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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김형진
“철컹, 털컹, 철컹, 텅터덩.”
리드미컬한 지하철 소리에 맞춰 사람들의 몸이 동일하게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지옥철 안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사람들 사이로 나 역시 내 몸 하나 구겨 넣으며 간신히 출근길에 동참하는 중이었다.
‘어? 이건 무슨 참신한 헛소리지?’
출근길의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 검색한 포털사이트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나의 눈길을 이끌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올라온 기사는 동물원에서 사자우리에 뛰어든 남자를 조명하고 있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 밑으로 이어지는 기사 내용은 한 남성이 사자우리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해 겁을 먹은 사자의 모습에 사육사들과 구조대원들은 사자의 돌발행동을 염려하여 격리조치를 취하다가 결국 사살하는 모습으로 뉴스는 사건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정신 나간 놈 한 놈 때문에 애먼 사자만 불쌍하게 되었네.’
끝으로 사진을 보여주며 경찰들이 우리에 뛰어든 남성을 구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사자는 총에 맞아 쓰러진 모습을 사진 한 구석에 조그맣게 실린 것으로 확인해주었다. 이어서 남성의 짤막한 인터뷰로 기자와 나눈 대화가 실려 있었다.
“왜 사자우리에 뛰어들었습니까?”
기자의 보편적인 질문에 남성의 대답은 보편적이지 못했다.
“항상 궁금했습니다. 동물원의 사자는 정말로 사람에게 길들여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우리에 갇혀있는 것 인지를요.”
기사는 인터뷰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고, 나는 왜인지 모를 답답함에 뉴스를 서둘러 지우고 멍하니 지하철이 역에 도달하기를 평소와 같이 기다렸다.
“김 대리, 일 자꾸 이렇게 할 거야? 자꾸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다음 인사고과에 또 후배들한테 추월당할 거야!”
퇴근시간이 다가옴에 마치 알람을 맞춰 놓은 듯 팀장이 내 자리로 와 언제나처럼 똑같은 잔소리를 반복했다.
“예, 기획했던 프로젝트 잠시 후에 팀장님 책상 위에 올려놓겠습니다.”
팀장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평소처럼 대꾸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별 의미 없이 다시 작업을 이어가며 이따금 시계를 확인했고 퇴근시간을 30분 넘긴 시간에 딱 맞춰 기획안을 마무리하고 퇴근을 준비했다.
“기획안 이곳에 올려두겠습니다.”
마치 늦어서 송구스럽다는 듯 나는 조심스럽게 기획안을 책상 위에 올려다 두었다. 이어서 5분이나 지났을까 팀장이 기획안을 대충 살펴보는척하고 책상을 정리하며 팀원들에게 말했다.
“오늘 회식자리엔 모두 참석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작성했던 기획안을 살펴보고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것이니 빠지는 인원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레퍼토리에 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참석의지를 팀장에게 보냈다. 팀장은 당연하다는 듯 팀원들을 살펴보고는 마지막으로 찌푸린 얼굴로 나를 향해 말하였다.
“김 대리가 기획안이 제일 늦었는데… 회식엔 당연히 참석하겠죠?”
팀장의 찌푸린 얼굴엔 네가 빠지면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뉘앙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병원에 예약해놓은 것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팀장은 나의 대답에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노발대발하여 네가 그러니 발전이 없고 진급도 안 되는 것이라고 소리쳤다. 팀원들은 팀장 주변에서 말리는 모습을 보이며 내게 눈짓했고 나는 팀장의 기분을 맞춰주며 대충 대답하였다. 팀장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팀원들도 서둘러 따라 나서며 내게 눈총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행동을 하였든지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회식자리라고 해봤자 팀장에게 아부를 잘하는 사람의 기획안이 최고로 나올 것이며 5분 남짓 훑어본 나의 기획안은 어느 노래방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
‘결과가 뻔하니… 답이 없는 싸움에 참여할 만큼 내가 여유롭지가 못합니다. 어차피 술 한 잔에 바뀔 기분이니 용서들 하시길.’
