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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의정공파)종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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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글 쓰고 싶은글 스크랩 동이족東夷族과 화하족華夏族의 대륙의 역사 1편
관희2244 추천 0 조회 71 12.11.09 06: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이족東夷族과 화하족華夏族의 대륙의 역사

 

대체적으로 알고 있었던 중국의 국가 기원은,

‘춘추春秋’ (BC722년부터 공자가 죽었던 BC479년까지, 노魯나라의 12제후가 다스렸던 시기의 주요사건들을 기록한, 공자가 지은 중국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나. 사마천이 기원전109~기원전91년에 지은 ‘사기史記’ (=태사공서太史公書, 신화시대부터 BC87년 한무제漢武帝까지의 역사서)에 기록되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시작하여, 하夏나라와 상商나라(=은銀나라)를 거쳐 주周나라에 이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황허(黃河) 유역의 하夏나라에서 시작해 상商과 주周나라로 이어 진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나, 삼황오제, 하나라, 상나라에 관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음에, 공자나 사마천의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나 전설상의 존재로 간주하여, 유물과 유적이 역사 기록과 일치하는 주周나라(기원전1046년경~기원전256년)를 중국 최초의 국가형태로 봄이 대체적이었다.

 

선사시대 유물이 간간히 발견되었어도, 대체적으로 알고 있었던 대륙의 문명 기원은,

북경원인의 출토지인 북경 인근의 구석기시대와 황하 중류의 서안시西安市 임동구臨潼區 강채姜寨 소녀묘少女墓에서 출토된 부장품을 기원전4,600~3,600년경으로 본 기원전 4000년경의 농경 신석기시대인 앙소문화仰韶文化나, 기원전4,300~2,400년의 태안시泰安市 대문구문화권大汶口文化, 기원전2,900~2,000경으로 보는 제남시濟南市의 용산문화권龍山文化를 포함하는 '황하문명권'을 기원지로 함이 정설이었다.

1973년 양자강 하류 지역인 항주만杭州灣의 영소평원寧紹平原에서 가장 전형적인 초기 도작농업稻作農業 발원지가 발굴되어, 탄소측정결과, 앙소문화보다 1000년 정도 앞선 기원전 5000년경의 유적이 발견되자, 중국은 ‘중화문명의 서광’이 장강長江(양자강) 유역의 ‘하모도문화’에서 시작했다고 정정하여,

기원전 5000년경의 장강長江(양자강)하류의 ‘하모도河姆渡문화권’'황하문명권'을 ‘중화문명 2대 원류지’로 삼아, 유목을 바탕으로 한 북방문화와 구별하여, 만리장성을 '북방한계선'으로 하여, 북방 민족들과 분명한 경계를 두는 ‘중원문화 기원설’로 인식함이 대체적이었다.

 

대체적으로 알고 있었던 지나족의 민족의 근원은,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인 화이관華夷觀인데, 대륙의 중원에는 화하족이 문명을 주도하며 살다가, 대륙의 적통이자, 황제의 후손인 한족漢族으로 족속이 통일되어, 대륙 변방의 동서남북에 퍼져 살던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불리는 야만인들인 수많은 오랑캐족속들을 다스리며, 대륙의 역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대륙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륙은 수천 년 동안을, 대륙에 웅거하던 수천을 헤아리는 족속들이 정벌과 복속을 통한 해체와 통합을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절대적인 대륙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중원의 화하족華夏족의 더 큰 의미의 통합체인 한족漢族과 변방의 오랑캐인 소수 민족들의 집단으로 분류된 사이족四吏族으로 구분지어 왔다.

근대에 들어, 열강의 간섭과 침략을 통한 서구식 국가경영을 습득한 중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선상에서 사회주의식 국가경영을 선택하면서, 대륙을 본격적으로 통일하여 경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된 현대 중국의 지배층들은, 세계경영을 목표로 삼아, 국력신장의 전략으로, ‘새로운 중화민족개념을 창출’하기 위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탄생시켜,

1950-1960년대에 제1차 대토론, 1970년대말-1980년대의 제2차 대토론, 1990년대 이후로 제3차 대토론을 거쳐, 2000년 이후에는, 예군민倪軍民, 경철화耿鐵華, 양춘길楊春吉, 마대정馬大正, 손진기孫進己 등의 활약으로, 소수 민족의 ‘통일적다민족국가’ 참여를 통한 새로운 ‘중화민족’ 개념을 확립했다 하겠다.

