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교수가 쓴 ‘예수’를 읽다
근본도 없는 시골교회 기도원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접했다.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기도원장님은 성경을 해석하기보다 성경이야기꾼에 가까웠다. 고난과 어려움은 밤새워 기도하면 이뤄진다는 기복신앙이 그 분이 믿고 의지하는 신앙관이었다. 기도원에서는 정기적인 부흥회가 개최되었다. 부흥사들은 강대상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교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지만 그렇게 맹목적으로 강요받은 신앙이 삶을 바꾸지는 못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충남의 크지 않은 읍(邑)에 위치했던 교회는 나에게 신세계였다. 교회에 피아노가 있고 성가대가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목사님의 설교는 조리 있고 분석적이었다. 고등부 학생들끼리 형제, 자매라고 부르며 존중하는 것도 처음 경험했다. 부흥회 때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신앙이 자란다는 사실도 그 때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도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일원이었다. ‘말씀에 의혹을 갖지 말고 문자적으로 믿어라’, ‘의미를 구하려 하지 말고 의심 없이 믿어라’는 것이 기본적인 신앙 방식이었다.
어렵게 진학한 대학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총신대학’이었다. 고등학교 때 다녔던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이었으므로 목회를 꿈꿨던 나는 당연히 교단신학대학인 총신대학에 입학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총신대학에서 처음 접한 ‘신학(神學)’도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배운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축자영감설’, ‘예정설’과 같이 신학적으로 포장만 되었을 뿐이었다.
보수신앙의 울타리에서 살고 있던 나를 조금씩 바꾼 것은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 기숙사 선배는 당시 빨갱이 교회로 탄압받던 ‘영등포 산업선교회(성문밖교회)’로 나를 데려갔다. 다른 선배는 사회비판과 보수신학을 비판했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전역 후 복학하자 과거의 선배들은 후배들만 득실대는 언더써클로 나를 밀어 넣었다. 후배들을 따라 시위 현장에도 나가고 각종 집회에도 참가했다. 동기 친구들과 자취방을 얻어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신학과 역사, 현실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 때 만난 책이 이현주 목사의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었다. 이현주목사는 문학적 소양이 깊은 목회자답게 예수시대의 팔레스타인과 민중들의 삶, 예수가 가르친 말씀의 의미를 유려하면서도 정확하게 보여줬다. 그 책을 통해 성경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으며 성경 말씀의 참된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그 뒤로 서인석 신부의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문익환 목사님의 ‘히브리민중사’를 읽었다. 칼 바르트, 위르겐 몰트만, 리처드 니버, 디트리히 본회퍼의 책도 접했다. 새로운 신학을 접하면서 신학과 신앙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신앙에 눈을 떴다.
책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김형석 교수가 쓴 ‘예수’라는 책을 구입했다. 숭실대 안병욱 교수와 함께 수필가로 이름을 날렸던 분이 인식하는 ‘예수’가 궁금해서 가방에 담았다. 한동안 거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서너 달 전 꺼내들었다. 코로나로 세상이 답답하고 고난주일도 가까워오는데 뭔가 신앙적으로 다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흥미로워서 책 받침대에 올려놓고 2/3쯤 읽었다. 아마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며 나귀를 타고 행진했던 장면까지였는데 그 뒤로는 바쁜 일정에 밀려 한쪽 구석에 방치했다.
오늘 아침 그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평소 모든 책을 끝까지 읽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이 책만큼은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씨는 청명하고 공기가 맑아서인지 머리도 맑아 빠른 속도로 일독(一讀) 할 수 있었다. 김형석의 책은 의외로 깊었다. 철학자이며 수필가답게 글도 유려했다. 쉽게 쓰면서도 할 말 다 하는 글쟁이를 높게 평가하는데 김형석의 글이 그러했다.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책을 읽으며 이해한 예수의 삶을 소개한다.
“예수는 2천 년 전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젊은이다. 팔레스타인의 변방 갈릴레아 출신이었으며 목수의 아들이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들처럼 전문적 신학교육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당시의 풍습처럼 아버지의 직업에 따라 목수 일을 했을 것이며 때로는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여가를 즐겼을 것이다. 그랬던 인물이 나이 서른에 고향과 부모를 떠나 사막에서 40일 간 단련을 하더니 갑자기 예언자를 자처하며 세상을 주유하기 시작했다. 당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았던 세례자 요한조차 예수를 높게 평가하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예수는 성경학자들인 바리사이파들을 배제하고 갈릴리의 어부, 세리, 열심당원 등을 제자로 불러들였다. 고향에 가서는 회당에 들어가 설교를 했는데 그 내용이 힘이 있고 권위가 있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보잘 것 없었던 예수의 기이한 행동은 제사장이나 종교적 지도층, 종교학자들을 놀라게 했지만 민중들은 열광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민중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덜어주고 기적을 통해 병마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정신병자에게 붙은 귀신을 좆아 하나님나라를 보여줬다. 문둥병자, 가난한 과부, 창녀, 세리들의 손을 잡아 친구로 삼고 그들의 죄가 그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세상 때문임을 설파했다. 그러면서 천국은 권력자나 종교지도자, 신학자들의 것이 아니라 무식하고 몰라서, 가난해서 죄를 지울 수밖에 없었던 무지렁이들의 것임을 천명했다.
민중들은 예수에게서 무한한 희망을 가졌지만 전통의 유대교 안에서 특권을 누렸던 종교지도자나 율법학자들은 분노했다. 종교권력을 위협하는 예수는 ‘혹세무민(질서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미혹하게 하는 사람)’하는 이단이라고 판단했다. 다음의 수순은 오늘 읽은 내용이다. 예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군중들 사이를 나귀를 타고 행진했다. 종교특권층과 손잡고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의 좌판을 뒤엎으며 지배층에게 도발했다. 결국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바람대로 유월절 희생양이 되어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됐다. 어떻게든 종교재판만큼은 모면하려던 빌라도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도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먼발치에서 예수의 고난을 지켜봤던 베드로도 예언처럼 닭이 세 번 울기 전 예수를 부인했다. 그렇게 예수는 유대교 종교지배층의 의도대로 철저히 실패했다. 해골의 언덕에서 쓸쓸이 죽어간 그의 시체를 수습한 것도 몇몇 여성들이었다.”
세상은 예수가 정치적 혁명가가 되기를 바랐다. 로마의 압제에서 민족을 해방시키고 민중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수의 꿈은 일시적 행복,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영생’이었다. 빵과 포도주는 일시적 자유와 배고픔에서 해방시키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신앙,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가치관으로 사는 삶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기독교가 민족과 국경을 넘어 세계적 종교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제국과의 정치적 결탁’을 운운하지만 기실 예수의 말씀이 세계인의 생각과 삶을 본질적으로 거듭나게 하는 혁명성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처럼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를 믿는다. 기독교의 혁명성을 믿고 지지한다. 예수시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처럼 종교적 아집, 재물과 권력에 사로잡힌 한국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 예수의 삶’이 주는 희망을 믿는다.(2021.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