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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1:1-3) 그래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 박신 목사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1-3)
아주 이상한 선지자
요나서는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 간 이야기로 시작하여서 하나님께 크게 혼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가 폭풍우로 배가 난파될 지경에서 제물로 바쳐지겠다고 자진해서 나선 것과 고래 배 속에서도 간절히 기도해서 구원 받은 의로운 면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는 전혀 선지자답지 못한 모습으로 남에게 꺼내놓기에 아주 부끄러운 내용입니다.
무슨 책이든 서두에는 그 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제시합니다. 요나가 도망가게 된 이유와 배경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요나서 전체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로 직통계시를 받았습니다. 요나도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2절)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한 문장으로 똑똑히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입장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 귀에 대놓고 직접 말한 명령을 거절한다는 것은 겁이 나서라도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주일 예배에 한두 번만 빠져도 이러다 하나님께 큰 벌을 받는 것은 아닌지 나도 모르게 염려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나에겐 인간적으로 동정해줄 여지가 있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여호와를 믿으라고 선포하다간 당장 돌에 맞아 죽을 것이 너무 뻔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이슬람 국가에 가서 모스크 앞에 서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예수를 믿으라고 큰소리로 노방전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도 당장 잡혀가 큰 곤욕을 치를 텐데 당시는 그 현장에서 돌이나 칼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이는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로 아무리 하나님의 직접 명령을 받았어도 당장 실천하기 힘듭니다. 베드로도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자기 목숨이 달아날 판국이 되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 배반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은 죽지 않으려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기 바빴고 그나마 믿음이 가장 좋은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으면 두려워서라도 그대로 행할 것이라는 말은 너무나 가난하고 치사하며 어리석기까지 한 자신의 영적실태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요나로선 일단 자기 생명부터 건져야만 했습니다. 틀림없이 여호와께 몇 번이고 저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수록 더 확고히 명령하시면서 당신께서 반드시 지켜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니느웨로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니느웨와 그 백성들이 요나에겐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것입니다. 니느웨는 당시 중동을 지배하는 이방의 최강대국 앗수르의 수도였고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오래 동안 아주 잔인하게 괴롭혀 왔던 철천지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로선 여호와가 그들을 당장 심판해주어도 성이 안 찰 판인데 오히려 회개시켜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하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고 심정적으로도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앗수르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지녔습니다. 그들의 강대함과 잔인함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우상을 섬기는 사악한 민족이라고 크게 멸시했습니다. 거기다 요나가 활동하던 여로보암 2세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합 왕조 다음으로 국력이 강력해진 제2의 황금시기였습니다. 모처럼 앗수르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겠다는 자부심이 생긴 판국이라 요나는 더더욱 니느웨로 가기 싫었을 것입니다.
요나로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더 부강하게 만들어서 니느웨를 쳐서 승리하게 만들든지 최소한 니느웨의 침공을 막아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것이 당신의 백성에게 행할 바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그들도 사랑으로 품어주겠다고 하니까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니느웨를 심판해야만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자기 나름의 강력한 방식으로 데모하는 셈입니다.
거기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지경 내에서만 당신의 권능을 역사하신다는 미숙한 믿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여호와가 상천하지의 유일한 하나님으로 세상만사를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체험한 적이 없어서 실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곧바로 시행하지 않고 시간을 끌다 보면 하나님도 체념하거나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결국 요나가 택한 최선의 방안 아니 궁여지책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지중해 연안이 세상의 전부였기에 스페인 남서쪽 끝에 있는 다시스가 땅의 끝으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은 그가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그곳으로 가는 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3절) 그로선 다시스로 가는 것이 여호와가 당신의 뜻은 아니라도 묵인해 주시나보다, 혹은 최소한 자신에게 요행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아무에게나 명령을 주었다가 거절되면 또 다른 사람을 택해서 동일한 메시지를 다시 주실 리는 결코 없습니다. 반드시 요나에게 그렇게 명령했어야 했고 요나도 그 말씀을 그대로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듣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기어이 그를 굴복시켜서 순종토록 만든 것입니다.
