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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시
임현준
김 언, 「한국계 저녁」, 『문학과사회』, 2024 겨울.
석상진, 「침의 부조화」, 『생명과문학』, 2024 겨울.
정해영, 「말의 즙」, 『애지』, 2024 겨울.
문정희, 「당신의 감옥-마드리드 책의 밤」, 『애지』, 2024 겨울.
이병일, 「라부여관」, 『애지』, 2024 겨울.
우스꽝스러운 정치적 비극
“오늘날에 있어 모든 사람의 운명은 정치적으로 규정된다”라고 말한 건 토마스 만이다.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나치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던 독일인 소설가라 생각하면 이 언사의 특별함이 도드라진다. 시야의 폭을 넓혀, 현대에 이르러 정치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보편적 대목으로 받아들인다면 토마스 만의 이 경구는 세계 어느 곳에나 해당하는 묵직한 통찰이 된다. 특히 우리네 현실,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빗대 보면 “운명은 정치적으로 규정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절묘하게 또는 절실하게 곱씹을 만한 것이 된다.
‘정치와 삶’, ‘정치와 문학’ 같은 관계가 공존과 공생의 것쯤이라는 진리는 물릴 정도로 배워왔고 겪어왔다. 우리는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히 경쟁하면서도 당할 수 있는 온갖 부조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당해왔다. 시방도 구질구질한 정치의 부조리를 감내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어찌어찌 여기까지는 왔다. 문제는 우리의 “운명이 정치적으로 규정된다”라는 이 식상한 말을 당했던 수법에 또 당하면서 처음인 것처럼 새로이 곱씹어야 한다는 데 있다.
유구한 호구를 잡힌 걸까. 근현대를 거쳐 당연시되는 이성과 합리의 세계가 무속의 입김에 쉽사리 흔들리는 것이나, 열망과 흘린 피로써 토대를 닦았던 정치적 이념이 한순간 반국가 세력의 토악질이 돼버린 것이나, 추운 겨울마다 아스팔트 위에서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비극적인 현실이나, 헌법을 농락해 놓고 헌법의 보호를 받는 우스꽝스러운 정치의 비극 앞에 우리는 어수룩한 덜미를 붙잡혀 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당했고 알면서도 당했고 또다시 당해야 할 것이 우리 현실이라면,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비극 이외에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요즘 우리의 운명이 정치에 어지러이 휘둘리다 못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 천박하고 시궁창 같은 상황을 정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문학은 문학의 할 일이 있다. 또 허물어질지 모르면서도 언어의 첨탑을 쌓는 일, 호구를 잡히면서도 우리의 생활과 내면을 공글리듯 들여다보는 일, 우스꽝스러운 현실의 비극 앞에서 상상력과 사유의 말을 끊임없이 내뱉는 일들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에 있어 모든 문학의 운명은 목소리 내는 일로 규정된다’라고 알려준 것은 우리네 선배 문인들이다.
2. 한국계 저녁
한국계 저녁이 온다. 한국계 저녁은 유대계 저녁과 다르다. 러시아계 저녁과도 다르다. 독일계와도 일본계와도 다른데 저녁은 온다. 중국계 저녁이 오는 것처럼 한국계 저녁도 온다. 오기는 온다. 와서는 멈추지 않는다. 어떤 계든 움직인다. 한국계든 중국계든 미국계든 움직이라고 온다. 움직여야 온다. 한참 담배를 피우다 보니 온다. 기다리는 사람이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한국계는 온다. 한국계답게 온다. 근데 한국계가 무어냐? 질문하지 않더라도 온다. 오기는 오는 사람답게 저녁이 와 있다. 한국계는 싫다고 말하는 사람의 입속에도 저녁은 온다. 어두워지고 컴컴해지고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온다. 저녁은 온다. 오늘은 한국계. 내일은 또 무슨 계가 되어서라도 온다. 국적을 바꾸고 싶다. 이름도 바꾸고 싶다. 인종도 바꾸고 습관도 바꾸고 모조리 다 바꾸고 싶은 저녁이 온다. 한국계라서 온다. 어느 계가 되어서라도 컹컹 짖고 싶은 저녁이 온다. 아무 상관도 없이 온다. 저녁은 왔다. 밤은 어느 계에 속해서 또 갈 것인가? 한국의 밤은 길다. 밤새 한국계 밤을 이룬다.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김언, 「한국계 저녁」, 『문학과사회』, 2024, 겨울.