이러한, ‘소수 민족의 통일적다민족국가 참여를 통한 새로운 중화민족 개념의 확립’이라는 전략에 박차를 가하게 된 사건은, 끊임없는 고고학적 발견에 따른, 역사적 근거의 상실에 따른 정치적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그 고고학적 사건들은,

1976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사학계는 ‘은나라가 동이족’이란 고고학적 증거 앞에서, ‘중국은 동양 역사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설상가상으로, 1983년부터, BC6500년경의 소하서문화, BC6000년경의 흥륭와문화, BC 5600년경의 사해문화, BC5000년경의 부하문화, BC4800년경의 조보구문화, BC 4000년경의 홍산문화, BC 3000년경의 소하연문화 등, 하모도문화보다 앞선 신석기 시대의 유적들이 지속적으로 요하지역에서 대량으로 발굴되어, 중국에서는 이를 ‘요하문명’ 또는 가장 많은 유물이 발굴된 홍산지역을 칭하여 ‘홍산문명’이라 이름 짓고, 더욱 심각한 역사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역사 이래로, 요하유역은 지나족들이 멸시하던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의 거주지이다. 수천 년 동안 그렇게도 야만인이라 비하卑下하던 오랑캐족속들이 살던 요하유역에서, 중원보다 시대적으로 앞서는 신석기 시대의 발달된 문명이 발견되어, 중원의 문명은 오히려 동북의 요하문명의 아류임이 속속 밝혀지게 되면서, 중국인들은 민족 자긍심, 문화 우월감을 자랑할 역사적 근거를 잃게 되었고, 소수 민족들을 아우를 정치적 명분에도 심각한 타격이 오는 정치적으로도 비상사태가 벌어지자,

중국 정부는, 1990년대에 들어,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한다~는 국가정책을 수립하여, 1996년에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시작하여, 2001년에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시작하고, 2002년에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시작하고, 2005년에 국사수정공정國史修正工程(2005-2015)을 시작하는 등의 국가전략 차원의 ‘역사 바꾸기’를 계속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 바꾸기’사업을 대강 정리해 보면,

황하중류의 앙소문화권 지역을, 염제 신농씨의 화華족이 일으킨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삼고,문헌상 나타나는 동이족東夷族의 활동무대는, 하북성 동북부, 산동 일대, 양자강유역이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인데, 동이의 구려족, 묘족苗族, 백월족百越族, 형오족荊吳族 등이 살던 장강 유역의 하모도문화권河姆渡文化 지역을, 하夏족이 일으킨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삼아, 기존의 중원의 화하족華夏族을 화華족과 하夏족으로 분리했으며,

요하일대 사해문화査海文化와 홍산문화紅山文化 지역을,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으로 묶어, 황제족皇帝族이 일으킨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삼아, 신화시절부터 요하일대는 모두 황제의 세력권으로 북방의 모든 소수 민족은 황제와 그 손자뻘인 고양씨 전욱과 고신씨 제곡의 후예라는 주장을 펼쳐, 이 지역에서 발원한 단군, 웅녀, 해모수, 주몽 등이 모두 황제의 후예로 만든 것이다.

황제는 북경 부근, 고양씨 전욱은 황하 중류의 위쪽, 고신씨 제곡은 황하 중류의 아래쪽이 세력권이라던 기존의 학설을 뒤엎고, 고대 중국사를 이끈 집단을 다시 재편하여, 지금까지 사이四夷이로 분류했던 오랑캐 족속인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모두 중화민족에 포함시켜. 중국민족의 기원은 화족, 묘족, 동이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중화 삼족설’로 급선회 하였다.

오늘날 동북공정을 정리한 중국의 사학계는, ‘은나라가 동이족’이란 고고학적 사실 앞에서, 중국의 기원은 화족, 묘족, 동이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중화 삼족설’로 급선회 하여, 치우蚩尤마저도 중국조상으로 삼고 있으나, 앞서 기술함을 기준하면, 화족을 제쳐놓더라도, 묘족은 동이의 지류임을 알 수 있으니, ‘중화삼족설’에 동의하기엔 무리가 있다.

