계란 볶음밥에 오이 한 개로 아침식사. 오이 한 개를 깎아 된장에 찍어 먹으면, 국과 김치 등 다른 밑반찬이 별로 필요 없다. 문제는 오이의 맛이 한국 오이와 약간 다르단 거다. 일단 좀 작고, 몸통이 단단하지 않고 약간 푸석푸석하며, 몇 입 베어 먹으면 풋콩 맛이 난다. 1~2일에 한 두 개면 나쁘지 않다. 질리지 않는다.
오전 6시 20분. 속옷과 수건 등을 세탁해 스턴 빨랫줄에 널고, 현대 소설을 펼친다. 14일간 인도양 항해다. 온전히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든 잘 달래서 보내야 한다. 새벽에 커피 한잔. 아침 식사 후 설거지와 세탁. 전체적으로 배 점검, 눈으로 꼼꼼히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독서. 간식. 기름 게이지 확인. 엔진룸 열고 확인. 지속적으로 세일 상태와 엔진Rpm과 거리 속도 체크. 점심 식사. 설거지 후 잠시 오침. 독서. 중간 중간 위성 전화로 위치 확인 및 기상 체크(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 청해 부대, 해수부) 담요말리기. 저녁식사. 설거지 후 샤워. (저녁 샤워를 안 하면 끈끈해서 잠을 청하기 어렵다.) 야간 견시 및 졸기. 나는 이런 패턴을 반복하며 하루를 보낸다.
보니까, 다른 선장들은 노래방 기계를 가진 분도 있고, 기타를 가지고 바다를 노래하는 분도 있다. 이리듐-고를 가지고, 느리지만 인터넷을 계속 하는 사람도 있다. 장거리 항해엔 엔너테인먼트, 소일꺼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우들이 보낸 전자책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한국서 출발하시는 분이라면 그간 보고 싶었던 책을 잔뜩 싣고 떠나는 것을 추천 드린다. 이리듐-고를 준비해 출항하면 더욱 좋다. 뭐든 즐길 꺼리를 가지고 타라. 오랜만에 마이클 잭슨을 듣고 있다. Beat it! Beat it!
영혼이 길 위에 있기 때문에, - 신라의 푸른 길 중, 윤대녕
오전 7시 36분. 풍속 빔리치 8노트, 선속 6.2노트. 좌전방 20 해리 근방에 비구름 두 개가 레이더에 잡힌다. 비는 오지 않고 먹장구름만 지레 수선이다.
오전 9시. 바람은 빔리치 9노트, 선속 6.7노트. 35해리만 더 가면 웨이포인트 2번과 3번의 중간 500해리다. 윈디는 분명 무풍지대라고 예보했건만, 이렇게 바람과 속도가 좋다. 럭키! Slow blues 곡들을 들으며 독서 삼매경. 정말 팔자 좋은 항해다. 바람이 조금씩 더 강해지며 선체의 힐 (heel) 각이 커지고 있다.
오전 9시 5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 콜을 받았다. 좌표를 불러 드리니 놀라신다. 나 역시 제네시스의 속도에 놀라고 있다. 빠른 배다. 오늘 오후 3시 쯤 500해리를 지난다고 알려드린다. 내일 (토) 까지는 바람이 지금 그대로고 이후로는 무풍 또는 약간 뒷바람이 될 거란 소식이다. 여러 가지로 다행이고, 운 좋은 항해다. 항로를 잘 잡은 것 같다고 덕담을 해주신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런 도움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는, 진짜 장거리 항해를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진한 씨맨쉽에 감동 받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일정을 정해 놓고 바쁘게 가는 딜리버리 항해다. 세일과 엔진을 동시에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항해다. 변칙이다. 제대로 세계일주하는 선장들은 주로 바람을 항해하고 입출항시에만 엔진을 사용한다. 몰디브 울리가무에서 지부티까지 14일 ~ 21일 걸렸다는 선장들은, 나처럼 하이브리드 항해를 한 것이고, 스리랑카 Galle에서 수에즈까지 3개월 걸려 도착했다는 프랑스 젊은(Leo) 선장들은, 완전히 바람으로만 항해한 거다. 오토파일럿과 레이더도 없이! 그들은 무풍이면 망망대해에서 하염없이 바람을 기다리거나, 바람이 강하면, 어느 무인도 뒤로 바람을 피해 앵커링 하면서 인도양, 아덴만, 홍해를 건넜다. 석 달의 식량과 연료, 식수. 대단하다. 물론 엔진은 전기가 많이 필요할 때만 켜고, 물은 워커 메이터가 만들었겠지만, 가끔 나는 그들의 여유가 부럽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유보다 내 딸 리나가 더 보고 싶다. 그들과 우선순위가 다른 거다.