신기하게도 인생사 보이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장님이 코끼리 코를 만지면서 보아뱀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큰 그림으로서 본질이나 부분과 전체라는 추상적 껍질로 다루는 철학적 문제는 여기서 거론할 따위의 것이 아니다. 배고픔을 느끼면 생각의 초점이 음식에 쏠리는 것처럼,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톰 행크스가 신은 신발이 눈에 띄어 ‘허시파피’의 매출이 폭증한 티핑포인트의 사례처럼, 갑작스레 포고된 계엄령에 정치와는 상관없을 것만 같던 젊은 아이돌 팬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일상을 지켜낸 것처럼 우리는 당면하고 맞닥뜨리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생각하는 대로 보는 건 그다음의 일이다. 의식의 시작은 상황과 현실에서 비롯되고, 거기로부터 관찰된 현실은 인식을 주조하고 갱신해 낸다. 때문에 거짓말과 주술과 폭언이 먼저 우리를 광분하게 만들었고, 자연스레 모든 행태를 정치적 술수나 주술적 비합리성으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김언의 「한국계 저녁」은 품이 넓은 시이다. 품이 헐거울 정도로 넓어 이 관점 저 관점을 들이대도 얼추 옷매무새가 사는 작품이다. 「한국계 저녁」에 굳이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읽는 이의 개인적 당면 문제를 대입할 여지가 많다. 현대문학에서 시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 미덕이 모호함으로 빠질지라도 이래저래 제각각의 논리나 정서의 톱니로 맞물려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렇게나 흐르는 인식의 흐름을 일단 붙잡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언의 많은 작품에서 그러하듯 이 시에서도, 모호하면서도 그럴싸한 연상 작용을 말놀이로 빚어내 생각을 지연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여러 시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민주공화국’과 “저녁”이라는 ‘무르익음의 시간대’ 개념 때문에 ‘민족적 속성’을 이 시에 관습적으로 대입하고 싶게끔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한국계”라는 말을 ‘민족의 성향’ 또는 ‘한국인의 기질’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국계는 싫다고 말하는 사람의 입속에도”, “어두워지고 컴컴해지고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오는 것처럼 “한국계 저녁”은 민족 혹은 한국인의 성미처럼 “온다”. 여기서 “한국계”는 어떤 소속된 사회 내지는 민족의 특질로 읽어도 좋을성싶다. 아니어도 그만이다. 대신 “유대계든 중국계든 미국계든” 상관없이, “한국계”라는 특질보다는 “저녁은 온다”라는 보편적 현상이 이 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비유라는 점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저녁”에 대입해 볼 수 있는 말 중에 “어떤 계든” “오기는 온다”라는 단서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무수히 많다. 자본이나 민주주의나 생활이나 사랑이나 문학 같은 말의 상징으로서 “저녁”을 읽어도 좋다. 요즘과 같은 시국에서는 계엄이나 탄핵 같은 말을 장난삼아 넣어보는 것도 유용하겠다. “한국의 밤은 길다. 밤새 한국계 밤을 이룬다.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처럼 어떤 개념어를 넣어봐도 맛깔나는 시가 되는 건 변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우스꽝스러운 현실이지만 “한국계라서” 그 어떤 말을 시에 들이밀어도 정치적 운명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이다. 시가 현실의 정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 그것은 ‘가능성의 기예(art of possibility)’가 된다. “정치란 가능성의 기예”라고 언급한 건 버나드 크릭이 『정치를 옹호함』에서였다. 정치가 인간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잘 듣고 잘 달래고 잘 조정해서 타협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시도 현실을 잘 들여다보고 잘 말해서 정서를 건강하게 흔들어 놓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는 세계를 해석하는 가능성의 기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광화문 광장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과 K-pop이 집회 노래로 변하는 모든 아스팔트 위에서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게 만든다.
