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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떤 여자빨치산의 죽음
"대장님, 대장님, 저기 빨치산 시, 시체가 있습니다." 하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시체 한두 번 봤나." 심재모는 모자 속에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여잔데, 아주 이상하게 죽어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잠자는 것처럼 앉아서 죽어 있는데, 아주 희한합니다." "그래? 가보자." 무르춤해 있던 하사는 얼굴이 밝아지며 앞장섰다. 등성이에는 분대원들이 둘러서서 시끌덤벙하게 떠들고 있었다. "야, 비켜, 비켜. 대장님 오신다." 하사의 외침에 떠들던 소리가 뚝 멎으며 사병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시체가 드러났다. 심재모는 긴 다리의 보폭을 넓히며 다가갔다.
하사의 말마따나 여자는 마치 잠이라도 든 것처럼 앉아서 죽어 있었다. 목 높이의 돌덩이가 그 여자의 등을 받쳐주고 있었다. 여자는 공목 누비저고리에 낡은 몸빼를 입고 있었고, 때 낀 버선발에 코 째진 검정 고무신을 새끼줄로 감발하고 있었다. 목에는 얼금얼금짜인 무명목도리가 겹으로 감겨 있었고, 이미 돌의 차갑고도 딱딱한 느낌처럼 굳은 핏기 없는 얼굴은 의외로 앳되어 보였다. 어딘가 배운 티가 나는 얼굴에는 묘한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그 웃음기를 느끼는 순간 심재모의 가슴은 섬뜩해졌다. 그의 눈은 재빨리 여자가 뻗치고 있는 왼쪽 다리로 다시 옮겨갔다. 허벅지와 무릎 위가 새끼줄로 두 겹씩 묶여 있었고, 그 가운데 총상이 나 있었다. 그 여자가 죽게 된 근본적 원인이었고, 그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심재모의 가슴에 차가운 전율을 일으켰다. 심재모의 눈길은 앞으로 모아잡은 그 여자의 손으로 옮겨졌다. 자그마한 두 손은 산중 추위를 견뎌내느라고 수 없이 많은 실금이 피를 물고 터 있었고, 그 손은 무슨 책인가를 감싸잡고 있었다.
심재모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그것이 무슨 책인가를 알아내려고 했다. 여자의 손가락 사이로 해득되는 글씨는 '선,공,산' 자였고 다른 것은 가려서 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삼아 책을 빼내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을 감싸잡고 있는 손의 모양으로 보아 책이 쉽게 빠질 것 같지 않았고, 억지로 빼내려고 하면 손가락 마디마디를 뚝뚝 부러뜨려야 될것만 같았던 것이다.
선, 공, 산? 선, 공, 산...? 연이어진 그 세 글자를 곱씹으며 심재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 공, 산...? 그때 머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사' 였다. 총상과 조선공산당사와 미묘한 웃음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었다. 심재모는 다시 한줄기 찬바람이 가슴을 훑는 걸 느끼며 새삼스럽게 여자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여자야. 저 아랫동네를 내려다보고 앉아서 죽은 거야." 어느 사병의 말이었다. 그말이 심재모의 귀에 잡혔다. 그는 여자한테서 눈을 돌려 산 아래 여기저기를 살폈다. 여자가 앉은 정면 저 아래 골짜기로 이삼십 호의 마을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였다. 비로소 심재모의 머리에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엮어졌다.
여자는 어디선가 총을 맞고 낙오되어 부대를 찾아 이 지점까지 와서 주저앉은 것이다.
그리고, 마을로 내려가고 싶은 유혹을 당사를 껴안고 이겨내며 혼자 죽어간 것이다.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고 했다.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 맞아죽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투쟁의 긍지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야말로 그 세 가지 죽음을 차례로 죽어간 것이다.
당사를 감싸잡고 묘한 웃음까지 피우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불가사의함에 심재모는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총을 맞고 죽어가는 순간에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남자들을 보았을 때보다 몇 갑절 더 불가사의함이 컸다. 사상이라는 것과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갈수록 알 수가 없이 난해해지는 것 같았다.
"이걸 어쩔까요?" 처음의 하사가 물었다. "그대로 두고, 다들 능선에서 내려서라. 작전계속이다." 심재모는 앞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시체를 그대로 두게 한 건, 묻어주기도 이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죽기로 작정한 여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이미 적일 수 없는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저 여잔 어느 부대였을까?" "보나마나 김달삼 부대지." "그럼 여자도 넘어왔단 말야?" "그야 지방 빨갱이로 합세한 거겠지." "저런 여자한테 걸렸다간 국물도 없었겠다." "저런 여자한테 장가들면 더 난리지." "왜?" "저리 독한 여자가 좆뿌리를 그냥 남겨놓겠어?" "히히히..." "잡담 마라!" 심재모가 내쏘았다. 말소리가 뚝 끊기고, 일월 하순의 살찢어지는 추위를 실어나르는 거센 바람 속에 어디선가 쏜 총소리가 메아리와 함께 묻어왔다.
염상진은 비상선의 전갈을 받았다. 급히 도당을 구하라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의 사족도 설명도 붙어 있지 않은 그 짧은 구원요청은 도당이 위기에 몰려 있다는 사실과, 신속한 행동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부대원을 모두 모았다. 스물일곱이었다. 동상이 심하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 아홉을 뺐다. 거기에 사령관 주문철도 포함되었다. 그는 장딴지에 총상을 입고 있었다.
"나가 꼭 가야는디 요걸 위째야 쓰겄소." 주문철은 염상진의 팔을 꽉 붙들며 아랫입술을 물고 한동안 있더니, "도당꺼지 당허는 판에 게우 열여덟으로..." 침통한 얼굴로 말을 잇지못했다. "다녀올 동안 몸이나 잘 간수하세요. 가다가 군당 병력이라도 만나게 되면 포함시켜야죠." 염상진은 일부러 기운차게 말했다. "그리라도 되먼 좋겄고. 조심허씨요." 선요원을 앞세운 염상진은 잠시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했다. 혹독한 추위에 손가락은 마비가 되는데도 가슴팍에서는 땀이 내맬 지경이었다.
