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보고서
신경숙
뚝! 버스 계단에 오르는 순간 내 왼쪽 다리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릎 내부에서 나는 소리였다. 귀에 들릴 정도의 큰소리였다. 사단이 난 걸 직감했다. 손에 든 물건이 있어 앉는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왼발은 뇌의 명령을 무시하고 신발과 차 바닥에 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발을 끌다시피하며 좌석에 앉았다. 불안감에 앉은 자리에서 살며시 다리를 들어올렸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날은 친정에 행사가 있는 날이라 친정식구들과 합류하기 위해 범어동 사는 큰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조카들에게 주려고 준비한 참외와 간식의 무게가 적잖아도 핏줄을 찾는 본능에 반비례되어 가볍게 느껴졌다. 9년 전의 어느 날이다.
그 무렵쯤 왼쪽다리는 심심찮게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많이 걷거나 무거운 물건을 든 날 저녁은 여지없이 다리가 무거웠다. 다소 활동이 불편해도 갱년기에 찾아오는 노화현상이라고 간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릎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채지 못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아프긴 했지만 CT나 MRI를 찍을 필요까진 없다고 섣불리 짐작했다. 그도 그럴듯이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전전해도 퇴행성 무릎관절염 초기라고만 했다. 아래위 뼈 간격이 먼 X-ray 사진과 오십대 초반 나이를 감안하고 가벼운 감기환자 다루듯 쉬이 취급했다. 사실 이따금 병원을 오가며 며칠간의 진통제와 물리치료로 무릎의 간헐적인 통증을 달래니 그럭저럭 큰 불편은 없었다.
평소 건강을 호언장담하던 나는 그 날의 무릎의 반란앞에 무릎을 꿇었고 급기야 수술까지 하게 됐다. 증상에 따른 병명을 찾느라 모니터엔 연관 검색어가 즐비했다. 병원을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사업으로 바쁜 남편과 학업으로 외지에 나가 있는 아들 둘에게 내 건강까지 짐 지우기 싫었다. 미주알고주알 알린다고 아픈 다리가 낫는 것도 아니니 내 앞가림은 최대한 내 선에서 해결하는 편이다. 지역 시내에 있는 무릎관절 전문병원의 검사 결과는 내 예상과 들어맞았다. 반월상 연골판 파열에 따른 연골 손상까지, 수술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푸근한 인상의 수술 집도의는 다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감을 주었다.
수술후 재활 기간을 거쳐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까지 장장 1년이 걸렸다. 휠체어, 목발을 졸업하고 양발을 딛기까지 서너달이 걸렸다. 그 후에도 근육을 채우고 근력을 채우기 위해 재활병원과 헬스장을 내집같이 드나들었다. 계단과 오르막을 소화하기까지의 노력은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은 엑설런트한 과정이었다. 어쨌거나 그 나이에 다리에 반짝거리는 금속물을 집어 넣는 인공관절 치환술을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고 탐탁지 않았다. 무릎 관절을 되살리는 연골 재생술이 있다는 건 내게 구세주같은 일이었다. 제대혈 줄기세포로 짱짱한 무릎을 되찾고 싶었다. 말대로라면 한 번의 수술로 반영구적 초자연골로 재생된다는데 아니 10년만 쓴다 해도 생애 1년을 뚝 떼 새 무릎으로 바꾸는데 주저하지 않을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왜 그렇게 손상이 빨리 왔는지 걱정을 섞어 물었다. 살아온 이력을 펼쳐 놓으면 장황하게 길어지고 무릎을 홀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꼴이라 적당하게 얼버부리고 말았다. 되돌아보면 자는 시간만 빼고 얼마나 부렸던가. 삼십대엔 집앞 피트니트 센터에서 에어로빅으로 방방 뛰었고 사오십 대엔 직장생활에 가사일까지 하루종일 동동거리고 살았다. 주말엔 친정의 주말농장과 농촌 시가를 교대로 건너다니며 밭일과 집안일로 무릎을 혹사시켰다. 게다가 평소 여행과 등산을 좋아해서 틈이 나면 친구들과 지역 산악회 두 곳을 오가며 가벼운 산행을 즐겼다.