오전 10시 15분. 풍속 빔 리치 14노트, 선속 7.4 노트. 나는 엔진을 끄고, 다시 범주한다. 바람이 이대로라면 충전을 위해 오후 3시 15분에 다시 엔진을 켜면 된다. 파도는 40센티 정도, 바람만 강하다. 나와 제네시스는 완전한 고요 속, 인도양을 횡단 중이다. 잠깐 갑판에 나가 촬영도 해본다. 진짜 조심해야 한다. 한 발 잘 못 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오전 11시 30분. 현지라면, 찬밥, 계란, 김치 몇 조각으로 점심. 바람은 여전히 좋지만 방향이 달라졌다. 포트 10으로 다시 바람을 받는다. 나중에 바람이 바뀌면 다시 조정하면 된다. 일단 달리자.
오후 1시 45분, 스타보드 10 변침한다. 원래 항로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거다. 엔진 Rpm 1,200 풍속 8.7 노트, 선속 6.7 노트다. 제네시스는 여전히 놀라운 속도로 달리고 있다. 땅콩비스킷 두 쪽과 우유 한잔을 마신다. 땅콩 비스킷은 참 먹음직스럽지만, 늘 몇 조각 못 먹는다. 내겐 너무 퍽퍽하고 느끼하다. 같은 이유로 땅콩버터를 사면 한 두 번 빵에 발라먹고, 그대로 몇 달 뒤 버리게 된다. 근본적으로 나는 그런 맛과 빵을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배에도 식빵이 두 덩이 있지만 이따가, 이따가 하다가 한 달 째 방치중이다. 아, 그중 하나는 4월 14일 지부티에서 산 것이다. 곰팡이가 피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저녁에는 스파게티를 스프에 섞어 먹어볼 생각인데...
새들이 자주 날아온다. 가장 가까운 육지나 섬에서 500해리(926Km) 떨어진 곳인데, 그렇다면 저 새들은 뭍을 생존 장소로 삼지 않는 새들이다. 하루에 왕복 2천Km씩 날아다니며 물고기를 잡지는 않을 테니까. 저 새들은 그야말로 이 망망대해를 삶의 터전으로 사는 것이다. 아마 알을 낳을 때는 육지로 돌아가겠지.
오후 2시 27분. 2번 ~ 3번 웨이포인트를 501 해리 지났다. 풍속 크로스 홀드 10노트, 선속 7.2 노트다. 무풍지대를 지나야 하는 지점인데, 속도가 점점 더 난다. 나로서는 신나는 일이다. 남은 거리 1,243 해리, 총 505해리 왔다. 위기감 없는 쾌속항해. 신의 은총이다. 바다에 참치가 여기저기 막 뛰어 오른다. 낚시꾼들이 보면 환장일 일이다.
오후 5시. 파스타를 삶다가 햄 조각을 넣고, 가루스프를 넣어 흰 파스타를 만들었다. 먹을 만하다. 반만 먹으려다 한 냄비를 다 먹어 버린다. 파스파와 토마토소스는 많이 있다. 혼자 먹으면 한국까지 먹어도 다 못 먹을 거다. 이제부터 하루 한 끼 정도는 파스타를 먹어 치우자. 토마토소스는 별로니, 이런저런 것들로 시험해보고 먹자.
오후 6시. 샤워를 하고 빨래 감을 담가 놓는다. 내일 아침 세탁해 널면 된다. 빔리치 8 노트. 선속 6.3노트. 남은 거리 1,219 해리. 529해리 왔다. 총 구간의 30%.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중략-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 메밀꽃 필 무렵 중, 이효석
오후 7시 15분. 해가 지자 바람은 더 강해졌다. 선속은 7노트를 넘나든다. 어둠속 항해등에 비친 태극기만 빠르게 펄럭인다. 다시 별이 가득한 하늘이다. 이렇게 일고여덟 밤을 더 보내야 한다. 그래도 엄청 빠른 거다. 인도양 한가운데는 무풍이라고 예보 되었지만, 이렇게 바람이 좋다. 이대로 2~3일만 더 가면 인도 서부 해안 Kannur 다. 그 앞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스리랑카로 내려간다. 인도양의 밤은 이제 시작이다.
