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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6: 18 전능하신 주의 말씀
고후 6: 18 전능하신 주의 말씀 -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확히 구별된다.
* 요일 3: 10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세상과 교회의 선이 명확할 때 교회는 강력한 단체가 될 것이다. 교회가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특권이요 힘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게 될 때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결국 세상에 짓밟히게 될 것이다.
1]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본 절은 바울이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 삼하 7: 14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사 43: 6 -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 렘 31: 9 -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이 삼하 7: 14과 사 43: 6을 나름대로 수정 인용함으로써 '남자'(*, 휘우스, '아들')와 '여자'(*, 뒤가테라스, '딸')를 명시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때 남자들과 여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갖게 된다.
* 갈 3: 28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 4: 5-6 –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엡 2: 18 -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 전능하신 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판토크라토르'(*)는 삼하 7: 8. 렘 51: 7등에 나오는 '야웨 쉐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에 대한 70인 역(LXX)의 인용으로 바울 서신에서는 본 절에서만 발견된다.
* 삼하 7: 8 -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 렘 51: 7 -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Martin).
(2) 주의 말씀
주의 말씀은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했던 무한한 능력의 힘을 의미한다.
3] 자신을 깨끗하게 : 박조준 목사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아주 간곡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11절 이하에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을 중심으로 사랑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넓히라고 간곡히 권면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마음의 관계입니다. 10년을 같이 지내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내 마음을 넓혀야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체험하는 바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넓어야 하는데 실제는 그와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납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에 품고 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넓어서 누구나 용납하고, 용서하고, 품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악과 타협하고 세상을 본받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4절 이하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7장 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 호소합니다.
이처럼 더러운 것을 온전히 버리고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생활을 이루겠다는 것은 사도 시대 이후의 모든 경건한 성도들의 한결 같은 염원이요, 노력이었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교회가 침체되었던 중고시대에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자기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려고 애쓴 수도원 제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특히 카타리(Cathari, 결백)라는 일종의 교파가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마틴 루터나 쯔빙글리, 그리고 요한 칼빈이 종교개혁을 한 것도 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할 때 생명력을 가진 새로운 교회, 깨끗한 교회로 변화시켜야겠다는 운동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폴 틸리히가 ‘Protestant Era’에서 말한 ‘종교개혁은 계속 되어야 한다’(Reformation must be continue)라는 말은 옳은 것입니다.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17세기 중엽 영국왕 제임스 1세로부터 찰스 2세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영국 안에서 당시 로마 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영국 국교를 상대로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투쟁한 성도들과 또 이들 중에서 핍박을 피하여 미대륙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주에 교회를 세우고 미국을 건설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소위 퓨리탄(청교도)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독일이나 스위스의 그것과는 그 성질이 달라서, 16세기 헨리 8세 때에는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 국교를 설립했으며, 왕이 교회의 수장(首將)이 되었고, 켄터베리 대감독이 교회를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잔재 다시 말하면 제사의 복장이나 예배 의식 같은 것은 그냥 답습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과 스위스의 제네바의 개혁을 알고 이에 불만을 품고, 이 로마교회의 잔재를 일소하고 순수한 기독교의 확립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영국 국교의 의식주의와 복잡한 성례, 감독 정치 같은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희생의 제물이 된 사람 중에 요한 번연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번연은 영국 국교에 반대한다고 해서 12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새 나라를 건설한 것입니다. 한편 영국 안에서는 크롬웰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청교도들이 가졌던 신앙과 생활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첫째, 그들은 신앙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성경 중심이었습니다. 성경을 무엇보다도 존중하고 애독했습니다. 주후 1611년 제임스 1세가 54인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되어 있었는데, 로마교회에서는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특수한 교육을 받아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아는 사제들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으며, 성경은 사제들의 전용물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임스 왕이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3년만에 완성이 된 최초의 영어성경인 King James Version(흠정역)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을 애독한 청교도들은 생활과 도덕의 표준을 성경에서 찾았고, 교회와 국가의 정치적 표준도 성경에서 얻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역사가 그린이 “영국인은 오직 한 책만 읽는 국민이 되었는데, 그 책은 곧 성경이라”고 할 만큼 성경을 애독하였습니다.
