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시건방진 오리새끼>의 줄거리:
왜 보통의 오리새끼들은 하얗고 몸집이 더 크고 우아한 독특한 오리새끼를 미워했을까요? 시건방져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좋고 아름답고 우아한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시건방져 보일때 그곳에는 고강도의 미움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이 유대인에게 미움 받은 이유도 실은 시건방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건방진 오리새끼
(행25:13~27)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시건방진 오리새끼>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1)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The Ugly Duckling)의 원래 제목은 '어린 백조'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목을 수정하게 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사실은 백조였다는 동화 속 반전 요소를 숨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유난히 큰 알에서 태어나 보통의 오리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주변 오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이에 상처를 받은 새끼 오리는 집을 떠나는데 다행히 어느 마음씨 좋은 할머니의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고양이와 닭의 괴롭힘에 못 이겨 새끼 오리는 결국 또 도망쳐 나오게 됩니다. 춥고 외로워했던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어느 날 우연히 새끼 오리는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못생긴 오리인줄만 알았던 새끼 오리는 다름 아닌 아름다운 백조였던 것이지요. 이후,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 무리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정말 동화의 원래 제목을 바꿔서라도 지켜내야 할 감동적인 반전입니다. 내용을 다 알고 다시 들어도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구성을 현실적으로 수정해보면 어떨까요? 다양한 경우가 있겠지요. 그 중하나를 예로 들면 이런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미운오리 새끼는 처음부터 자기가 백조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주변의 오리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겁니다. 그리고 끝까지 오리들은 백조를 미워하고, 백조는 끝까지 자기가 백조인 것을 알고 그 괴롭힘을 참아내며 삽니다.
2) ‘독설 멘토’로 유명한 스타 강사 김 미경(48)씨가 몇 개월 전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에서 한 발언 때문에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언은 그 곳에 참석한 한 학생의 발언에 대한 대꾸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학생이 말했습니다. “나는 (잘살고 싶어서) 자기계발 서를 안 읽고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 이 때 이 학생에게 김 미경씨가 “인문학 서적? 그거 어디에 쓰려고? 인문학은 지혜를 만들기 위해 읽는 거라고. 그런데 그 사람의 지혜가 300페이지 책으로 쓰이면 그게 자기계발서적이야. 근데 안 읽는다고? 웃기고 있어. 시 건방떨고 있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또 이어서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시 건방떠느라고 남의 말을 안 듣는지 알아요? 책은 아무 문제없어요. 읽는 사람이 문제에요”라며 책의 질보단 읽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자기 계발서적을 안 읽고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이 왜 시 건방떠는 걸까요? 실용적 가치에만 찌들어버린 이 세상에서 오히려 신선하고 기특한 면도 있는 것은 아닐까요? 확실히 이 원색적인 발언 속에는 단순히 흥겹게 들을 수 있는 독설 이상의 짙은 미움의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2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저자:이지성)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다소 과격하게 들리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기계발이 요즈음 2030세대의 주관심사입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자기계발을 주제로 한 독특한 독설이 섞인 강연으로 스타가 된 강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에게 자기계발서를 안 읽는다고 했으니 그 학생은 미운털이 박혀 마땅합니다. 이 학생은 동화 속 미운 오리 새끼가 그 토크쇼 현장에 사람이 되어 나타난 경우이지요.
3) 자기가 스스로를 계발해서 이루려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면 자기 계발을 위한 모든 조언과 가르침은 일종의 율법입니다. 성공에 대한 희망에 설득되고 들떠서 듣고 읽는 순간 못 깨달을 뿐이지, 자기계발서란 그것을 읽고 따르는 인생을 무지막지한 중압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노예상태로 몰아넣는 채찍질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일반 대중에게 호응을 일으키는 이유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율법적 본성 때문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아침 형 인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긍정의 힘 등등 성공을 향해 달리라는 모든 책이 예외 없이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율법 책입니다.
잘 살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안 읽고 대신 인문학 서적을 읽겠다는 학생의 발언은 참으로 이 시대에 상징적인 의미를 던지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성공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눌려서 자기계발의 율법에 매여 사는 삶 보다는, 인문학 속에 들어있는 지혜와 지식을 사랑하는 동안에 그 지식과 지혜들이 이끄는 대로 살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의 율법에 노예가 된 평범한 오리들이 그러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지식과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하늘을 나는 백조를 미워하는 형상입니다.
