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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되지 않은 음화陰畵의 기록
― 박성현 시의 존재론과 정신분석
이 도 연
박성현의 시는 존재자의 속살을 어루만지고 싶어 한다. 가령 바람의 파동을 감지하거나 덧없는 그 체취를 기꺼이 흠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정인情人의 살결 하나하나를 헤아리는 애무의 손길처럼 바닥없이 깊고 부드러우며 한없이 관대하다. 그렇지만 속살은 좀처럼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씨앗을 내장하고 있는 살구 열매의 과육처럼, 표면 아래로 스스로를 깊숙이 감춘 채 종적마저 가뭇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것의 흔적과 더불어 드문드문 우연히 돌출된 표지들뿐이다. 시적 인식으로 표현된 하나의 존재론으로서 박성현 시가 동원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인지, 따라서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자리에 발표된 신작시 다섯 편을 골라 그 과정을 살피고 세부적인 절차들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시적 의미가 무엇인지도 이참에 함께 발견되기를 기대한다.
친애하는 사물들의 세계 혹은 사물적 친연성
박성현의 시가 고유한 시적 대상으로 가장 먼저 대면하게 되는 것은, 현상적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사물들의 세계이다. 그의 시는 자연물과 인공물을 굳이 가르지 않고 자신이 펼쳐놓은 풍요로운 시적 향연에 빠짐없이 호명하며 초대한다. 우선 [집쥐에 관한 농담](이하 [집쥐])의 소제목으로 달린, “살구죽”, “흉터”, “얼룩들”이 그러하며,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미지 계열로서 “쥐”, “골목”, “아카시아”, “사진(첩)”, “얼굴” 들이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각종 사물들이 시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별반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들을 호출하는 방식, 이들에 다가서는 목소리의 접근방식은 의외로 남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집쥐]에서 “쥐”는
“목이 잘린” 채이거나 “새끼를 물어 죽인 어미” 등의 기형적 이미지로 묘사된다. 마침 시궁 속 “쥐”의 속내가 몹시 궁금해진 “나”는, “하수구”에라도 들어가 보고 싶은 심정이지만, “쥐가 아니어서 불가능했다”거나 “짐승이 아닌 까닭에 그 마음을 다 알 수 없었”다고 화자는 진술한다. 다시 말해 시의 화자는 인식 대상으로서 사물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몸속으로 직접 헤집고 들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동물-되기를 통한 ‘변신’의 욕망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한 개입 의지를 노골적으로 전면화하는 것보다는 조심스레 묻어두는 우회의 전략을 택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화자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 개입이나 인간적 의지의 투영을 최대한 절제한 채, 사물의 움직임과 변화를 주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넌지시 조망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완만한 동력을 섬세하게 포착하려는 화자의 시선은, 텍스트의 많은 구문들을 동사로 마무리 짓게 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을 무수한 동사들의 흔적이라 명명하는 것도 일견 가능할 것이다. 한편으로 텍스트의 표면 위로 특별한 논리적 인과관계가 두드러지거나 이를 통해 전달되거나 형성되는 감정의 역동적 진폭, 그리고 각별한 의미의 파장이 확연히 시야에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소설의 객관중립 서술처럼 매우 건조하고 무연한, 마치 제3자의 시선으로 처리된 듯한 사물들의 세계를 멀찌감치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화자는 사물들의 세계와 그 질서를 무덤덤하며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간결한 배치로 갈무리 해놓고 있다. 여기에 무심한 듯이 단속적으로 배열된 사물들은 각각의 자리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각자의 자연스런 숨결을 내뱉으며 한가로이 호흡하고 있다. 한 폭의 정물화처럼, 뜻 없이 아름다운 하나의 세계가 문득 빚어지며 시의 평면에 정갈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이 작품이 창조한 이른 바, ‘뜻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인간적 시선을 배제한 대상 세계의 극진한 존중, 사물에 대한 충실한 배려로 읽고 싶다. 대상의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인정과 충분한 존중, 사물의 질서에 대한 무조건부의 승인이 언제나 필요하다. 대상을 손쉽게 장악하거나 인간의 의지대로 인위적으로 조작하려 들 때, 사물의 원래 ‘얼굴’은 일그러지고 훼손되어 급격히 변형되고 만다. 사물들의 ‘표정’이 읽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물들과 속속들이 친해지고 두터운 우정을 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체의 투명한 인식과 함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연후에 사물들이 들려주는 침묵의 말과 존재의 언어에 깊이 침잠하여 가만히 귀 기울여줘야 하는 것이다. 대상과의 사물적 친연성은 이와 같은 비개입의 개입, 무의지의 의지의 능동적 실현을 통해서만 비로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진동하는 냄새들의 미립자
