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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창조의 조옮김>의 줄거리:
음악에서 조옮김은 원곡과는 음의 높이를 달리하여 악곡 전체를 다시 쓰는 것을 말합니다. 조옮김을 통해 노래나 곡들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올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동안 제시 되었던 규례대로 성막을 제작하기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첫머리에 안식일 규정에 대한 언급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막 제작을 명하신 그 근본 취지를 명백히 하려는 것입니다. 타락과 함께 파괴 된 창조의 조옮김! 바로 이것의 회복입니다.
창조의 조옮김
(출35:1~35)
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2.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6.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7.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8.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9.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그리고 제작할 성막과 기구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온 백성 중에서 감동되고 자원하는 마음이 생긴 자들이 성막제작에 필요한 예물들을 드린다는 얘기가 나오게 되고 마지막으로 이 성막을 제작할 일꾼에 관한 언급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 35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창조의 조옮김>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창조의 조옮김’
‘조바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곡이 진행되다가 조가 다른 조로 바뀌게 됩니다. 음악을 잘 모르지만 중간에 조를 바꿈으로 기존의 멜로디와는 색다른 느낌을 주면서 곡에 색채감을 불어넣는 것이고, 또 그와는 다르게 조옮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옮김은 다 아시겠습니다마는 전체적인 곡의 음 높이를 바꾸는 것입니다. 곡 전체를 다른 조로 옮겨서 높게 하거나 낮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Eb 장조의 곡을 D장조로 바꾸면 음이 반음이 낮춰집니다. 이렇게 조옮김을 하는데, 성악곡일 경우 소프라노 가수가 불러야 맞게 작곡을 했는데 그 노래를 메조소프라노나 알토가 불러야 하는 상황이 되면 너무 높으니 조를 바꿉니다. 또 기악곡에서도 원곡은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게 돼 있는데 비올라나 첼로로 연주할 상황이 됐으면 조를 옮겨서 곡을 조에 맞춰서 다시 씁니다. 테너 가수의 곡을 바리톤이 부를 때에도 음을 낮추어야 됩니다. 곡의 내용은 바뀌질 않는데 표현되는 음역대의 높이가 달라지면서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데 곡의 내용은 변함이 없지만 느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작년 8월에 서울시 교육청이 각 학교에 애국가의 악보를 배포했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변성기에 속하는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는데 음이 높아서 잘 못 부른다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음이 ‘미’로 이 음을 잘 못 내서 장3도, 2도를 낮춰서 악보를 다시 만들어서 각 학교에 보냈습니다. 대한민국 초, 중고 학생들만 다른 음 높이의 애국가를 부르게 된 것이지요. 원래 애국가가 가장조인 것을 바장조로 옮겨 부르게 되면 어떠냐는 것 때문에 아주 논란이 일었어요. 수원교향악단 단장이었던 김 필주씨 경우는 안익태 선생님께서 처음에 만든 애국가의 곡은 ‘미, 라’로 ‘동해’가 시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955년에 ‘레, 솔’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꾼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미, 라’ 음도 ‘레, 솔’ 음도 청명한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시 교육청의 악보대로라면 처음 시작이 ‘도, 파’로 시작이 되는데 이건 완전히 애국가가 지니고 있는 청명한 느낌을 완전히 죽여 버려서 굉장히 흐름이 우울하게 돼 버린다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쪽에서는 밝으면서 웅장했던 애국가의 멋과 맛을 다 죽여 버리는 장송곡이 아니냐는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그러면 ‘창조의 조옮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육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 일째 안식을 하십니다. 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내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을 통과하면서 안식일 다음에 또 다른 한 주가 시작되면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손 놓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다음 한 주가 시작될 때에도 또 창조를 하시는데 단, 안식일을 통과하시면서 창조의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창조예요. 그런데 이 창조의 활동이 조옮김을 하게 됩니다. 마치 원래 테너 가수를 위해서 만든 노래를 바리톤 가수가 부르게 되니 그 조를 옮겨서 곡을 다시 쓰듯이 아니면 호른을 위해서 색소폰을 위해서 만든 음인데 색소폰의 곡을 피콜로로 연주를 해야 된다면 음을 다시 높여서 조를 바꿔서 쓰듯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내용은 같은데 안식일을 통과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 조옮김을 할 수밖에 없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삼라만상을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만드신 뒤에 마지막 과정의 인간은 흙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면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식일을 맞이하신 것이지요. 