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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4,10-17
모세의 입 아론
이곳에서는 아론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야훼의 명령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철학적인 신학적인 정체성의 문제였다면, 이제부터는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모세 자신이 말을 잘못한다는 것입니다.
탈출 4,10-17
10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부분은 어떻게 번역할지 모르는 애매한 부분입니다. 신부님께서 번역하신다면 "야훼여 제발, 제발 야훼여. 부탁입니다."(δεομαι κυριε 데오마이 퀴리에)로서 감탄사적인 어감으로 표현하시고,
그리고 모세가 왜 야훼의 부르심에 따를수 없는지에 관해서 "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표현되는 부분을 히브리 성서로 직역하자면
" 나는 말들의 사람이 아닙니다."(לא איש דברים אנכי)
으로 다소 이상한, 표현으로 말을 잘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탈출 4,10-17
10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
- 따라서 내일도 못할 것입니다. 시간적인 흐름을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재밌는 것은 11절에서
탈출 4,10-17
11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라는 첫번째 질문에는 구약에 있는 동사중 완료형의 동사가 쓰입니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라는 과거형으로
다음 질문에는 미완료형 동사로서
11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하고 귀먹게 하며, 보게도 하고
눈멀게도 하느냐? 나 주님이 아니냐?
- 완료형이 아니므로 조금은 미래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누가 사람을 말못하게 할 수도 있고 귀먹게 할수도 있고 보게 할 수도 있고 눈멀게도 할수도 있느냐? 약간 열려 있는 이미 있는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앞서서 얘기했을 때 끊임없이 나왔던 표현은 "나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바로 나다." 라는 이야기로 자신을 소개하셨는데 여기서는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말못하게도 하고 듣게도 하고..." 라는 표현을 성조들의 하느님이 아닌 창조주 하느님으로 , 앞에서 소개되었던 하느님을 뛰어넘습니다.
새로운 신관과 함께 야훼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탈출 4,10-17
12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가르쳐 주겠다."
그리고 나서 도와주겠다는 말인데, 신자들을 위해서 의역한 성경이라서 나타난 표현인데,
직역을 하면,
" 바로 내가 너의 입과 함께 있겠다"
( ואנכי אהיה עם פיך) 로서 앞에서는 모세가 표징을 요구하자,
"내가 너와 함게 있겠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부분에서는 구체적으로 "내가 너의 입과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무슨말을 해야할지 가르쳐 주겠다. 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가르쳐 준다' 라는 동사가 "(야라 ירה)"라는 동사로 이 야라와 모세오경 전체를 지칭하는
"(토라 תורה)" 라는 말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토라 안에는 가르침에 뜻이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 내가 너의 입과 함께 있겠다 →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로 두가지 중요한 진술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다시 얘기합니다. 다섯번 째입니다( 전주 11회 내용에 있습니다)
탈출 4,10-17
13 그러나 모세는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제발 야훼여,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 그러자 참을만큼 참은 야훼가 화를 냅니다.
탈출 4,10-17
14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화를 내며 말씀하셨다.
"레위인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화를 낸다는 부분을 직역을 하면 "야훼의 코가 타올랐다."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코가 주로 작아서 "코가 빨갛다"는 의미는 "술 많이 먹었구나~" 이지만 신부님께서 서양에서 지냈을 때 서양인들이 흥분하면 코끝이 빨개지는 모습이어서, 루돌프 사슴코가 빨간것도 혈압과 관계되었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인종들로 코가 큰 사람이라서 '누구의 코가 빨개졌다"의 의미는
완곡한 표현으론 ' 그 사람이 조금 흥분했다'
조금 세게 표현하자면 ' 그 사람이 화가났다' 라는 표현인데 여기서 야훼의 코가 타올랐습니다. 화를 내는 것인데
그리고 나서, 굳이 "레위인인" 라는 붙여서 '레위인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라는 말을 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탈출기 처음부터, 모세와 아론의 아버지가 레위인이란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여기서 레위인인을 언급한 것에는 어떤 뉘앙스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론은 사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흐름안에서 예언자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사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레위지파여야만 합니다.
