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림파와 정암 조광조의 개혁정치-1->
조선 500년 역사를 꾀뚫어 보면 정치의 맥을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사림파와 훈구파로 나눌 수 있다. 지금으로 비교하면 보수와 진보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왕도 정치에서 항상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여 때로는 정권에 따라 큰 사화를 일으켜 많은 인재가 유배, 사사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여 나라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다시 풀어 보면, 조선 500년을 지배한 이들은 사대부이고 사대부를 지배한 것은 성리학이었다.
사대부란 과거에 합격하면 사대부로 불렀다. 과거에 합격한 지식인은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눌 수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첫 관문이 진사 시험이다. 평균해서 1년에 2,000명 정도 진사 시험에 합격시켰다고 한다. 진사 시험에만 합격하여도, 향리에서는 지식인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최진사댁 셋째 딸 등..
경주 최부자댁의 가훈에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라는 가훈이 있다.
진사 시험에 합격 후 큰 뜻을 품고 집안이 좋으면 대과 즉 과거 공부를 준비하게 된다. 인맥이 좋고 가문이 좋으면 서울 성균관에 들어가서 전국의 지식인들과 대과를 준비하기도 하고, 아니면 지방의 서원에서 공부하여 대과에 응시하기도 했다. 일년에 대과 즉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이 별시를 제외하고 정시에 약 200명 정도 뽑았다고 한다.
과거 시험공부는 주로 사서삼경 책으로 공부를 준비하게 된다. 공부 할 때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사서삼경이란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성리학이 들어오기 전에는 주로 공자의 가르침인 논어가 주가 되었을 것이다.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을 줄인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교 사상을 성리, 의리, 이기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여 성리학이라 불렀다. 성리학을 보통 주자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공자 맹자를 기본으로 삼되 도교와 불교는 공허한 학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단으로 취급하고부터 출발했다. 특히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는데 고려가 멸망한데는 불교의 영향이 컸으므로 조선에서는 억불 숭유 정책을 국시로하여 불교를 배척했다.
조선의 성리학은 안향 - 목은- 정몽주 - 길재 - 김숙자(김종직의 부)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졌다. 정몬주, 길재, 김숙자는 고향이 경북이다.
김종직은 밀양이 고향이다. 아버지가 밀양 처가에서 안착하여 밀양에서 태어났다. 김종직을 성리학의 종조로 불리는데, 이는 그가 성리학을 통한 많은 제자를 길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함양 군수로 재직 때 김굉필, 정여창 등 동방 5현 중에 두 사람의 훌륭한 선비를 배출하였고, 나머지, 조광조도 김굉필이 가르쳤고 경주 양동 출신인 이언적도 외숙부한테서 수학했는데 외숙부인 손중돈도 김종직의 제자이다. 퇴계 이황을 제외하고 동방 5현(조선의 최고의 선비 광해군 때 나라에서 정했음)중, 4명이나 직계 제자이거나 아님 제자의 제자이기 때문에 성리학 사람파의 종조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본인 김종직은 왜 동방 5현에 포함되지 못했을까? 세조, 성종 때 나라의 녹을 먹었기 때문으로 전한다. 대부분 정론을 주장하는 사학자뿐만 아니라 사림파에서는 세조의 왕위 찬탈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참 선비였으면 세조대에 벼슬을 하지 않아야 된 다고 봤다. 제자 중 김굉필은 세조 때 나라에 녹을 먹었다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언행이 일치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스승 김종직과 의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 연산군 때 “조의제문” 때문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많은 제자는 사사되거나 유배된 것을 보면 김종직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