인간의 입장에서는 처음 맞이한 상대가 하나님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결합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시다가 그 행복과 기쁨을 연장하시면서 피조물인 인간과의 결합이 이 안식일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안식일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므로 그 다음 주부터 새로운 주가 시작될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시던 그 말씀이 이제는 인간이라는 악기를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창조의 모양이 달라진 것이 육일 동안의 창조에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셨고 그 다음 주부터는 하나님의 활동이 유에서 다른 유를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인간과 결합하시게 되면서 이 말씀이 인간이라는 악기를 통해서 나타나면서 창조가 조옮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하나님께서 가장조로 창조를 하셨다고 하면 인간이라는 악기를 통해서 바장조의 창조로 바꿔진 것입니다. 아니면 Eb으로 하시다가 D로 바꾸신 것입니다. F로 하다가 Eb으로 바꾸신 것처럼 조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창조의 조옮김의 구조를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완전히 다 파괴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창조의 조옮김을 망쳐놓은 사건이 타락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살고 직장생활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직장이라고 하는 유(有)에서 다른 유(有)를 만들어 내시는데 ‘나’라는 악기를 통해서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면서 현실이 됩니다. 우리의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현실과 동떨어지고 현실과는 관계도 없는 열매 없는 말이 되기 쉬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현실적인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조옮김으로 ‘나’라는 악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활동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조옮김이 일어나는데 우리 인간들이 다 망쳐놓은 것입니다. 오늘도 가정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조옮김을 하셔서 가장이면 가장, 엄마면 엄마, 자식이면 자식, 형제면 형제, 자매면 자매라고 하는 관계 속에서 ‘나’라는 악기를 통해서 그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할 때 당신의 창조활동을 계속해나가시려고 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원곡을 옮겨낼 수 있는 악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 하나님이 쓰신 원곡의 조를 바꾸어서 ‘나’라는 악기에 맞추어서 다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창조주가 돼버렸습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고 손으로 만지면서 내 발로 걸어 다니면서 세상을 창조하고 내 삶을 창조하는 자들이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엉망진창이 돼버렸습니다. 그래도 가정이루고 자식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하시는데 항상 기뻐할 수 없으면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나님의 원곡이 조가 바뀌면서 나를 통해 연주가 될 텐데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가 나오지 않고 불평, 불만, 걱정, 근심, 우울, 짜증, 원망, 증오, 질투, 탐내는 것이 나오면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곡에는 수원교향악단의 김 필주 단장의 말대로 청명한 느낌의 애국가가 우울한 느낌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게만 만드시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게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원곡이 다 파괴돼 버리고 내가 곡을 만들어 내느라고 이렇게 걱정, 근심, 짜증, 불평, 불만이 생기니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 얘기를 왜 하고 있는 겁니까? 오늘 본문은 25장부터 31장까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제작에 관한 아주 엄격한 규격이나 모든 것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금송아지 사건을 거치고 파탄에 이를 수도 있었던 관계가 모세의 간절한 중보로 회복이 되면서 이제 드디어 성막제작의 단계의 시작에 도달했고 필요한 물건들을 봉헌하라고 하시고 그 품목을 얘기하시고 그 품목들로 만들게 될 성막의 기구들을 얘기하시고 일꾼들을 얘기하시는 단계에서 시작하면 되는데 난데없이 안식일 규정을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은 출애굽기에서 귀가 따갑도록 지금 반복되고 있습니다. 31장에서도 관계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 안식일 얘기를 하셨는데 또 안식일 얘기가 나옵니다. 왜 그러실까요? 안식일 얘기가 왜 또 나올까요? 이게 바로 성막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선민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살잖아요. 그러면 이제 선민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고 단체에서 살고 모임에서 살고 삶이 이어져 나가는데 도대체 그 삶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창조활동의 연장이 돼야 한다는 것인데 선민으로 부른 ‘너’라고 하는 악기를 통해서 나타나야 되기 때문에 조옮김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 상태는 조옮김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너희들 스스로가 다 창조주가 되어서 내 삶의 형편을 내가 보고 잘 살고 못 살고의 판단을 해서 벌써 창조주의 입장에 선 것입니다. 그 판단에 따라서 돈을 많이 벌어서 좋으면 더 벌어야지 하고, 돈이 없어서 궁핍하고 짜증이 나면 어떻게 하든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계획이 생기고 소원이 생기고 활동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나면서 하나님과 최초의 인간이 결합을 합니다. 