둘째, 그들의 신학 사상은 단순했습니다.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을 통하여 전해진 칼빈주의가 그들의 신학 사상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으로, 사랑과 자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신학 사상을 가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예배도 하나님 중심의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의식주의를 배제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마음으로 신령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예배가 엄격했던지 뉴잉글랜드의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누가 졸든지, 웃든지 하면 벌을 주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런 신앙을 가진 그들은 주일을 엄격히 엄수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레 중 하루를 하나님께 드려 이 날을 하나님의 날로 지키며, 성전에 나아가 예배를 드리고, 예배 드린 후에는 전도하는 것과 위문하는 일에 힘썼고 일체 오락을 금했습니다. 노동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때 표준으로 한다면 요새 성도들은 거의가 책벌받아 마땅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 생활도 아주 엄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지상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놓고 결정할 때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판단이 생기면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고 이를 감행하며, 인간의 권위에 대항했습니다. 그들의 염원은 하나님의 뜻이 가정에, 사회에, 국가와 정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자연히 검소했고, 근면하고 정직하였고, 충성스러웠습니다. 누구나 믿을 만하게 살려고 힘썼습니다. 세상과 타협이 없는 건전하고 깨끗한 생활을 했으며,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이 그들의 윤리 사상의 근본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 가운데는 이처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말씀 따라 살려고 힘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예나 지금이나 이것을 떠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곁길로 나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령, 신신학의 사조가 그런 것입니다. 이 사상은 과학적 분위기에 싸인 현대인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세상과 타협한 신학 사조이기 때문에 자연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합리주의, 인본주의가 그 골자입니다. 이 사상은 고대 교회로부터 나타난 것인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서 2세기에는 노스틱주의, 4세기에는 아리우스주의, 그 후에는 펠라기우스주의, 종교개혁 이후에는 소시니안주의가 생겨 예수는 인간인데 아주 위대한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독일 튜빙겐 대학을 중심으로 현대주의 사상, 신신학 사상이 교회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 믿는 사람의 신앙적인 태도를 흔들리게 하고, 자연히 무력하게 만듭니다. 스트라우스(Strauss) 같은 이는 성경을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예수님의 생활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며, 하나의 신화라고 주장해서 교계에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그는 유물론자, 무신론자로 전락해서 죽었고, 이 사상의 지배를 받은 독일교회는 아주 무력한 교회가 되어 생기를 잃어버려서, 비스마르크나 히틀러에게 좌우되는 교회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신앙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성령이 임하는 것이지 불신하는 태도로, 불경건한 마음으로 연구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고전문학 작품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심령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른 생각하기에, 그 시대 그 시대의 사상과 타협해 가면서 전도하면 신자가 많이 생길 것 같지만 타협해서 얻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죄와 싸우는 데서 회개하는 사람을 많이 얻을 수 있으며, 죄를 책망하지 않으면 귀로 듣기는 좋을지 모르나 회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극우의 사조라 할까, 소위 극단적인 영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성의 요소를 전혀 무시하고 극단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광신 내지 미신에 빠지는 사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자기만이 의롭다는 자휼에 빠져서 기성 교회를 부인하고, 극단적인 문자주의에 빠져서 성경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사소한 문제로 교회의 분열을 꾀하는 일을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양대 강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유물주의 사상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을 타고, 사회 정의와 무산자 해방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간의 최대 본능인 물욕에 호소하여 인간을 짐승처럼 전락시켜 하나님도 모르는 자리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소위 세속주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과 세상 일을 타협하려고 해서 세속 생활과 같은 오락과 향락을 마음껏 누리며 예수도 믿어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넓은 길을 가면서 예수를 믿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7장 1절에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소위 오염의 시대입니다. 공기 오염, 물의 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체와 생명을 위협하는 오염 이외에 인간의 생명 전체를 위협하는 오염 문제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오염입니다.