 

요하문명의 고고학적 성과는, ~지나의 고대문명과 국가형성은 황하黃河유역의 하나라에서 시작해 상과 주나라로 이어짐이 아닌, 오랑캐라 부르던 요하遼河에서 시작되어 황하유역으로 넘어갔다~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에 주목하며,

홍산문화를 공부하고자 한다.

20세기에 들어, 내몽골자치구 적봉赤峰시의 동북방에 인접한 산인 홍산紅山을 중심으로 한 요하유역(내몽골자치구 동북지역과 동북삼성의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만주 일대)에서 발굴되는 유적 유물들이, 동쪽 오랑캐라고 항상 폄하하고 무시하였던 동이족東夷族의 신석기시대 문화권으로 밝혀지면서, 동양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에 먹칠을 하는, 중국인의 역사인식과 정치적 위상에 혼란을 오게 되었다.

 

홍산紅山은 중국이나 몽골인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데, ‘붉은 산’을 의미하며,실제로 철 성분이 많은 바위산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한다.

이 홍산紅山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원시국가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흔적인,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 적석총(塚) 등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삼위일체의 거대한 후기 신석기유적이 발견되고, 요녕성, 내몽골, 하북성 경계인 연산燕山 남북과 만리장성 일대를 포괄하는 대규모의 새로운 선사시대 유적지가 점차 발굴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중국은 55개의 소수민족을 아우르기 위한 역사 정리가 시급하게 되었다.

 

먼저, 홍산紅山 일대의 고고학 일지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보자.

1906년 일본의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우鳥居龍藏’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신석 기 유적과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적석묘 등을 발견함으로 시작되었으나, 큰 관심을 끌지 못했고,

1919년 프랑스 학자겸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1952)이 열하熱河일대 의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탐사하고 남긴 글을,

1920년대 하버드대학 유학중에 에밀 리상이 남긴 글을 본,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이 귀국 하여, ‘내몽골 임서현’일대와 ‘적봉현’일대의 신석기유적을 탐사하고, 1934년 ‘열하 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를 학계에 첫 보고하였고, 배문중裵文中, 윤달尹達 등이 참여 하여 흑룡강 등 동북4성(요령·길림·흑룡·열하성)의 문화유적에 관심을 가지면서, 중 국의 근대 고고학이 시작되었다.

1935년 요령성 일대에서 발굴된 채도彩陶와 손으로 눌러 뗀 석기 등을 발굴한, 일본 고고 학자인 ‘하마다 고사주濱田耕作’, ‘미즈노 세이키水野淸一’가, 만주일대를 일본이 점 령할 수 있는 빌미를 얻고자하는, 제국주의적 목적으로 시작하여, 홍산후紅山后유 적을 발굴하고, ~만주족과 몽골족은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했으므로, 중국과 역사적 으로 별개의 민족이다~는 등의 보고서를 내놓는다.

 

홍산 주변의 발굴시도는 청동기 문명 발굴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예상과 달리, 신석기 주거지 31곳과 옥구슬 380여기, 골기骨器 33점 등의 신석기 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으나, 사회, 정치적 필요성이 그다지 중요한 시대도 아니었고, 1958년 여준악呂遵?이 ‘고고학보考古學報’에 홍산후紅山后유적을 ‘홍산문화紅山文化’라 명명할 당시에도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으나, 이후 중국과학원에서 ‘내몽고공작대’를 구성하여, 서요하 유역을 본격적으로 발굴하면서, 사회, 정치, 학문적 필요성이 시급해 진다.

 

1958년 여준악呂遵?이 명명한 ‘홍산문화(전기:BC4500~BC3500,후기:BC3500~BC3000)’,

서광기徐光冀가 발굴한 시라무렌화 이북의 ‘부하문화富河文化(BC5200~BC5000)’

1960년 이공독李恭篤이 ‘소하연문화(BC3000~BC2000)를 발굴한 이래로,

1970년대에 조보구趙寶溝문화(BC5000~BC4400), 사해査海문화(BC5600년경), 홍륭화興隆 窪문화(BC6200~BC5200)를 발견, ‘홍산제문화권紅山諸文化圈’을 설정하게 된다.