박성현 시의 내부에는 온갖 산재한 냄새들로 진동한다. 도처에서 풍겨오는 강렬한 향이 코끝을 찌르며 감각의 분화구를 자극한다. 곳곳에 미만한 후각 이미지들은 미세한 파장을 따라 넘실대며 시의 내부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여기서 냄새의 매개자는 물론, 단연 바람이다. 냄새는 바람의 흐름을 타고 공기의 파동을 따라 서서히 대상에 전달된다. 먼저 상투적인 얘기가 될 밖에 없겠지만, 인간의 감각 중에 시각이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에 비해 후각은 그 원초적 성격 탓에 열등하고 부차적인 감각으로 치부되며, 인간의 인식 작용에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후각은 그 비가시적인 즉물성 때문에 원초적인 본능과 몸의 감각에 보다 가까우며, 즉각적이며 직접적인 영향력과 호소력을 지닌 매력적인 감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각이 직접적인 감각적 호소력을 지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박성현의 시가 냄새라는 후각적 감각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표명하며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시작詩作의 중요한 원천의 하나로 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까지도 [집쥐]의 잔향이 여전하거니와, [냄새의 식욕]과 [개 비린내] 등은 제목에서 곧바로 드러나는 것처럼, 후각과 냄새를 직접적인 시의 모티프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냄새의 식욕”은 냄새에서(~로부터, ~때문에, ~에 의해) 자극된, 축자적 의미의 식욕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냄새의 식욕은 단단해졌”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냄새의 식욕]이라는 작품 역시 특별한 의미 표상은 제거된 채, 가급적 사물의 언어를 직역하는 태도를 화자는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면으로 감춰진 의미를 굳이 찾는다면,
“꽃을 집으면 꽃은 사라지고 냄새만 남았습니다”라거나, 또는 “표정을 읽어도 마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보기 싫은 사진을 태우는 것처럼 한꺼번에 휘발하는 것이었습니다”와 같은 구절들이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 인용한 첫 구절은, 꽃의 이미지가 떠올리게 하는 시각적/ 후각적 표상의 위상의 역전을 함축한다. “사라지는” “꽃”은 분명, 꽃이 지닌 선명한 색감의 시각 표상이다. 이어지는 “냄새만 남았”다는 표현은, 냄새와 후각이 바로 사물의 본질 구성물이자 객관적 실체라는 도전적인 진술이자 독자적인 시적 선언이다. 혹은 화자에게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거나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기관이 후각이라는 솔직한 고백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진술은 박성현 시의 궁극적 의미 표상으로 간주해야 할 것 같다. 화자는 거품 아래로 깊이, 사물의 거죽 속을 뚫고 들어 그 속살(또는 “마음”)을 손으로 만지고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신작 시편들에서 그것은 이를테면, (얼굴 < 표정 < 마음)의 순서대로 그 진실성과 절박함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듯하다. 이는 시를 통한 세계의 재현을 넘어, 사물의 밑바닥에서 존재자의 존재Sein를 개현하고 직접적으로 현시하려는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성현의 시는 이처럼 사물의 ‘속살’을 더듬고, 그 ‘마음’에 가닿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의 기원과 진원지는 아마도, “모두 냄새가 시작된 쪽”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인용된 마지막 구절은 인화된 것으로서, 다시 말해 존재자의 속살이나 마음과는 무관한 껍데기이자 복사물인 “사진”을 불사르는 의식의 정화 행위로 보인다. 사본寫本은 언제든 “한꺼번에 휘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정작 중요한 것은 인화되지 않은 것에 있다는 화자의 단호한 전언으로 간주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인화되지 않은/ 인화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에는 대표적으로 냄새가 속할 것이다. 이상의 맥락에서 집쥐에서의
“오줌”과 “구정물”이 풍기는 “누런 생강 냄새”, “똥지게꾼”이 무심코 흘린 “똥물” 냄새,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살구죽 끓는 냄새”, 그리고 [개 비린내]에서의 “사람들이 풍기는 냄새”, “하수구보다 더 심한 악취” 등은, 바로 진동하는 냄새들의 전형적인 미립자로서 풍부한 질감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하겠다.