요나로선 실패했다고 여겼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요나를 반드시 당신의 일에 들어 쓰고 싶었고 당신께서 그대로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로선 그만한 성공도 없습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며 반대로 인간의 성공도 하나님의 성공이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요나에게 강요하신 첫째 이유
이젠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는 요나더러 기어이 니느웨로 보내려 하신 이유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처한 모든 상황과 개인적인 믿음과 생각을 잘 알면서도 명령하셨습니다. 이번에도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요나의 결정이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점부터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당시로선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최고로 의로운 요나일 텐데도 하나님이 지금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앗수르에게 계속 괴롭힘을 당하게 만들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방관한 책임이 있는데도 그 악인들을 벌주지 않겠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세상에서 의인은 항상 억울하게 손해 희생당하기만 하는 반면에 악인들은 떵떵거리며 풍요하게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은 왜 손을 놓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요나가 생각하기에는 소를 도둑맞고 난 후에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요나와는 정반대로 그들의 죄악에 당신의 책임이 전혀 없고 니느웨가 당신을 대적하여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자기만 세상에서 최고가 되어야만 성에 차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자기가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하게 차지하려는 싸움이 끊임없이 지속됨으로써 경쟁 시기 질투 분노 저주 도둑 살인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세상의 죄악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일 뿐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짜로 제공한 잘못 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서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신자들 중에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아예 사탄도 없애고, 자유의지도 주지 말고 악이 생길 소지를 완전 차단해야 하지 않느냐고 종종 따집니다. 이런 억지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럼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아니면 짐승이나 기계나 물질로 만들었어야만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자동차를 처음 만든 자는 과속이나 부주의로 사고가 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만들기 전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동차는 인간에게 교통과 수송에서 너무나 유익하고 편리한 도구가 될 것이므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사고에 대비해서 속도계와 제동장치와 안전벨트 등을 달고 관련 교통법규도 당국과 의논해서 제정한 후에 차를 만들었습니다.
운전자로선 자동차를 항상 잘 정비하고 교통법규와 안전속도를 지키면서 방어운전을 하면 평생 무사고로 자동차의 모든 유익을 활용하면서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 규정대로 따르지 않음으로써 사고를 낸 자가 아예 자동차를 만들지 않았으면 이런 불행은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따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떼입니다. 요컨대 사탄 같은 나쁜 친구의 꾐에 넘어간 것은 본인의 잘못이지 그 나쁜 친구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인간을 조종 미혹할 줄 알았고 인간이 넘어갈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필립 얀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줄 알면서도 인간에게 당신과 사탄 중에 누구를 따를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던 배경은 당신의 독생자를 죄에 찌든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여서 그 죄 값을 치르게 하려는 완벽한 구원 계획을 태초부터 마련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니느웨가 이스라엘을 악독하게 괴롭힌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죄 때문이지 하나님의 탓이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그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당신의 거룩한 율법을 수여할 때부터 그대로 순종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율법을 주시기 전부터 창세기의 네 족장의 일생에 풍성한 은혜로 개입하셨고 또 노예 살이하던 애굽에서 큰 기적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얼마나 큰 권능으로 함께 하시는지 확실하고도 가시적인 증거들을 넘치도록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현실적 형통과 세속적 쾌락에 눈이 어두워서 여호와를 고의적으로 배반하며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숭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며 율법은 형식적 껍데기로 방치했습니다. 요나가 지금 니느웨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고 원망할 계제가 전혀 아닙니다.