가장 안전하게 보존되어야 할 도당까지 위기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귀결인지 몰랐다. 이쪽의 병력이 줄어들면 그만큼 적의 세력은 강해지고, 활동범위도 넓어지게 마련이었다. 소모된 병력을 계속 보충하는 적과 그렇지 못한 이쪽과의 힘의 상대성이었다. 도당이 위기에 빠진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투쟁의 절망상태를 의식하게 했다. 조계산지구에 국한하더라도 석달 동안의 병력손실이 백오십여 명이었다. 정확한 파악은 할 수 없지만 다른 지구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런 결과는 더 말할것 없는 참담함 이었다. 지금 살아 있는 군당이 몇 개나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여순병란을 기점으로 지하투쟁으로 전환된지 일년 삼개월만의 결과였다. 지리산을 거점으로 삼은 병란의 주력부대와 공개투쟁으로 들어간 지방당의 병력은 현재 얼마나 살아남아 있을까. 염상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생각에 제동을 걸거나, 떼쳐내려는 순간적인 행위였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괴로움과 고통과 회의가 밀어닥쳤던 것이다. 투쟁에 따르는 육체적 고통이야 오히려 혁명의욕을 고취시켜주는 자극이고 보람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인명손실은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고 아픔이었다. 그건 승리가 보장된 희생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회의를 키우지 않기 위하여 그 생각을 의식적으로 지우고 몰아내려했다.
도당의 피해는 또다시 염상진을 참담한 늪으로 빠뜨렸다. 도당 보위병력은 거의 전사상태였고, 간부들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있었다. 왼쪽어깨를 크게 다친 정하섭이 그 속에 끼여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염상진이 정하섭의 손을 잡았다. "수류탄 파편에 맞았습니다." "아직 손을 못 썼겠지?" "예에..." "많이 아픈가?" "그저 참을 만합니다." 정하섭이 고통스러움이 역연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그 억지웃음이 염상진의 가슴을 긁어내렸다.
"조금만 더 참게, 내가 어찌 해볼 것이니." 염상진은 불쑥 말했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하섭을 치료시켜야 된다는 생각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 "다시 백운산으로 이동합시다." 도당위원장의 결정이었다.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도당은 어차피 옮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적에게 그 위치가 일단 노출된 이상 신속한 대처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므로 적이 다시 공격해오는 경우 방어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이미 떠나왔던 백운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현명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도당의 비트를 정하는데에는 백운산만한 산이 없었고, 그곳은 적의 관심으로부터 이미 떠난 있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정하섭을 부축하고 걸었다. 정하섭은 고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염상진 위원장을 만나게 되자 더없이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론 부담을느끼고 있었다. 염상진의 직책이 어떻게 바뀌든 그의 의식 속에서는 항시 '위원장' 이었고, 존경감과 어려움도 중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염상진 위원장 역시 자신에 대한 정이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원은 그 직책여하를 막론하고는 당원 사이는 물론 일반전사에게도 존대를 쓰도록 당규는 엄연히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이론에 밝고, 당규 준수에 철저한 염상진 위원장은 자신에게만은 중학생 때처럼 반말을 쓰고 있었다. 당원이 되고난 다음에 만약 그분이 존대를 썼으면 얼마나 서운하고 쑥스럽고 거리감을 느꼈을 것인가.
"자네 어떤가, 하 동무 부인과 함께 사는 그 무당이 믿을 만한가?" 염상진 위원장이 왜 이런 말을 묻는지 정하섭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원의 이성으로 말인가?" 순간 정하섭은 오른쪽 볼에 찬 기운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은 곧, 사사로운 감정으로 오판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말을 바꾼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정하섭은 힘주어 대답했고, 염상진 쪽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둠이 짙었는데도 정하섭은 염상진 위원장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다 아는 말이지만, 자네 목숨은 자네 혼자만의 것이 아니네. 분명 인민의 것이야. 이 말을 자칭 자유주의자라는 것들은 비웃고 비난하네. 계급주의의 비인간성에 대해서, 다수의 삶의 쓰라림에 대해서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파렴치한 이기주위자들의 의식으로는 당연히 실감할 수 없는 말이지. 그러나 우리는 달라. 나를 버리고 인민의 혁명을 성취하고자 나선 우리에겐 굶주림 앞의 밥처럼 절실하게 실감나는 말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부축하고 부축당하느라고 몸을 밀착시킨 두 사람은 속삭이듯이 그 목소리가 낮았다.
염상진 쪽에서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염상진 위원장이 유격대의 행군 중 삼대 소리수칙을 어겨가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정하섭은 그 뜻을 익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부상을 당해 자신의 마음이 행여 약해지거나 허물어질까봐서였다. 그러니까 그건 소리수칙의 위반이아니라 긴급한 사상교육 실시였던 것이다. 그 소리는 물론 사 보 간격으로 걷고 있는 앞 뒤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고 낮았다. 행군도중, 특히 야간행군에서 총소리, 발소리, 말소리는 절대로 내서는 안되는 규칙이었다. 이쪽을 노출시키지 않음과 동시에 적에게 탐지되지 않으려면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듯 그 규칙을 지켜야 했다. 그 규칙을 어기면 혼자만 죽는것이 아니라 부대원 전부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그건 모택동 동지의 십육자전법과 함께 입산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입시키는 교육이었다. 그 규칙을 위반한 자에게는 당연히 엄중처벌이 내려졌다.
"우리 도당이 특히 규율이 엄한 것은 공개투쟁을 하기 때문이네. 그러나 그 동안 이성문제로 투쟁사업을 파괴해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규정된 시간을 어겨 처형된 선요원은 꼭 한 사람일게." 염상진이 또 말을 끊었다. 나뭇가지들이 세찬 바람에 시달림당하는 소리가 비명처럼, 신음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도당위원장님한테 허락을 받을 테니 그 무당집에서 치료를 받도록 하게." 정하섭은 묵묵히 발만 떼어놓았다. 염상진 위원장은 결국 이 말에 이르기 위하여 앞의 말들을 한 것이었다.
정하섭은 조계산 비트에서 도당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이걸 자애병원 전 원장님한테 전하게." 염상진은 손가락 매듭만큼 작게 접은 종이를 정하섭에게 내밀었다. 정하섭은 선요원을 따라 하대치에게 연결되었다. 하대치는 네 명의 부하와 함께 제석산 중턱을 무질러 도래등 뒷산을 넘었다. 기진맥진한 정하섭을 번갈아가며 업었다. 정하섭은 업히지 않고 제발로 걸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다리는 다리대로 휘청거리며 접혀졌고, 의식은 의식대로 흔들리며 흩어졌다.