감각의 논리 또는 네거티브 필름의 실체
지속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박성현 시에서 뚜렷한 의미론적 표지는 발견되지 않거나 깊숙이 은폐되어 있다. 이는 매우 의도적인 것일 수도, 무의식적으로 보다 자연스럽게 수행된 것일 수도 있다. 그 이유와 기원이 무엇이든 박성현 시의 뜻 없음과 의미의 부재는 상당히 특징적인 것이어서, 시 해명의 중요한 단서의 하나로 삼을 수 있을 듯하다. 한편 시인이 애써 의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이유는 표층의 현상적 의미가, 거짓 의미이자 사이비 진술pseudo-statements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박성현 또한 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그 뜻 모를 의미의 실체 내지 그것의 구성방식, 그리고 이를 통해 형성되는 박성현 시 고유의 아우라 및 그 궁극적 지향성을 일부나마 해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신작시 5편 중, 그럭저럭 의미의 맥락과 윤곽을 희미하게나 잡아볼 수 있는 작품은 [개 비린내]가 거의 유일해 보인다. 또한 거의 유일하게 개체적 실존을 넘어 그 사회적, 역사적 관계망이 비교적 가시화되어 있는 작품으로도 판단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정치적 사건으로서 5·18의 비극적 현장을 떠올리거나, 축자적 의미에서 철거지역의 낭자한 폭력과 피비린내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표면적 의미로서 어렵지 않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무자비한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폭력사태이다. 군인들과 맞서야 할 동네 어른들임에도, “대낮부터 취한 아버지들은 문 밖을 나오지 못했어”라고 화자는 진술함으로써, 폭력의 불가항력성은 더욱 분명해지며 무방비 상태에 놓인 마을은 속수며 무책으로 마비된다. 여기에서 참혹한 폭력의 서늘함을 가중시키고 있는 반복-이미지는 단연, “죽은 쥐”다. 끝부분의 “죽은 쥐처럼 검은 달이 뜨던”이라는 표현이 그날의 살기와 악취를 깊이 각인해놓는다. 이 작품의 논리적 중핵에 해당하는 구절은 무엇보다 마지막의, “그런데 몇 페이진가요, 목소리가 찢어지고 있어요”라는 긴박한 절규다. 이 한 문장이 텍스트의 모든 에너지를 일거에 응축시키며 시적 의미를 완결한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실존의 파열음일 것인데, 여기에서 이 작품이 지닌 중요성은 살육의 현장을 재차 호명한다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는 화자가 그것을 “개 비린내”라는 후각의 감각 표상으로 환치해놓았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인화되지 않은 것의 복원이자 재구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역사적 사건의 충격을 실존의 파열음으로 전치시킴으로써, 개성적인 하나의 시적 존재론을 창안해 놓고 있다. 이는 자신의 존재 사유를 궁극에까지 개진한 부단한 공력의 결과이다.