3. 말의 부조화
식욕은 침의 끈적거림에 반비례한다
파블로프의 종소리에 반응하는 침은 식욕이 아니다
키스할 때 사람들은 쉽게 침을 빨아먹는다
한 번 뱉은 침은 되돌릴 수가 없다
그것은 가위를 뜻한다
퉤,는 침이 가진 무성음이다
혀의 역할은 침을 알사탕처럼 굴리는 것이다
침은 가래와 자신을 똑같이 취급하지 말라고 억울해 한다
침은 우리 몸의 다른 액체처럼 왜 노란색이나 빨간색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지구를 침략할 외계인의 침은 아마도 짙은 녹색일까
우표가 점점 사라져서 침의 용도가 또 하나 줄어드는 것이 아쉽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소화 효소라고 정의했고
독재자들은 일단 그것을 묻히면 전부 다 제 것이라고 우기고
치과 의사들은 충치가 더 잘 생기는 이유가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경우 꿀꺽 삼킬 때 침이 모자란다
웃는 표정이지만 불안의 징후일 때다
그럴 때 거짓말처럼 헛기침 같은 침도 있다
―석상진, 「침의 부조화」, 『생명과문학』, 2024, 겨울.
우리는 수없는 거짓말을 들어왔다. 거짓말을 내뱉는 이는 아무렇지도 않다. 선한 거짓말이나 무의식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발견되는 후천성 거짓말(?) 같은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거짓말을 하는 쪽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받을 어떠한 손해도 상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거짓말을 듣게 되는 쪽에서는 어떠한 식으로든 피해나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의 결말이 파국을 불러오든 도리어 어리둥절한 선의가 되든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권선징악적 꼴이 되든 간에 결국 거짓말을 곱씹고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 쪽은 뚫린 귀를 가진 사람이다. 우리의 정치 풍경이 우스꽝스럽게 된 것은 다 거짓말 때문이다. 그리하여 잠 못 이루는 현대인의 불면증이 도지는 원인 가운데 정치적 울분이라는 마음속 이명이 추가되었다는 풍문이 농담처럼 떠돈다.
거짓말의 가장 큰 뒷배는 좁은 시야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같은 개인적 경험의 보편화나, ‘전문가로서의 견해’같이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이의 예언 등은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현대 사회의 병든 면모일 수 있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소화 효소라고 정의”하는 것도 한쪽 면만 바라보며 그것이 본질이라고 우기는 거짓말의 일종일 수 있다. “독재자들은 일단 그것을 묻히면 전부 다 제 것이라고 우”기게 되는 것도 좁은 시야에서 비롯되는 거짓말의 폭력이다. 문제는 거짓말에 당하는 이들이 거짓말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내뱉는 이들보다 넓은 안목과 혜안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말’은 단순히 호흡기관에서 내뱉는 공기가 아니다. ‘말’은 “식욕” 같은 몸의 욕망과 마음의 정서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한 번 뱉은” 말은 “되돌릴 수가 없”는 단호한 성질을 내포한다. 또 “혀의 역할은 침을 알사탕처럼 굴”려 말을 하게 하는 것이어서 말은 “파블로프의 종소리에 반응하는” 단순한 작용이 아니라, “혀”와 “침”과 “식욕”과 “무성음”과 “억울”과 “용도”와 같은 여러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총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말’에 대한 여러 층위를 알게 되면, 편협하고 좁은 시야의 거짓말을 간파하거나 “가위”처럼 잘라낼 수 있다.
이러한 ‘말’에 대한 통찰력은 시인의 집요한 관찰과 분석과 상상력이라는 관조에서 비롯된다. 석상진의 「침의 부조화」는 ‘말’을 가능케 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물리적 작용으로서의 “침”에 천착한다. 그의 건조한 듯하면서 눙치는 문체는 다소 단순해 보이지만, “우표가 점점 사라져서 침의 용도가 또 하나 줄어드는 것”을 발견할 만큼 날카롭고 의외롭다. 이러한 시적인 시치미 떼기가 넓고 유연한 안목을 갖게 하는 태도로 작용하고, 이는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말’의 “부조리”를 다방면으로 또는 총체적으로 형상화해 내게 하는 데 한몫을 담당한다.