탈출 4,10-17
14 나는 그가 말을 잘하는 줄 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그는 너를 보면 마음으로 기뻐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무난합니다. 아론이 모세를 만나기 위해서...이 부분을 직역한다면
그가 지금(이집트에서) 나와서 - (1)
너를 볼 것이고 - (2)
기뻐할 것이다 - (3)
나와서(צא체으) 보고(ראה 라아흐)
기뻐하다(שמח사마흐)는 세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서 중요합니다.
탈출 4,10-17
15 너는 그에게 일러, 그가 해야 할 말을
그 입에 담아 주어라.
야훼의 말이 마치 패키지처럼, 하나의 택배처럼 포장도 안풀린채 모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가 모세가 자신의 입속에서 꺼내서 아론의 입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다인들이 갖고 있는 말에대한, 또는 말씀(logos)에 대한 기본적인 표상입니다.
우리는 말이 허공에 흩어지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으로 말에대해 다소 약한의미를 두지만 유다인들의 철학이나 사상안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하나의 형상이 되는 그와 같은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나중에 요한 복음에 반영이 되서 복음의 시작이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이 의인화되어서 그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이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제 사람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다. 라고 쓰여집니다.
여기서는 말이 형상화 되고 있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형상화의 단계를 넘어가 그 말씀이 의인화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15절의 "너는 ....일러 그가 해야 할 말을 그 입에 담아 주어라." 라는 표현이 신명 18,18 : 예레 1,9 에서도 등장합니다.
그 다음에 더 중요한,
탈출 4,10-17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의 하느님이 되어 줄 것이다.
너는 그의 엘로힘이 될 것이다. 라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소 놀라운 표현입니다.
즉 너는 그에 신과 같이 된다는 표현입니다. 나중에 탈출 7,1 에서도
º 보라 !
º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엘로힘이 되게 하고,
º 너의 형제 아론을 너의 예언자가 되게 하겠다.
여기서는 아론이 모세의 입이고 모세는 아론의 엘로힘이 되는 관계입니다만, 탈출 7,1에서는 모세가 파라오의 엘로힘이 되고 형 아론이 모세의 예언자가 되는 구도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는데 '누구에겐가 엘로힘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로서..
이 부분의 엘로힘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말씀의 주체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고,
이 세상의 세속적 관점에서는 모세와 아론은 형제의 관계이지만 신학적 관점에서는 마치 엘로힘과 엘로힘의 말을 백성에게 전하는 예언자와 같은 관계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같이 파격적인 표현이 조금씩 등장하고 나중에,
요한 복음 11장에서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지는 장면에서 "당신이 분명히 인간인데 어떻게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합니가?"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시편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내가 너를 신들이라 불렀다." 라는 시편의 구절이 있고 따라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들이라 불렀는데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이 너희에게 왜 그렇게 못마땅하냐? " 라는 대목들이 나온다 하셨습니다.
이 구약 부분과 요한 복음에 관해서 충분한 시간이 허락된다면 더 강의 말씀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7절로 넘어오면서,
탈출 4,10-17
17 그리고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너는 그것으로 표징들을 일으킬 것이다."
이부분의 지팡이라는 표상이 계속되어 나온다고 설명하시면서 맨 처음에 양을 치기위해서 들고간 모세의 지팡이가 이제는 엘로힘의 지팡이가 되어 놀라운 표징을 부리는 그와 같은 상징으로 나중에는 그 지팡이가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만들때 지성소에 놓이게 되는 계약의 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즘에는 이 지팡이가 주교님들의 지팡이가 됩니다. 지팡이는 하느님께서 교황님, 주교님에게 맡겨주신 권위로 나타내집니다.
탈출 4,18-23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18절- 23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사는 하나는
(가다 הלך 할라크)다른 하나는 '(돌아가다שוב 슈브)'입니다.
신부님께서 신학적으로 보자면 모세가 자신의 삶의 길을 가다가 야훼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장인 이트로에게 돌아가서 말하면서
탈출 4,18-23
18 모세는 장인 이트로에게 돌아가서 말하였다.
"저는 이제 떠나야겠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친척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보아야겠습니다."
그러자 이트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게"
하고 말하였다.
이 장면에서(미디안을 떠나 이집트로)는 창세기의 야곱이 라반을 떠나 돌아오려는데 라반이 못가게 합니다. 라헬이 신상을 훔쳐와서 라반이 끝까지 추적합니다. 그러다가 경계를 넘어 라반과 야곱이 계약 비슷한 것을 맺고 야곱이 두 아내와 가축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부분과 비슷합니다.
