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臺 僖靖公 諱 權 相一 先生 移兆 告由祭 맟 神道碑 除幕式
청대 희정공 신도비↑
淸臺 僖靖公 諱 權 相一 先生 移兆 告由祭 밒 神道碑 告由祭 및 除幕式
안동권씨 10세 副正公 諱 通義선조의 18세손 호 淸臺 諡號 僖靖公 諱 權相一 선생 移兆 告由祭 및 神道碑 고유제 除幕式이 무자(2008)년 3월 16일 오전 11.00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서, 1759년(기묘 영조59년) 249년된 문경시 산양면 과상동에 모셔있는 묘소를 문경시 산양면 봉정리산 진좌 로 이조된 묘소에서 이조고유제를, 相禮 卞準(유림대표, 근암서원원장),初獻 김철훈, 亞獻 이준돈, 終獻 이세걸, 讀告由 정재천, 贊者 김주현, 判陳 이체욱 陳設 채홍찬씨 등등,올리고 하산하여, 七賢(❶ 㝢菴(우암) 洪彦忠 1473(성종4)~1508(중종3) ❷ 漢陰 李德馨(이덕형) 1561(명종16년)~1613(광해군5년) ❸ 沙潭(사담) 金弘敏(김홍민) 1540(중종35)~1594(선조27) ❹ 木齋 洪汝河 1621(광해군13)~1678(숙종4년) ❺ 活齋 李 榘(이구) 1613(광해군5)~1654(효종5) ❻ 息山 李萬敷(이만부) 1664(현종5)~1732(영조8년) ❼ 號(호) 淸臺(청대) 諡號(시호) 僖靖公(희정공) 諱(휘) 權相一(권상일) 1679(숙종5)~1759(영조35))이 모셔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148-1, 현 근암서원 입구에서 고영조씨의 사회로 식순에의해 문경시장 신현국, 시의회 의장 탁대학, 도의원 고우현,이시하, 근암서원 추진위원장인 문경문화원장 채대진, 그리고 상주대학 전총장 김기탁, 김종호 전 대학원장 권태을씨,등 각게인사와 경향각지의 유수문중 주종손 및 대표 기타 내빈을 포함한 북부지역 유림 그리고 문중 후손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新道碑 제막식 고유제에서는 都執禮 柳寧夏, 相禮 박기후, 初獻 박희택, 亞獻 김두순, 終獻 정 필(울산향교전교), 讀告由 이대열, 贊者 김주희 判陳 권우집 陳設 채홍찬 謁者 안 창현 贊引 남창희 奉香 조성필 奉爐 변종성 奉爵 박문희 專爵 김봉현 司尊 이강태씨등 告由祭爬錄(1명씩만기록)데로 성대히 열렸다.
한편 門派錄(1명씩만기록)은 都執禮 권응서, 相禮 권응규, 初獻 권준호,亞獻 권기승,終獻 권기남, 讀祝 권형달,執禮 권응남,謁者 권기정, 判陳 권영찬,권세창,陳設 권기헌,권응대,奉香 권오태,권오선,奉爐 권기용,奉爵 권기주등이였으며,
청대 선생 후손들이 주최한 이날 除幕式에서 移兆 고유문과 신도비 고유문은 9세손 권 세창씨가 謹識(근식)하고 제막식장에서 9세손 권세창씨기 고유문을 낭독하니 참석자들은 숙연하며 청대 권 상일 선조의 업적을 흠모하고 기리는 자리에 여러 후손들과 더불어 제막을 함께 하게돼 무한한 영광이라 했다
신도비의 글씨는 文田 權應奎씨가 썼으며,原碑文 行狀은 大山 李象靖이 元諡狀은 領議政 번암 蔡濟恭이 개시장은 洛坡 柳厚祚가 神道碑文은 海左 鄭範祖가 지은글이다.
청대선조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1710년(숙종36년)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출사해 1727년(영조3년)김제의 만경현령이돼 파당에의해 어수선하고 흉년이들어 어려운때 조세를 탕감하고 서당을 지어 학문을 가르키니 고을 안에 학문이 크게 진작되었다. 그로인해 고을이 평온하고 군사훈련과, 성을쌓고 군량도 미리 준비하고 하여, 이듬해 무신년(1728년) 영조대왕이 탕명책을 펴 인물을 고루 등용하였으나 당파의 심화로 불익을 당한 자들의 반란인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고을에서 그 공을 높이 기려 선정비 銅碑가 세워졌으며,그후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에와 弄淸臺(농청대)란 亭子를 지에 독서에 힘썼다.訴(소)를 올려 천거에의해 경연에 첨석, 군자감정, 1734년(영조10년) 울산부사에 임명돼 도호부사시(영조11년)울산 郡誌(학성지(인척,지형,군내의거리,산업,성별,년령별,동별,씨족별, 인구통계등 기록)을 편찬 군정에 도음을 주었다.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고,또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만 뜻을두고 나가지 아니하다가 그후 대사간시 영조께서 어필로 수서 16자(갈성찬수 공존천의(喝誠纂修 功存첨義 16자로 以代鐵券)를 下賜하셨다. 홍문관 부제학, 80세에 대사헌, 지 중추부사를 지냈으며,기로소에 입사하고,구강서원을 세웠다.81세에 세상을 마치니 왕이 不祧之典(부조지전)을 내리고 친히 諡旨를 내려 1788년(정조12년)僖靖이란 시호를 내리셨고, 학문은 퇴계 이황(李滉)을 좇았으며, 이황이 수정하기 전의 사칠설(四七說)을 조술하여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이물(二物)로 분리하고, 이(理)는 본연(本然)의 성(性)이 되고, 기(氣)는 기질(氣質)의 성(性)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저서에《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록,근사록집해(觀書錄,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문집》《日錄12권》기타 등이있다. 마즈막으로 신도비 추진위원장인 9세손 권세창, 주손 10세손 권준호는 "오늘 제막식이 있기까지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주신 유림 어르신 여러분과 안동권씨의 종중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고 인사말을 했다
戊子08.04.12. 7세손 남곡 권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