“침”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식욕”에 “반응”하거나 “키스할” 상대가 있어야 한다. 때문에 “침”은 “가래”와 있을 때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우리 몸의 다른 액체처럼 왜 노란색이나 빨간색이 아니었을까”처럼 비교 대상이 있어야 존재를 눈치챌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침”의 묘사나 설명이 그대로 ‘말’에 대한 속성으로 보이게 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임의적이라 보고 그에 따른 의미 생성을 ‘차이’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침은 우리 몸의 다른 액체처럼” “노란색이나 빨간색이” 아니라는 ‘차이’로 인해 변별되고, “가래와 자신을 똑같이 취급하지 말라고 억울해”하는 ‘차이’로 인해 무고해서 투명에 가까운 것으로서의 “침”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말’은 “침”의 속성처럼 투명한 것이다. 따라서 “식욕”이 “침의 끈적거림에 반비례”하는 것처럼 ‘말’의 투명도는 거짓의 농도에 반비례한다. ‘말’은 “웃는 표정이지만 불안의 징후일 때” “부조화”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짓말의 “징후”이다. 우리가 종종 듣게 되는 뉴스 속 정치의 말들이 “헛기침”으로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시 문제는 그 “헛기침” 같은 “무성음”이 귀를 가진 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퉤” 하고 내뱉으면 그만이지만 상처 입은 귀는 씻어 낼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4. 시의 즙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입 안에 들어온 딱딱하고 거친
이물질 같아 내뱉고 싶었다
넘길 수 없는 말
입속에 넣고 혀끝으로
오래 굴렸다
녹인다는 것은
둥근 모양으로 어루만지는 일
울퉁불퉁 거친 것을 받아
부드럽게 넘기는 법은
어릴 적
사탕을 먹으면서 알았다
굴릴수록 단맛이 난다
그 말에서 나오는
즙인가
어느새
말이 넘어간다
돌을 삭이듯
녹여 먹는 말
며칠 혹은 몇 백 년이
걸린다 해도
즙이 된 말은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정해영, 「말의 즙」, 『애지』, 2024, 겨울.
토머스 홉스는 그가 살던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면서 여러 저서와 함께 『리바이어던』을 썼다. 당시 유럽대륙은 중세의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근대의 질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혼란스러웠다. 홉스는 자연과학적 연구 방법을 인간과 사회에 끌어들여 일반법칙을 찾으려 했는데 이러한 사유 방식은 그의 정치철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면모를 『리바이어던』 1부 ‘인간에 대하여’의 4장 ‘언어에 대하여(of speech)’에서 살펴볼 수 있다. 홉스는 언어의 특수한 효용을 ‘기록을 통한 학문 발전’, ‘지식의 유통과 축적’, ‘의지나 목적을 전달하여 서로에게 도움’, ‘언어를 통한 기쁨’ 등의 네 가지로 정리했다. 그러면서 이에 상응하는 네 가지 악용 사례를 든다. ‘언어의 의미가 변덕스럽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한 바를 잘못 기록하여 스스로를 기만하는 경우’, ‘언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즉 정해진 의미에서 벗어나게 사용함으로써 타인을 기만하는 경우’,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을 언어를 통해 자신의 의지라고 표명하는 경우’,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목도되는 정치적 상황은 죽어서야 멈추는 인간의 권력욕으로 기만하는 괴물 ‘리바이어던’의 악용된 언어의 면면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정해영의 「말의 즙」은 홉스가 언급한 언어의 악용 사례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을 체험케 하는 시의적절한 시이다. “딱딱하고 거친/ 이물질” 같은 “그 말”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울퉁불퉁 거친” “말”이기 때문이다.
“말”이 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 “입 안에 들어”오게 되는 건 순전히 시인의 내공으로 건너뛴 문학적 비약일 터이다. 어쩌면 시인이란 번뜩이는 어떤 말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시부터 쓰고 보는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시는 표현의 단순한 볼륨같이 상상력도 투명하다. 그 투명한 상상력이 천진난만하게도 자연스러운 비약을 일으켜 나름 타당성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시의 “말”이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들어온[有]” “말”에서 태어나는 것임을 예리하게 환기시킨다. 자극이 있어야 반응이 일어나듯,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있어야 내부에서 말이 생겨난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 중에서, 시인의 문장이 시인 내부에서 저절로 발아하는 것으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시인은 창작자이지 창조자가 아니다. 창작은 보편에서 특별함을 길러내는 일이다.
