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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李盛夫은 “봄”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봄은 저와 여러분의 뜨거운 의지나 간절한 기대가 없어도 때가 이르게 되면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기다릴 때도 오고 있고, 기다리지 않을 때도 오고 있습니다. 무조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조금도) 지체 없이 이루어주겠다.”(사60:22b)라는 약속대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도 때가 이르게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기다릴 때도, 잊어버리고 있을 때도, 심지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을 때도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때로 늦어지기도 합니다. 매서운 추위가 얼마나 길고 혹독하게 이어지는지 도무지 오지 않을 것 같을 때도 조금 늦어질 뿐이지 봄은 겨울을 완전히 끝장내 버리고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너무나 깊고 길어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만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과 함께 낙심과 절망이 밀려올 때에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무리가 아무리 방해해도 결국에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드디어 눈앞에 다가온 봄은 일어나 맞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눈부십니다. 얼마나 감격에 겨운지 입을 열어 외칠 수도 없습니다. 가까스로 팔을 벌려 안아볼 뿐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굳이 알리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되어 이루어지는 날,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입을 열 수 없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핑 돕니다. 마음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감사와 감격과 감동으로 물결칩니다. 감사와 감격과 감동을 어떻게든 표현해보고 싶지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에게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심하거나 절망하키는커녕 오히려 자신은 물론 목숨처럼 사랑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은 때가 이르게 되면 반드시 이뤄지게 되어 있다고 그러니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申榮福는 1968년 7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류連類 되었습니다. 졸지에 무기수無期囚가 되었습니다. 20년 20일이라는 긴 세월을 복역服役했습니다.
1988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었습니다. 옥에 갇혀 지내는 동안 부모, 형수, 계수季嫂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보냈던 편지들을 모아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제목으로 엮어냈습니다. “빛나는 눈”이라는 소제목의 글을 통해서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고...무엇보다 자기의 자리 하나 굳건히 지키게 해주는 옹이같이 단단한 마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고...무엇보다 자기의 자리 하나 굳건히 지키게 해주는 옹이같이 단단한 마음입니다.”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기 때문에 더 많이 참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이 견딜 수 있습니다.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절대로 쉽지 않지만 간혹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 내놓아야할 때도 있지만 자신에게 사명처럼 주어진 자리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떠났습니다. 죄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아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신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했습니다. 스스로 진멸Herem을 자초했습니다. 결국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잉태하지 못한 여인 같은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출산하지 못했습니다.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수치스러웠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은 물론 심리적인 상태까지 모두 다 이럴지도 모릅니다.
어디에서도 희망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절망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인간의 편에서 볼 때는 그렇습니다. 어쩌면 죄와는 전혀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작정한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기 때문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 속에 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어떤 자격이나 조건도 갖추지 못한 그렇기 때문에 아주 버림받아 마땅한 성민 이스라엘을 돌아보셨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잉태케 해주셨습니다.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자녀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자녀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장막의 터 곧 나라와 민족의 경계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자녀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영적이고 육적이며 동시에 환경적인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더 이상 수치를 당치 않게 해주셨습니다. 부끄러운 과거는 아예 기억조차도 나지 않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또 마치 창녀처럼 온갖 우상들에게 붙어 지낸 성민 이스라엘에게 친히 떼려야 뗄 수 없는 친밀한 남편이 되어주셨습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이 높이 솟아있었던 거대하고 웅장한 산들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작은 언덕들이 흔들릴지라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베풀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도 훼방할 수 없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베풀어주셨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무너지고 불타서 들짐승의 소굴로 변해버린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진주와 사파이어로 장식해주셨습니다. 영광과 아름다움이 충만한 성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친히 성민 이스라엘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평화와 조화가 넘치는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당신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당신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더 이상 억압을 당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완벽하게 진멸시켜주셨습니다. 위협과 고난을 제거해주셨습니다. 완벽한 보호와 승리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디에서도 희망의 그림자조차도 찾기 어려운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여호와에 대한 믿음 하나만 붙잡고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 되어 있는 축복들입니다.
