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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과 시의 이웃들 원문보기 글쓴이: 운수재
一. 나의 삶, 나의 시
1. 이름에 관하여
나와 알고 지낸 지가 꽤 오랜 문인들 가운데서도 나를 ‘임(林) 형’이라고 호칭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임보(林步)’이니 나를 ‘林’씨로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林’씨가 아닌, 본관이 진주인 ‘강(姜)’가다. 호적상의 내 본명은 강홍기(姜洪基)인데, ≪현대문학≫에 추천 받을 당시 우연히 ‘임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젊은 날의 내 생각은 시라는 글을 본명으로 발표하는 것이 좀 쑥스럽게 여겨졌던 것 같다. 내 필명을 두고 어떤 이는 송(宋)의 임포(林逋)를 좋아했느냐고 묻지만,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산 그 은사(隱士)를 혈기 넘쳤던 약관의 내가 좋아했을 리가 없다. 젊은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인물은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A. Rimbaud)였다. 일찌감치 시를 팽개치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대상(隊商)의 대열에 끼어 대지를 갈고 다녔던 그의 생애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그래서 랭보의 의음으로 ‘林步’를 사용한 것이다. 영자 표기로는 ‘Rim-Poe'로 쓰고 있는데 Poe는 미국의 유미주의 작가 포우(E. A. Poe)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적엔 조부님께서 지어주신 인규(仁奎)라는 아명으로 불렸다. 아니, 대학에 들어간 뒤에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아명으로 나를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본명보다는 아명을 들을 때 더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강랑(姜郞)이라는 필명으로 잡지에 더러 글을 발표했고, 대학에서는 강홍(康弘)이라는 필명으로 대학신문 소설 현상 모집에 당선된 바도 있다.
대학에 들어간 뒤 조부께서는 남구(南龜)라는 호를 내리셨는데 별로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성인이 된 뒤 나는 몇 개의 자호를 만들어 썼다. 한때 수석에 심취해 지내던 시절 청석산인(聽石散人)을 쓰기도 했지만, 주로 우이동 북한산 밑에서 수십 년을 붙박여 살다 보니 근처의 산 이름을 즐겨 끌어다 썼다. 북한산의 옛 이름인 화산(華山) 혹은 화산인, 화산주인 그리고 삼각산인(三角山人) 혹은 삼각산주인, 오봉산인(五峰山人) 혹은 오봉선인(五峰仙人) 등을 사용해 왔는데 이들은 주로 글이 아닌 희묵(戱墨) 용 이름들이다. 인터넷 상에서는 내 당호(堂號)인 운수재(韻壽齋)를 필명으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적어 놓고 보니 참 부질없이 이름도 많이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어떤 자호를 더 만들어 사용하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하기야 조선조의 어떤 선비는 260여 개의 자호를 사용했다고 하니 그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이긴 하다.
2. 삶에 관하여(거주와 직업)
나는 호적상 1940년 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의 출생일은 1939년 (음)5월 13일이다. 그러니 경진 생이 아니라 기묘 생 토끼띠다. 태어난 곳은 순천읍 인제리(麟蹄里) 311번지인데 5살 때 조부님께서 가솔들을 이끌고 전남 곡성군 석곡면 구봉리 382번지로 이사를 했다. 가족은 증조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어머니와 나 다섯 식구였다. 아버지는 동경 유학으로 부재중이어서(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아버진 딴 살림을 차리고 있어서 본가와 소식을 끊고 지냈다) 어머니가 손재봉틀을 돌려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였다.
우리가 산 집은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는데 동 남 북 삼면이 대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 그늘 속에 묻혀 있어서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겨울에는 몹시 추웠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재봉틀을 돌리셔서 논밭도 불려나가고 조부님께 사랑채도 지어드리고 나중에는 본채도 기와집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이곳이 내가 대학까지 졸업을 하고, 증조모님과 조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군에 들어가 병무를 마치고, 결혼을 한 뒤 직장을 갖게 되어 1966년 서울로 이사를 할 때까지 우리 식구들이 23년 동안 살았던 정든 고장이다.