여기에 더해 「말의 즙」은 진정성 있는 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돌을 삭이듯” “울퉁불퉁 거친 것”을 “녹인다는 것은” “말”을 “둥근 모양으로 어루만지는 일”이다. “입속에 넣고 혀끝으로/ 오래 굴”려야만 “그 말에서 나오는/ 즙”을 삼킬 수 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를 거부하는 시적 가르침은 “며칠 혹은 몇 백 년이/ 걸린다 해도” 거를 수 없는 시인의 태도를 지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입속에 넣고 혀끝으로/ 오래 굴”린 “즙이 된 말은/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중차대한 일이니 말이다. 딴에는 이 시가 시인들에게 “말”에 대해 인고의 자세를 취해보라는 것 이상으로, 생활을 사는 사람들과 정치하는 인간들에게도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라 가르치는 듯하다. 특히, “역사를 바꾸기도”할 요즘에는 말이다.
5. 언어의 감옥
초저녁 마드리드는 소나기에 갇혔다
세계 책의 밤! 세계도 책도 밤도 넓기만 하다
퇴적층을 뚫고 뿌리 하나가 솟듯이
은발의 평론가가 대뜸 물었다
당신네 나라의 감옥은 어떻습니까?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으로 사형수였던 분이
대통령이 된 후로 감방마다 TV도 있고
난방도 비교적 잘 되고 있다고 해요
당신네 나라의 감옥은 어떻습니까?
나날이 범죄가 증가하여 수용이 넘쳐나요
프랑코 시대도 아닌데 정치범? 혹은
마약과 성범죄 등인가요?
어느 시대나 미운 놈은 많죠, 게다가
고통도 자유도 인터넷도 널려 있으니까요
인간은 육신이 감옥 아닌가요
(앗,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작가는 수갑보다 입마개를 더 싫어하죠
오늘은 책의 밤, 책처럼 완성된 사물도 없는데
자꾸 인간에게서 밀려나고 있네요
피와 살이 숨 쉬는 문학은 오래 살까요?
글쎄요. 시인은 언어의 감옥에서
늘 탈옥을 꿈꾸는 수형자
침묵으로도 자유를 표현할 수 있어요
감옥은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요
시인의 노래는 결국 감옥의 노래입니다
쉬잇! 너무 과장 미화하지 마세요
시가 달아나요
―문정희, 「당신의 감옥-마드리드 책의 밤」, 『애지』, 2024, 겨울.
많은 이들이 분노하는 건 “수갑”과 “입마개”를 포고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 정치적 좌와 우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경쟁하는 건 우리가 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거창하게 민주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방향성과 이념적 정당성을 말하지 않더라도 중요한 원칙은 “수갑”을 채우지 않고 “입마개”로 가리지 않고 자유로이 할 말을 하면서 ‘말’로써 서로의 이익을 겨루는 일이다. 이렇게 명약관화한 암묵적 합의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헌법이자 대원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정치적 숙적을 구속하기 위해, 고작 다른 생각과 다른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당연한 이 시대의 원칙을 깨버렸다는 것에 우리는 분개하고 치를 떨 수밖에 없다. 평등과 자유가 “수갑”에서 나올 리 없다. 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이 “입마개”에서 나올 리 없다.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반국가 세력을 처단한다’는 언어도단 앞에서 언행일치까지는 바라지 않다손 치더라도 말의 표음일치를 지키려는 자세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를 포함해 입을 가진 많은 이들은 이런 표리부동한 “언어의 감옥”에 유폐되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문정희의 「당신의 감옥-마드리드 책의 밤」은 짤막한 인터뷰 내용을 시적으로 구성해 놓은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대뜸” 묻고 답하는 시시껄렁한 대화의 배치 속에는 ‘문학과 정치’, ‘문학과 인간’, ‘정치와 인간’이라는 함의가 깊숙이 내포되어 있다. 이 시는 “마드리드 책의 밤”을 통해 “자꾸 인간에게서 밀려나”는 문학의 현실을 단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면서 문학이 처한 갑갑한 현실에 대해 “고통도 자유도 인터넷도 널”린 “세계”에서의 “인간”이 그 원인이라 진단한다. “정치범”과 “마약”과 “성범죄”같이 “어느 시대나 미운 놈[인간]”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문학”이 살아 숨 쉬는 “세계”를 방해하는 존재로서 스스로 “책[문학]”을 밀어내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문학이 위기에 처한 건 책이 안 읽혀서일 수도 있고, 책의 효용성이 떨어져서일 수도 있고, 책다운 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시대적 천박함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책처럼 완성된 사물”이 “인간에게서 밀려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감옥”이 된다. “고통도 자유도 인터넷도 널”린 “세계”가 “수갑”과 “입마개”를 강요하는 “감옥”이 되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작가는 수갑보다 입마개를 더 싫어”한다. “시인은 언어의 감옥에서/ 늘 탈옥을 꿈꾸는 수형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은 말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할 말을 해야 시인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할 말은 “침묵으로도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진정한 “시인의 노래”여야 한다. 도리어 “너무 과장 미화”하는 문학은 “책”의 “세계”를 “감옥”으로 몰아넣는 것이 될 수 있다.