팀장의 뒤를 따르던 팀원들의 눈초리가 걸렸던 탓인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며 회사를 나섰다.
술집에 노래방으로 정신없는 골목길을 뒤로하고 평소에 이용하는 대로가 아닌 집과 통하는 지름길로 들어섰다. 어느새 어둑해진 골목길은 깜박이는 가로등으로 귀가 길을 재촉하게 만들었고 나는 가방을 고쳐 메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순간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골목길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소리에 지나치지 못한 나는 비명소리가 들리는 골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엔 20대의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남성에게 제압당하여 성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뉴스 기사로만 접하던 사고 현장을 직접 접함에 당황했지만 우선 112에 신고한 후 인기척을 내며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범인은 화들짝 놀라며 여성과 거리를 벌렸고 나는 갑작스레 생긴 용기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자리하고 남자와 대치하였다. 여성은 흐느끼며 벽에 바짝 붙어 몸을 추스르고 있었고 남자는 어느새 진정했는지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며 경찰에 신고하셨냐고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범인의 태연하고 또 정중한 말투에 오히려 내가 당황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망쳐도 소용없습니다. 신고한 지 이미 시간이 꽤 흘렀으니 골목이 통제되고 있을 겁니다!”
떨리는 내 목소리에 범인은 조그맣게 웃음 짓고는 다시 정중하게 말하였다.
“그렇군요. 그럼 도망쳐도 소용없으니 이 자리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당당한 범인의 말에 나는 오히려 당황하며 속으로 어서 경찰이 당도하기만 기도할 뿐이었다. 짧지만 긴 시간이 흐른 후 경찰이 당도했다. 그제야 긴장이 끈이 풀린 나는 경찰의 부탁 아래 경찰서까지 같이 동행하였고 그렇게 나와 피해여성, 범인 셋은 경찰서까지 함께하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 현장은 빠른 신고와 사후처리가 정확하기 힘든데 선생님 덕분에 큰일 없이 사건이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경찰의 감사 인사로 조금은 뿌듯한 기분에 별일 아니었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가려 경찰서를 떠났다.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내 뒤로 조서를 작성하던 피해여성이 경찰서를 박차고 나와 나에게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보답해드릴게요.”
피해자로써 상황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울 법 한데도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여성이 대단해보였다. 나는 그런 여성이 맘에 들어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쾌활하게 마주 인사하였다.
“네, 조서 잘 작성하시구요. 몸 조심히 귀가하시길 바랄게요.”
경찰서를 나와 다시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은 깜박이던 가로등이 어느새 꺼져 어두워져 있었다.
“오랜만에 뿌듯한 일이네, 이러다 용감한 시민 상 받는 거 아냐?”
두려웠던 어두운 골목길은 어느새 관심 밖의 일이었고 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집에 도착했다.
“현진아 서울 생활은 어떻게 할 만하니?”
집에 들어옴과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가 신호를 발하며 빛나고 있었다. 몇 마디의 안부가 오가고 별일 없이 잘 지낸다는 말로 마무리된 전화는 빛을 잃고 조용히 잠들었다.
“내일 마쳐야 할 일이….”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까지 마쳐야 할 일을 체크하러 책상에 앉았다.
“에이… 어차피 매번 바뀌는 오더인데 내일 생각하자.”
책상에 앉자마자 쓸모없는 일이라 말하는 머릿속 생각에 다시 침대로 향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여보세요, 강남서 정중도 형사입니다. 혹시 김현진씨 되십니까?”
“네 저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사건으로 조사차 강남서로 다시 방문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방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침부터 잠을 깨우며 온 전화에 나는 퉁명스럽게 받으며 대답을 이어갔다.
“음, 어제 조사가 끝난 것이 아니었나요?”
이어지는 형사의 말은 피의자 쪽에서 변호사를 선임하여 정확한 사정을 살피길 원한다는 뜻에 상황 조사차 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아, 그렇군요. 제가 회사일로 시간이 오후에나 가능할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형사는 괜찮다며 어차피 참고인 신분으로 자리에 참석하시는 것이니 부담가지지 말라고 말을 해주었다.
