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4. 중국으로 - 西域 카슈가르에 도착하다
‘이슬람 로드’로 변한 ‘다르마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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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가르의 모르불탑> |
사진설명: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곳에 있는 불탑. 2000여년 전에 조성된 탑인데,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며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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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이얼카스탐에서 카슈가르로 이어진 공로. |
2002년 9월12일 오후4시.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 측 세관인 이얼카스탐을 나와 점심을 먹은 뒤, 카슈가르로 출발했다. 이얼카스탐에서 카슈가르까지는 250km. 길은 그런대로 잘 포장돼 있었다. 8월의 홍수로 곳곳의 도로가 파괴됐지만 길은 좋았다. 가슴 속은 무척 설레었다. 말로만 듣고, 책에서만 보던 ‘서역’(西域) 아니던가.
카슈가르로 가는 도중 만난, 도로 주변의 모든 풍광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무작정 달리길 6시간. 카슈가르에 도착하니 밤 9시30분.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 카슈가르. 새벽5시 키르기스스탄 오쉬를 떠난 지 거의 15시간 만에 마침내 서역의 카슈가르에 도착한 것이다.
저녁을 먹은 뒤 카슈가르 세만빈관(色滿賓館)에 자리 잡고 그대로 쉬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지나온 여정(旅程) 등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카슈가르(소륵국)가 서역(西域) 끝 오아시스 도시이기에, ‘서역’에 대한 생각이 가장 먼저 뇌리를 스쳤다. 주지하다시피 서역이라는 말은〈한서(漢書)〉에 처음 등장한다. 원래 동(東)투르키스탄, 대체로 현재의 중국 신강성(新疆省) 타림분지 일대에 산재해 있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지칭해 ‘서역 36국’이라고 불렀다. 그 뒤 중국인의 서방에 관한 지식이 커짐에 따라 서역이 뜻하는 지역범위도 확대됐다. 서(西)투르키스탄 즉 중앙아시아·서아시아, 때로는 인도까지 포함하게 됐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동·서 투르키스탄을 합친 중앙아시아, 특히 동투르키스탄 지역(신강성 일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 유명
넓은 의미의 서역 지역엔 여러 개의 사막이 있다. 트란스옥시아나(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지역,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키질쿰 사막, 아무다리아 강 남쪽의 카라쿰 사막, 신강성 타림분지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 신강성 동북쪽의 롭노르 호수에서 홍안령산맥 사이에 있는 고비사막 등이 그것이다. 사막이 있었기에, 오아시스 정주민들은 유목민들의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었고, 덕분에 별 탈 없이 장기간 동서교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들 사막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이 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상·하를 관통하는 길이 ‘천산남로’(타클라마칸 사막 위쪽. 서역북도)와 ‘사막남로’(타클라마칸 사막 아래. 서역남도)이며, 이 루트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실크로드’(비단길)이자 ‘다르마로드’(불교가 전래된 길)이기 때문이다.
타림분지는 처음 흉노(匈奴)의 지배 하에 있었다. 전한(前漢) 무제 때 흉노 세력을 물리치고, 서방제국과의 교통·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기원전(BC) 59년 구자(龜玆. 현재의 庫車) 동쪽의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가 설치되면서 중국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 때가 기원전 2세기였으며, 당시 서역 개척의 중국 측 선두주자는 장건(張騫. ?~BC 114)이었다.
장건이 서역개척에 나선 것은 흉노 때문이었다. 흉노는 기원전 2세기경까지 강성하여 중국에도 자주 침입했다. 진시황에게 패배해 격퇴되기도 했지만, 진말한초(秦末漢初)의 혼란을 틈타 다시 세력을 만회해 중국을 넘봤다. 천하를 통일한 한 고조 유방(BC 247~BC 195)은 흉노를 격멸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싸웠다. 그러나 처참한 패배만 경험하고 해마다 막대한 양의 비단을 공납하고, 왕족의 딸을 흉노왕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겨우 화평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때 흉노는 타림분지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기원전 141년. 젊고 기예 넘친 한 무제(武帝. BC 156~BC 87. 재위 BC 141~BC 87)가 즉위하자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흉노제압에 나선 것이다. 포로로 잡힌 흉노를 심문하던 중 “흉노에게 쫓겨난 월지국 사람들이 흉노를 원망하며, 원한을 갚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무제는 사자를 월지로 보내 함께 흉노를 치자고 제안하고 싶었다. 이 때 사자로 발탁된 사람이 바로 장건이었다. 월지국은 당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지역과 타지키스탄의 서반부 지방에 살고 있었다.
무제(武帝)의 명을 받은 장건은 기원전 139년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일리강(江) 유역에 있던 대월지(大月氏)를 향해 장안을 출발했다. 가던 도중 흉노에게 잡혔으나 탈출해 대완(大宛)·강거(康居)를 거쳐, 이미 아무다리아강 북안으로 옮긴 대월지에 기원전 129년경 도착했다. 그러나 대월지는 흉노를 칠 의사가 없었다. 대월지에 1년 여 머물며 설득했지만 대월지는 듣지 않았다. 장건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귀국해야만 했다.