눈 뜨고 처음 보는 인격적 상대자가 하나님이고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첫 번째 대상인 이 상태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결합한 날이 안식일이고 이 결합이 기쁨과 행복을 동반합니다.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거듭 말씀하신 것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결합으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는 것인데 기쁨이 나타납니다.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간에 결합이 있었고 영원 전이므로 시작이 없었고 영원 후까지 갈 것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 결합 속에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 벌면 기뻐하고 서울대 들어가면 기뻐하고 건강하면 기뻐하고 암 걸렸다 나으면 기뻐하고 대통령되고 국무총리 되고 장관되면 기뻐하고 오늘 수입이 어제보다 많으면 기뻐하는데, 아무것도 이 세상에 없을 때 영원 전에 성부, 성자, 성령님께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결합이 되면서 기뻐하셨습니다. 돈이 없을 때도 기뻐하셨고 대통령이나 장관의 관직이 없을 때도 기뻐하셨고 육체가 건강하네 마네라는 말이 필요 없을 때도 기뻐하셨는데 그 기쁨이 진짜 기쁨이라는 것이에요. 이 세상이 없을 때 그 분들이 기뻐하셨어요. 그런데 이것이 안식일을 통하면서 이 세상과 상관없이 영원부터 존재하는 그 기쁨이 인간에게도 연장되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던 일들이 조옮김으로 인간을 통해서 창조가 되는 것이고 이 창조활동을 위해서 결합이 우선돼야 했습니다. 결합의 순간에 인간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모셔 들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만족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기쁨을 원하지 않게 되는데 이게 땅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아내로부터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아내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자식으로부터 기쁨을 얻지 못하면 자식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얻으니 더 이상 기쁨을 원하지 않아요. 기쁨을 원하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 죽은 상태가 될 때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단 하나님께서 연주하고 싶은 곡이 나를 통해서 연주되고 있고 조옮김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삶에 대해서 죽으면 그 삶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내가 삶에 대해서 죽으면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데 이게 안식일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합을 위해서 장치해 놓으신 것이 인격자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기계와 결합하는 데는 기쁨이 없어요. 그러므로 인간이 주체적일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창조하시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판단하고 내가 말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내 말이 내 안에 있으므로 선악과를 만드셔서 판단할 능력은 있으되 언어를 사용할 능력은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므로 하지 않는 것인데 스스로 주체성을 활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려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악기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조옮김으로 이 세상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활동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활동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막은 선악과를 따 먹어서 자기의 말(생각, 계획, 소원)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고 싶어 하는 체질이 되었습니다. 선악과의 역할이 성막의 번제단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성막의 존재이유는 선악과의 효과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조바꿈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다 창조의 조바꿈입니다. 하나님께서 원곡을 쓰시고 ‘나’라는 악기를 통과해서 조바꿈으로 바꾸어진 곡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선악과를 두셨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는 번제단을 두신 것입니다. 상번제가 중심인 것이지요. 상번제에서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기구가 바로 십계명 돌판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증거인데 그 돌판을 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자꾸 말을 하려고 하므로 말을 하려고 하는 나는 번제단에서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안식일의 결합을 회복하고 그 안식일의 결합이 회복되면서 이제 에덴에서 타락 전에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므로 결합이 이루어졌는데 이제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로는 선악과 따먹어서 스스로 말을 갖고 살려고 하는 창조주의 입장에 있는 내가 죽으므로 연합이 이루어져서 이제 앞으로의 모든 삶은 타락이전의 아담의 삶처럼 하나님의 창조가 ‘나’라는 악기를 통해 조옮김으로 나타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막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지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회복하는 것임을 모두가 다 명심하라는 것이고, 지금 이스라엘이 공동체로서 함께 힘을 모아서 하는 첫 번째 활동이고 첫 번째 과제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일에 대해서 죽는 것부터 얘기를 하시는데 안식일입니다. “일을 하면 죽으리라.”