내 이름으로 된 첫 주택은 수유동(가오리) 345의 11호. 10여 평의 작은 집이었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하고 이듬해 수유동 239의 14번지로 옮겼다가 1975년에 쌍문동 422-127로 이사를 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집에서 45년 가까이 살고 있으니 내 생애에서 가장 오랜 동안 사는 곳이 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론 쌍문동이지만 나는 통상 우이동에 산다고 말한다.
나는 한평생 거의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수도사대부속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첫 직장으로 하여, 서울예술고등학교, 정일학원, 선덕고등학교,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등이 주 직장이었다. 그런데 서울예고에서 정일학원으로 옮긴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출퇴근 시간도 없이 자유스럽고 보수도 많다는 친구의 권유에 넘어간 것인데 막상 옮기고 얼마 안 가서 당국의 학원에 대한 제재가 강화된 바람에 있을 만한 곳이 못 되고 말았다. 거기서 6년 동안 아까운 내 30대의 청춘을 소모하고 뒤늦게야 대학원에 진학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석사 박사 과정을 다 마칠 때는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운이 따랐든지 50세에 대학의 자리를 가까스로 얻게 되었다. 내 경우를 보고 늦게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후배들이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도 한다.
여러 차례 직장을 바꾸었지만 집을 옮기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청주의 충북대학에 15년 동안 근무하면서도 가솔을 이끌고 내려가진 않았다. 처음 몇 년 동안 내가 청주에 머물 때는 <복대동 연작시>를 낳았던 복대동 1733번지의 전세방이었다. 후에는 개신동 41-5 한진아파트 1217호 원룸에 <개신운헌(開新韻軒)>이라는 당호를 걸고 제법 태평스럽게 지내기도 했다.
나는 토끼다
기묘(己卯) 생 토끼띠
음력 5월에 났으니 때를 만났다고
사주(四柱)는 말한다
그러나 한평생 별로
큰소리치며 살아보지 못했다
세상을 향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집안에서도 늘 숨죽여 지낸다
왜 토끼에게는 단단한 뿔이 없는가?
왜 토끼에게는 사나운 발톱이 없는가?
왜 토끼에게는 날카로운 이빨이 없는가?
허다 못해 고슴도치처럼
가시라도 지녔어야 할 텐데
쓸데없이 큰 귀만 달고 있어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 가슴을 조이고
앞다리는 짧아 넘어지기 일쑤다
언청이 입에
구부러진 등
귀가 엷어
남의 말에 잘 속고
겁이 많아
사람들 모이는 곳에도 못 간다
나는 토끼다
날카로운 이빨도 사나운 발톱도 없는 토끼
개들도 비웃고
닭들도 얕보고 지나간다
왜 내겐 뿔을 안 주었는가?
―「나는 토끼다」전문, 『눈부신 귀향』(2011)
3. 나의 스승님들
내 생애의 첫 스승은 조부님(後隱 姜泰秀)이시다.
나는 네댓 살 되던 때부터 조부님 사랑에서 함께 기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분은 내가 말을 익히기 시작하자 한문을 가르치시었다.
나의 첫 교재는 『추구(推句)』였는데 이는 역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서 뽑아 엮은 시집이다.
지금도 다음의 구절은 내 뇌리에 남아 반짝이고 있다.
狗走梅花落(구주매화락) : (개가 달려가매 매화꽃이 떨어지고)
鷄行竹葉生(계행죽엽생) : (닭이 걸어가매 댓잎이 돋아나는도다)
눈 덮인 마당 위에 생겨난 개와 닭의 발자국을 매화꽃과 댓잎에 비유한 것인데 당시의 어린 나에게 글이란 참 아름답고 신기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내가 한평생 시를 가까이 하며 살게 된 것도 일찍이 조부께서 익혀 주신 몇 구절의 시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겨울밤/ 대수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 깨어 먹을 가시던 그분/
그런데 어인 일로/ 그가 내 손에 남기신 묵적(墨蹟)은/ 단 두 편의 시/
그것도 파지에 적어/ 책갈피에 꽂아 둔 초고인 걸 보면/
이렇게 남게 된 것도/ 당신의 뜻은 아니었던 모양//
나는 그분의 유묵 몇 점 못 간직한 것이/ 두고두고 서운키만 했는데/
오늘 아침 내 나이 천명(天命)에 들면서/
이제야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 등 뒤에 숨어서 소곤대는/ 그 소리를 비로소 들었다./
지상의 흔적 다 거두어 떠나려 했던/ 후은(後隱)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겨우 백여 년 내다보고 사는데/ 수만 년 유유(幽幽) 속에서 소요했던/ 그분을…….
