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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포정해우, 포정해심>의 줄거리:
장자에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정이라는 궁정 요리사가 신기에 도달한 능숙함으로 소 한 마리를 발라내면서 도(道)를 따르고 있음을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면서 칼이 지나가야 할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지요. 선민으로서 이 땅을 산다는 것은 포정같은 칼잡이가 되어야함을 뜻합니다. 칼을 쥔 포정의 손놀림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해체하는 야곱의 포정해심(庖丁解心)의 이야기가 소개 되고 있습니다.
포정해우(庖丁解牛), 포정해심
(창32:1~12)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포정해우, 포정해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포정해우, 포정해심’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이 있습니다.
포정은 요리사의 이름입니다. 요리사 포정이 위나라의 왕인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궁중에서 소 잡는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문혜군이 우연히 포정이 소 잡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소를 잡을 때 큰 도끼로 소의 머리를 내리치고 예리한 칼로 소의 부위를 해체하고 피가 튀는 참으로 험악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포정의 손짓, 발짓, 몸짓은 소 잡는 일을 하는 사람 같지 않고,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마치 춤을 추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문혜군이 귀신에 홀린 듯이 포정의 소 잡는 기술을 발휘하는 것을 다 본 다음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봅니다.
“소 잡는 기술을 어떻게 배웠기에 이러한 경지에 도달했느냐?”라고 물었더니 포정이 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이렇게 소를 잡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처음에는 소가 산처럼 보여서 어디서부터 칼을 대서 이 소를 해체하고 고기를 발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는데, 3년이 지나면서부터 눈에 소가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소를 보게 되었고, 마음으로 소를 보면서 해체해 나가는 과정이 마치 정해져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도를 따르는 것과 같다”라는 얘기를 했답니다.
결국 이 사람 말의 핵심은 회통(會通)에 있습니다. 만날 會에 통할 通.
만나는 가운데 통하는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뭐가 만나요? 살과 뼈가 만나요. 모여 있어요.
그 사이를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마음의 눈으로 봅니다. 이제 도가 트이니 칼의 두께가 전혀 의식되지 않고 살과 뼈 사이로 빈 공간이 보이므로 그냥 두께가 느껴지지 않는 칼을 집어넣으면 되는 것입니다. 칼을 잡는 순간에 이미 칼이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를 거치고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가가 훤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눈앞의 소는 포정을 조금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포정이 마무리를 짓는데 세 종류의 칼잡이를 분류합니다.
첫 번째는 족포가 있어요. 족포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왜 달마다 칼을 바꿉니까? 칼로 단단한 뼈를 건드리고 힘줄을 억지로 자르려고 하다 보니 칼날이 쉽게 상합니다.
두 번째는 양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1년에 한 번씩 칼을 바꿉니다. 이 사람은 뼈와 힘줄을 피해갈 줄은 알지만, 아직은 살을 억지로 손질하려고 하니 칼날이 무뎌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포정의 상태는 뼈와 뼈 사이에 마음에서 보는 공간에 칼을 집어넣습니다. 또 뼈와 살이 만나는 공간에서는 뼈와 살 사이로 칼을 집어넣습니다. 이미 나 있는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러므로 칼로 소의 살을 베는 것이 아니라 뼈와 뼈 사이에 난 길, 뼈와 살 사이에 난 길, 살과 살 사이에도 길이 있는 것을 봅니다. 소위 말하면 앞다리 살, 목살 같은 부위를 보는 것입니다. 부위와 부위 사이에 길이 있는 것이 마음에 보이므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지 살을 베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살과 가죽 사이에 길을 봅니다. 이렇게 지나가니 칼날이 상할 일이 없어서 자기는 19년 동안 칼을 숫돌에 갈지 않고, 칼날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소를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하하) 기가 막히지 않아요?
뼈와 살 사이에 길이 보여요. 눈에는 안 보이는데 마음에는 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나 있는 길을 따라서 칼이 쓱쓱 지나가면 그 큰 소가 수백 부분으로 다 해체되어 나갑니다. 위나라의 혜왕인 문혜군이 소 잡는 모습에 완전히 홀려서 빠질 만하지 않습니까?
신앙인이 누구입니까? 칼잡이입니다.
누가 뭐래도 의대의 꽃은 외과의사인 것처럼 우리가 칼잡이입니다.
소를 분해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분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뼈가 있고 힘줄이 있고 살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마음이 신분 의식을 갖게 됩니다.
내가 누구의 남편이고, 어느 회사의 부장이고,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누구의 아버지이고, 누구의 딸이고 아들이다. 이 신분의식이 바로 뼙니다. 이 뼈에 살이 붙어요.
어떻게 살이 붙어요?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들 중에서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될 때에 마음에 살이 됩니다.
힘줄이 있습니다.
힘줄이 뭐예요?