1971년 내몽고 삼성타랍촌에서 대형 옥저룡玉猪龍 등을 발굴하고,

1973년 ‘요녕성 부신현 호두구’의 석관묘에서 올빼미, 옥거북이, 옥새(玉鳥), 등 옥기18점 을, 무덤을 돌린 돌담장의 형태가 상층이 원형이고 하층이 정방형인 제단 발굴.

1979년 요녕성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에서, 중심에 방형제단이 있는 석축 건물지와 주 거지등에서 홍도, 채도, 흑도, 소조인상20여점에 나체잉부孕婦(임신한 여인)상像, 양 손을 잡고 무릎을 굽혀 반듯이 앉은 여신상, 양쪽에 용무늬를 새긴 옥, 올빼미 모양 의 녹송석등 석주石柱를 세운 방형의 지단地壇과 여신女神을 모신 원형의 천단天壇 으로 구성된 종교적 제사시설물을 발굴.

 

1980년대에 들어, 요서지역에서 단壇, 묘廟, 총塚,을 특징으로 하는 홍산 문화보다 이른 시기의 신석기문화들이 속속 발견되어, 세계의 주목을 끌게 된다.

1980년 1959년 발견된 상대商代 전기의 이리두 유적에서, 하대夏代의 궁전宮殿 유적과 왕 묘王墓와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중·소형 무덤 58기를 발굴한 언사偃師현 이리두 二里頭 유적(하남성 낙양) 발견.

1981년 능원현과 건평현建平顯 경계의 ‘우하량牛河梁’에서 20여곳의 유적 발견.

1982년 부신현 동북에서 발견된 사해유적에서, 50여동의 주거지, 돌로 쌓아 만든 석소룡石 塑龍, 가장 오래된 토기에 부조된 용龍문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옥기玉器, 등,

1983년 발견된 망우하?牛河 상류의 흥륭와 유적에서, 2001년 1000여동의 주거지, 옥으로 만든 귀고리, 도끼등 100여점의 옥기, 2003년 멧돼지 두개골로 만든 저수룡猪首龍 등이 발굴되었고.

동산취 서북쪽의 ‘우하량’에서, 홍산 문화유적의 가장 중심에서 발견된 여신묘女神 廟에서는 동산취 유물과 유사한 유물과 토기제기 등이 출토, 주변에서 13개의 적석 총과 27기의석관묘, 청동 제련의 흔적 등을 발굴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84년 망우하?牛河 상류의 조보구趙寶溝 유적에서는, 신조神鳥, 녹수룡, 저수룡을 몸통 에 그린 토기와 사람 얼굴모양을 새긴 돌도끼(石斧)등의 일상용기가 아닌 제사용기 가 발굴되면서, ~요서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흥륭와문화가 쇠퇴하자, 북으로 부하문화와 남으로 조보구문화가 계승되다가, 이를 홍산문화가 이은 것~으로 정리.

 

이처럼, 중화의 민족 정통성을 뒤엎는 고고학의 발굴이 잇따르자, 중국 정부는 1980년대에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 들어, 홍산문화를 중심으로 한, 요하유역의 고대 문화권을 ‘요하문명’이라 명명하고, 문명기원의 다원성을 강조하여, ‘중화문명의 3대 원류지’이며, ‘중화문명의 실질적 시원지’이자, 세계 최고의 문명 발상지로 요하문명을 선전하는, 역사 개改조작에 국가적 총력을 기우린다.

 

1990년대에 들어,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한다~는 국가정책을 수립한다.

 

구오九五계획(1996-2000)=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라 하여, 대대적인 발굴을 진 행시켜, 연대 측정, 일식·월식 기록의 비교 연구 등을 통해서 하?상?주의 존속 연대를 공식적으로 확정지어, 하夏나라 존속연대를 BC2070~BC1600년으로 공식화시켜, 중 화의 역사시대를 최소한 1229년이나 끌어 올려놓았다.

 

십오十五계획(2001-2005)=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한다~하여,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 明探源工程’을 수립하여, 예비연구(2001-2003)와 1단계연구(2004-2005)에 이어,

 

십일오十一五계획(2006-2010)을 통해 2단계연구(2006-2008)를 마쳤다.