달맞이꽃은 바늘꽃과에 속합니다. 낮에는 힘없이 오므라든 채 있다 밤이 되면 활짝 피어 자태를 뽐내고 아침이 되면 진다고 해서 월견초月見草라고도 불립니다. 밤에 꽃을 피우는 식물은 향기로 곤충들을 불러 모으는 탓에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고 해서 야화夜花 또는 야래향夜來香이라고도 불립니다. 일본에서는 밤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대소초待宵草라고 부릅니다. 독일어Nachtkerze로는 밤의 양초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뜻대로 캄캄한 어두움을 배경으로 피어납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선명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노랑은 자체로 호롱불입니다. 반딧불입니다.
해바라기가 낮을 밝혀주는 해를 바라보듯 피는 꽃이라면, 달맞이꽃은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달을 바라보듯 피는 꽃입니다. 특히,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기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申榮福는 또 “나이테”라는 글을 통해서 “...나이테가...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이다...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이다. 햇빛 한 줌 챙겨 줄 단 하나의 잎사귀도 없이, 동토에 발목 박고 풍선에 팔 벌리고 서 서도 나무는 팔뚝을, 가슴을...내년의 봄을 키우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겨울에도 자랍니다. 봄을 키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찐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이 견뎌내고 있는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키우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의 저자인 그Soonkyu Shin는 모든 것이 낯선 타국에서 외국인과 유색인종과 시각장애인으로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책 한 권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고난을 감사로 여겼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저와 여러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낙심할 때, 좌절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꼭 붙들고 계십니다. 2025년, 저와 여러분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그Mark는 촉망받는 젊은 목사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와 공을 차던 아들Owen이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는 망연자실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들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픔을 통해서 형제자매의 아픔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이집트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13:17)라는 증거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바로의 압제로부터 건져낸 성민 이스라엘을 처음에는 쉬운 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곧 성민 이스라엘을 쉬운 길로부터 돌이키셨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넘실대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좌우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성민 이스라엘을 놓지 못했던 바로가 최정예 부대를 규합해서 싸우려고 나올 수밖에 없도록 유혹하는 길이었습니다.
바로는 성민 이스라엘이 사면초가에 놓였다고 판단했습니다. 즉시 성민 이스라엘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착각이었습니다.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성민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내려졌던 열 가지 재앙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바로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이집트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출14:4절)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약속대로 두렵고 떨리는 상황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굳게 세워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상관없이 모두 다 도구로 사용하셔서 저와 여러분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위에 굳게 세워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평안할 때는 믿음으로 안식하면 됩니다. 삶이 어려울 때는 믿음으로 여호와께 온전히 맡기면 됩니다. 그Rembrandt van Rijn는 네덜란드가 전성기를 맞은 17C초에 태어났습니다. 부자나라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다 화가라는 탁월한 재능까지 타고났습니다. 그야말로 선택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성인이 되서도 성공을 거듭했습니다. 남들은 수시로 당하는 실패 하나 없이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삼십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은 서서히 화려했던 젊은 시절의 영광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아내가 죽었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지나친 사치로 인한 빚에 허덕였습니다. 결국 파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남긴 백여 점의 자화상에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의 삶이 드러나 있습니다. 유작들 가운데 “십자가 세우기The Raising of the Cross”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림의 중앙에 그려져 있습니다. 네 명의 남자들은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그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빛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었던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화가 스타일의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을 그림에 넣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의 죄 때문이기도 하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보입니다. 말을 타고 있습니다. 그림의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렘브란트의 또 다른 자화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까?”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5:10a)라는 증거대로, 저와 여러분은 원래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진 고난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 스스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제공해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온갖 필요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결코 아주 버리지는 못하십니다. 오히려 상처를 통해서 한층 더 자랄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한층 더 성숙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당신의 크고 놀라운 뜻을 이루어주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크고 놀라운 복을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2025년, 원망과 절망보다는 감사와 희망을 선택하기로 결정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5년, 거센 바람이 불어 닥칠까봐 두려워하는 촛불보다 바람이 불어와 주기를 기대하는 장작불이 되기로 결정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5년,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절망밖에는 보이지 않는 지극히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 한 분만 붙잡기로 결정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5년, 반드시 도래할 희망을 기대하기로 결정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2025년, 겨울 같은 고난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오랫동안 이어지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한분만 기다리기로 결정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을 통해 아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2025년,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찬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복된 2025년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