오후 11시 20분. 풍속 쿼터런 7노트. Rpm 1,300 선속 5.6노트, 총거리 561해리. 남은 거리 1,187 해리.
4월 29일 (토) 오전 1시 40분. 풍속 쿼터런 4.5노트, Rpm 1,300 선속 5.2노트. 확실하게 무풍지대에 들어 온 것 같으네. 윈디 상으로는 일요일 오전까지. 일요일 오후부터는 뒷바람으로 바뀐다. 하지만 바람이 확실하게 뒷바람으로 잡히는 것은 월요일 쯤 아닐까 싶다. 바람이 이대로면 상당히 더운 며칠이 되겠다. 레이더는 텅 비었고 집세일 시트만 가끔 갑판을 두드린다. 나에게 인도양은 여전히 미지의 지역(terra incognita) 이다.
오전 4시 35분. 무풍이라고는 하지만 얼굴로 바람이 느껴지기도 한다. 크로스 홀드 2.5노트. Rpm 1,300. 바람이 느껴지면 선속 5.5노트. 느껴지지 않으면 5.3노트다. 나쁘지 않은 속도다. 그래봐야 2~3일이다. 어쨌든 1,159해리 남았다.
주변에 뿌연 여명이 다가오고 있다. 시간대가 바뀌고 있을텐데, 확인해 보자. 걸프만 표준시는 지금이 맞고, 스리랑카 콜롬보는 6시 12분이다. 1시간 30분 빠르다. 스리랑카에 도착하면 한국과의 시간차는 3시간 30분. 시간차가 줄어드는 만큼 한국과 가까워진다. 플로터의 위치 데이터가 자꾸 사라지며 알람이 울린다. 위성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인가 보다. 여기는 인도양. 미래도, 항해도, 아직은 무채색이다.
훗날 흑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리빙스턴조차 그의 탐험목적을 "아프리카의 야만족이 문명국가의 대열에 설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데 있다." 고 설명하는 선의의 교만을 범했다. 아프리카인에 대한 유럽인의 이러한 경멸 어린 태도는 산업기술 반전상의 기술적 우위를 인종적인 우월로 비약시킨 그들의 그릇된 자만심에서 비롯되었다. - 아프리카 탐험 중, 안 위공
오전 5시 45분. 이탈리아산 듀람 밀 스파게티 면들과 파스타를 소비할 방법을 찾은 것 같다. 아침식사로 파스타를 끓인 뒤, 국물을 조금 남기고 햄 조각과 카레 가루를 넣었다. 어제 야채스프 가루를 넣어 파스타를 만든 것과 같은 방법이다. 맛있었다. 토마토소스는 어쩌다 한번 씩만 요리하자. 한 냄비 가득 끓여 다 먹고, 배 두드리고 있다. 아침부터 이렇게 식사를 서두른 까닭은 곧 타는 듯한 햇살이 배를 집어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그늘을 찾아, 배의 진행으로 생기는 약한 바람을 받으며 몸을 식혀야 한다. 그늘에 앉아 미풍을 얼굴에 받으면 그런대로 서늘하다. 좌현 100미터에서 돌고래들이 함부로 튀어 오른다. 멀리서 심상하게 바라본다. 멋지긴 하네.
오전 6시 30분. 인도양은 호수가 되었다. 파도도 없고 바람도 없다. 미풍이 해수면에 만든 무늬가 잔잔한 바다위에 등고선처럼 펼쳐진다. 뒷바람 2.5노트. 육지에서 600 해리 (1,110Km) 떨어진 이곳에 스티로프 조각들이 떠간다. 가끔 페트병도 떠다닌다. 전혀 낭만적인 풍경이 아니다. 배 뒤 빨랫줄에 넌 빨래들도 그리 목가적이진 않다. 선속 5.3노트. 바람이 돛을 핥기만 해도 0.5 노트가 오르내린다.