―「후은시(後隱詩)」부분,『황소의 뿔』(1990)
두 번째 내 문학의 스승은 중학교 때 만난 인촌(人村) 정동렬(鄭東烈) 선생님이다.
나는 인근에 새로 설립된 주암중학교에 진학했는데, 2학년 때 이마가 훤칠하게 벗겨진, 짙은 갈색 안경의 멋쟁이 젊은 체육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그 체육 선생님은 운동장이 아닌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주로 세계명작소설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었다.
『테스』『부활』『죄와 벌』 같은 흥미진진한 소설의 스토리를 선생님을 통해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선생님의 전공은 체육이 아니라 국어였는데 우리 학교의 빈 체육교사 자리를 채우기 위해 임시로 오셨던 것 같다.
한국전쟁 직후 당시의 교육행정이 얼마나 어수룩했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 선생님께 홀딱 빠진 나는 방과 후 선생님의 숙소에 찾아다니며 선생님이 소지한 문학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소월이며 미당 청록파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며 시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인촌 선생은 1년쯤 뒤에 당신의 전공을 찾아 다른 학교의 국어교사로 떠나셨는데 그때부터 선생께서는 편지를 통해 나를 가르치셨다.
이틀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선생님의 편지에 답신을 쓰기 위해 날을 새기고 했다.
선생께서 구사하신 미려한 문체와 멋스런 필체를 본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지금의 내 필체에는 아직도 그분의 것이 남아 있다.
1952년 어느 봄날/ 전라남도 승주군 주암면 창촌리 산골에/
짙은 갈색 안경에 검은 베레모를 쓴/ 바람의 신 같은 젊은 청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아무 물정도 모르는/ 열네 살의 어린 한 소년에게 바람을 넣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사람이 누군 줄 아느냐?/
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도 아니고/ 억만 금을 거머쥔 거부도 아니고/
천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제왕도 아니고/ 한 자루의 아름다운 펜을 가진 사람이다
―「바람의 스승」부분 『눈부신 귀향』(2011)
세 번째의 스승님은 유상(愉象) 유공희(柳孔熙) 선생님이다.
호남의 수재들이 모인 광주고등학교에는 선생님들 또한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셨다. 그 가운데서도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분이 국어를 담당하셨던 유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교과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인생과 문학과 철학을 말씀하셨는데, 보들레르를 위시해서 랭보와 발레리 등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에 대한 얘기며, 사르트르, 까뮈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 그리고 『생활의 발견』의 저자인 생의 철학자 린위탕(林語堂), 『사랑과 인식의 출발』의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 등을 소개해 주시기도 했다.
내가 결정적으로 문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그렇고, 세상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여유로운 자세를 배운 것도 바로 그분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께서는 수필을 잘 쓰셨는데 당신 생전에 문집 갖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신 맑은 선비셨다.
그래서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몇 해 뒤에야 유고시문집 『물 있는 풍경』(시학, 2008)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네 번째 스승은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시인이시다.
내가 다형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광주의 한 신문사가 주관한 학생 문예작품 공모에 내 시가 당선이 되었는데 그때의 심사위원이 조선대학교 교수였던 다형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광주 양림동에 자리한 다형 댁엘 가끔 드나들었다.
시에 대한 말씀을 기대하면서 찾아갔지만 선생님은 별로 말씀이 없었다.
마른 볼에 유난히 큰 귀가 마치 선량한 사슴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말 주변이 없었던 터라 한동안 멍청히 앉아 있다가 그만 물러나오곤 했다.
내가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1958년 무렵, 다형도 모교인 숭실대학으로 옮겨오면서 수색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20여 평의 조그만 반양옥집이었는데 다형의 조촐한 방엔 손수 끓인 원두커피의 향기가 늘 가득했다.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지만 술과 담배를 전혀 가까이하지 않는 청교도적인 청정한 삶을 살았던 분이다.