 

필자는 3단계 연구에 관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 서술하지 못하나, 탐원공정류의 중국내 활동은 정부의 지원 외에도 개인적 연구도 활발해진 종료치 않은 현재 진행형의 국책사업이다.

탐원공정探源工程을 통해 중국은,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이 교차하는 유연幽燕지역에 살던,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高陽氏 전욱?頊과 고신씨高辛氏 제곡帝?, 두 씨족이 모든 북방 민족들의 시조이며, 만주지역의 요하문명권의 핵심인 홍산문화도 고양씨 전욱 계통이라는 주장을 펼쳐, 신화와 전설의 시대라 했던 ‘3황 5제’를 중국의 민족역사에 편입하여 중국의 민족역사를 1만 년 전으로 끌어올린다.

 

동북공정東北工程(2002-2007)= ‘중화문명탐원공정’의 일환으로 시작된 동북공정은, 요하문 명권과 한반도의 연계성을 단절하여, 고주몽의 고高씨 성도 고양씨의 후예라는 등으 로 정리하여, 진秦한漢 시대를 기점으로, 고구려를 포함한 각 소수민족들이 ‘민족 대 융합을 통해 중화민족으로 통일되었다’는 주장으로, 한민족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마저도 완벽하게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역사 조작을 일단락 하였다 함에, 국내의 많은 이들이 한민족 역사 지키기에 나서게 된 실정이다.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는, 중국의 고구려연구소 부소장 경철화耿鐵華 교수의 주장을 보면, ~요서 지방에서 발생한 지나支那 문화인 홍산문화가 서쪽으로 가서 은나라를 세우고, 동쪽으로 옮겨와 고구려와 부여 같은 나라의 기원이 되었으며, 아즈텍문명, 마야문명을 일으킨 이들도 상나라의 후예들이다~는 주장을 거리낌 없이 할 정도로 동북공정의 완성도에 만족하고 있다.

 

국사수정공정(2005-2015)= 중국정부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동북공정東北工程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통해, ~요하문명권 내의 모든 고대 민족들은 모두 중화민족이다~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속셈이 숨겨진 고고학적 전략으로, ‘국 사수정공정(2005-2015)을 진행하여, ‘요하문명권遼河文明圈을 지나의 역사에 편입 시켜, 슈메르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이른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권으로 만든다’는 국가의 전략차원의 역사 조작을 일차 끝내고, 새 역사 창조를 진행하고 있 음을 기억해야한다.

 

지금까지, 대략적인 중국의 고고학 일지를 정리하여 보았다.

이처럼, ‘홍산紅山문화권’의 신석기 유물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동북지역(특히 내몽고와 요서지역에 집중)에서 계속 발견되어, 중원문화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더 발달됨이 확인되고, 요하遼河 일대에서, 기원전 5500년경으로 추정되는 신석기문화인 소하연小河西문화와 기원전 5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사해査海문화가 발견되어, 요하지역의 유물들이 기존 황하유역의 앙소仰韶, 용산龍山문화, 장강長江(양자강)하류의 하모도河姆渡문화보다 최소한 2천년 이상 앞섬이 증명되고, 한자의 기원일지도 모르는 도부문자도 출토되고, 가장 이른 시기의 용龍 형상물들이 요하에서 발굴되어, 용의 후예라는 중국인들의 자부심에 금이 가게 된다.

특히,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발굴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 적석총(塚) 등은 초기국가형태로 증명되고, 요하遼河 일대의 각 유적에서, 중원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고, 한반도 일대에서 많이 보이는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적석총, 비파형동검, 다뉴세문경 등이 대량으로 발굴되어, 내몽골-만주-한반도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임이 밝혀지게 되면서, 오랑캐 땅이라고 비하하던 ‘요하 일대가 중국문화의 원류’로 역사적 증명에 도달하니, ~지나의 고대문명과 국가형성은 황하黃河유역의 하나라에서 시작해 상과 주나라로 이어짐이 아닌, 오랑캐라 부르던 요하遼河에서 시작되어 황하유역으로 넘어갔다~ 결론에 도달하여, 기존의 역사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민족 자긍심, 문화 우월감을 자랑할 근거를 잃게 되었고, 소수 민족들을 아우를 정치적 명분에도 심각한 타격이 오는 정치적으로도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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