우연히 찾아 읽는 ‘아프리카 탐험’ 이라는 책이 눈이 쏙쏙 들어온다. 리빙스턴, 스탠리 등의 어린시설 위인전집에서 읽었던 대 탐험가들의 이름도 반갑다. 그러나 이런 모든 탐험의 배후가, 아프리카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서양 각국의 야심이었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됐다. 그들 탐험가들도 각 지역의 통행세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요즘 항해와 다르지 않네. 재미난 것은 이들이 새로 탐험한 지역 거의 전부가, 몰래 노예무역을 계속하던 포루투갈 노예무역 상들이 이미 개척한 곳이며, 이 위대한 탐험가들은 때때로 노예무역 상들의 행렬에 끼어 안전하게 탐험한 것이다. 위대한 탐험가들은 자신들의 발견을 기록하여 공식적인 정부에 제출하고, 그에 대한 상급이나 작위를 받았다. 결국 숨어서 노예무역을 한 상인들은, 앞서 위대한 통로를 개척하거나 발견을 하고도 역사의 뒤로 사라졌고, 노예 무역상들이 보았다는 소문을 따라 거대한 강과 호수를 찾아 기록하고 보고한 탐험가들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800년대에 이미 아프리카는 유럽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제네시스는 아무도 각축하지 않는, 가끔 인공위성도 신호를 놓아 버리는, 망망대해를 통과중이다. Clara Jumi Kang의 파가니니아나 가 인도양의 아침에 울려 퍼지고 있다.
오전 7시 45분. 바람은 크로스홀드에서 빔리치까지 1.2 ~ 2.5 노트를 오르내린다. 하지만 나는 세일을 그대로 두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속도가 0.5 노트 확 올라가는 것도 있지만, 세일이 햇살을 가려 준다. 배가 햇살에 달아오르는 것을 막아준다. 선속은 5.1 ~ 5,5 노트 사이다.
오전 09시 05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가 오다가 끊어진다. 아마 이준희 선장님은 여러 번 전화를 거신 걸 텐데. 안타깝다. 위성 수신 상태가 메롱인가 보다. 선속 5.1노트. 남은 거리 1,135 해리. 화요일부터 오늘 토요일 까지 4일간 613 해리 왔다. 총 항로 35%. 매일 153.2 해리씩 오는 빠른 속도였다. 무풍지대를 건너면 선속이 어느 정도 회복 될 거다. 뒤를 돌아보니, 잔잔한 인도양에 제네시스의 궤적이 수백 미터나 길게 남아 있다.
오전 9시 30분. 갑자기 벙커 C 유를 태우는 매연 냄새가 난다. 레이더를 보니 오른쪽 4기 방향에 카고가 있다. AIS가 없으니 다가오는 밴지 멀어지는 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배가 길게 보이지 않고 짧게 보이는 것을 보니 제네시스를 향하고 있는 듯하다. 저런 배가 들이 받으면 한방에 끝장이다. 상대방 레이더에도 제네시스가 발견되길 기대한다. VHF 16번으로 무전기를 켜고 계속 견시 중이다. 깔끔하던 대기에 비릿한 매연 냄새가 가득하다. 카고가 뚜렷해 지면서 후방으로 조금씩 길어지는 것을 보니 제네시스 뒤로 통과할 모양이다.
오전 9시 50분. 카고는 3 해리 뒤로 제네시스를 지나친다. 핸드폰으로 촬영해 확대해보니, Stena Bulk 라고 써 있다.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가 왔다. 예상대로 위성신호가 잘 안 잡힌 모양이다. 현재 제네시스가 지나는 해역에 무풍이라고 한다. 현장과 딱 맞다. 앞으로 26시간 후, 북서풍 4~6노트가 예보 된다고 하신다. 그럼 바람이 완전히 반대로 바뀐다. 그 바람을 타고 인도 서부 해안까지 갔다가, 침로를 남쪽으로 바꾸어 그 바람을 뒷바람으로 하고 스리랑카로 내려가면 된다. 사이클론이나 풍랑은 없다고 한다. 너무 고맙고 다행이다. 전방 해수면에 5노트 정도의 바람결이 보인다. 저 바람이라도 속도가 조금 더 날거다. 선속 5.2노트.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는 일은 두렵기 그지없는 악몽이었다. 실제로 항해가 끔찍한 시련이었음은 통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노예교역이 이루어지는 동안 대서양을 '가로지른' 1,200만에서 1,500만 명에 이르는 흑인들 가운데 150만에서 200만 명의 노예가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끔찍한 위생환경과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사이에서 몇 개월을 버텨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 흑인 노예와 노예상인 중, 장 메이메.