"정 동무, 기운채리씨요. 인자 다 왔소." 하대치가 정하섭을 흔들었다. 정하섭은 정신을 다잡았다. 바로 눈앞에 제각이 보였다. "여그 둘이서 그 집 문앞꺼정 델다줄 텡께 거그서부텀은 정 동무가 알아서 혀야 쓰겄소." "아닙니다. 다시 이 제각으로 옮겨야 하니까 누가 한 사람 가서 무당을 불러오는 게 빠를 겁니다. 부인과 아이들을 잠시라도 만나볼 겸 하 동무가 가시는 게 어떻겠어요?" "아니요, 고런 말 마씨요. 처자석 만낼 생각 눈꼽째가리만치도 웂소. 나가 떠난 담에라도 왔다갔다는 말 뻥긋도 허지 마씨요." 하대치의 단호함에 정하섭은그만 민망해지고 말았다. 어두워서 다행이다 싶었다.
"강 동무, 핑허니 댕겨오씨요." 하대치의 말에 강동기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담을 넘어가서 두 번째 방 봉창을 두들기고, 장독대 옆에 섰다가 무당이 나오면 정하섭이가 와 있다고 말하시오." 정하섭은 서둘러 말했다. 남녀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나자 하대치는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뒷걸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을매나 다치셨소." 정하섭을 부축하며 소화가 울음처럼 토해낸 말이었다. "별거 아니요. 그간 잘 있었소?" 정하섭은 가까워진 소화의 몸에서 들꽃냄새와 온기를 함께 느꼈다. "얼렁들어가 누셔야제라." 소화의 부축을 받으며 정하섭은 오래 전부터 시달려온 한기와 함께 온몸의 무게가 아래로만 쏠리는 것 같은 현기증에 휘둘리고 있었다.
"추위, 불을 때 불..." 이불 위로 무너져내리며 정하섭은 신음처럼 소리를 흘렸다. 부상당한 몸으로 그는 이틀동안 산길 백오십 리를 걸어댔던 것이다. 부들부들 떨어대는 그의 몸이 불덩이로 뜨거운 것을 안 소화는 미친 것처럼 부엌으로 내달았다. 아궁이 가득 불을 지피고 방으로 들어와 정하섭의 부상을 확인한 그녀는 입을 가리며 소스라쳤고, 그리고 하얗게 굳어져갔다. 왼쪽 어깨를 싸맨 헝겊과 옷은 굳어진 피로 떡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다치고,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으면 누비솜옷의 왼쪽 등판이 피범벅으로 굳어졌을 것인가. 소화는 주체할 수 없도록 울음이 솟구쳐올랐다.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았지만 울음은 코로 새나오고 눈물로 쏟아져내렸다. 두 손을 포개 입을 가리고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울음이고 눈물이었다. 무릎을 꿇는 소화는 허리를 다 굽혀 얼굴을 무릎께에 묻어 두 손으로감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울고, 어깨가 울고 등줄기가 울고, 마침내 조그맣게 오그라뜨린몸 전체가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그분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의사를 불러올 수 없는 깊은 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절박감에 떠밀리며 부엌으로 가서 나무를 다시 밀어 넣었다.
그분은 자는 것인지 정신을 잃은 것인지 구별을 할 수 없는 채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랫목을 더듬어봐도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소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부끄러움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사람을 살려야 했다. 옛날 이야기에서 들은 방법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을 살려 열녀문이 세워졌다고 했다. 소화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치마가 흘러내리고, 저고리가 떨어져 내렸다. 솜바지를 벗자 속곳이 드러났다.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속곳까지 벗어 던졌다. 알몸이 된 그녀는 이불을 들추고 몸을 디밀었다. 그리고, 때에 절고 냄새나는 옷을 입은 채 떨고 있는 정하섭의 몸을 거침없이 그러나 소중하게 감싸안았다.
신령님, 신령님, 신령님... 전신으로 전해져오는 정하섭의 몸떨림을 수없이 많은 바늘에 찔리는 아픔으로 느끼며 소화는 피 마르게 신령님만을 불렀다. 그러다가 다시 옷을 꿰입고 부엌으로 내달아 불을 돋우어 지폈고, 밥을 안치다가 먹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떠올라 물을 더부어 죽을 끓이기도 했고, 뜨거운 물을 떠다가 수건에 적셔 정하섭의 수척하고 핏기 없는 얼굴을 조금조금 닦아냈다. 바싹 마르고 터진 입술에는 실피가 맺혀 있었고, 헤벌어진 입에서는 단내가 뿜어져나왔다. 베개에도, 요에도 소화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아랫목 장판이 눋도록 불을 땠다. 그분의 몸떨림은 가라앉았지만 몸은 여전히 불덩어리였다. 죽을 끓여놓고 깨웠지만 그분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분은 자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을 놓치고 있었다. 찬물을 떠다가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얹으며 소화는 가슴을 쥐어짰다. 신령님, 신령님, 어서어서 날이 새게, 닭이 울게 해주십소사...
해가 떠오를 무렵 정하섭이 눈을 떴다. 한 대접의 물을 다 마시고난 그는 속주머니에서 작게 접은 종이를 꺼내 소화에게 건넸다. "표 안 나게 병원에 전하시오." 그리고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면목 없습니다. 다시 한번 도와주십시오. 술도가집 아들이 어깨에 파편상을 입었습니다. 전 원장은 쪽지를 내려다본 채 굳은 듯 말이 없었다.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선 소화는 올려뜬 눈으로 그런 전 원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 계세요, 뒤따라갈 테니." 전 원장의 목소리가 낮고 무거웠고, "야아..." 떨려나오는 소리와 함께 소화의 허리가 반으로 접어졌다. 이틀이 지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일천구백오십년 이월 오일이었다.