요나에게 강요하신 진짜 이유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신 정작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앗수르와 이스라엘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당신의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요나가 의심 원망하는 것과는 달리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당신은 절대 손을 놓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를 타락시킨 것은 인간이요 그런 상황에서 손을 놓고 있는 것도 당신이 아니라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경쟁하듯이 죄악을 만들어 내고선 그 부정적인 폐해에 대해 모두가 하나 같이 남들 탓으로 돌리며 서로 책임 전가하고 있습니다. 힘이 센 자만이 정의이며 힘이 약한 자도 자기들 잘못은 잊고 하나님에게 억울하다고 온갖 핑계를 대며 불평 원망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런 상태를 버려두지 않고 지금도 요나를 통해 적극 개입하시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만약 니느웨가 정말로 회개하면 이스라엘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니까 요나의 고민도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더더욱 요나가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잘못될 리는 절대로 없으며 단지 인간의 것보다 훨씬 높아서 다를 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가도 여전히 세상의 절대적인 주관자이자 거룩한 통치자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들에게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죄악은 전적으로 인간의 잘못이자 책임이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분은 자나 깨나 인간의 구원만 생각하고 계십니다. 모든 병은 인간이 만들어 내었음에도 하나님이 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자기들 죄로 죽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잔인하고 악독한 죄인들까지 구원해주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고 의롭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 땅은 사실상 이스라엘까지 포함해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등을 진 상태이며 엄밀히 말해서 원수의 자리에서 그분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은혜의 구원을 받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도 알지도 못하며 그전에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미혹 아래 죄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니느웨를 그대로 두면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절망과 죽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지었는데 어떻게 내가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요나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셈입니다.
“너희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정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다. 선지자로서 네 수고를 기억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래도 내가 준 율법과 제사는 물론 신앙의 유전이 있으며 선지자들도 너희 속에 보내지 않았느냐? 그러나 저들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사탄의 궤계와 모략과 농락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않느냐? 과연 내 심정이 어떠한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았느냐? 내가 손을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세상에는 흑암과 절망과 죽음과 죄악뿐이라 해도 하나님 안에선 반드시 빛과 소망과 생명과 의가 넘친다고, 그래서 세상 문제의 해답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가서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창조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간 세상을 향한 본심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이 단 한 순간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노아,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하나님을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의 궁극적인 말로가 어떠한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려고 미리 보여준 증거였습니다. 그런 증거는 역사적으로 몇 번이면 족하지 매번 보일 수는 없습니다. 요나 생각대로 하자면 세계 도처에서 매일 폭죽 터지듯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져 내려야만 합니다.
예수님도 역사상 최고의 사탄의 도성인 로마를 한 번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 종교적인 의에만 능통한 바리새인들이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한지 물었을 때에 주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오늘 주제와 연결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가이사에게 속한 자 둘로만 나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하나님의 선의 열매를 맺게 마련이나 가이사에게 속한 자들은 가이사의 악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너희가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면 가이사에 속한 자를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요나더러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명령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원수도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악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에도 하나님은 요나서와 동일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우선 이 사태를 절대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잘못이자 책임입니다. 왜 그냥 두고 보시느냐고 의심 불평할 조건과 자격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최고로 고급한 이성을 주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자유의지도 주셨습니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부하게 쓸 수 있도록 공짜 은혜로 다 베풀었습니다. 지금의 인간 사회는 모든 면에서 유사 이래로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일반 서민의 생활이 고대의 왕들보다 더 풍요롭고 호사스러울 정도입니다.
문제는 인간은 너무나 치사하고 연약하고 완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의로워지고 싶은 소망은 다 있으나 막상 실천하려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지금껏 체험했듯이 착한 일은 쥐어짜듯이 노력해야 가뭄에 콩 나듯이 겨우 행하는 반면에 악한 일은 너무나 자주 손쉽게 저지르면서도 대부분 모르고 지나칩니다.
이는 삶과 여건의 풍요와 궁핍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평온 때에 착해지고 고난 때에 악해질 것 같으나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고 지금도 여로보암 2세 통치 하에 이스라엘이 강력해졌는데도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고난이 닥쳐야 뒤늦게나마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새삼스럽게 회개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 전부가 인간죄악의 결과입니다. 결국 인간사회 불행은 전적으로 인간의 발명품입니다.