문정희 시인은 어렵지도 모호하지도 않은 인터뷰를 통해 “감옥” 같은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우의한다. 그러고는 “피와 살이 숨 쉬는 문학은 오래 살까요?”와 같은 우매한 질문에 명랑한 대답으로 주위를 환기시킨다. “시가 달아나요”라는 끝말의 함의는 “문학”의 생사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노래는 결국 감옥의 노래”라는 인식적 자각 자체에 있다 할 것이다. 시는 “탈옥을 꿈꾸”지만 “감옥”에서 달아나면 그때부터 시가 아니라는 통찰, 시는 온갖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불리어질 수 있다는 통찰, 그리고 그것은 “침묵으로도 자유를 표현할 수 있”다는 통찰까지도 담아낸다. 결국, 시인에게 “언어의 감옥”은 표음일치를 뛰어넘어 언중유골을 탐닉하게 하는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다. 아니,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오로지 “탈옥을 꿈꾸는 수형자”일 때 시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옥은 사방에 널려 있”다.
6. 고백을 듣는 방
나의 피난처는 라부여관,
그런데 레바논의 백향목이 왜 생각날까
익힌 것은 깊고 잊힌 것은 춥겠지,
욕심은 나를 깨우고 잠들게 하고
핏줄보다 돈이 이끄는 대로
적과 싸우게 하고
총, 칼, 활이 내 관자놀이를 겨누게 한다
고흐, 까마귀 울음으로 칼을 갈아
귓등을 긋고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왜 피에서 해바라기 냄새가 나는지
왜 피로 죄와 믿음을 씻으려 하는지
오늘 수염으로 가득한 나의 얼굴은
까마귀가 되었다가
사이프러스와 밀밭이 되었다가
다시 새 피 얻을 몸으로 되돌아온다
왜 죄는 눈꺼풀이 없을까
나의 탄식소리로 말미암아
인중에 괸 침묵도 일렁거릴 것만 같다
격리와 고립은 한몸 같은데
얼음구멍같이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찔끔, 코피가 흘러나온다
라부여관, 신기하게도 죽음보다
고백을 듣는 방이 많았다
나는 종교도 없이 신앙심을 갖고 싶었다
캄캄한 것이 꾸물꾸물 밝아진다
―이병일, 「라부여관」, 『애지』, 2024, 겨울.
일상이라는 말이 귀한 시대가 되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어느 만큼 귀한 것인지 우리는 팬데믹을 겪으며 알게 되었고, 계엄이라는 정치적 날벼락을 또다시 되풀이하며 되새기게 되었다. 그 와중에 피부로 느끼게 되는 물가라든지, 점점 삭막해지는 인심이라든지, 과격을 넘어 기괴하기만 한 편 가르기라든지, 믿고 싶지 않은 참사와 범죄들을 목도하면서 일상은 더욱 요원해질 것만 같아 우울해진다. 비단, 국내의 정치 현실만 암담한 것 같지는 않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또는 “레바논”이 주고받는 공습이나, 우경화되는 세계 정세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일상은 또 하나의 노스텔지어가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럴 때 우리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종교든 철학이든 예술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에게 일상을 꿈꾸게 하는 “새 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여망이다. 어쩌면 이병일의 「라부여관」은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또 돌아가게 만드는 희망을 넌지시 건네는 시일지도 모른다. 한 예술가의 비극적 죽음을 기리는 “라부여관”에서 “신기하게도 죽음보다/ 고백을 듣는 방이 많았다”라고 깨닫는 시인의 돌연한 언사가 그 증거이다. 그럼으로써 빈센트 반 고흐가 생을 마감한 프랑스 파리 인근의 “라부여관”은 “새 피 얻을 몸으로 되돌아”올 “나의” 또는 시를 읽는 ‘우리’의 “피난처”가 된다.