계엄령 해제를 현실감 있게 알린 것은 극장의 스피커였다. 닷새가 못가 악극단이 밀려들었고, 변사는 그 동안 목에 곰팡이라도 슬었다는 듯 멋대로 감정치장을 한 어조로 신바람나게 떠들어댔다. 볼륨을 한껏 높여댄 스피커의 소리는 장터거리를 넘치고, 읍내 안통을 찌렁찌렁 울려댔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읍민 여어러분, 마침내 바야흐로 계엄령이 해제되어 우리 읍내에 고대하고 고대하던 평화와 자유가 찾어왔습니다. 계엄령 해제를 축하하고, 그 동안 읍민 여어러분들께서 겪으신 고생과 불편을 위로하기 위하야 당 극장에서는 오늘밤 일곱시부터 동방악극단의 <이수일과 심순애>를 무대에 올려 여러분들을 모시기로 한것입니다. 돈에 울고 사랑에 울고, 아아, 사랑이란 그다지도 열매맺기 어려운 쓰라린 형벌이었더란 말이냐.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돈이 운다. 사랑만으로 살 수 없는 인생, 돈만으로도 살 수 없는 인생, 아아 어차피 인생은 쓰라린 고통이 아니더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사랑의 거편, 삼 막 오 장 <이수일과 심수운애>. 오세요, 오세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오시어이 청춘남녀의 기구하고도 한많은 사랑의 쌍곡선을 감상하시라.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눈물의 호화 무대, 미남 미녀 배우들의 애간장 녹이는 명연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일생일대의 대실수, 저승에 가서도 후회하고 또 후회할 거딥니다. 연극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담도 있고, 노래도 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삼 막 오 장의 연극, 배꼽 빠지고 오줌 질금거리게 하는 만담, 가슴 살이 살짝 녹여주는 노래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무대의 입장료는 단돈 백 원, 계엄령 해제 특별할인요금, 봉사가격 단돈 백 원으로..." 변사의 사설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계엄령이 해제되었지만 군인들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만족하고 안심할 만큼 '공비소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판단이었다. '공산비적'을 줄인 '공비'라는 말은지난 일월 초순에 강원도 경찰책임자가 신문기자를 상대로 쓰게 되면서 '빨갱이'란 말을 젖히고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공식용어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반란도배'라는 말의 준말인 '반도'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염상진은 옥산 비트에서 안창민을 만나고 있었다. 염상진은 수염이 더부룩했고, 안창민의 오른쪽 안경다리는 언제 부러져나갔는지 삼끈을 꼬아 귀에 걸고 있었다.
"아무 곡기도 안하고 물만 마셔가며 열 시간에 걸쳐 계속된 도당회의 결과는, " 염상진은 말을 끊고 담배를 깊이 빨아 천천히 연기를 내뿜고는, "지금까지의 투쟁사업을 방법적으로 변경하기로 했소. 적극 투쟁을 피한 조직의 보존. 유지투쟁으로 바꿨소. 열 시간 동안이나 걸린 회의 결과로는 싱거울지 모르나. 회의는 그 결과를 찾기 위해서 열 시간을 소모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투쟁방법의 문제점이나 모순점 등에 대한 강한 비판토론이 벌어졌던 것이오." "대개 어떤 점들 이었나요?" "여러 이야기가 많았는데 큰 줄기를 간추리자면, 투쟁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냐, 이런 지역적 무장투쟁은 옳은 것이었느냐, 당원과 전사를 잃은 것만큼 얻은 것은 무엇이냐, 당의 무력투쟁 채택은 모험주의가 아니었느냐, 하는 것들이었소." "제기될 만한 문제들이긴 하군요. 그러나 시기가 잘 안 맞는 것 같군요. 그런 것들이 제기되었으려면 여순병란 직후 야산대투쟁으로 접어들기 전에 제기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으로서는 결과론밖에 나올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의 투쟁을 실패로 규정하는 것도 그렇고, 당의 무력투쟁노선을 모험주의로 보려는 것도 그렇습니다. 과오에 대한 비판은 마땅히 행해지고 그 책임도 져야 하겠지만, 과오에 대한 명백한 상대적 대안 없이 결과론에만 입각한 과오의 지적이나 비판은 그것이 또 책임전가적 기회주의의 과오를 범하는 행위가 될 겁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더 이상의 방법이 없이 최선을 다하다가 좌절된 투쟁을 실패로 볼 것이냐, 성공으로 볼 것이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될 무젭니다. 이번 투쟁을 실패로 보는 경우 저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엄연히 대장님도, 저도 이렇게 살아 있고, 몇 안되지만 우리 동지들도 살아 있어 군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투쟁은 중단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약 실패로 단정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먼저 죽어간 동지들의 죽음을 모독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짓밟는 반동적 무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앞으로의 전략전술을 세울 때지 결론적 비판을 내릴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장의 부족은 말할 것 없고, 투쟁 방법이나 요령 같은 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나 하는 것은 별개로 검토되어야 할 문제입니다만." 안창민은 숨을 돌리고는, "도당의 조직이나 생존자는 얼마나 파악이 되었습니까?" 슬픔이 낀 듯한 눈으로 염상진을 쳐다보았다.
"안동무 의견에 찬동이요." 염상진은 안창민에게 그윽한 눈길을 보내며, "두어 군데를 빼고는 모든 군당이 살아 있소. 도당 전체의 생존자가 이백여 명, 지리산지구가 백이십여 명쯤인 것으로 파악되어 있소. 그리고, 우리의 투쟁 방법이나 요령은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경험부족으로 미숙한 점이 없지 않았을 거요. 그 해결은 더욱 철저한 연구와 경험축적밖에 없을 것 같소." 그는 곤혹스러운 심정으로 말했다. "참 많이들 죽었군요." 안창민은 눈길을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염상진은 담배를 새로 말기 시작했다. 의식 속에는 안창민의 논리적인 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말에서 안창민의 그 동안의 변모를 선명하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 언제나 정연하던 논리는 그대로였지만 그 어조나 태도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어조는 신념에 찬 강인성이 느껴지게 완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유격투쟁을 통해서 이론에 살을 붙이고, 피가 돌게 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투쟁이 실패로 규정되는 것을 그가 거부하고자하는 것은 혁명의식의 새로운 무장이기도 했고, 자기존재의 부정에 대한 대응이기도 할 거라고 염상진은 생각했다. "이지숙 동무의 사업은 어떻소?" "무사하게 해나가고 있습니다." "장한 일이오, 애로가 많을 텐데." "대장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구사령부도 자연히 해체된 형편이니 당분간 도당에 머무를 것 같소. 율어의 조직은 어떻소?" "아직까지별 노출 없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군민들이 붙여준 영광스러운 이름 '모스코바'가 끝까지 지켜졌으면 좋겠소. 벌교는 어떻소?" "이 동무 관리 아래 피해 없습니다." "다행이오. 그만하면 우리 군당이 유지되기는 별 어려움이 없지 않겠소?" "적극대응만 피한다면 유지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유지시키면서, 확대도 꾀하는 거요." "알겠습니다." 두사람은 서로 맞쳐다보았다.