늘 당일코스였으며 점차 저급해지는 체력 탓에 정상에 도전하는건 언감생심이었다. 스틱을 폼나게 짚고 정상석에 호기롭게 기대어 찍은 사진은 몇 안된다. 가야산 우두봉, 황매산, 매화산, 대금산, 두타산, 화왕산, 팔공산 동봉 등 크고 작은 산들을 헐떡이며 오를 때도 있었지만, 어느 때부턴가 지리산 둘레길 등 트레킹 코스만 찾았다. 그렇게 주변 이름난 산들을 섭렵하는 사이 내 무릎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산에 매료된 다섯자 남짓한 몸뚱아리는 발아래 동네를 탈출해 청량한 하늘과 맞닿아 정서적 포만감에 취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 시간 그렇게 바지런을 떨었다.
수술로 업그레이드한 다리는 언제 아팠냐는듯 원활했다. 삶의 패턴은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전히 분주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인연은 내 손과 발이 필요했고 그들이 있어 발끝에 힘을 주며 살았다. 연로한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을 한번이라도 더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이들도 장성했고 다리가 나으니 하고 싶었던 게 더 많아졌다. 자전거 타는게 부러워 시청 생활체육을 이용해 자전거를 배웠다. MTB자전거를 비롯해 라이딩에 필요한 풀세트를 갖춰 알록달록한 단체복을 입고 선망의 자전거 행렬에 끼었다. 자전거 페달에 발을 얻고 강변과 시골길 가로수 아래 공기를 가르니 갈아갈 듯 했다.
종전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불교대학에 등록하고 절 합창단에 가입했다. 엑스코 오디토리움 무대에서 찬불가를 부르는 환희를 누렸다. 마음 따라 몸이 따라갔다. 원해서 하는 일은 힘들지도 않았고 성취감도 컸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수필작가로 등단하는 행운도 따라왔다. 늦깎이로 여기저기 벌려 놓은 빡빡한 취미생활로 직장인 못지않게 쏘다녔다. 찾아서 달린 만큼 허기를 채울 수 있었고 좌충우돌 어지러진 지난 날을 매끄럽게 정돈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2년 전부터 다시 무릎이 슬슬 아파왔다. 이번엔 오른쪽다리였다. 한쪽을 하면 한쪽도 마저 한다더니 그 날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수술한 다리가 아무는 동안 한쪽 다리마저 고생했고 후로도 생활은 여전히 번잡스러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무릎에 좋다는 약도 꾸준히 먹어왔다. 어쩌면 '그 영양제들 덕분에 지금껏 버틴건지도 모르겠지'하고 자위하니 속 편했다. 다시 9년 전의 같은 수술과 재활의 긴 여정을 반복하려니 비참하고 우울했다. 그 땐 멋모르고 달려들었지만 알고 하려니 걱정이 앞섰다. 아닌 게 아니라 주사와 약으로 근근이 버티던 8월 어느 날 9년 전 버스안 그때처럼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약발도 안 듣고 무릎 사용기간이 다 된 것 같았다.
작심하고 수술한 병원에 오니 수술만이 답이란 결론을 들었다. 9년 세월은 잘 생긴 선생님의 머리칼만 세게 한 게 아니라 내 무릎도 같이 앗아갔다. 아이러니하게 아프지만 좋고 반가웠다. 변함없이 푸근하고 친절한 그대로 날 알아봐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수술할 용기가 났다. 수술날을 정하고 기다리는 동안 3개월간의 긴 외출 준비를 했다. 퇴원하기까지의 긴 시간이다. 남편과 아들이 고생하겠지만 도리가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집중할 일만 남았다. 수술실로 들어갈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두 다리로 활보하는 즐거운 상상이 온몸을 휘감았다. "괜찮다. 고삐를 늦추자. 인생의 남은 여백 구석에 속살을 채워 넣으려 종종걸음 쳤으니 숨을 고르는 시간이라고 여기자" 라며 주문을 되뇌었다.
뜻하지 않은 두 번의 수술과 재활 과정을 거치며 두 다리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한 번 더 절실하게 느낀다. 걸을 수 없으면 모든 게 정지된다. 세월이 가고 모든 것들이 낡고 힘을 잃어도 다리만은 고쳐 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