이어서 후각에서 보다 확장된 관점에서 박성현 시의 감각의 논리와 구성방식, 그 세부절차와 과정적 구체성을 따져볼 차례이다. 박성현 시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여지없이 후각일 터이나, 이는 보다 보편적인 감각의 차원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겠다. 가령 [여기서 방향을 틀면](이하 [여기서])은 “설탕”의 미각과 “피”의 촉각 이미지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먼저 흰 설탕에 떨어진 붉은 피는 설탕의 순백색에 스며들며 딱딱한 고체 상태의 설탕을 용해한다. 설탕의 낙하에 관여하는 중력 역시 몸으로 감지되는 경중輕重으로서 촉각에 가까운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사물의 언어를 의역하기보다는 그 말의 직접적인 뉘앙스들을 충실히 복원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감각의 유동과 파문이 지향하는 것은 어떤 것이며, 과연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감각의 점진적 확산과 더불어 생성되는 정서의 일회적, 순간적 환기일 것이다. 정서나 감각 등이 내재한 고유한 분위기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이어서 금세 휘발되며, 때문에 영원한 지속성을 갖지 않는다. 한편 그 덧없는 감각의 무상성 속에서 비로소 가시화되는 것은, 인화되지 않은 음화陰畵의 은밀한 기록들이다. “여기서 방향을 틀면”이라는 제목은, 베일 속에 감추어진 봉인된 음화가 개봉되는 내밀한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황 증거로는 “사진은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휘어졌”다는 진술을 꼽을 수 있다. 중력의 정 방향으로 움직이면 사진은 올바르게 양화陽畵로 인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흙으로 만든 새가 마르면서 쏟아내는 균열”은 인화되지 않은 음화가 다시금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만들어진 시공간의 틈새가 아닐까 싶다. 중력을 거부하는 음화가 활성화되면서 세계는 “진공으로 꽉 찬 방”, 마침내 어떤 무중력 상태에 도달한다. 이어지는 “방향을 틀면 무게가 사라졌”다는 표현은 이상의 추론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벽에 걸린 악기” 또한 본래의 음색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추론에 저항하고 있는 지점은, 이러한 진공 상태가 “죽음의 만조기”로 화자에게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물론 현존재의 속살을 직접 매만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건의 하나인 섹스가 생물학적 죽음의 상태에 근사하다는 점을, 여기에서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선명한 음화의 부각이라는 돌발적 사태가 가져다준 것은 존재의 넘쳐나는 기쁨이나 눈부신 환희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갑작스런 전율과 함께 심한 가려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그 가려움 때문에 “쓸쓸하다”고 낮게 읊조리는 것이다. 이는 분명 화자의 지독한 절망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논리적 모순을 피하기 어렵겠지만(여기 그 간격과 낙차를 그대로 드러내기로 한다), 이는 음화로 상징되는 사물의 실체와 속살, 존재자의 존재에 궁극적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도저한 체념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세계는 인화된 양화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로 만연한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는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순간 모두가 “정체 모를 것들에 사로잡혔다”는 불안감이 고조된다. 결국 박성현 시의 뜻 없음과 의미의 부재는, 뿌리 깊은 의미의 환멸과 불신에서 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뒤돌아보는 것은 얼굴이지 표정은 아니었죠”라는 단호한 서술은 결정적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화자의 짙은 고독과 깊은 외로움은 여기에 기인한다. 이에 대한 보다 확고한 정황들은 [낙타 사이사이 골목](이하 [낙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견된다. “철없는 아카시아”가 “혓바닥을 내밀고 바람을 핥았지만, 바람은 닿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움켜쥐려는 것은 마음 바깥에 있고, 귓속을 버석거리는 소리들은 입술 앞에서 망설”인다는 등의 직접적인 언술들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박성현 시의 화자가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본원적 양태와 궁극적 지향성은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분명, ‘실재the Real’를 표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 ‘실재’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부재의 성소聖所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실재와의 필연적 거리에서 빚어지는 결여와 간극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하는 아이러니컬한 존재이다. 그리고 욕망의 환유연쇄는 곧 이 자리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맥락에서 “거품처럼 툭, 터져버린” “얼굴”이라는 이미지들의 계열체는 의미의 공백 상태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계속되는
“얼굴, 얼굴들을 보아야 했습니다”라는 진술은 그럼에도, 그러한 의미의 폐허와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화자의 황망한 심정과 실존적 상황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일이 어려워지고 말았다는 뚜렷한 절망감, 존재자의 존재에 가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확정적 판단에서 비롯된 화자의 근원적 허무의식은, 허공의 새를 자연물의 피붙이가 아닌 “철근으로” 이루어진 한낱 인공적 사물로 인식하게 한다. 마침내 세계는 빛과 어둠의 순차적인 공존이 아닌, “어둠의 낮과 밤”이라는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시의 영도零度에 현전한다. 이내 세계로 통하는 입구는 단단히 봉쇄되고 그 유일한 최후의 단서마저 “골목으로 사라”지고 만다. 하염없이, 깊고 긴 시의 침묵이 이어진다.