다형의 성품은 대쪽같이 강직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적당히 타협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함부로 그분을 대하질 못했다.
내가 대학 2학년이던 1959년 10월에 다형께서는 나의 「자화상」을 《현대문학》에 처음으로 추천해 주셨다.
두 번째 추천작 「거만한 상속자」는 1961년 11월에 그리고 마지막 추천작 「나의 독재」는 1962년 7월에 통과될 수 있었다.
세 번의 추천을 거치는데 3년 가까이 소요된 셈이다.
가을/ 볕바른 다실(茶室)에 앉으면/
차(茶), 그 투명의 향기에/ 부활하는 다형(茶兄).//
고독,/ 그 마른 정결로/ 뭉친 이마,/
늘/ 천상의 음계를 더듬어/ 크게 열려 있던/ 사슴의 귀,//
다만/ 한 잔의 뜨거운 커피에만/ 관용턴 입술,//
세상을/ 굳은 눈썹으로/ 재고 갔던/ 청교도,//
홀로/ 곧게 걷던/ 금강석의/ 시인.
―「다형(茶兄)」『목마일기(木馬日記)』(1987)
다섯 번째의 스승은 대학의 은사님들이다.
대학에 들어와 보니 네 분의 교수들이 계셨다. 일석(一石 李熙昇)과 심악(心岳 李崇寧) 그리고 백영(白影 鄭炳昱)과 백사(白史 全光鏞)였다.
그런데 어학 파트의 두 원로 교수가 주도를 하고 있어서 문학 쪽은 힘을 못 쓰고 있었다.
더욱이 이숭녕 교수는 창작에 뜻을 두고 있는 학생들을 불량배 취급을 했다.
그분의 말씀은 문리과대학은 학문하는 학자를 양성하는 곳이지 작가를 기르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학과의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글 쓰는 데 관심을 가지고 들어왔던 학생들도 생각을 바꾸어 어학이나 국문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20명의 입학 동기 가운데 창작의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틴 학생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의붓자식처럼 외톨이로 굴러다녔다.
소설을 쓰신 전광용 교수가 그나마 나를 다독여 주셨다.
그래서 그랬든지 대학에 들어온 후로는 시보다 소설 쪽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961년 대학신문에 단편소설 「비(碑)」가 당선되기는 했지만 신춘문예의 관문을 뚫지는 못하고 말았다.
그의 목청은/ 겨울 청댓잎 스치는 바람으로/ 늘 살아 있었다.//
남해(南海) 먼 바다 흑산도(黑山島)를/ 마흔 나이에/
등으로 져 끌어올리더니//
숨은 국초(菊初)의 멱살을 붙들어/ 세상의 밝은 햇볕에/ 올려놓았다.//
예술과 학문을 함께 메고/ 이 땅의 청사(靑史) 새롭히겠다고/
천하(天下)를 갈던 백사(白史),/ 욕심 많은 북청(北靑)분네.//
오늘/ 고희(古稀)에 앉아서도/ 그 푸른 목소리로/ 청댓잎을 흔들고 있다.
―「백사시(白史詩」전문 『은수달 사냥』(1988)
그리고 내 마지막 스승은 운정(芸丁) 정완섭(鄭完燮) 선생이시다.
이당(以堂)의 문하인데 내가 학원의 강사로 인사동에서 떠돌고 있을 때, 가끔 이분의 화실에서 문인화의 운필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일찍 세상을 뜨시어 만남은 길지 않았지만 내게 묵향의 운치를 일깨워준 분이다.
내 안방에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얻은 운정의 그림이 걸려 있다.
삼베에 그린 두 폭의 금강산도인데 바라볼 때마다 과묵하고 온건한 그분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이켜 보면 나는 훌륭한 스승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아무도 안 계신 지금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그분들 생전에 좀 더 응석을 왜 못 부렸던고 하는 것이다.
4. 나의 동인 활동
어떤 이는 나를 두고 ‘동인지 시인’이라고 평한다는 말을 들었다.