“예, 그럼 일 마치고 바로 강남서에 가겠습니다.”
경찰의 감사 인사로 전화는 끝을 맺었고 나는 전화로 늦은 출근준비에 서둘러 어제 벗어놓았던 옷을 그대로 챙겨 입으며 출근길에 올랐다.
“어? 기사가 이렇게도 올라오나?”
평소와 같이 무료함을 달래려 열었던 포털사이트는 어제 내가 보았던 기사의 후속편이 올라와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제목의 기사에 글을 열어보니 사뭇 달라진 기사 내용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정기사임을 밝히는 내용을 시작으로 어제의 남자의 행동은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었으며 실수로 떨어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처음의 cctv는 화면의 사각지대로 인해 오보가 있었다는 말로 정정되었고, 실수로 떨어진 남자는 겁에 질려 우리의 한 구석에 잠잠히 있었으나 우리로 떨어진 사람을 본 사자들이 흥분하여 소란을 피웠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자들의 소동에 주위 사람들이 급히 신고를 하였고 먼저 도착한 사육사들이 다급히 격리조치를 취하던 중 부상을 입게 되자 뒤이어 도착한 경찰들이 사격을 가해 사육사들에게 공격을 가한 사자를 사살했다는 소식이었다.
“뭐야…. 남자가 우리에 들어간 것과 사자가 죽은 것을 제외하곤 다 바뀌었네.”
바뀐 기사 내용은 처음과 너무도 달라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나는 떨떠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래서야…, 기사를 믿을 수가 있나?”
혼잣말을 뱉고 지하철을 내리는 와중에 평소와 같은 발걸음, 목적지가 정해진 사람들의 매일 똑같은 행진 속에 나는 어느새 기사가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여타의 사람들과 똑같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제 나눴던 얘기지만 이번 프로젝트 기획안은 노 대리의 기획안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진행 방향을 기획안에 맞춰서 따라갈 것이니 노 대리는 기획안 파일 공유 걸어주시고 팀원들은 확인 후 각자 맡게 되는 파트 보고 바랍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노 대리의 기획안이 선정되었고 부서 사람들은 공유된 파일을 바쁘게 체크해 나갔다. 팀장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눈짓했고 나는 예상했던 결과에 그저 묵묵히 파일을 확인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첫 날이니 기분 좋게 오늘은 일찍 마치십시다.”
과장의 여유로운 한 마디에 팀원들은 모두 환호하며 일어섰고 퇴근길을 재촉했다.
‘어디보자, 강남서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지?’
대중교통을 확인하던 순간에 팀장이 옆으로 와 한마디를 건냈다.
“자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겠지만 어떡하겠나, 노 대리의 기획안이 더 훌륭한 것을…, 낙심하지 말고 오늘은 일찍 마쳤으니 기분전환이라도 하게나.”
웬일인지 살갑게 구는 팀장의 말에 어색했지만 이런 모습도 있으려니 생각하고 적당히 대답해주곤 회사를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지?’
강남서에 도착한 후 생각보다 큰 건물에 갈피를 못 잡고 당황하였다. 머뭇거리는 순간에 전화가 울리더니 핸드폰 화면에 아침에 전화하였던 형사의 전화번호가 나타났다.
‘강력계2반이라…,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되겠지.’
형사의 확인전화로 위치를 알게 되어 입장한 경찰서는 약간의 소란스러움과 난잡함이 함께하고 있었다.
“저기, 정중도 형사님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내 옆을 지나가던 형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할 일이 많은 듯 바쁘게 알려주곤 자리를 떠났다.
‘세번째 책상이…, 여긴가?’
“정중도 형사님 맞으십니까?”
나의 물음에 서류를 보던 형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고 이내 표정을 정리하며 대답을 해주었다.
“예, 제가 정중도입니다. 김현진씨 되십니까?”
“예, 상황 조사차 제 증언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지금 찾아왔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의 질문에 형사는 우선 피의자와 그의 변호사 그리고 내가 대면을 통한 사건진술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말을 마친 형사는 나를 데리고 피의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대면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 날 저녁 보았던 범인과 새로 보는 남자를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최재상씨의 변호를 맡은 백호산이라고 합니다.”