4) 오늘 본문은 바울과 유대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총독 베스도의 모습을 통해 미운 오리 새끼의 동화를 실제 이야기로서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 새로이 부임한 총독 베스도에게는 첫 번째 난제가 주어진 셈입니다. 유대인들은 2년이 지나도록 구금 상태에 있는 사도바울을 죽이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런데 총독 베스도로서는 아무리 묻고 듣고 따져 봐도 바울이 죽어야 할 만큼 뭘 잘못했는지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러는 중에 바울은 유대인들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를 결정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이제 총독으로서 자기가 할 일은 로마시민인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 또 무슨 고민이 남았다는 겁니까? 보내면 되지요.
그 고민은 다름 아니라 도저히 황제에게 보내는 공소장에 바울의 죄목을 기록할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렇지요. 죄목 없는 공소장이 있을 수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를 방문 중인 아그립바 왕의 도움을 청하고 있는 장면이 본문에 소개 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로마제국의 유대 통이었던 아그립바라면 이 유대인들 끼리의 싸움판에 대해 뭔가 명쾌하고 야무진 결론을 내릴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한 것이지요.
5) 신임 총독 베스도의 이런 고민은 대체 어디서 생긴 것일까요? 그것은 문제의 핵심이 바로 유대인들의 미움이라는 감정에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미움의 문제를 총독으로서 로마의 법이라는 합리성으로 해결해야만 하는데서 고민이 나온 겁니다. 미움을 무슨 수로 합법적으로 매듭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기가 힘든 까닭은 미움은 종종 합법성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왜 이렇게 까지 미운 오리새끼가 된 것일까요? 바로 율법 때문입니다. 율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달랐던 거지요. 행전 21장에서 야고보 장로가 바울을 벼르고 있는 유대인들의 보복을 염려하며 바울에게 한 말입니다.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조차 이런 정도라면 하물며 아예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유대인들의 바울을 향한 시선이 어떠했겠습니까? 증오 그 자체이지요. 미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으면 율법에 매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의에 들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궁극적인 샬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바울의 전도가 도대체 용납이 안 되는 것이었지요. 혹시 달리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즉 궁극적인 행복을 위한 길이 복음뿐인데 이 복음은 적지 않은 돈이 지불되어야만 내 것이 될 수 있다 했거나 아니면 아침 형 인간이라야 된다거나 혹은 7가지 습관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으면 결코 이렇게 까지는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있는 힘을 다해 지켜야할 율법을 제쳐 놓고도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정말 견디게 어려울 정도로 시건방져 보였던 겁니다. 하기야 어쭙지않게 여겨지는 사람이 시건방을 떨어댈 때처럼 사람의 마음에서 짜증나게 하고 싫다는 감정을 강하게 유발시키는 일이 어디 다시 있겠습니까?
6) 유대인들이 바울을 볼 때 소위 용납할 수가 없는 시건방의 정점은 율법에 대한 태도를 넘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동행을 언급하는 점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대제사장이나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만나 뵐까 말까 하는 하나님을 어쭙지않은 자신의 개인사 안으로 깊이 끌어 들이고 있는 겁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광포한 폭도로 돌변하여 그를 돌로 쳐 죽이던 순간도 스데반이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과 우편의 주를 본다고 할 때였습니다. 어쭙지않아 보이는데 자기 눈앞에 하늘이 열렸다는 겁니다. 용납이 안 되는 시건방을 떨어 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시건방져 보여도 이것이 복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천지를 지으신 주님과의 동행 때문에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율법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살 수가 있는 겁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한 가지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나 지금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잘 살기 위해 자기계발서들이 제안하는 모든 율법들을 개의치 않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이미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공은 예수님이 부활 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하늘나라가 지금 이 땅 위에서 나의 가장 우선적인 현실이 됨으로 주어지는 성공입니다. 가정이나 사업이나 내 개인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해서 내가 마음으로 처음 만나는 현실은 천국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실제로 나와 함께하시고 평강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자기계발서들의 율법을 개의치 않는 이유의 둘째는 내가 행해야 할 것은 자기계발을 위한 원칙이나 규칙 같은 율법들이 아닙니다. 대신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면서 그때그때 말씀하시고 지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매이지 않고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인격에 매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허물지 않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복음 안에서 성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삶을 세상은 아주 못 마땅해 합니다. 아주 낯설어 합니다. 아주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 버립니다. 세상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7) 바울은 미운 오리 새끼였습니다.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오리들 틈에서 이미 성공한 자로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성공을 이루려면 문자로 주어지는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강박증 오리들 사이에서 미움 받는 시건방진 오리 새끼였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문자나 원칙이나 습관 대신에 그때그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백조와 오리만큼이나 달라야 합니다. ㅇㅇ해야 한다는 모든 율법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대신에 오직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 한 시도 떨어지지 말고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공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어쩔 수없이 이 세상에서 율법에 매여 사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 된 모습으로 보여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차별화 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분명히 우리는 복음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일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서 시건방져 보여 미움을 받더라도 진정한 백조들이 되어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