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평안남도중앙도민회(조성원 회장)와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장원호 회장)는 통일회관에서 ‘왈우 강우규 의사 99주기 추모식’을 거행했습니다.
강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로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일제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안중근의사(하얼빈), 윤봉길의사(상해) 모두 해외에서 거사를 했지만 강 의사 의거는 국내 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역에서 일어나 3.1운동 후 독립의지의 불을 다시 지피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강 의사 의거는 비록 사이토를 살해하지 못했지만 192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단 투쟁, 청산리 대첩 등 무장독립전쟁과 의열투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입니다.
이에 정부는 강 의사의 항일운동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1855년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면 제남리에서 출생한 강 의사는 한학과 한의학을 터득해 의술이 뛰어나 거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09년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만나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러시아와 북만주로 가 한인학교, 장로교회, 한인회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국내로 들어와 극한투쟁을 결의하고 자신이 행동대 선봉에 섰습니다.
강 의사의 한반도 통일과 평화공존을 모색하는 동양평화론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재판과정의 상고취지서와 공판기록에 나타난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색다른 주장입니다.
이날 추모식 전에 의거 100주년 ‘강우규 의거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가졌습니다.
토론자들은 강우규 의사가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에 비해 대중적으로 덜 조명된 것은 의거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북한자료 조사와 연구가 부족한 결과로 분석했습니다.
이날 평안남도민과 덕천군민들은 추모식후 따로 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을 찾아 강 의사를 참배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폭탄 투척일에 맞춰 지난 9월 2일 역시 통일회관에서 ‘의거 100주년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한편, 서울역 광장에 있는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은 2011년 9월 2일 기념사업회가 국가보훈처와 서울시 후원으로 세워졌습니다.
강 의사는 당시 65세라는 고령에도 독립운동을 펼쳐 통일운동과 애향사업을 하는 2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만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것이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형 직전 “단두대 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고 읊은 강 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 탄압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강 의사 의거는 非오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는 평가입니다. 늙고 평범하지만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강 의사 의거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위한 몸부림입니다. 그의 동양평화론도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강우규 의거는 고향 출신 독립운동가 조명을 넘어 향후 남북통일과 교류활동의 밑거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본격적으로 찾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