새로 보는 남자가 자기소개를 하며 나에게 말을 건내었다. 생각보다 밝은 변호사의 말투는 피의자와 변호사 그리고 피의자를 만든 내가 대면하는 자리라 딱딱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무엇이었다.
“예, 안녕하세요. 저는 김현진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간단한 인사 후 형사의 인도 아래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현진씨는 그날 저녁 어떤 이유로 그 골목길에 들어갔습니까?”
변호사의 첫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저는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퇴근길에 평소 다니는 대로보다 일찍 가고 싶어 집과 통하는 지름길로 간 것입니다.”
“흠…, 하필 범행이 벌어진 그 날 말이군요?”
변호사의 답변이 이상하다 느꼈지만 딱히 어긋난 말은 없어 이내 긍정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현진씨는 범행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까?”
“예, 비명소리가 들렸고 그냥 지나치지 못해 골목길을 확인하니 저분이 여성을 제압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으로 범행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까?”
“네, 여성의 옷이 상당부분 찢겨져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질문과 답변 중에 변호사는 무엇인가 잡아챈 듯 내 말을 끊고 질문을 하였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장면을 목격하였다면 상당히 급박했을 것 같습니다. 어젯밤 조서엔 범행현장을 목격 후 112에 신고하고 범행현장에 들어섰다,라고 하였는데 맞습니까?”
분명 사실들만을 나열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호사의 억양은 점점 거세어져갔고 내가 당황스러움을 느껴가고 있는 가운데, 대화를 지켜보던 형사는 점점 자세를 고쳐 앉고 우리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다.
“예, 당황스럽기도 하고 제가 혼자 현장에 들어가 무엇인가를 하기엔 두려워 신고부터 하였습니다.”
변호사는 내 대답을 듣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형사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고가 들어온 시점 전후로 범행현장의 cctv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확인해본 결과 범행현장 주변 골목엔 cctv가 설치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범행 반경 100m 전후방에 골목길 출입구를 비추는 cctv 2대와 골목길에 위치한 편의점 외곽 cctv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형사의 이야기를 듣고 변호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엇인가 의아하다는 말투로 형사에게 되물었다.
“형사님, 그렇다면 현진씨의 진술과 피해 여성분의 진술 아니면 재상씨의 범행을 증거할 만한 자료가 없지 않습니까?”
변호사의 말은 형사와 나를 놀라게 하였다.
“하지만 피해 여성과 현진씨의 진술이 상당부분 일치하고 재상씨의 무죄입증도 증명할 방법이 없어 피의자로 굳혀진 입장입니다.”
“허나 아직 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지 않았으므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재상씨는 피의자로 의심될 뿐이지 피의자로 확정된 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와 형사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져지고 나는 형사와 변호사의 말로 가득한 방안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양으로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저희는 저희의 권리로 불구속 수사를 요청합니다. 증거 자료를 저희도 수집할 수 있도록 재상씨를 풀어주길 요청합니다.”
변호사의 말에 형사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변호사는 조금 전과는 다른 딱딱한 인사와 함께 나를 보고 한마디 하였다.
“저는 그 상황에 있지 못하여 아직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현진씨가 한 말이 거짓일 경우엔 어떤 벌을 받게 될지는 알 것 같군요.”
변호사가 남기고 간 말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형사는 나에게 다가와 아마 변호사의 요청으로 재수사가 이루어질 것 같다고 하였고, 아마 나에게도 수사가 들어가게 될지 모른다고 하였다. 마지막 변호사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지만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런 나를 바라보는 형사의 시선이 대면실로 들어오기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에 더욱 불안해지는 나였다.
“아니…, 어떻게 말 한마디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니 더욱 억울하였다. 좋은 일 하고 욕먹는 느낌에 이런 불합리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지 속으로 반문을 거듭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생각해보니 이대로 있으면 왠지 내가 범인이 될 것만 같았고, 불안한 생각의 흐름은 결국 나를 범행현장으로 다시 데려다 놓게 하였다.
