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긍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
‘프라이드’(pride)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겸손과 반대되는 교만이고, 다른 하나는 수치와 반대되는 긍지이다.
교만은 우리의 성공에서 하나님과 다른 환경들을 배제시켜 버린다.
교만은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던 간에 자신의 힘으로 성취했다고 주장한다.
교만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이기심이며, 성경은 이것을 정죄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자아를 적대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아는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것이다. 교만은 항상 무대 중앙에 서고 싶어하며,
모든 공로를 혼자 차지하며, 하나님을 빼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으며,
독불장군식의 이기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과 반대된다.
요한일서 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이다.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활동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는 인간은 그 누구도 고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긍지는 일을 잘 처리하며,
탁월하며, 최고를 위해 노력하며, 평범함을 초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러한 긍지는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주인께 드리려 한다.
교만과 긍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해서도 잘못된 인상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기독교는 탁월함을 반대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탁월하며 성취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탁월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대할 뿐이다.
이기적인 교만은 감사와 반대된다.
교만은 건강한 몸, 건강한 마음, 좋은 부모, 좋은 나라, 좋은 식사, 그 외 사람들의 통제 밖에 있는 수많은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전혀 감사하지 않는다.
이기적인 교만으로 가득한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만은 근시안적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가면 인간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잠 16:18).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교만을 벗겨내신 후에야 자신이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분의 힘을 구하게 된다.
긍지는 감사할 대상에게 감사하다고 표현하며 공로를 합당한 데 돌릴 수 있다.
긍지는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잘한 일을 인정할 수 있다.
칭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오만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능란한 손가락이 어디서 왔으며
누가 자신의 마음과 리듬감을 주었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독립적이며 자기중심적이지 말라고 독려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탁월함과 성취를 추구하라고 독려해야 한다.
큰일을 이룰 수 있는 재능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성공이 얼마나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지를
항상 인식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놀랍고도 과분한 은혜로 인해 항상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일을 통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해야 한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성당에서 걸어나오면서 자신이 정말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고
긍지를 느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당의 천장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하나님께로 이끌린다.
사람들은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예술은 위대하다.
그러나 예술의 목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람객은 예배하고 싶은 감동을 느낀다.
우리의 일에 긍지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에 한껏 부풀어 오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훌륭한 일을 하게 하셨으나 그 목적은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마 5:16).
교만과 긍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 (2)
죄책감과 은혜
나는 확고한 율법주의자였다. 나는 죄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강단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8∼10가지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국을 슈퍼마켓처럼 보았다.
나는 내가 천국에 가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로 가득한 카트와 함께 줄을 서서 계산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나는 “많아야 일곱 개”만 찍고 계산대를 쉽게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숙하면서, 나는 내가 죄와 인간의 상태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해왔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단지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려고 기도회에서 고백하는 의식적인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심각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죄인이었으며 심판받아 마땅했다.
나는 내 죄의 깊이를 내가 거의 맛볼 수 있는 수준까지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의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죄는 하나님이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시는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아버린다.
죄는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죄는 사람들, 특히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친다.
일단 우리 죄의 심각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로 옮길 수 있다.
나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찬송가 405장)과 같은 찬송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어떤 죄인인지 알았으며,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놀라운지 알았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찬송가 28장)라는 가사도 마찬가지였다.
죄책감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인의 성장이 시작된다.
다시 말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롬 5:20).
죄를 깨닫고 그 죄에 대해 정직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 죄에서 돌이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오직 은혜, 과분한 은혜를 통해서만, 그가 행한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죄는 단지 하나님의 규범을 위반하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떻든 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서서 더 많은 죄를 지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구원하신다.
자책과 회개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8-11절에서 죄책감에 대해 생생하게 말한다.
그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 근심”(worldly sorrow)과 회개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Godly sorrow, 경건한 근심)을 대비시킨다.
세상 근심은 자의적인 죄책감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자신에게 가하는 지속적인 형벌이며,
자신의 죄에 대해 인간적인 수준에서 대가를 지불하려는 시도이다.
자의적인 죄책감은 마침내 부정(否定)과 심지어 자멸로 이어진다.
가룟 유다는 이러한 죄책감을 느꼈을 때 자살을 선택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로 이어진다.
이것은 유다가 깨달았듯이 죄의 무서움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하는 죄인은 자신을 자멸로 몰고 가는 대신에 하나님은 은혜로운 용서의 제안으로 눈을 돌린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마 11:28).
그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사 1:18).
시몬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으나 유다처럼 동산으로 가서 스스로 목을 매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갔고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자책과 회개의 본질적인 차이는 인간 중심적인 죄책감이냐 하나님 중심적인 죄책감이냐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가운데 하나가 낙타를 쓰러뜨리는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도를 넘으면 지푸라기 하나 더 얹어도 낙타의 등골이 부러진다”는 속담을 이용한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극단적인 죄를 용서한다는게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가장 악한 죄,
곧 우리를 너무나 당혹스럽게 하며 너무나 큰 죄책감을 안겨주는 특별한 죄까지도 충분히 용서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우리가 그 죄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그분의 용서를 구하며 그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와 성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구원 받는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믿음까지도 행위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 구절을 우리에게 주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구절은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공로로 우리의 죄책감을 제거하신다.
우리의 근심과 믿음 모두 우리의 구원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구원 받는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가?
수년 전이었다. 나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 친구를 찾아가 내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완전한 헌신으로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때 친구는 나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죄 없이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이 자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을 걸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자네가 죄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지. 자네의 죄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흠집을 내는 게 아니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바로
자네의 죄 때문이니까.”
그때 나는 비로소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깨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