라고 하신 것은 내가 창조주가 되어서 하는 일들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을 시킬 때는 일에 대해서 마음이 죽은 상태라야 하나님의 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 보니 내가 그 일에 대해 애착이 생겨서 내가 잘 해보려고 하는데 목사에게는 목회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목회에 마음을 쏟는 것은 무조건 정당한 줄 알고 있는데 보세요. 성막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 하셔서 선민과 만나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성막을 짓는 것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법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막을 짓는 일조차도 안식일을 범하면서 까지 일을 하면 죽이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 일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안식일이 있는 이유가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취지가 그런 것이므로 하나님하고만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일을 하면 괜찮은 줄로 알고 있고 교인들도 주일날 더 바빠요. 교회에 와서 더 많은 일을 합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만의 결합을 위해서 주일을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에게 목회는 첫 번째로 죽어야 할 대상입니다. 목회가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목회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가 내 일이라서 내 마음이 흠뻑 빠져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가 내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또 사장님이 사업하시잖아요. 사업하시는 사장님 장로님은 사업이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수가 없어요. 자식을 양육하는 어머니는 자식이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어요. 그래서 안식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첫 번째로 해야 되는 과제와 사명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은 자라야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활동이 계속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나’라는 악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쓰신 원곡이 조옮김으로 나타나는 일인데 자꾸 내가 끼어들어서 잘해보려고 하면 조가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원곡이 훼손돼 버리는 것이고 내가 원작자가 돼 버렸어요. 이것을 회복시키라고 성막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성막의 존립의 목적이 안식일의 회복으로 ‘하나님과 온전히 결합하라. 하나님과 결합하면 하나님이 쓰신 창조의 원곡이 너를 통해서 조옮김으로 표현될 것이다. 안식일의 의미인 이 세상에서 너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죽어라. 너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 있어라. 네가 세상에 대해서 죽으면 너의 삶은 하나님의 일이 된다.’라는 이 얘기를 하시기 위해서 성막제작 초두에 안식일의 얘기를 뜬금없이 다시금 모세가 해주시는 것입니다.
창조의 조옮김, 이것이 성막의 의미가 완성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온전한 결합을 이룰 때라야만 조옮김의 창조가 나타나므로, 자식을 보고 있다면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원곡이 조옮김으로 표현됩니다. 직장에 나가서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죽습니다. 이게 십자가 생활화 아닙니까? 죽으면 직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표현하시려는 그 창조의 원곡이 나에게 맞추어져서 조옮김으로 표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나는 악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이올린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비올라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첼로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쓰신 원곡이 첼로에 맞춰서 비올라에 맞춰서 바이올린에 맞춰서 조옮김으로 나타나는 것뿐이지요. 나는 이 세상을 사는 게 아닙니다. 누가 색소폰에서 소리가 날 때 색소폰이 연주를 잘 한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연주자가 연주한다고 하지요.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연주하시는 것이지 우리는 악기입니다. 창조의 조옮김이 성막의 모든 의미의 완성인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날마다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어설픈 창조주가 되어서 기가 막힐 정도로 한심한 창조주가 되어서 내 삶을 창조한 결과가 불평, 불만, 우울, 짜증 그리고 절망과 슬픔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악기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입에 물리고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나는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내 삶은 하나님의 일이 되어서 ‘나’라는 악기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가 조옮김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과 내 이웃 모두가 보시기에 좋은 삶이 연주되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