“cctv가 형사님 말대로 입구 출구에 한 대씩 있고….”
현장을 둘러보며 다시 확인하던 차에 편의점을 발견하였다. 이곳도 형사의 말대로 외곽 cctv가 한 대 달려있었고 그 각도가 범행이 이뤄지던 현장을 아슬아슬하게 걸쳐 보이고 있었다. 현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해볼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다 둘러본 후 나는 무기력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보니 핸드폰엔 문자로 팀장의 잔소리가 한가득 쌓여있었고 나는 내가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답답한 마음으로 병가를 신청한다는 문자 하나만을 남겨놓고 핸드폰을 바로 꺼버렸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집전화로 전화가 왔고 나는 전화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 강남서로 달려갔다.
“형사님! 새로운 증거가 나왔다구요?”
두 번째로 찾아온 덕분인지 금방 형사님을 찾아간 나는 형사님에게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어떻게 찾은 증거지요? 신빙성은 충분한가요? 피의자하고 변호사는 어디에 있나요?”
형사는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말하고는 증거물을 보여주었다. 증거물은 사진 2장과 영상 2개였다. 각각 내가 골목길에 들어가는 사진 한 장과 편의점에서 차를 정차해놓고 골목길로 들어오는 범인, 그리고 골목길에 들어가는 범인을 찍는 영상, 마지막으로 내가 골목길에서 나와 서성거리다 골목길에 다시 들어가는 영상이었다. 사진은 cctv에서 나온 영상을 편집해 캡쳐해 놓은 것이고 영상은 편의점 cctv영상 하나와 범인의 차에서 찍힌 블랙박스 영상 하나였다. 편의점 영상은 범인이 골목길로 들어오는 것을 찍고 있었는데 흐리게 나왔고, 범인이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게 사실 중요한 건데 말입니다.”
형사는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을 보여주며 말했다.
“영상보존도 잘 되어있고 범행당시 현진씨의 진술과 일치하는 현진씨의 모습이 보이는 영상이라 좋은 증거가 될 수도 있는데….”
불안하게 말을 줄이는 형사의 모습에 나는 채근하며 물었다.
“그런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이것이 변호사측에서도 말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영상이라서 말입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새로운 증거나 피해 여성의 진술, 주변인 조사와 알리바이가 중요해졌습니다. 현진씨는 다음 조사 때 증거로 제출할 것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봐 주시고 와주십시오. 다음 대면은 피해 여성도 함께 참석하여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게 형사의 말이 끝났고 나는 멍한 느낌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서를 나왔다.
“여보세요, 현진이니? 핸드폰으로 전화했는데 받질 않아서 걱정했구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오랜만에 통화가 연결된 어머니는 안부를 계속 살피며 지난밤 안 좋은 꿈을 꿔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며 계속 말씀하셨고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계속 별일 없다며 이야기하곤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허무한 마음에 멍하니 tv를 켜고 바라보는데 각종 범죄에 관련된 뉴스가 나와 마음을 더 어지럽혔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용기를 내서 구한 것뿐인데….’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주변의 시선과 인식은 점점 나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처음에 호의적이었던 경찰과 조사를 맡은 형사도 점점 시선이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외딴 곳에 홀로 떨어진 짐승처럼 웅크리게만 되었다.
‘나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고….’
끊임없는 불안함과 떨림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잠을 자는 듯 마는 듯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현관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좁은 현관문 유리알 사이로 누가 찾아온 것인지 확인했다.
“김현진씨 안 계십니까?”
나를 담당하던 형사님이 밖에 와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나는 더욱 당황스러운 기분에 문을 열지 못하고 조용하게 말을 건냈다.
“형사님 아니세요.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어요?”
조심스럽게 되묻는 나에게 형사님은 그저 허허롭게 말을 건냈다.
“오늘 출석하셔야 하는데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려고 온 것입니다. 제가 차를 몰고 왔으니 제 차 타고 가시죠.”
형사의 태평스러운 모습은 묘하게 나를 안심시켰고 나는 어제의 불안감은 꿈이었던 것처럼 편안하게 형사의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또 뵙는군요.”
