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4-06
뜨는 해는 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일은 해가 뜬다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해는 돋는다. 빽빽한 수풀에 가리워 돋는 해를 보지 못하지만, 아침 산보를 하며 평지에서 불쑥불쑥 오른 집들을 눈 밑으로 하고 건너편의 동산(東山)에서 뜨는 해를 찬란하게 맞이한다. 오늘도 붉은 불덩이가 내 가슴에 찾아들어 머무르고 있는 태양의 타는 열기에 지탱하여 하루를 살아간다. 태양이 동산에서 동터 중천(中天)을 지나 서산(西山)으로 낙조(落照)하는 모습은 우리들과 행보(行步)를 같이 한다. 이 속에서 피고 지는 인생을 이야기하는 허무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발화(發火)하는 불길처럼, 또는 활화산(活火山)처럼 삶을 불태우는 사람도 있다. 앞의 사람은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다”(베드로전서 1:24)고 말하는 종교인이며, 작가이다. 뒤의 사람은 시장사람들이다. 이립(而立. 나이 서른 살을 이르는 말, 논어의 ‘三十而立’ <서른 살에 인생관이 서다>에서 온 말)의 철부지의 나이를 지나 불혹(不惑)에 막 들어섰는데도 잘은 모르겠지만, 오십, 육십 그리고 생의 석양(夕陽)인 고희(古稀. 사람의 나이 일흔 살을 달리 이르는 말,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나오는 ‘人生七十古來稀’<사람의 나이 일흔은 예로부터 드문 일>라는 말에서 유래)의 노년은 오래 전에 담가놓은 머루주처럼 삶의 맛이 베어있으리라. 그러므로 성서의 잠언(箴言)은“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31) 했으며, 오히려 회춘(回春)을 말함직한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요엘 2:28)고 하였다.
사람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 하였다(마태복음 5:12-16). 디오게네스(Diogenes)는 해가 중천의 한낮에도 아테네 거리를 등불을 켜들고 다니며 어두워진 사람 사이에서 빛을 갈구(渴求)하였다.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한 자신의 용해(溶解), 태양이 빛을 그리고 추운 때에는 마치 자신을 소실(燒失)할 것 같이 하면서 볕을 내는, 그러나 이것은 소모(消耗)가 아닌 다른 곳으로의 전이(轉移)이며, 소비(消費)가 아닌 다른 것의 소생(蘇生)이다. 뜨는 것은 지는 것이겠지만, 나는 나를 전해준 자식에게서 다음날 다시 떠오른다.
농사지면서 부르는 노래 가운데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라는 말이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즉,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붉은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면 왜 꽃은 쉽게 시들까? 소위 다르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본능적으로 종족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식물의 꽃 또한 단지 종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꽃을 피운다고 볼 수 있다. 그 꽃이 종족을 보호하는 기능을 끝냈을 때는 그 꽃 또한 더 이상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꽃은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 또는 꿀 등으로 벌이나 나비 등을 유인하여 수정을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다. 그리고 수정이 끝나고 나면 그 후에는 모든 에너지를 수정 후에 생기는 씨를 만들기 위해 사용해야 하므로 식물들이 더 이상 꽃에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기 때문에 시들게 되는 것이다.
꽃은 생명의 모태가 되는 내일에 있을 씨앗을 만들기에 모든 것을 다한다. 그리고 그 씨앗은 생명의 원천(源泉)이다.
공동체 이야기
바 른 생 활
우리는 오래 전인 초등학생 때에 바른생활을 배웠고, 그 이후의 중고등학교에서는 도덕공부를 하였다.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 돌아보건대 어느 곳에 집착되거나 연연하지 않은 반듯한 생활을 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때로는 편벽(偏僻)되거나, 어느 때에는 작은 욕심에 이끌려서 차분히 바른 가르침이나, 옳게 인도하는 것을 외면하고 다른 것에 허둥댈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까지 말하고 있다(디모데후서 4:3).
어느 방송중의 두 사람 사이의 대화이다. “나는 나름대로 세상을 옳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야” “세상살이가 옳고 그른게 어디 있어요? 그냥.... 나 좋으면 그만이죠!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주고 내 속 편하게 살면 되는 것 아녜요?” “그래.... 자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나는 나대로 산다는 이야기가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가는 세상에 서로 불간섭의 측면에서 볼 때에 틀리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도리(道理)를 생각해 볼 때에는 맞는 이야기만도 아니다. 사람은 나 홀로 만으로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사람의 최소 단위는 사람인(人)자 보여주듯이 홀로 서기가 아니다. 그것은 두 개체(個體)가 동시에 지장 없이 존재하는 양립(兩立)이 아닌, 서로 기대어 서있는 존재들이다. 내가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을 내가 칭찬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자기에게 도취된 행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이 더 나아갈 때에는 맹목적(盲目的)이고, 전위적(前衛的)이고, 실험적인 것에 불과하여 돈키호테적인 망상(妄想)의 헤프닝으로 끝나고 말 공산(空山)이 크다. 그림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하여 그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물결이 부딪쳐 흐른다는 말의 격려(激勵)와 칭찬(稱讚)이 필요하다. 요즈음 나는 사람 사는 공동체 속에서의 부딪침과 그리고 수용(受容) 속에서 바른생활을 배워간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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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라홍채
강재홍
최성재
최영애
지명수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 금산 제원적십자사(회장:유상현)는 금산밀알의집, 새터공동체 그리고 이웃 장애인 분들과 함께 갖는 목요일 모임을 5월 20일에는 제원주유소에서 27일은 군북교회가 함께 해주셔서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열린 장애인 위즈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6월 3일은 유 선생님 댁에서, 10일은 지경수가든에서 각각 모임을 가졌습니다. 군북교회(한성국 목사님. 박형순 전도사님)에서 새터공동체 식구들을 위하여 매주 차량운행으로 같이하여주셨습니다.
* 6월 8일에 둔산대공원 엑스포남문 광장에서「사랑나눔한마당」모임이 있었는데 공동체에서 8명이 참여하였습니다. 김철우 목사님께서 수고하여 주셨습니다.
* 04년 6월 14일에 금산읍교회 김철우 목사님과 논산의 대둔산 수락랜드의 도움으로 금산읍교회 나눔의 집, 새터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목욕을 하고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김기홍.분평청북교회.주식회사EG(이광형).정무래.최영애.강재홍.라홍채.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9인).박종만.세광교회.채윤기(박현실).추부소방서(7인).유영수(김창일).이원교회(6인).지명수.중부대학교사회복지학과(5인).기물리교회.대전노회.대덕교회.진명구.참좋은교회청년부(8인).김남완.오정교회3여전도회(이정화외3인).찬미교회.향림원(2인).옥천동부교회.신건태.추부제일교회.대전일보(김세원외1인).그리스도의집.대산식품(박우학).광진산업(정진백).대동사출(김복현)대전지역사회선교협의회(김상인외6인)향림원(2인).최선희.성남교회.정명래.군북교회(박형순).남상륜(김성숙).동춘교회4남선교회(마승호).대전제일교회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