"엄니, 설에 우리 무신 떡 헐랑가?" 어머니를 향해 베틀 옆에 배를 깔고 엎드린 광조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쉼없이 달가닥거리고 철거덕거리는 베틀 움직이는 소리와 바디 치는소리를 이기려는 것이었다.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얼굴이 부석부석한 죽산댁은 무표정인 채 기계적으로 손발만 움직이고 있었다. "어이 엄니, 요분 설에 무신 떡 허냐니께." 광조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공부 안헐라먼 자빠져 자그라! 하는 꾸짖음이 터지려 했지만 죽산댁은 꾹 눌러 참았다. 애비 정도 몰르게 배곯려 키움시로, 하는 죄된 마음과 안쓰러움이 앞을 막았던 것이다. 그나마 기죽지 않고, 병치레하지 않으며 저리 커가는 것만으로도 황감하고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자식을 싸안고 있는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워째 그래쌓냐, 또 쑥떡이나 쪼깐 허제 무신 떡얼 더 허겄냐." 죽산댁은 일손을 놓으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엄니, 우리넌 은제나 철떡 해묵을랑가?" 광조와 마주보고 쪼그려앉아 글씨를 쓰고 있던 덕순이가 고개를 들어 동생을 향해 눈을 흘기며 입을 삐쭉했다.
광조는 어머니를 올려다보고 있어서 그런 누나의 눈치꾸중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금메말이다, 이 엄씨도 잘 몰르겄다." 죽산댁은 시름겹게 말했다. 빈말로라도, 아부지가 오먼, 하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가슴에 어둠이 차게 했다. 남편은 돈벌이를 떠난 것도 아니었고, 징용을 끌려간 것도 아니었다. 그 장래가 아무 기약도 없는 일에 미쳐 언제 돌아올지, 언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지 모를 사람이었다.
"엄니, 나 소원이 먼지 안가?" "광조야, 니 방학숙제 하나또 안해놓고 무신 실답잖은 소리만 그리해쌓냐." 덕순이가 동생의 약점을 찌르며 말을 막고 나섰다. 동생이 철없는 소리를 자꾸만 해대며 어머니 속만 상할 뿐이었다. "찰떡 한 가마니럴 묵는 것이여." 광조는 오기스럽게 제 할말을 해치웠다. 아이고메, 저 기 승헌 거, 천상 즈 애비여, 죽산댁은 끌끌 혀를 차며 다시 일손을 잡았다. "아이고 빙신아, 학교럴 댕기기 시작했으먼 남자가 좀 똑똑해져라. 니넌 워째 맨날 묵는 생각밖에 못허냐." "배가 고픈께 그러제 워째." "그런 생각 헌다고 배가 불러지냐? 멍청이." "누나넌 몰러서 그랴. 고런 생각얼 허먼 배가 고픔스로도 불러." "하이고 참, 요상허너 말도 다 듣겄다." 덕순이는 어이없는 코웃음을 치고는 공책으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광조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누나를 쏘아보다가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베짜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은 화가 난 것도 같고, 배가 살살 아픈 것도 같고 해서 진짜 기분이 어떤지 알아내기가 아주 어려웠다. 어머니는 화는 잘 냈지만 웃는 일은 별로 없었다. 배고프게 사는 것도, 어머니가 그러는 것도 다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누나한테도 하지 않았다.
"엄니이..." 어머니는 들었느지 못 들었는지 베만 짜고 있었다.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죽 먹은 것이 다 꺼져버려 그냥 잘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프면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엄니, 나 배고파 죽겄는디 무시 하나 꺼내다 묵세." 광조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쏟아냈다. 덕순이가 고개를 발딱 들며 상체를 세웠다. "니 정신 있냐, 웂냐. 반찬 해묵을 무시도 웂어. 배고프먼 물 떠다 줄 것잉께 한 사발 묵고 자." 덕순이의 야무진 말이었다.
죽산댁은 스산한 마음으로 웃음지었다. 자기에게 동생이 야단맞을까봐 덕순이는 미리 막고 나서고 있었다. 그 동기간의 정이 더 가슴 아리게 했다. "멫 개나 남었는지 몰르겄다. 한나 꺼내다가 묵어라." "야아, 우리 엄니 질이다!" 광조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두 팔을 뻗쳐올렸다. 덕순이는 배시시 웃으며 어느새 일어서고 있었다. 광조도 따라 일어났다.
무는 광조가 받쳐들고, 칼과 도마는 덕순이가 들고 들어왔다. 껍질을 깍아내지 않고 먹을수 있도록 찬물에 무를 깨끗하게 씻느라고 덕순이의 손은 바알갛게 일어 있었다. 배고픔을 줄이기 위해 똥도 매일 누지 못하게 하는 빈궁 속에서 무껍질을 깍아낸다는 것은 상상도 안되는 일이었다.
무를 도마 위에다 올렸다. 무는 노오란 순을 꽃모자인 양 달고 있었다. 무는 움 속에서 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순이는 칼을 들어 순 밑에 바짝 칼질을 했다. 덕순이는 그 노오란 순을 볼 때마다 꽃보단 곱다는 생각을 했고, 두리뭉실하게 생긴 무에서 어쩌면 그리도 예쁜 노란색의 순이 돋아나는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순을 도마 끝에 바로 세웠다. 내일 아침 죽을 끓일 때 넣을 것이었다. 무 옆구리를 광조가 잡았고, 덕순이는 입술을 오므려 붙여가며 힘을 써 길게 반 토막을 냈다. 반을 다시 반씩으로 칼질했다.
길게 네 토막이 난 무를 하나씩 나누어 들었다. 마침 바람이 들지 않아 그렇게 기분이 좋을수가 없었다. 바람이 든 무는 퍼석거리는게 싱거워 먹으나마나였다. "남은 것은 느그 둘이 갈라묵어라." 죽산댁이 말했고, 덕순이는 재빨리 동생의 다리를 툭 치며 눈짓을 했다. 광조는 무를 볼이 미어지게 넣은 채 입술을 빼물었다. 남아 있는 한 쪽은 당연히 어머니 몫이어야 했다. 자기들은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는데도 그리 배가 고픈데, 베짜기를 쉬지 않는 어머니는 얼마나 더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을 것인가. 자기는 동생 나이 때 그렇지 않았던것 같은데, 그런 눈치를 전혀 모르는 동생이 덕순이는 밉고도 야속했다. 어쩌면 동생은 알면서도 당장 먹고 싶은 욕심에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끔 엉뚱한 소리를 잘하는 걸 보면 속이 멀쩡하기도 했던 것이다.