문학지를 통해 활동하기보다는 동인지 중심의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그런 평을 들을 만큼 나는 많은 동인지 활동을 해 왔다.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해 보니 선배들이 《태광(胎光)》이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동인지는 세대교체를 하면서 이어졌는데 1957년 내가 3학년 때 간행된 제6집의 동인들은 김범경 오병선 윤재성 이성부 이이화 그리고 필자 등 6명이었다.
이 중 오병선은 법조인으로 이이화는 역사학자로 빠져나가고 평생 문학을 붙들고 산 동인은 나와 후배 이성부 두 사람뿐이었다.
내 두 번째 동인 활동은 병영에서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초여름에 입대를 했는데 경리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경리단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경리단의 사병 몇(서승주 정세진 임길순 그리고 필자 등 4인)이 모여 〈초막회〉를 만들고 《막사족(幕舍族)》이라는 동인지를 엮어냈다.
등사판의 초라하고 얄팍한 문집이었지만 미소를 자아내게 했던 일이다.
세 번째의 동인 활동은 1966년 6월에 《영도(零度)》제4집 동인으로 가담한 것이다.
《영도》는 광주고등학교 출신의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인데 제4집에는 여러 시인들(강태열 권용태 김규화 낭승만 박봉섭 박봉우 손광은 신동엽 윤삼하 이성부 임보 정현웅 주명영)이 동참했다.
그러나 동인지를 이끌어갈 핵심 인물이 없어서 그랬든지 생명이 길지 못했다.
네 번째의 동인지는 《육시(六時》다. 1970년 5월에 김춘석 오세영 이건청 이시영 조정권 필자 등이 창립멤버가 되어 제1집을 간행했다,
10월에 간행된 제2집에는 신대철이 가담했는데 두 권의 사화집을 내고 《육시》는 해산되고 말았다.
멤버 중 오세영 이건청 두 회원들이 다른 동인지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동인은 《진단시(震檀詩)》다.
1982년 3월 창간호에 가담한 멤버들은 강희근 김규화 문효치 박경석 박진환 임영희 정의홍 필자 등이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구성원들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년 2회의 사화집을 열심히 간행했다.
이 동인활동의 특색은 전통적인 소재를 내걸고 테마시 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는데 문단의 반응도 괜찮았다.
나는 1997년 6월 제22집을 간행하고 빠져나왔다.
그만 두게 된 이유는 또 다른 동인지 《우이동 시인들》과 병행하기가 번거로웠기 때문이었다.
여섯 번째 동인지 《우이동 시인들》의 창간호는 1987년 3월에 나왔다.
우이동 인근에 살고 있던 이생진 채희문 홍해리 신갑선 필자 이렇게 다섯 사람이 자주 만나다 보니 의기투합해서 사화집을 엮어내기로 한 것이다.
신갑선 시인은 6호까지만 참여하고 나머지 4인이 1999년 6월까지 년 2회 총 25집을 간행했다.
《우이동 시인들》이 시도한 이색적인 작품 활동은 합작시다.
한 사람이 시작한 첫 연을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제2연을 쓰고 또 그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써서 한 작품을 여러 사람이 완성하는 것이다.
4인 공동작인 이 합작시를 매호마다 1편씩 만들어 동인지의 첫 머리에 실었다.
《우이동 시인들》이 1999년에 25집으로 활동을 멈추게 된 것은 《우이시회》때문이었다.
우이동 시인들을 중심으로 1987년부터 우이동 인근에 사는 시인들이 모여 매월 시낭송을 했었는데 이것이 《우이동 시낭송회》다.
그 낭송회에서 《우이시(牛耳詩)》라는 낭송집을 묶어 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1999년 5월 월간지로 등록되면서 회의 명칭도 《우이시회》로 바꾸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굳이 ‘우이동 시인들’이 따로 동인지를 간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회원의 구성원이 전국 규모로 확대되자 2007년 4월 ‘우이시회’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명칭도 《우리시 진흥회》로 개칭하고 월간지의 제호도 《우리詩》로 바꾸게 된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詩》도 따지고 보면 회원 중심의 문예지이므로 동인지가 월간 형식으로 발전된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