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下山而待 使一章十一節
基督敎史 始自驚異而成. 主復活 門徒一次驚異. 今昇天時 又復驚異. 主復活後 顯現于橄欖山上 托勿離京, 又托至地極爲證人. 言畢卽昇天, 門徒仰天. 有白衣人言曰 勿仰天 彼當復來云. 此勿徒仰天 當下山從主之訓 而證主矣. 如變化山上之門徒 下山有病者 有紛爭者 以主之慈悲 何能晏起不救乎?
下山之後 先祈禱. 限十日, 一日二日經過後 無異狀. 必有異論者 而怯危. 彼得先言 補決擇맛듸아. 此非危務 而門徒不知 故須行矣. 至十日 而神降臨 如火如風如舌 而臨門徒. 大有覺醒悔 前日之紛爭占位 問復國之.
非徒仰天而望 皆非所宜. 前日主之所訓 一日記憶, 大得能力 又悔. 望主爲主 一一悔悟. 會得 敎會之材料 何也? 復活也, 昇天也, 聖神也. 敎會設主者卽 證主之復活也. 昔猶人在野 摩西上山四十日不下, 民不待之 而做金犢拜之, 皆發癲而死. 吾等待之間心上 有金犢乎? 速宜去之.
其次證據. 卽見所聞 不可不證, 非但證其復活 又證再臨. 或曰 復活昇天已見之 足可證矣, 再臨所未目視者 何能爲證也? 主已言之 而未應及已應也. 復活昇天 已應之 再臨始未應, 主言如金石不變也 十分無疑 雖證無愧矣.
證之有各種. 言證, 行證, 物證. 言證屬過渡時 非言不明 故言之詳而證之可矣. 然今日文明 皆已知耶蘇敎徒有善行 是於證主. 今日敎會之不權 在敎友無善行. 前日宮井敎會靑年 O累千金 救濟, 不言与者爲級而歸. 其後得救者曰 實探知爲敎會 故來堂拜之, 是待主之事. 主曰 行於貧者卽 行於我者也.
偉大之說敎家 不必要緊. 當備聖油 而待卽 又當束帶而醒待可也. 亞扁氏夫人 聞其郞到時間前 至門而待 郞至키쓰. 与東之人異色, 其愛可神欲耳.
264. 산에서 내려와 기다림 / 사도행전 1:11
기독교 역사는 놀라움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첫 번째 경이(驚異)였습니다. 지금 주님이 승천하시는 때에 또 다시 놀랍니다. 주님께서 부활 후 감람산에서 명백히 나타나셔서 서울[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분부하시고, 또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는 즉시 승천하시니,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봅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 저분은 반드시 다시 오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더 이상 하늘을 바라다보지 못한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주님의 교훈을 따라 주님을 증거 하여야 했습니다. 마치 변화산 위의 제자들처럼 산에서 내려오니 병자가 있었고 분쟁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의 자비하심이 어떻게 더디 구할 수 있겠습니까?
산에서 내려온 후에는 먼저 기도했습니다. 한 열흘 정도가 되었는데, 하루 이틀이 경과한 뒤에는 별다른 현상이 없었습니다. 필시 생각을 달리하는 자와 위험을 느낀 자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말하여서 (가롯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선출하였습니다. 이것이 위급한 업무는 아니었으나 제자들이 알지 못한 고로 실행하였습니다. 10일째가 되자 성신이 불과 같이, 바람과 같이, 혀와 같이 강림 하여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큰 각성과 회개가 일어났으니 지난날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광복(光復)하면 차지할 자기들의 지위차지를 위해 분쟁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지 않았으면 모두가 마땅히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날에 주님이 훈계하신 바를 하루 만에 기억하였고, 큰 능력을 받고는 또 회개하였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바라보고서야 하나, 하나 깨달아 뉘우쳤습니다. 이해하게 된 교회의 일거리는 무엇입니까? 부활이요, 승천이요, 성신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세우는 것이니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 유대인들이 광야에 있었을 때 모세가 산에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예배했는데, 모두 미쳐 날뛰다가 죽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에 마음에 금송아지가 있습니까?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증거입니다. 보고 들은 바는 불가불 증거 합니다, 그 부활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재림을 증거 합니다. 혹 말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이미 보았으니 족히 증거 할 수 있지만, 재림은 아직 눈으로 목격하지 못한 바이니 어떻게 증거 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으니 아직 응하지 않은 것이 이제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부활과 승천은 이미 응하였고 재림의 시작은 아직 응하지 않았으나 주님의 말씀은 쇠와 돌과 같이 변하지 않기에 충분히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증거 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증거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말의 증거, 행동의 증거, 물질의 증거입니다. 말씀의 증거는 지나칠 때가 있지만 말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자세히 설명하여야 증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명(文明)은 모두가 예수교 신도들의 선행이 있는지를 이미 다 알기에 이로서 주님을 증거 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권능이 없는 것은 교우들의 선행이 없는 데에 달렸습니다. 지난날 궁정(宮井)교회의 청년이 수 천금의 많은 돈으로 구제하였는데, 말없이 주고는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구원을 얻은 자가 말하기를 그로서 교회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주님이 이르시기를 가난한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위대한 설교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거룩한 기름을 준비하고서 기다려야 하며 또 당연히 허리띠를 띠고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아펠셀라(H. G. Appenzeller)씨의 부인은 그 신랑의 소리를 들으면 도착하는 시간 전에 문에 이르러서 기다리다가 신랑이 오면 키쓰(kiss)를 했습니다. 동양의 사람과는 색다르지만 그 사랑은 가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