불운하게도 귀국하던 도중 장건은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 기원전 126년 한나라로 돌아왔다. “대월지엔 한혈마(汗血馬)라는 명마가 떼 지어 있고, 포도가 가지마다 휘어지도록 매달려 있다. 그들은 한나라와 교역하고 싶어 한다”는 보고를 무제에게 올렸다. 무제는 기뻤다. 이후 무제는 대흉노작전과 서방으로의 진출정책을 급격하게 강화한다. 이 모든 것은 장건의 보고에 자극받아 이뤄진 일이었다. 기원전 121년 장건은 다시 오손(烏孫)에 파견됐는데, 그 곳에서 그는 서역 여러 나라의 사절·대상(隊商)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러한 그의 여행으로 서역의 지리·민족·산물 등에 관한 지식이 중국으로 유입됐고, 동서간의 교역과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시작했다.
한편, 기원전 121년 봄 1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린 표기장군 곽거병(BC 140~BC 117)은 2차에 걸쳐 감숙지방의 흉노를 격파하고, 수많은 포로를 잡는 데 성공한다. 무제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하서군(기원전 115. 후일 장액군으로 개명)·주천군(기원전 111)·돈황군(기원전 100~107)·무위군(기원전 73년경) 등 하서사군을 설치해 서역경영에 나섰다. 이후 흉노는 점차 타림분지 일대에서 밀려나고, 선제 시절 한나라는 쿠차 동쪽에 있는 오루성(차디르)에 서역도호(西域都護)를 두고 서역지배를 완성하며, 천산남로(서역북도)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일본의 실크로드 연구가 나가사와 가즈도시(長澤和俊)교수에 의하면 “서역도호 설치 이후 50~60년 동안은 실크로드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던 시대의 하나”였다.
‘천산남로의 끝 오아시스 도시’ 카슈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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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카슈가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소조불상. |
한나라 시절 ‘천산남로의 끝 오아시스’ 도시 카슈가르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카슈가르에 대해, 반고(班固. 32~92)·반소(班昭. 반고의 누이동생. 45~117) 남매가 집필한 〈한서〉 ‘서역전’ ‘소륵국(疏勒國. 카슈가르)조’엔 이렇게 나온다. “소륵국왕은 소륵성에서 다스린다. 동은 도호치소(都護治所)까지 2,210리, 남은 사차(현재의 야르칸트)까지 560 리다.” 한나라·오호16국·당나라를 거치며 불교가 흥했던 카슈가르는 중앙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금 완전히 ‘이슬람 땅’으로 변했다. 751년 탈라스전투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이 이슬람 세력권으로 변하고, 9세기경 위구르인들이 이주해오자, 이 지역 사람들도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종교를 바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위구르인들을 살펴보자.
현재 신강성을 장악하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본래 셀렝가강(바이칼호 부근) 유역에서 동돌궐(東突厥) 지배를 받다, 744년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오르콘강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위구르제국을 건설했다. 제3대 모우가한(牟羽可汗 : 759~780)의 치세 때 당(唐)나라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협력한 뒤, 당나라에 과도한 요구를 내세우면서 내정에 간섭하기도 했다. 그 후 제8대 보의가한(保義可汗 : 808~821)까지 약 40년 동안, 동(東)투르키스탄(신강성)으로 진출해온 토번(吐蕃)과 카를루크족(탈라스전투 당시 고선지 장군을 배신한 부족), 예니세이강(江) 유역의 키르기스족 등과 싸웠다. 그러나 내분이 계속되면서 키르기스의 공격을 받고, 840년 제국이 붕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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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모르불탑 부근의 차크마크 강변에 있는 삼선동. |
제국이 무너진 뒤 남쪽으로 내려온 위구르족은 당나라 군대에 토벌돼 쇠퇴하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패주한 세력 일부는 감숙성에 정주(定住)하다, 1028년 서하에(西夏)에 병합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중심세력은 천산산맥(天山山脈) 북쪽 기슭의 비슈발리크(北庭) 및 남쪽 기슭의 고창(高昌)을 거점 삼아, 위구르왕국을 건설해 동(東)투르키스탄을 지배했다. 그러다 징기스칸이 일어나자, 1209년 그 밑에 복속됐다. 이들은 본래 불교를 믿었으나, 이슬람 세력이 동진(東進)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현재 카슈가르 지역엔 2000년 전의 불교유적이 남아있다.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곳(아토스 지역)에 있는 모르불탑(莫爾佛塔. 모루푸타)과 차크마크 강변에 있는 삼선동(三仙洞. 3명의 신선이 사는 굴이란 뜻)이 그것이다. 〈다음호엔 카슈가르와 탁스쿠르간 소개〉.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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