대면실에 들어가자 범인과 변호사가 나에게 인사를 건냈다. 나는 그들의 편안한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위축되어 소심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자리에 착석해주세요. 이제 지금부터의 대화는 녹음되고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경찰은 말을 마치고 우리를 인도한 형사 옆에 가서 앉아 우리를 지켜보았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변호사의 가벼운 말을 시작으로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그저, 평소와 같이 지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나는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범인을 노려보았다. 범인은 묘하게 거슬리는 웃음을 지으며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현진씨, 그럼 그때의 상황을 시간 순으로 다시 재배열해보겠습니다.”
변호사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제스쳐를 취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사건 발생 시각은 정확히 모르니 현장에 있었던 피해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변호사는 이번엔 형사를 바라보며 말을 하였고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으로 동의를 표했다.
“하은씨라고 하셨죠? 하은씨는 그 범행 현장에 어떻게 가게 되셨습니까?”
“저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편의점 뒤편으로 좀 떨어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평소에도 잘 다니는 골목길이라 그저 평소대로 가던 것뿐이에요.”
피해 여성은 범인은 물론 나의 시선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하였다.
“예, 그렇군요. 힘드시겠지만 사건을 추정하는데 하은씨의 도움이 절실하니 조금만 더 용기를 내주세요.”
변호사는 마치 피해여성을 이해하는 듯 살갑게 말하였고 피해여성은 모든 남성들로부터 일정거리 떨어진 채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용감하고 당당하던 사람이….’
사건 당일 경찰서를 박차고 나오며 감사인사를 하던 여성은 보이지 않았고, 상처 받아 떨고 있는 가녀린 여성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르바이트는 언제 끝나셨나요?”
“항상 오후 9시에 끝나도록 되어있어요, 그날은 뒤에 인수인계를 받을 사람이 조금 늦어서 10분정도 늦게 매장을 나왔던 것 같아요.”
여성은 변호사의 따뜻한 말에 차츰 긴장을 풀며 대답했고 변호사도 장단을 맞춰주듯 대화의 속도를 차츰 높여나갔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카페와 편의점 사이의 거리 그리고 편의점에서 범행 현장까지의 거리를 따지면 하은씨의 걸음걸이로 몇 분 정도가 걸릴까요?”
“얼추 10분 정도가 걸릴 것 같아요.”
그렇게 변호사와 여성과의 대화가 이어졌고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렇다면 얼추 오후 9시 20분경을 범행이 일어난 시간으로 보아도 무방하겠군요.”
여성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고 경찰과 형사만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변호사는 말을 짧게 끊고 나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쏟아냈다.
“저희가 확보한 블랙박스엔 현진씨가 골목을 방황한 것이 9시 18분으로 나와서 말입니다. 거기서 의문점이 생기는 군요.”
여성과 범인을 제외한 자리에 있던 모두가 변호사에게 집중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은씨가 골목길에 진입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이 20분경입니다. 하지만 현진씨가 사건현장을 목도하였다며 기웃거린 시간이 18분으로 나오니 시간에 오차가 생기고 있네요.”
나는 변호사의 말에 당황하며 대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은씨의 시간이 정확하게 20분이라 확정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부실한 증거를 기반으로 저를 너무 몰아세우시는 것 아니십니까!”
당황하며 시작한 말은 고함으로 끝이 났고, 변호사는 그런 나를 보고 비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정확한 시간을 원하시는군요. 그럼 이것은 어떻습니까?”
변호사는 말을 하며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형사에게 봉투를 건냈다. 형사는 봉투를 열어보았고 내용물을 확인하며 놀라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며 변호사에게 되물었다.
“범행 현장인 골목길 출구 방향 차량 블랙박스에서 얻은 것입니다. 사실 그 블랙박스는 재상씨의 친구분의 차량에 있던 것으로 재상씨는 그날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이었습니다.”