내가 힘을 들여 이루고 싶은 소원, 비전, 꿈… 이런 것들이 다 힘줄이 돼서 마음에도 뼈가 있고 살이 있고 힘줄이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랑하는 명품 백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며 담뱃불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백이 탔습니다. 내 마음이 탄 것처럼 아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한 대 샀는데 자동차가 부딪혀서 찌그러졌어요. 내 마음이 찌그러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의 살이 되었으니까 그 아픔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신앙인이 누구입니까?
내 마음에서 뼈와 마음을 발라내고, 살과 마음을 발라내고, 힘줄과 마음을 다 발라내서 칼을 든 포정의 손놀림으로 날마다 내 마음을 해체해 내는 포정해심의 삶이 신앙인의 삶이고 선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민에게 주어지는 대면특권과 외면특권이 특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려요. 하나님을 대면하는 특권은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는 특권이고 세상을 외면해도 괜찮은 특권이 주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포정이 칼을 잡고 소를 해체해 나가듯이, 우리는 포정해심으로 포정처럼 칼을 잡고 우리의 마음을 해체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야곱이 칼잡이가 되어서 자기 마음을 해체해 나가면서 우리에게 포정해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에서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에서가 세일 땅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곱이 사자들을 보내면서 뭐라고 하느냐?
4-5절에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라고 합니다.
본문 안에는 은혜라는 말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참! 반가운 말이에요.
야곱에게서 은혜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이 소와 나귀와 양떼가 있다는 이야기를 왜 에서에게 전달하려고 합니까?
벌써 과거가 생각나기 시작합니다.
장자권을 탈취했을 때에 장자권의 핵심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에게서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를 물려받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에게 그런 것이 다 있다는 이야기는, 장자권에 대해서 조금도 사심을 갖거나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고 에서에게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 당신을 속이고 장자권을 훔쳐갔던 나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의도에서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많이 있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서를 만났던 사자들이 돌아와서 야곱에게 뭐라고 하느냐?
에서가 장정 400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전갈을 가져옵니다.
이 소식에 대해서 야곱은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우리가 봐도 이제 큰일 났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옵니다.
그 옛날에 한 부족에게서 400명의 군사들이 소집될 수 있었다는 것은 에서가 얼마나 큰 집안과 부유함을 이루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권 축복기도도 안 받고 세일 산이라는 험악한 산지에서 살지만 400명의 장정을 동원할 수 있는 그런 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400명이 오면 이제 싹 죽는 거예요. 두려움에 압도되어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 앞에서 야곱이 하는 말에 감동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창세기에서 야곱에 대한 이야기 중에 가장 진실하고 가장 선민다운 신앙적 말이 오늘 야곱의 입에서 드디어 나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오늘 함께 읽은 구절 중에 특히 10절에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 에서가 오고 있으므로 자기 식솔들과 재산을 두 떼로 나누어서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나머지 한 떼만 살아도 다행이다 싶어 떼를 나누다보니 자기에게 허락된 부와 식구와 노비 같은 것들이 엄청났으므로 감격이 생기는 거예요. 에서를 통해서 20년 동안 숨겨 왔던 자기의 본전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에서를 피해 하란의 라반을 향해 갈 때에 벧엘이라는 루스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에 맨몸이었고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고, 정든 고향 땅과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뒤로 한 채 맨몸으로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있을 때에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맨몸으로 지팡이 하나 가지고 갔던 그때의 그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야곱이 왜 이 생각을 합니까?
앞서 라반과의 대화 속에서는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고 양이 없어지면 스스로 보충하였고 나의 수고와 고생을 하나님이 아셨으므로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주셨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기세등등하여 자기 의에 충만해서 모든 목동들이 다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만 특별했던 것처럼 생각했던 야곱이 갑자기 모든 것이 은혜고 하나님의 나를 향한 진실하심을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 같이 자격 없는 자에게 왜 이렇게 진실하십니까? 내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진실하시게 말씀하신대로 은혜만 베푸시고 계시는 겁니까? 한 떼만 있어도 부자소리를 듣고 살겠는데, 두 떼나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느끼는 겁니까?
에서를 마주하면서 자기의 죄를 봅니다. 죄를 보면서 벧엘에서 죄인으로 가졌던 자기 본전의 모습을 무의식 속에서 떠올리면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라고 자신을 규정해내는 것입니다.
에서를 통해서 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내가 잃어버릴 것이 무언가를 보니 전부 은혜로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전에 라반과의 관계에서는 자아의식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습니까?
라반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내게 마땅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재산이 나에게 마땅한 것이 되어서 라반 앞에서 의인이 되어버립니다. 이 많은 식솔들이 나에게 마땅한 것이고 지금의 나의 신분과 재산 이 모든 것들은 내 수고와 고생에 대하여 하나님이 합당하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에서 앞에서는 모든 것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해체해냅니다. 본래의 나는 에서 앞에서 도망하는 자였음을 알게 되고, 지금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들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분해해서 해체해냅니다.
