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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동하는 예수> / 김근수 지음 / 메디치미디어 펴냄 / 796면 / 2만 8000원 |
<행동하는 예수>는 해방신학에 대한 그리스도교 대중의 오해와 불신을 걷어 내는 데 도움을 준다. 마르크시즘과 사회과학적 분석 이론에 크게 의존했던 80년대 해방신학은 전통적 서구 신학의 관점에 길들여진 이들로부터 비(非)신학적 사회 이론으로 격하되거나 신학의 주변부에 머무는 좌파 운동으로 잘못 인식되곤 했다. 이러한 대중의 오해와 불신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 성서학자인 이 책의 저자는 해방신학의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성격을 줄곧 강조하면서 해방신학이야말로 신학적 사유와 성서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장의' 신학임을 힘 있게 강조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본디 라틴 아메리카의 극악한 정치·경제적 현실 속에서 고통당하는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극복하고 위로하기 위한 사목적인 요청에서 출현한 '목회신학'이다. 저자가 익숙한 세속 이론에 기대기보다는 복음서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행동과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출현한 해방신학 본연의 목회적 문제의식을 21세기 한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현장 신학'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려는 저자의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2.
가난한 이들의 시각에서 당대의 정치적·종교적 현실을 재해석한 예수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이라면, 이 신앙 행위의 실천에 있어 교회 안과 밖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저자가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 만나는 신학적 장소 또는 삶의 자리(10쪽)"가 교회라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장소인 현장이야말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교회인 신자/성도들은 "교회 안에 머무르기보다 거리, 광장, 시장, 시위 장소 등 고뇌와 갈등이 어우러진 곳으로 가라(10쪽)"고 말한다.
문제는 오늘날 이른바 교회의 지도자들(신학자·사제·목사)이 가난하지 않다는 데 있다. 현세에서 지나치게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던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뿐더러 이를 지나치게 내면적인 것으로 축소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라고 권고하는 책(126쪽)"인 성서가 고작 "힐링을 꾀하는 책"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가 "심리학에 취한 종교인들은 신학의 본령인 성서로, 역사의 현장인 가난한 사람에게 어서 복귀하시라(99쪽)"고 외치는 배경이다.
이렇듯 <행동하는 예수>는 예수가 사랑했던 가난한 이들의 시각에서 마태오복음을 '새롭게' 읽음으로써 불의에 저항한 예수를 우리 시대의 현장으로 다시금 호명한다. 철학과 신약성서학, 그리고 해방신학을 공부하며 그리스도교 역사와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쌓아 온 저자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애(偏愛)적' 시각을 통해 독자들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익숙한 질문이 뿌리내릴 새로운 동시대의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
가난한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그들은 어느 시대에나 천대를 받았다. 예수의 시대에도 그랬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5:20)"이라고 말했다. 예수의 말로 인해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종 부도덕한 집단으로 오해되곤 했지만, 저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오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흔한 "언어폭력의 대명사(623쪽)"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 느끼는 열등감(627쪽)"의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오히려 신실한 이들의 표상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신실한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판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이 가난한 사람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율법 의례에 충실할 수 없었던 이들을 무시했고, 종교 생활에 충실한 자신이 가난한 이들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했다. 충실한 종교 생활을 가능하게 만드는 자신들의 물적 조건과 계급적 특권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한 채 종교 의례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두고 예수는 날선 비판을 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는 아예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기 위해 부자들과 결별(8쪽)"했다고 말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의 이 같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요 신학의 주체(9쪽)"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었을 뿐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결정짓는 그리스도교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이들을 편들기 위해 부자들과 결별"한 예수의 목소리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점차 삭제되어 갔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 놓는다. 그는 예수의 사랑의 정신을 구현하겠다고 나선 종교인이 어느덧 우리 사회의 특권층이 되어 호사를 누리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뿐만 아니라 "부자와 권력자의 하수인" 노릇을 한 신학자들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교회로부터 "그리스도교가 빗나가지 않도록 감시하고 지적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신학자들은 "부자와 권력자의 하수인"이나 "교회 지배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오직 성서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사람(392쪽)"이 되어야 한다는 것. "신학자가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순간 그의 몰락은 이미 시작된 것(392쪽)"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어떤 서늘함마저 느껴진다.
4.
한 가지, 이 책 곳곳에 나타나는 바울에 대한 저자의 다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 마태오와 '고백하는 믿음'을 강조한 바울(520쪽)"의 대비를 통해 예수의 역사적 실천을 강조하는 한편 바울을 ‘고백하는 믿음’으로 범주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남는다. 신약성서학자인 저자가 바울에 관한 이른바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에 입각한 논의들을 비판적인 측면에서라도 소개해 주었더라면 예수의 역사성 이해를 위한 더욱 풍성한 논의가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바울에 대한 평가는 마태오복음 해설서인 이 책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다. 또한 "철학보다는 역사, 정신보다는 물질(98쪽)"에 대한 강조를 통해 그리스도교가 잃어버린 예수의 역사성과 물질성의 회복이 보다 시급한 과제임을 주장하는 저자의 일관된 입장에서 볼 때 바울에 대한 소극적 평가는 타당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역사성을 바울과의 대비를 통해 드러내기보다는 공통점을 강조하는 방식이 될 수는 없는지, 의문이 남는다.
이와 관련하여 민중신학자 김진호의 연구를 참고할 만하다. 김진호는 최근 그의 저서 <리부팅 바울>에서 김창락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확장하여 바울을 '현장 신학자'로 그려 내고 있다. 본인은 김진호의 바울론과 <행동하는 예수> 저자의 예수 이해가 '현장'과 '실천'에 대한 강조에 있어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김진호의 주장처럼 행동하는 예수의 역사성은 현장 신학자인 '행동하는' 바울의 실천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이 점에서 바울은 예수의 역사성과 대비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정신의 역사적 계승과 실천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주목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현장은 '역사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노상(路上)'에서의 역사적 실천만큼이나 '책상'과 '밥상' 앞에서 지속되는 역사성의 일상적 구현에 더욱 힘써야 하지 않을까. 예수의 윤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형(原形)으로 고착되어 있는 한 예수 이후의 모든 윤리적 실천은 변형(變形)의 비애를 간직한 불완전한 윤리라는 오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5.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각종 지표들과 사회학적 용어들이 동시대 삶의 위험과 불안의 수위가 극한에 이르렀음을 말해 주고 있는 이때 우리에게 김근수 선생과 같은 신학자가 있다는 사실은 큰 행운이며 위안이다. 그리스도교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고통의 현장에 함께하며 권력자들에 대한 날선 비판을 하는 예언자적 신학자들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신학자들, 그리고 사제·목사들이 학교와 교단, 지역교회의 이른바 '목회적' 관계에 얽혀 좀처럼 못 하는 전방위적 비판을 통해 총체적 부실과 타락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교의 쇄신을 주장하는 김근수 선생의 예언자적 목소리에 더 많은 이들의 힘이 실리기를 바란다. 아울러 '행동하는 예수'의 걸음을 바짝 뒤쫓는 '현장 신학자'의 목소리가 오늘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해방의 복음이 되어, 위로와 용기를 가져다주는 일에 더 많은 이들이 우정의 연대로 화답하기를 기대한다.
홍정호 / 신반포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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