형사는 변호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고 나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재상씨는 친구분들과 술을 마시던 중 잠시 밖으로 나와 숙취 해소 음료를 사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블랙박스에 고스란히 찍혀 당시 편의점으로 향하던 재상씨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현진씨가 주장한 정확한 시간을 대조해보니 현진씨가 골목을 방황하던 시간인 18분으로 똑같이 나왔더군요.”
머리가 멍했다. 지우개로 지운 것 마냥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렸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어버버 입도 잘 벌어지지 않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피해 여성이 저 사람에게 성폭행 당하고 있는 것을 제가 똑똑히 보았는데요!”
“그것은 현진씨만의 생각 아닙니까? 하은씨 그때 범인이 재상씨가 확실합니까? 범인의 용모를 확인했나요?”
모두의 시선은 여성에게로 몰렸고, 피해여성은 몸을 떨며 대답하였다.
“사실, 골목이 어두워서 남성 두 분이 계셨다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어요.”
망치가 뒷통수를 때렸다. 어이가 없었다. 경찰서를 박차고 나와 나에게 감사인사를 하던 여자가 맞나 의심스러웠다.
“재상씨는 그저 숙취해소음료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 중에 수상한 남성이 골목길을 살피며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마음에 따라 들어갔던 것입니다.”
여성의 말 뒤로 변호사는 정신을 못 차리며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두고 말을 이어나갔다.
“범인은 오히려 골목길을 살피며 하은씨를 미행한 현진씨입니다.”
그렇게 말을 이어가며 변호사는 형사를 보고 단언했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범행직전 112에 미리 신고를 하고 범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대화를 통해 확인한 대로 그는 시간을 체크하며 범행을 계획하였고 동네에 거주하며 동선도 파악하고 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여러 증거를 기준으로 판단, 이번 범행은 계획적인 범행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엇인가 서둘러 말이 지나갔고 나는 형사와 범인 그리고 피해여성이 모두 있는 가운데 범인이 되어버렸다. 변호사의 말은 무언가 얼기설기 대충 짜여 있었고 부실해보였으나, 대면실 안에 있던 모두는 나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형사는 나에게 다가와 몇 가지 말을 하였고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따라갈 뿐이었다. 형사가 인도한 곳은 창살로 둘러진 곳이었다. 아무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중에 주변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흘끗흘끗 쳐다보니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 같았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 주변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험한 수준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골목마다 깜박거리는 가로등과 cctv의 사각지대는 무고한 자를 범인으로 너무도 쉽게 몰고 갔습니다.”
경찰서 앞에 진을 친 기자들과 그 앞에서 인터뷰하는 범인은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고 그 앞에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와 경찰들은 자랑스럽다는 듯 범인 옆에서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지역 치안상황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저희 회사이름으로 기부를 하겠습니다. 골목길마다 cctv설치를 하는 일에 사용될 것으로 앞으로 범죄발생빈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플래쉬 세례가 터졌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을 뒤로하며 경찰서 옆문으로 나와 수송차에 오르려는 순간 한 기자의 외침에 기자들이 나에게 몰려들었다.
“피해여성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사회에 불만이 많으셨나요?”
“재상군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이유가 있습니까?”
질문이 쏟아지는 것을 피해 수송차에 올랐다.
“허튼짓 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뒤로 경찰이 무장해 있으니 크게 다치기 싫거든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좋아.”
“철컹, 텅터덩.”
좌석 옆 쇠로 된 봉에 수갑을 채운 경찰은 경고의 말을 남기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수송차에 비치된 작은 티비를 보며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사자우리로 실족해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하였던 최 모군은 동물원에게 심려를 끼친 점이 죄송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거액의 돈을 기부하여 시민들과 동물원 관계자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뉴스엔 몇 일전 보았던 뉴스기사의 뒷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최 군의 기부에 감사를 표하며 저희 동물원은 기부금 전액을 동물원 내부 울타리 강화와 동물들의 복지에 힘쓸 것을 다짐합니다.”
뉴스는 아름답게 끝나며 사람들의 긍정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어진 뉴스엔 조금 전 범인의 인터뷰가 나오며 마무리가 되었다. 수송차는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고 나는 가려진 창문 사이로 깜박이는 햇살을 받으며 피곤했던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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