"이집트에 있는 친척들게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 보아야 겠습니다." 라는 부분이 다소 웃기는, 모세가 장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 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 이유는? 모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텍스트에 안써진 것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탈출 4,18-23
19 주님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네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대목을 보면은
야훼가 모세에게 시키실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전제되어지는 것이 아닌 무시되어지는 앞에 이야기들과는 다른 전승인것 같다하셨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오는 모세의 공생활이전에, 즉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키고 탈출시켜나가는 그런 공적인 삶 이전의 이야기는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개의 이야기들이 전승되었을 것 같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텍스트상에 순서는 바뀌었지만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하시자, 모세가 장인 이트로에게 '이젠 이집트로 돌아가겠다.' 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로 이해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탈출 4,18-23
20 그래서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데려다 나귀에 태워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다.
좀 이상한 '아들들을 데리고'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모세의 아들은'내가 이방인의 땅에서 너를 낳았구나'라는 '게르솜' 하나 뿐이었습니다.
4장 24절이하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다의 장면에서도 모세의 아들이 한명처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탈출 18,3-4을 보면
탈출 18,3-4
º 치포라의 두 아들을 데리고 나섰다. 한 아이의 이름은 게르솜(נרשם)인데,
이는 모세가 "낯선 땅에서 내가 이방인이 되었구나." 하고 말한 까닭이고,
º 다른 아이의 이름은 엘리에제르인데, 이는 모세가
"내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도움이 되시어, 나를 파라오의
칼에서 구해 주셨다." 하고 말한 까닭이다.
엘리/ 에제르로 끊어 읽으면 됩니다. 예수님 돌아가실 때 시편기도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타니" 하시는
'엘리' 는 '나의 하느님' 이라는 뜻입니다.
20절에서 '아들들을 데려다' 는 앞의 이야기와 또 어긋납니다. 적어도 두 아들을 의미하니까요.
탈출 4,18-23
20 모세는 손에 하느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전승이지만 지팡이(מטה 마테)에 관한 이야기와 아들이 하나인지 둘인지 모르겠지만 아들에 관한 이야기, 아내에 관한 이야기, 장인에관한 이야기는 공통적이고 함께 엮여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 이트로가 모세에게
탈출 4,18-23
18 그러자 이트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게." 하고 말하였다.
가 나오는데 이트로는 사제였습니다. 사제가 자신의 사위에게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내리는 축복과 같은 것입니다.
판관 18,6 에서는 단 지파의 다섯명의 사람이 땅을 얻기위해서 가다가 사제를 만났고, 미카의 사제가 그들에게 말하는 장면입니다.
1사무 1,17 에서는 엘리가 한나에게 얘기하는 부분입니다.
1사무 20,42 에서는 요나탄이 다윗에게 하는 축복입니다.
2열왕 5,19 에서는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나아만에게 "안심하고 가십시오."
다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헤어질때 "안녕히 가십시오." 라는 표현은 단지 인사라기 보다는 본래의 하나의 축복이었을 것입니다.(상대방에게 안녕을 빌어주는)
그런데 요즘에도 그러한 축복을 빌어주는 마음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시며 위에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누군가와 만나서 헤어질 때 " 아! 내가 상대방을 축복해 줄 수 있구나.." 로서 축복은 사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할수있고, 교황님이 교황님이 되시고 '첫 강복' 을 하시기전에 "여러분들이 먼저 나를 축복해 주십시오." 하고 머리를 숙이셨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모습을 보시고 참 좋았다는 말씀과 함께 우리가 서로를 축복해 줄수 있구나! 그리고 우리가 신부님을 축복해 줄수 있는, 사제만 축복해 줄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드릴 수 있는 사제의 축복이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모두에게 서로를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으로,
세례받지 않는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우리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받지 않는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수 있습니다(교회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지 않는 두 사람이 무인도에서 서로를 세례주고 받고 싶어하는 경우에도 가능하고,
누구나 서로에게 줄수 있지만 자신이 자신에게 줄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사는 자기가 스스로에게 베풀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신자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축복은 이웃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 가정에( 건물이 아닌) 평화를 빕니다" 라는 축복을 전하고 신자들과 비신자들이 섞여있어 말로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 축복을 그 사람이 받아들이면 그 축복이 그곳에 머물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축복은 떠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적어도 우리가 누군가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 그가정에 평화를 빌어주는 축복들,
그리고 상대방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축복해주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자에게 "가거라, 더이상 죄짓지 말아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가장 의미있는 축복으로 나는 당신이 더이상 죄짓지 않고 의로운, 선한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는 축복입니다.