"달고 맛나제?" 광조가 덕순이에게 눈웃음을 쳤다. 남아 있는 한 쪽이 자기 차지가 될 수없다는 것을 안 광조는 무를 아껴 먹고 있었다. "이빨이 시렵다." "긍께로 더 맛나제." "잉." 덕순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딩이, 계엄인가 먼가가 풀렸다는디 살었는지 죽었는지 소식이나 전헐 일이제, 죽산댁은두 어린 것들 한테서 애써 신경을 돌리며 일손을 더 재게 놀렸다.
이중과세 폐지조치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며 설을 맞았다. 철시하는 상점에 대해서는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겠다는 통보를 미리미리 했지만 문을 연 상점은 읍내에 하나도 없었다. 작년처럼 관공서만 문을 열어놓고 썰렁하게 자리들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민심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랜 풍습을 도외시한 강압적 행적의 본보기였다.
아무리 가난에 찌들려도 설을 설이었다. 헌 옷이나마 빨고 기워 입혀 아이들의 입성은 깨끔했고, 쑥떡이나마 손에 들고 깡충거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웃에 세배를 가서 세뱃돈 대신 받은 떡이었다. 아이들은 양지 쪽을 골라 팽이치기를 하거나, 둑길에서 연을 날려올렸다.
팽이싸움에서 이기면 떡이 한 개에다 일 년 재수가 좋았고, 연끊어먹기에서 이기면 소원성취가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설날만은 말타기 놀이나 닭싸움 같은 험한 놀이는 하지 않았다. 설날에는 그래야 복을 받는다는 어른들은 말을 지켜 아이들은 얌전한 놀이만으로 싸우거나 다치는 일없이 하루를 보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버릇을 바로잡으려 하거나 금기시하는 일을 훈계하는 말에는 으레 '가난하게 산다'거나 '재수가 없다'거나 '부자로 산다'거나 '복받는다'거나 하는 말들이 뒤 따라 붙었다. 다리를 꼬고 자면 가난하게 산다, 낯을 푸푸거리며 소리내서 씻으면 재수가 없다, 다리를 까불어대면 복이 달아난다, 밥을 께질께질 먹으면 가난하게 산다, 문턱을 밟고 다니면 복이 깨진다, 어른을 보면 꼬박꼬박 절을 잘해야 복받는다, 밥을 한 알도 흘리지 않고 먹어야 부자로 산다. 가난에 진저리가 난 아이들은 더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두려워했고, 어른들의 말은 주문처럼 먹혀들었다. 그 다음으로 많은 말이 부모에게 피해가 미친다는 내용이었다.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은 혼자 차례상을 차려놓고 방구석에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볼품없는 차례상이나마 차렸는데 절을 올릴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이 없다는 것이 어느때보다도 절절하게 가슴에 사무치고, 외로움과 서러움으로 목이 메었다. 남자가 없다고 하여 여자가 감히 절을 올릴 수도 없는 일이었고, 남양댁은 울음이 가득찬 가슴으로 차례상을 바라보고 앉아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다 아시대끼 아그아부지가 집 나가 해럴 넴겠십니다.
워디서 멀 허고 사는지, 그저 무사허게 살펴주십소사. 워디서고 무사허게 살어만 있으먼 더바랄 거이 웂응께, 살펴주십소사, 살펴주십소사...
남양댁은 차례상을 물리고도 남편 생각에 가슴이 막혀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설이 되면 날짐승 들짐승도 한자리에 모인다는데 남편은 어느 하늘 아래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발단이야 어찌 됐든 간에 멀쩡한 사람을, 그것도 예삿사람이 아니라 지체가 높은 양반이고 지주를 숨길만 붙어 있지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만들고 말았으니 언제나 그 죄가 풀려 만나게 될지 앞날이 막막할 뿐이었다. 좌익하는 사람들은 군인에 경찰에 청년단까지 눈에 불을 켜고 지키는 속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하건만 남편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기에 그리도 까마득히 소식이 없는지 몰랐다.
부쩍 가슴이 삼동 응달처럼 된 것은 동서 외서댁마저 옆에서 떠나버린 탓이었다. 동서가 장흥 이모네로 떠나는 것이 못내 싫었지만 옷깃 한번 잡아 만류해보지 못하고 말았다. 동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날 수밖에 없는 기박한 처지였다. 부정한 씨를 낳자마자 갖다주었다가 다시 데려온 것도 그랬지만, 그 자식을 사람들 눈총 받아가며 키운다는 것은 얼마나 바늘방석일 것인가.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벌써 열 가마니 쌀이면 팔자 고쳤다느니, 남편 노릇 제대로 못하더니 죽으면서 부조하고 갔다느니, 입들을 놀려대는 판이었다. 아이를 다시 데려온 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분간이 어려운 채로 동서의 팔자를 생각하면 기막히고 안쓰러워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자신도 신령님이 보살피고 조상님이 도우사 임신을 피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허가놈의 씨가 달라붙었더라면 어찌 됐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등줄기에 얼음이 맺혔다. 그러나 허가놈과의 일은 과거지사만이 아니었다. 남편이 이리 소식이 없고 빚이 남아 있는 한 그놈은 언제 또 지게문에 구멍을 뚫을지 몰랐다.
그러고보면 장흥댁 남편과 목골댁 남편은 그 의리 단단하기가 제석산 바웃덩어리요, 그 마음 깊고 넓기가 오동도 앞바다였다. 내색 한번 없이 두 마지기 농사를 나눠 짓고 타작까지 해서 마루에 부려놓았던 것이다. 인정사정없는 세상인심 속에서 부처님이 따로 없고, 신령님이 따로 없었다.
"그저 몰른 디끼 있으시오. 공연시 소문 나먼 허가눔이 그 핑계허고 소작얼 띨라고 헐 것잉께요." 장흥댁의 남편 김복동의 말이었고, "동기가 당허는 고초에 비허먼 우리가 헌 고상이 무신 고상이간디라. 우리가 헐 일 동기가 대신허고 당허는 것잉께 우리도 이만헌 일이야 응당 혀야제라." 목골댁의 남편 마삼수의 말이었다.
남양댁은 아이를 업고 보퉁이를 챙겨들었다. 나이가 더 많은 김복동이네로부터 들르기로했다. 서너네댓씩 패를 지은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빠르게 뛰며 고샅을 오갔다. 아이들은 그들 특유의 해맑고 싱그러운 목소리들을 고운 꽃잎이듯 낭자하게 뿌리고 다녔다. 얼굴이 익숙한 아이들은 "과세 안녕허신게라?" 하고 인사했고, 그럴 때마다 "인냐, 한 살 더묵었응께 쑥쑥 더 커라이" 하며 남양댁은 새해 덕담을 보냈다.