정오. 드디어 바람은 1 노트다. 그냥 무풍지대다. 어차피 내일 저녁까지는 이대로다. 더 길게 무풍일수도 있다. 답은 기다리는 거다. 선속 4.8노트. 웨이 포인트 3번까지 2일 20시간이었는데, 3일 8시간으로 늘어났다. 강렬한 햇살로 배 갑판이 뜨거워 신발을 벗고는 나갈 수 없다. 집세일을 접는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는다. 밥과 감자튀김, 오이, 무말랭이 김치로 점심을 먹는다. 신선한 야채류가 부족하다. 스리랑카에서 양파와 오이를 좀 더 사야겠다. 아니면 야채 통조림(그런 게 있나?)
오후 4시 35분. 해가 구름에 가려 그나마 조금 시원하다. Rpm 1,400. 선속 5.1 노트. 웨이 포인트 3번까지는 360해리 2일 21시간 남았다. 남은 거리 1,103 해리. 624해리 왔다. 내일 (4월 30일 일요일) 오후까지는 북풍으로 바뀐다고 하니 이대로 가자.
"사막이 아름다운 건" 라며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어린왕자 중, 생텍쥐베리
오후 4시 30분. 아직 2~3노트로 약하긴 하지만 바람이 북동풍으로 바뀌고 있다. 선속 5.5노트.
한국서 울릉도를 세일링 할 때나, 제주도를 세일링 할 때, 단 한 번도 기름이 부족할 거라는 걱정을 한 적이 없다. 대략 왕복 거리의 몇 배나 되는 디젤유를 준비했고, 국내 어디서는 쉽게 디젤유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일주 장거리 항해는, 디젤을 1,000리터 이상 준비해도 계산상 아슬아슬 하기도 하고, 디젤을 구하지 못하거나, 달러로만 디젤을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카드를 사용하지 못하거나 달러만 사용해야 하는 상황도, 웨스턴유니언으로 해결 할 수 있었다. 오만 Hawana 마리나에서는 VISA 카드로 다 해결했다. 스리랑카는 어떨까?
2021년 필리핀까지의 장거리 항해에서도, 뭐든 일반 상식선에서 다 해결하고 구할 수 있었고, 에이전트 따윈 없었다. 직접 입항 신고를 하고 입국 심사를 받고, 출국 서류를 제출하고 가면 됐었다. 오키나와(멋진 마리나에 있었음)나, 이시가키 (마리나 아닌 그냥 선착장, 그러나 물과 디젤은 얼마든지 구입 가능) 수빅베이마리나 (뭐든 다 있음) 스리랑카는 일단 에이전트를 고용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랑카위마리나 부터는 에이전트 없이 직접 입국서류 작업을 하면 된다. 다만 미리 ETA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지, 일본처럼 24시간 전에 문서로 통보해야 하는지, 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코나키나발루에서 일본 입항을 다시 한 번 전면적으로 확인하자.
오후 5시. 이번 항해 중 처음으로 배가 고팠다. 뭘 좀 많이 먹어서 뱃고레를 키워 놓아서 그런가? 점심도 만만치 않게 먹었는데. 해물라면에 찬밥, 감자볶음, 오이, 오이지 등으로 든든하게 저녁을 먹었다. 배 뒤에 엄청나게 많은 돌고래 떼들이 있었다. 그중 몇 마리는 제네시스를 쫒아 왔는데, 대부분의 돌고래들은 300미터 뒤에서 점프하며 놀고 있었다. 인도양은 여전히 호수다. 바람은 여전히 무풍, 제네시스는 밤을 향해 나아간다.
오후 9시 10분. 10시 방향에 엄청나게 밝은 빚 뭉치다. 일반적인 배들의 운항등이 아니다. 뭐지? 레이더 탐색 범위 24 해리 밖이다. 50Km 이상 먼 곳인데도 하늘의 구름이 비칠 정도록 밝다. 일단 스타보드 20 으로 침로 변경해 상황을 지켜본다. 1시간 후, 8시 방향으로 천천히 지나간다. 거리는 3마일. 다시 포트 20으로 원래 침로로 복귀한다. 한국의 오징어 배 같은 어선인가보다. 대신 크기가 상당한 어선. 엄청나게 밝은 빛을 내며 육지에서 600 해리 이상 떨어진 인도양 한가운데를 지나는 배라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인터넷 되는 데로 가면 한 번 검색해 봐야겠다. 어떤 고기를 잡는 어선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