탈출 4,18-23
2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쥐어 준 그 모든 기적을 명심하여
파라오 앞에서 일으켜라.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게 하겠다.
직역하면,
21절의 후반부는
그러나 바로 내가 그의 심장( 레브 לב)을 강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백성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또는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에 심장을 강하게 한다는 것은, 앞의 코가 타올랐다는 표현과 함께,
여기서 잠깐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심장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얘기하는 뇌와 비슷하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모든 지성적인 작용, 감성적인 작용들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활동이 유다인들의 전통안에서는 심장에서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심장이, 우리가 얘기하는 감성 지성의 모든 것들이 이 기관인 심장에서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그것이 강하게 일어나서 바껴지지 않을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훼가 파라오의 심장을 강하게 해서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건 '예정론' 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정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둘러보시면서 그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안배가 있었다는 것으로 그 모든것에 주인으로서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이지 그 모든 것이 예정되있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즉 예정론만 따른다면 우리가 더이상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고
스티븐 호킹 박사의 "나는 예정론을 말한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도 길을 건너면서 좌우를 살피더라" 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굳이 살피면서 건널필요가 없을텐데 살피는 것을 보니까 그들도 철저한 의미에서 예정론자는 아닌것이다. 라는 이야기처럼,
이부분에서도 예정론이 아닌 이것을 통해서 야훼가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것이 무엇이었나? 에 대해서 탈출기의 저자가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탈출 4,18-23
22 그러면 너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이것도 직역하면,
이스라엘은 나의 아들, 나의 맏이이다.
( בני בכרי ישראל)
탈출 4,18-23
23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말하였건만,
너는 거부하여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 "
따라서 파라오가 야훼의 맏이에게 야훼가 요구하는 것을 하지 않았기에, 야훼는 이제 파라오의 맏아들을 죽인다. 는 것으로,
이 전체를 통해서 열가지 재앙에서 마지막 재앙인 이집트의 맏이를 죽이는 야훼의 행동이 합법화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가 내 맏이에게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리고 열가지 재앙을 통해 계속해 경고했지만 그 말을 듣지 않았기에 나는 이제 너에 맏이를 친다." 라는 열번째 재앙에 대한 정당성, 합법화되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기저에는 동태복수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다시 탈출 4,18 에서
18 그러자 이트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게."
(לך לשלום)하고 말하였다.
여기 "평안히 가게" 에서는 "평화"(샬롬 שלום)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평화라는 주제가 가장 중요하게 드러나는 복음서는 요한 복음과 함께 루카 복음서 라고 하셨습니다.
루카 2,29 절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또는 루카 24,3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만남과 헤어짐에서 상대방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그와 같은 전통은 신약 구약을 꿰뚫으면서 진행되고 있고,
오늘날 전례 안에서도 미사가 시작하면서 사제가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미사가 끝나면서도 사제가 "미사가 끝났으니 여러분은 가서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또는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를 함께 누립시다." 라는 평화의 기원이 미사의 시작과 마무리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안에서도 만나고 헤어질 때, "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하는 모든 것 안에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하느님의 체험과 축복에 관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탈출 4,24-26 할례
º 할례
탈출기 전체를 통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 중에 하나라고 하셨고, 탈출기 전체를 통해서 시나이 계약과 같은 굵은 주제가 아닌 짧은 주제를 골랐을 때 가장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대목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논란이 많은 텍스트 라는 것입니다.
직역입니다
(24 a) 그리고 (그) 길에서 (그) 숙소에 있었을 때였다.
(24 b) 그리고 야훼가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26a) 그리고 그는 그로부터 떠났다
(26b) 그때 그녀는 할례들(!)
하탄 - 담밈이라고 말했다
대개 많은 대명사들이 쓰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선 이해가 안가는 것이 야훼가 모세에게 일을 시켜놓고, 모세가 하겠다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
세상에 믿을 하느님이 하나도 없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따라서 학자들이 여러가지로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야훼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까?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첫째 야훼가 원했던 것은 모세가 홀로 이집트로 가는거였는데 가족을 데리고 갔다.