"아이고, 요런 것얼 멀라고 챙기고 이러시오. 요래불먼 고마운 것이 아니라 섭해지요." 남양댁이 내놓은 흰고무신을 보고 김복동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네 맘얼 알제만, 안 이래도 되는 것을 그랬네. 나도 가실이 다 되야서야 그 이약얼 듣고, 허든 일 중에 잘헌 일이라고 생각혔네. 우리 아덜아부지가 그런 처지 당허먼 자네 서방이 그런 일 안 맡고 나서겄는가. 긍께 인자 요런 인사 채릴라 말고 빚버텀 끄도록 허소." 장흥댁의 말이었다. 그 말이 가슴의 추운 외로움과 그늘진 적막감을 걷어내는 걸 느끼며 남양댁은 눈물을 찍어냈다. 설을 닥치고 그 고마움을 어찌 표할 수가 없어서 마음써가며 대목장에서 두 내외의 흰고무신 한켤레씩을 준비했던 것이다. "기왕 사온 것잉께 고맙게 신겄소마는 인자 당최 요런 맘 묵지마씨요. 나가 동기 생각만 허먼 미안시럽기도 허고, 나잇값얼 못헌 것 겉기도 허고 혀서 똑죽을 것 같은 맴이요. 동기도 고상이고 아짐씨도 고상이제만 다 참고 기둘리씨요. 요런 사람못살 눔에 시상이 은제꺼지 가는 것도 아니겄고, 동기가 워낙에 강단지고 똑똑헌께 워디서고 아무 탈 웂이 지내고 있을 것잉께요." 김복동의 말이 남양댁의 마음에 훈훈하게 담겨왔다.
마삼수 내외는 한결 더 그녀의 행동을 꾸짖듯 했다. "참말로 아짐씨가 영판 요상허요이. 못헐 말로 그 나이에 노망이 든것도 아니겄고, 요것이 멋 허는 짓이다요. 고런 일 쪼깐 허고 고무신 받아 신은 것 동기가 알먼 나럴 멀로 보겄소. 참 아자씨 드럽게 짜잔허고 보초웂다고 사람 취급을 안헐 것이요. 긍께 싸게 갖고 가서 도로 바꾸씨요. 아짐씨가 몰라서 그렇제 동기허고 나허고는 성만 달랐제 성제간이요, 성제간." "아는구만요." "아, 암스로도 요런짓 혔소!" 마삼수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메, 자는 아그 경기 들리겄소." 목골댁이 놀라 남편을 향해 허공을 쳤고, "잘못혔응께 한분만 용서허시씨요." 남양댁은 오랜만에 사는 맛을 느끼며 과장되게 고개까지 숙여보였다. 목골댁과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네가 섭헌 짓 허기넌 혔네. 요분 일 봉께 남정네덜이 우리 여자 덜허고 워찌 달븐지 새시로 알겄드랑께. 남정네란 것이 그냥 생김만 달버서 남정네가 아니드란 말이시." 목골댁이 정겨운 눈길로 한 말이었다. 남양댁은 편안한 마음으로 눌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보도연맹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계엄령을 풀었으면 그만이제 워쩔 심판으로 동네마동 지부럴 맹근다고 그 북새질얼 치는지 몰르겄데." 목골댁의 말에 남양댁은 금방 샘골댁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샘골댁이 청년단원에게 시달리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미친눔에 새끼덜이 있는 좌익얼 잡는 것이 아니라 웂는 좌익얼 맹그니라고 그 염병이제워째." 마삼수가 굴뚝처럼 코로 연기를 내뿜으며 불퉁스럽게 말했다. "와따, 담배 잡 에진간히 꼬실리씨요. 숨맥히겄소." "연기 타박 말고 자네도 담배럴 배와뿔소." "아이고메 저 징헌 심뽀. 나 땀세 그러는 거이 아니라 아그 땀세 그러요." 목골댁이 내지를는 말에 마삼수는 쩍은 얼굴로 남양댁과 자느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슬며시 일어섰다. "나 나가야겄네. 놀다가시씨요." "존 일 헌다고 싸게 나가씨요." 목골댁은 기다렸다는 듯 새 쫓는 손짓을 했다.
남편은 사랑방을 찾아갈 구실이 생겨서 좋고, 아내는 남편을 내몰 기회를 잡아서 좋았다.
"인자 다리 쭈욱 뻗고 앉소. 오늘이야 세상천지가 다 쉬는 날잉께." 목골댁이 남양댁의 무릎을 눌렀다. "나가 말이시, 보도연맹에 가입허라고 청년단원덜이 샘골댁얼 왈기는 것을 봤는디, 그 억지춘향이놀음이 사람 못 당헐 일이등마." 남양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고초 당허는 것이 워디 샘골댁뿐이겄는가. 읍내 좌익헌 남정네 마누래덜이야 다 당허는 것이제." "금메 말이시, 워찌 그리 쌩사람덜얼 잡을라고 그까?" "다 베락맞을 짓거리덜 허니라고 그러제. 좌익 마누래로 몸고상 맘고상 젺은 것도 워디 헌디." 남양댁의 눈에는 샘골댁이 시달림당하는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고, 귀에서는 악쓰는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샘골댁이 당하는것을 일삼아 열심히 보았던 것은 남편이 몸을 숨기고나서 자신이 시달렸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샘골댁이 딱하게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러 말 말고 여그레 손도장 눌르씨요." 청년단원 둘이 버티고 서서 샘골댁 눈앞에다 종이를 흔들어댔다. "아 금메 나넌 빨갱이질 헌 일이 웂당께로 워째 이래쌓냐니께." 샘골댁이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듯 짚신발을 굴렀다. "와따 그 아짐씨 고집 드럽게 씨네. 빨갱이 마누래먼 그것이 그것인디 워째 그리 말이 많소. 싸게 눌르씨요." "머시가 워쩌고 워쩌? 느그가 먼디 나럴 빨갱이 맹글고 지랄이여, 지랄이. 나가 좌익이고 빨갱이라먼 치가 떨리고 피가 꺼꿀로 솟기는 사람이여. 헌디, 빨갱이 마누래먼 그것이 그것이라고? 고것이 워따 대고 놀리는 주딩이여, 주딩이가." 샘골댁은 분을 참지 못해 마구 삿대질을 하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어허, 그 아짐씨 참말로 땁땁허시. 보도연맹이 빨갱이 잡자는 디니께 빨갱이가 그리 싫으먼 더 잘된 일 아니겄소. 여그에 손도장 팍 눌러뿔고 빨갱이 잡는 일에 협조허먼 을매나 좋소." "염병허고 사람 흘기지 말어. 나가 아무리 무식혀도 그런 소리에넌 안 넘어간다." 두 주먹을 말아쥔 샘골댁이 부르르 떨었다. "아짐씨, 참말로 말 안 들을라요? 정 그리 뻐시게 나가먼 우리가 완력을 써서 그까징 손도장 하나 못 눌르게 헐 성불르요?" 두 청년단원은 샘골댁을 곧 덮칠 것처럼 한 발짝씩 다가섰다. 샘골댁은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옆으로 내달았다. 청년단원들이 주춤하다가 뒤쫓았다.