평생을 불안과 망상, 악몽과 환각에 시달리며 가난하고 병든 삶을 살았던 고흐는 오베르의 성 뒤편 밀밭에서 자신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총알이 심장을 빗겨 척추에 박혔는데도 죽지 않았다. 고흐는 가슴을 부여잡고 1.6km를 걸어서 라부여관으로 돌아왔다. 이틀 뒤 동생 테오가 왔을 때 고흐는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것이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마저 실패하다니”라고 말한 뒤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이한 생애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우리 같은 범인들은 여러 모로 기가 눌릴 일이다. 그렇지만 「라부여관」의 시적 화자는 “핏줄보다 돈이 이끄는 대로/ 적과 싸우”거나 “레바논의 백향목”을 생각하며 “왜 피에서 해바라기 냄새가 나는지” 골몰하며 자기반성을 하는 피곤하고 수척한 인물로서 스스로를 고흐와 빗대어 놓는다. 이러한 시적 화자와 비극적 생애를 살았던 유명 인사를 동일시함으로써 이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라부여관”이 특별한 곳이 아니라 말한다. 누구에게나 노스텔지어로 있는 어떤 “라부여관” 같은 공간 속에 함께 묵고 있다는 동질감을 상상케 하는 것이다. 고흐처럼 “까마귀가 되었다가/ 사이프러스와 밀밭이 되었다가” “까마귀 울음으로 칼을 갈아/ 귓등을 긋”는 고통은 결국 보편적인 삶의 고통일 따름이다. 이 고통을 고흐의 삶을 통해 따라가다보면 결국 “왜 죄는 눈꺼풀이 없을까” 하는 “나의 탄식소리”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격리와 고립”은 한 끗 차이라는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삶의 고통은 다시 살게 하는 삶의 원동력과 “한몸”인 것이다. 이제 “피난처”인 “라부여관”은 “죽음보다/ 고백을 듣는” 곳이 된다. “새 피 얻을 몸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공간이 된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고백을 듣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왜 피에서 해바라기 냄새가 나는지”, “왜 피로 죄와 믿음을 씻으려 하는지”에 대한 “고백”을 듣는 동안 우리는 고흐의 거친 질감의 유화처럼 “까마귀가 되었다가/ 사이프러스와 밀밭이 되었다가” 종내에는 “캄캄한 것이 꾸물꾸물 밝아”지는 희망을 “새 피”처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희망은 필시 죽음이나 전쟁, 폭력과 거짓말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있을 것이다.
7. 보이는 대로, 겪고 있는 대로 읽는 시
결국 우리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나 갈등을 지닌 채로 떼 지어 살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들이다. 이 상호의존이 체계적으로 운용되는 것을 정치라 부른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상호의존이고 투명한 체계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관계 맺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식을 다룬 윤리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정치론에 맞닿아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어떻게 미학적으로 그려낼 것인가에 대한 문법도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향해 이루어져야 한다. ‘참여와 순수’ 같은 오래된 논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참여든 순수든 결국 읽는 이가 시의 목적이고, 읽는 이들의 합이 사회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결국 돌고 돌아 ‘정치와 시’는 비슷한 운명 앞에 만나게 된다. 이제 정치는 정치의 할 일로, 시는 시의 할 일로 할 말을 하면 된다.
시를 읽는 여러 방법 중에 하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입해 보는 것이다. 나아가 ‘나’가 속한 사회를 빗대 보고, 더 나아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투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각각의 특별한 서정과 이야기를 품은 시는 보편성을 띠게 되고, 나아가 시인과 독자의 공감대가 형성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나’가 보는 대로 시를 읽고 해석해 보는 것도 어지럽고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타개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운명이 정치적으로 규정된다”는 토마스 만의 말을 상기한 채로 우리가 처한 절체절명의 시국 상황을 보고 겪는 대로 시에 대입해 보면 해법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떤 위안이나 희망을 찾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다룬 다섯 편의 불빛 같은 시는 시의 할 일을 다한 작품들이다. 이 시들은 우리의 시위 도구이자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나침판이다. 어둠을 뚫고 타오르는 작은 촛불처럼, 근엄과 진지함이 어깨춤을 추게 하는 유쾌하고 발랄한 응원봉의 불빛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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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준
약력
2018년 애지 등단. 애지 편집위원.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