로 야훼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사라졌다가 광야로 나가니까 모세의 장인이 모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 케일keil, 이라는 학자의 이론)
두번째 앞부분에서 모세가 다섯번에 걸쳐서 야훼의 명령에 거부를 합니다. 그래서 코가 빨갛게 된 야훼가 뒤늦게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혈압이 오르는 경우처럼 그러한 것이 아닐까? 라고 주장하는 사람
또는 탈출 2장에서 모세가 사람을 죽인것에 대한 뒤늦은 벌일 것이라는 사람
또는 아직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한 창세 17장에서의 계약처럼 그 계약을 지키지 않은 모세에게 경고하는 의미에서의 이 사건을 의미한다고 보는 여러가지 뜻에 해석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해석입니다.
피(דם 담)를 가지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 비슷한 얘기가 나중에 파스카 사건에 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니 야훼의 영이, 그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인들의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나쳐 갑니다( 그래서 "파스카" 지나갔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피를 발랐다" "피를 바르자" 죽음이 비켜갔다. 라는 내용으로
( 25aß) 그리고 그녀는 그의 발에 대었다 (발랐다?)
발랐다에서 의문부호가 나옵니다. 여기서 나오는 "발랐다" 라는 히브리말 동사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נגע 나가으)라는 동사가 같습니다
피를 바르자, 죽음이 떠나갔다. 라는 같은 구조가 이곳에서 등장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열번째 재앙과 연결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두번째로 '하탄 담밈' (חתן דמים)이라는 말에서,
하탄(חתן)이라는 말은 장인 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모음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서 사위 라는 뜻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본래는 인척관계가 아닌 남자인데, 혼인과 같은 것을 통해서 인척관계가 생겼을 때 그를 '하탄'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A 라는 남자와 B 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둘이 서로 혼인하기 전에는 남이지만,
혼인하고 나서 그 B 라는 여자의 형제나 아빠나 다른 친척에게 이 A 라는 남자도 하탄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피로 맺어진 인척관계가 되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4a) ~(26b) 그때 그녀는 할례들(!)
하탄 - 담밈이라고 말했다. 라는 전체 부분을 신부님께서는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야훼와 치포라와 모세의 아들 셋만 있다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4a) 그리고 (그) 길에서 (그) 숙소에 있었을 때였다.
(24b) 그리고 야훼가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리고 그는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야훼가 모세의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24aα) 그리고 치포라는 돌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들의 포피를 잘랐다
(24aß) 그리고 그녀는 그의 발에 대었다
여기서 그의 발은 아들이 아니라 야훼입니다. 포피를 자른 다음에 그 피를 야훼의 발에 대었을 때 인척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25b)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 당신의 나에게 하탄 - 담밈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야훼입니다. 야훼 당신은 나에게 하탄 담밈입니다. 당신과 나의 친척관계이므로 이제부터 나의 아들을 죽이지 마십시오
(26a) 그리고 그는 그로부터 떠났다
야훼는 아이에게서 떠났다. 로 신부님이 해석하셨습니다.
이 전체를 해석하는 주석가들의 백가지 의견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백한번 째의 신부님 의견이 되시겠습니다.
창세기 17장에 있었던 할례의 주제가 탈출기에 등장하고 이어서 여호 5,2-5 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에서 할례를 받았지만, 이집트를 떠나고 나서는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약속의 땅에 와서 할례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의 계약인 할례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게 되는 시작부분을 여호 5장은 전해주고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탈출기 4장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다음강의에서는 탈출기 5장을 시작하신다는 말씀으로 강의를 마치셨습니다.(히브리어는 최승정신부님의 탈출기I 에서 참조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피의 신랑이라는 부분이 궁금하게 여겨졌는데 "하탄 담밈" 이라는 설명을 통해 잘 이해되었습니다.
어떻게든 구원해 주시려고 여러 방법으로 길을 열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하느님의 심장은 완고하지 않으신 듯 합니다. 저희를 바라보시고 살피시는 모든면에서...
예수님의 피로써 구원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받기만 하는 저를 그리고 그것을 자주 잊어버리는 저를 보게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주안님^^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열매맺는 삶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