샘골댁은 담 가까이에서 무엇인가를 집어들었다.
"그려, 완력으로 혀라. 느그덜 죽고 나 죽고 허자. 뎀베라, 뎀베. 요눔에 시상 더 살고 잡은 생가 웂응께 느그랑 나랑 향꾼에 죽자!" 샘골댁은 악을 쓰며 도끼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 몸에 기운이 펄펄했고, 눈에는 파란 불이 켜져 있었다. 돌발사태를 당한 두 청년단원은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치다가 사립이 가까워지자 다투어 도망질을 쳤다. 샘골댁은 소리소리 지르며 사립 밖까지 달려나갔다. 짚신이 벗겨지고 옷고름이 풀어진 채 그녀는 도끼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 즈음까지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의 수는 전국적으로 삼십만 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좌익세력 제거에 어느 만큼 실효를 거두고 있기도 했다.
이월이 저물고 있었다. 읍사무소에서는 지난 이월 십일에 공포된 법에 따라 농지위원회를 구성하느라고 분주했다. 먼저 읍단위 농지위원회를 만들고, 그 아래로 각 이,동 단위 농지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농지개혁 실시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농지위원회의 구성 소식을 듣고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이 좌익척결위원회였다. 임시총회라는 명목으로 소집된 회의에는 회원으로 가입된 읍내 지주들이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빠진 사람이 김사용 이었다. 열 명이 미처 못되는 그들이 가결한 사항은, 무슨 방법을 써서든 농지위원회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뜻은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합해졌다. 제일 중요한 읍농지위원회 장악을 위해서 좌익척결위원회 위원장 최익달, 부위원장 윤삼걸, 총무 유주상이 읍장을 만난다는 것도 결정했다. 그 비용은 전체가 분담한다는것도 뒤따랐다.
그날 밤 남원장에 술자리가 차려졌다. "세상이 못쓰게 변혀서 결국 나라가 지주 웂애는 농지개혁인가 먼가럴 허게 되는 모양인디, 읍장님은 농지위원회럴 워떤 식으로 꾸밀 요량이시오?" 최익달은 그 성질대로 직사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예, 읍장님께서도 다 헤아리고 계실 줄 압니다만 이번 일이 국가대사라 공평무사하게 성사돼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작인들을 너무 안하무인으로 난동을 일삼고, 지주들은 이익보호를 받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나라 기강이나 장래가 우심하지 않습니까.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 있어서 농지위원회의 소임이 지대할 것으로 보는데, 읍장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유주상이 직사포의 방향을 곡사포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읍장 이병주의 입장에서 들으면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술자리를 마련한 그들의 의중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들으나마나 한 소리였다. 그리고 농지위원회 구성 규정에는 그들이 요구하는 바가 명시되어 있어서 아무 고심없이 인심 쓰기가 좋았다.
"내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마는, 하시는 말씀들 뜻을 익히 알았으니 너무 걱정들 안하셔도 될 겁니다." 읍장은 확답을 슬쩍 피해 섰다. "그리 말씸 허신께 고맙기는 헌디, 워째 기분이 만족시럽지는 못허구만요." 윤삼걸은 읍장이 사린 꼬리를 잡아채려는 듯 말했다. "여긴 사석이니까 공적인 얘기는 이 정도로 끝내는 게 어떨까 합니다. 나머지 일이야 읍장님이 선처하실 것이고, 이렇게 자리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이제 기생들 불러들여 술맛 돋우게 하십시다." 유주상이 윤삼걸에게 눈짓하며 가로막고 나섰다. "그리헙씨다. 단출허니 술맛나게 생겼소." 최익달이 맞장구를 쳤다.
각급 농지위원회의 위원장은 지방행정기관의 장으로 하며 그 위원은 농지사정을 숙지하며 학식과 명망이 있고 공평무사한 인격을 겸비한 관민 중에서 선임한다... 읍장은 농지위원회규정의 한 대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이 그 규정에 얼마나 합당한 인물일지는 모르나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끼워넣기로 하자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막상 그 조건에 맞는 인물을 찾아낸다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농지개혁은 추진될 것이고, 그들이 농지위원회에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이미 자기네 뜻대로 마음대로 일을 주무르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다. 정부는 어디까지나 행정관리의 책임 아래 농지개혁을 시행하도록 방침을 정해놓고 있었다. 왜냐하면 농지개혁의 성패는 바로 정부의 존립에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대다수 소작인들은 좌익의 선전선동에 쏠려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소작인들을 좌익으로부터 떼어내 그 위기를 넘기는 방법은, 비록 이북에서 이미행한 조건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농지개혁밖에는 없는 실정이었다. 미군정이 자기네들의 점령지가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사회주의사회가 되어버릴 위기를 막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귀속 농지를 분배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의 계속이었다. 군정이 그때 동척 소유의 귀속농지만이 아니라 모든 농지를 분배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지주들의 조직적인 반대와 방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형편은 많이 달라져 정부는 농지위원회의 권리를 형식적인 면에서 허용하고 있을 정도로 지주들을 현실적인 권력의 버림을 받아가고 있는 처지였다. 정부권력이 튼튼해야만 자기 자리도 튼튼해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읍장은 농지개혁에 대한 태도 결정을 진작 끝내놓고 있었다. 눈치 빠른 지주들은 벌써 반 이상, 그렇지 못한지주라 하더라도 평균 삼 할씩은 매각했거나 명의변경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읍장 이병주의 마음은 편하지가 못했다. 농지개혁은 하나마나 실패가 아닐까 하는 회의가 생겼던 것이다.
"자아, 한잔 쭈욱 드십시다아." 최익달이 왼쪽에 기생을 품은 채 정종잔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쭈욱 드십시다." 읍장도 흔쾌한 척 술잔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