정관의 거리와 능동적 체관諦觀
지금껏 우리는 박성현의 시가 존재자의 속살을 손수 어루만지고 싶어 한다는 가설 하에, 그것의 구체적인 텍스트 실현과정과 여기에 동원된 여러 문학적 수사 장치들을 실제 분석에서 확인하고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후각을 위시한 감각의 논리와 이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활용을 그 세부 미학의 핵심적 양상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해 텍스트의 배면으로부터 서서히 현상하는 것은, 인화되지 않은 음화의 명암과 채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분석의 차원에서는 실재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 논리적 추론과정에서 모순적 진술과 함께 박성현 시의 내부에 존재하는 양가감정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속살을 매만지고 존재에 가닿으려는 화자의 깊은 열망과 공존하는, 그것의 근원적 접근 불가능성에 기인하는 도저한 허무의식과 묵직한 절망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과 정신분석은 박성현 시를 해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순수한 열망의 좌절, 아름다운 패배의 기원과 진원지가 어디인지, 마지막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밝히는 일이, 이 글에 할당된 최후의 과제일 것이다. 잠시 앞서 분석한 낙타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먼저, “골목을 지켜보는 창문”으로 확보된 거리와 시야는 사실상 화자의 시선을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매설된 텍스트에서 우연히 누설되고 있는 “적당한 무관심”이라는 언표는, 박성현 시가 세계와 사물을 대하는 기본적인 입장이자 일관된 태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은 다른 말로는 중용적 태도라 일컬을 법한 것이다. 하나의 정신적 가치지향으로서, 중용은 자체로서의 위의를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기계적 의미의 평균적 중립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느 현자의 진언처럼, 중용이란 극단을 경험한 자에게만 내리는 신의 축복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선택하거나 임의로 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비자발적인 불가항력의 사태들을 깊이 수용하며,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되는 내면의 태도이다. 이상의 맥락과 관련하여, 멈추면 보인다는 제법 그럴듯한 시쳇말도 있으나, 그치고(止) 살피는(觀) 일은 소박한 정관적靜觀的 태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편향을 제거하려는 마음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함께, 결코 지워지지 않는 카르마의 심연을 몸소 체험하는 역동적인 인식의 순환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취되는 것으로, 고단하고 참된 수행의 결과이자 불가피한 상황으로서 결국 도달하게 되는 정신의 한 임계점이다. 궁극적 허무주의의 진의는 모든 것을 견디는 희망 없는 사랑의 힘에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박성현 시에서 모순된 화자의 양가감정과 욕망의 어긋남은, 사물들과의 구체적인 관계 설정, 보다 직접적으로는 사물과 조응하는 화자의 내면적 거리 조정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췌언을 더하자면, 사물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외부적 시선에서 적실히 조망되고 효과적으로 조절된 정관적 거리의 확보가 아니라, 이의 과감한 폐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관조적 풍요와 여유로움은 사물을 정지된 상태로 붙잡아두려는 그릇된 열망의 소산이다. 엄밀한 뜻에서 다만 그것은 정태적 수동성에 지나지 않는다. 불가해한 사물의 움직임과 사태의 역동적 변화에 자신의 영혼을 에누리 없이 개방한 채, 그 확실치 않은 미정형의 흐름에 초연히 스스로를 내맡길 때, 사물의 속살은 저절로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예컨대 적극적 수동성의 능동적 실현, 능동적 체관의 비개입적 실천에서, 이는 궁극적으로 가능해질지 모른다. 그것은 사물의 바깥이나 틈새가 아니라, 사물들 속에서 사물을 발견하려는 오랜 길이기도 하다.
이도연 2007년 {문학동네} 신인상 평론부문 수상 ―현재 한국체육대학교 교양과정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