사상적으로는 유물주의의 오염, 무신론의 오염, 사신론의 오염, 공산주의의 오염, 인간천시 사상의 오염 등 갖가지 사상적인 오염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비인간화의 시대가 되어 갑니다. 이와 같은 사상적인 오염은 또한 도덕적인 오염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부정 부패의 오염, 허위와 가식의 오염, 불신 풍조의 오염, 반항 풍조의 오염, 폭력주의의 오염, 사치와 향락의 오염, 음란과 방탕의 오염, 이혼과 가정 파탄의 오염, 나쁜 유행의 오염, 술과 담배의 오염 등 오염이 범람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의 영적 분위기는 사실 공기 오염이나 물의 오염보다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오염 시대에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경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 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 구체적인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4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되리요” 했습니다. 또한 신명기 22장 10절에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 한 민족이요, 한 나라의 국민이요, 한 사회의 일원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불신자는 벨리알에게 속합니다. 신자는 빛의 아들이요, 불신자는 어두움의 아들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이요 불신자는 그 반대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도 당시의 불신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버지 마귀에게서 났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신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성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다른 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불신자들과는 절교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회나 국가의 일에 협력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무슨 사업을 같이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는 어디서나 성도의 본분을 지켜서 성결한 생활을 하며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다’의 히브리어의 근본 뜻은 ‘무엇을 벤다’는 뜻입니다. 갈라놓는다는 말입니다. 보통 집에서 갈라내어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하나님께 드린 집을 거룩한 집, 곧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어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곧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그의 고향과 친척에서 따로 나와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창 12:1). 모두 성별의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 성도가 이 생활을 못하면 맛 잃은 소금으로 전락합니다. 우리 성도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인데 가증한 죄악과 우상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므낫세 왕 때 성전 뜰에 아세라 목상과 일월 성신을 숭배하는 단을 쌓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시아 왕이 이런 모든 우상을 철폐한 것과 같이 모든 더러운 죄악을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전에 다니엘이 바벨론에 잡혀가 우상을 숭배하는 바벨론 궁전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같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런 결심이 다니엘로 하여금 더러운 영적 오염 속에서 깨끗한 신앙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 ‘나는 이미 죄에 오염이 되었으니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러한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시면 요한 1서 1장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 회개와 신앙은 우리를 깨끗케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오염된 세상에서 스스로 자신을 깨끗이 보존할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더러운 세상을 깨끗이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맨 마지막 절에 보면 “가이사 집에 있는 성도들이 문안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때 가이사는 네로 황제였습니다. 그 당시 가이사의 궁중은 가장 음란하고, 잔인하고, 포악한 곳이었습니다. 전 로마 제국의 오염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그 몸을 더럽히지 아니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점점 그 수가 늘어나 결국 콘스탄틴 대제 때 이르러서는 온 궁중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이 기독교 나라가 되었습니다.
죽은 고기는 물결에 밀려 내려가고 짠 물에는 절여지고 맙니다. 그러나 산 물고기는 짠 물에 살아도 짠 물이 들지 않고, 폭포수라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죽은 물고기가 되지 말고 산 물고기가 되어야겠습니다. 한란계(Thermometer)가 되지 말고, 정온계(Thermostat)가 되십시다. 한란계는 방안의 온도대로 변합니다. 그러나 정온계는 온도 조절기가 정하는 대로 방안의 온도가 조절이 됩니다.
영적으로 오염이 심해 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오염의 분위기를 변하게 할 수 있는 참된 성도가 되십시다.
본 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때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불의와 악을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모든 성경 교훈을 온전히 순종하자.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고난으로 감당하자.
우리 주님의 지상 생활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했던 삶이셨다.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은 환난, 궁핍, 매 맞음, 수고, 비방을 당했던 사역이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고난을 감수하고 죽도록 충성하기를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고난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셋째,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자.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믿는 자와의 교제가 중요하다.
악은 누룩같이 퍼진다. 잘못된 교제는 신자 개인과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킨다. 우리는 잘못된 교제를 피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오염의 시대이다. 공기의 오염, 물의 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육체와 생명을 위협하는 오염 이외에 인간의 생명 전체를 위협하는 오염 문제가 있다. 소위 영적 오염이다.
사상적으로는 유물주의의 오염, 무신론의 오염, 사신론의 오염, 공산주의의 오염, 인간 천시 사상의 오염같은 갖가지 사상적인 오염이 있다. 그러므로 비인간화의 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인 오염은 도덕적인 오염을 파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부정부패의 오염, 허위와 가식의 오염, 불신 풍조의 오염, 폭력주의의 오염, 사치와 향락의 오염, 음란과 방탕의 오염, 이혼과 가정 파탄의 오염, 나쁜 유행의 오염, 술과 담배, 마약의 오염 등 오염이 범람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이 사회는 공기 오염이나 물의 오염보다 매우 심각하다. 이런 오염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경의 교훈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