이게 바로 선민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곱이 큰 실수를 합니다.
라반 앞에서 그 모든 재산과 식솔을 합당한 것으로 여겨서 마음과 엉켜있었던 그것들을 다 분해하고 잘라내면서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가족들과 재산들을 마음으로 다시 붙잡습니다. 이것들을 에서가 빼앗아 갈까 두려워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군대라는 마하나임 이야기가 1-2절에서 나왔습니다.
왜 이렇게 뜬금없이 나왔다가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처럼 다음 이야기로 진행이 됩니까? 왜 하나님의 군대가 동원이 됩니까? 군대가 동원 될 때에는 싸울 일이 있기 때문인데, 무슨 일이 있어서 하나님의 군대가 동원이 되었겠습니까?
야곱을 잡아 죽이려는 에서의 마음과 하나님이 싸우시려고 군대를 동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야곱의 모든 재산과 식솔들을 지켜주시려고 작정하셨기에 마하나임이라는 군대를 앞서서 보내신 거예요.
그러면 야곱이 에서를 보고 자신의 본래의 모습에서 재산과 식솔들을 분리하여, 벧엘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으면 그 모습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 모습을 왜 지킵니까?
벧엘에서 맨몸과 맨 마음이었을 때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서를 동원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포정해심을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맨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가지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이 땅에서 은혜로 주신 모든 것들로부터 마음을 해체하고 분리해야만 합니다. 포정의 손놀림으로 소를 해체해내듯이 내 본래의 마음과 이 땅에서 내 마음에 붙어버린 뼈와 힘줄과 살들을 다 발라내고 맨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야하는 것입니다. 벧엘에서의 야곱의 모습처럼.
그런데 다 해체해낸 다음에 다시 그걸 붙잡으면 마하나임의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참! 기가 막히게 좋았어요. 모처럼 야곱에게서 선민다운 모습이 보였어요.
이 죄의식이라는 것은 교리적으로 가르쳐 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식이 어떨 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느냐?
에서 앞에서의 야곱처럼 자기가 지은 죄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죄인 줄도 모르고 욕심에 의해서 그렇게 했는데 자기가 20년 동안 라반에게 속아보니 에서와 아버지 이삭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가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이 죄 때문에 20년 동안 모은 재산과 가족들이 한 순간에 다 없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겨났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 올바른 죄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완전히 망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에 진짜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데, 이 죄의식에서 나의 본전을 찾고 마음을 해체해냅니다.
그런데 왜 다시 잡았느냐?
칼잡이의 최후 선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다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최후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칼잡이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가 내 죄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죄의식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내 마음이 해체될 수가 있어요.
포정의 손에 들린 19년 동안 갈지 않은 칼, 내 평생 동안 갈지 않아도 되는 하나의 칼이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로 내 마음을 날마다 해체해내야 해요.
왜?
하루를 살다보면 이 세상 것들이 뼈가 되고 살이 되어서 붙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내가 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았다면 내가 부장이라는 의식의 뼈가 생기고, 그 뼈가 생기면 부장으로서 사랑해야 할 것들이 생기면서 마음에 살이 붙어버려요. 부장 다음에는 전무가 되어야겠다는 소원이 생기면서 힘줄이 생깁니다. 이래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이게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장자권을 탐내는 것과 세상의 것들을 마음으로 붙잡기 때문에 십자가로 내 마음을 날마다 해체해 내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야곱이 맨 몸과 맨 마음으로 돌베개를 베고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해체해서 내 마음이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여야만 하늘이 열리고 사다리가 내려오고 하나님께서 내게로 오시고, 하나님과 내가 하나로 연합되는 과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야곱 보세요.
이제까지 하나님이 지켜 주셨어요. 참다운 죄의식을 갖게 되는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비로소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전의 라반과의 만남에서는 전부 자기에게 마땅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편을 들어주셨다고 이야기 했었어요. 지금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진실하심을 감당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는 진실한 적이 없었는데 하나님은 진실하지 않으셨던 적이 없음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행동을 보면 도저히 이것들을 모을 수가 없었는데,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였고 나의 본전을 보니 벧엘에서의 맨몸이었다는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 가지고 갔는데 이렇게 큰 떼를 이루었다고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금 그것들을 붙잡으면서 얍복 강의 씨름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될 내용들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에 우리는 포정 같은 칼잡이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포정이 소를 분해하듯이 내 마음을 분해해서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뼈로도 살로도 힘줄로도 내 마음에 붙어있지 않은 상태로 분해해 내서 그 마음을 온전히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동선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만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포정과 같은 칼잡이가 되어서 녹슬지 않고 무뎌지지 않는 십자가의 칼로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해체해 내서 온전한 마음을 아버지께 드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