예컨대 광산 채굴에 효율성을 높이려고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으나 전쟁 살상 무기로 바꾼 것은 인간의 탐욕과 죄악입니다. 큐리 부인이 질병을 치료한 목적으로 엑스레이를 발견했으나 세상 권력은 핵폭탄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플레밍이 하나님이 섭리로 마련해 놓은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해서 획기적인 질병치료법을 개발했으나 인간끼리의 무한경쟁으로 자연을 계속 파괴시키는 바람에 슈퍼바이러스가 생겼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으나 그와 동시에 인간의 죄악으로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골칫거리로 바꾸어버리지 않은 것도 하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손발을 편하게 움직이려다가 거꾸로 스스로 족쇄를 채워버린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병균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왜 이렇게 걷잡을 수 없게 번졌는지 그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조사 중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탐욕과 그로 인한 기후변화가 근본원인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처음에 중국에서 쉬쉬한 것은 분명히 정치적 모략이었고, 지금 미국에서 마스크를 써야한다 안 써도 된다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고 비과학적인 논쟁을 하는 것도 정치적 당파적 이익 때문입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
더 큰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나뉜 사람들끼리 이제는 서로를 완전히 원수 취급하고 있습니다. 요나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메시지와 정반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조금 죄송한 표현이지만 세상이 완전히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탄의 농락에 춤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아질 기미는 없고 앞으로는 더 그럴 것 같습니다. 자연재앙의 세기와 피해는 엄청 심해질 것이며 더 심한 바이러스들이 생길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완전히 식어졌습니다. 요나는 그나마 니느웨를 미워할 타당한 명분은 있었습니다. 지금은 단지 서로 의견을 달리 한다는 이유로, 아니 내가 저들보다 더 선하기에 저들은 악한 것이며 그래서 원수 삼아 마땅하다는 식이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었던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이 그러하니 다른 곳은 더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공의는 한갓 쓰레기일 뿐입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며 사람의 생각하는 바는 어려서부터 죄악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만 따지면 지금 당장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공의는 어리석고 완악한 인간이 지레짐작한 것일 뿐 정작 하나님의 공의는 그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에겐 당신의 긍휼과 함께 할 때만 당신의 공의가 완성됩니다. 다시 어폐가 있지만 긍휼 없는 공의는 하나님께는 오히려 죄악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가 어떤 잘못을 범해도 그 사랑에 변함이 없으신 그분에게만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를 향한 소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너희는 이미 영생을 소유했으니 영원한 죽음은 절대 없다, 그러나 아직 십자가를 모르는 저 불쌍한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니, 네가 가서 십자가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지 않겠니, 비록 그곳이 무슬림 지역이든, 공산국가 평양이든, 철천지원수 일본 도꾜든지 말이다. 네가 내 대신 제발 가서 내 애끓는 뜻을 전해 달라. 코로나로 보듯이 이제 정말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하지 않겠느냐?”
이참에 세상 권력이 교회를 탄압하려는 기색이 있으며 유독 개신교가 누명을 쓰는 억울한 측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억울하게 여겨선 안 됩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세상은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기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인 기독교에만 항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자연스런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런 핍박을 받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의 신자 됨을 의심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 받음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인간 개인과 공동체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 절대적 진리는 오직 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작금 그 진리를 알고 믿는 신자들마저 도대체 중심을 못 잡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더 그러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진리대로 사는 아름답고 거룩한, 특별히 지금은 담대한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공적 예배 같은 종교적 의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또 반드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만 살고 죽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내는 정도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관심과 긍휼이 가는 사람 장소 사건 시간과 똑같이 신자의 마음과 관심과 긍휼도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요나에게 당신의 마음이 니느웨로 가니까 그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기준으로만 판단하고선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대놓고 거부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하고 자신의 의로움도 증명하려는 것 같으나 사실은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과 욕심과 분노와 저주를 실현하려 한 것입니다.
코로나가 전적으로 인간의 죄악과 탐욕의 결과라면 그 해결책은 모든 인간이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자더러 내 대신 니느웨로 빨리 가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도 궁극적으로는 신자가 나서야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지금 현실이 힘들어도 예수님 없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더 힘들고 정신적 영적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기면서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나누지 않으면 그들에겐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혹시 지금 신자들마저 하나님이 이 사태에 손을 놓고 있다고 여기고 두려워서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사탄에게 지고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