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개혁
대원군이 정권을 잡음에 오래 권세를 잡고 있던 김 씨네들은 실로 청천벽력을 만난 듯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제까지도 시정에 한 오입쟁이요 인격으로 알지 않은 왕손이 별안간 높은 자리에 앉게 됨은 실로 의외이다. 대원군도 평일 외척들에 대한 감정이 없지 않았고 또 조대비 역시 그 친정 편을 들게 되어 항상 김씨에 대한 증오감이 있었다.
대원군이 집정 초부터 외척 김씨를 눌러 그 전횡을 막고 국조 이래로 지방에 대한 차별과 계급을 없애 버리고 서북사람에게도 과거와 벼슬을 허락하여 요직에 많이 들어오게 하고 조정을 어지럽게 하고 민간에 분쟁을 자아내는 사색당파를 근본적으로 없이하려고 오랫동안 요로에 물러간 남인과 북인들을 불러 남인 유후조(柳厚祚)로 좌상을 삼고 북인 강로(姜㳣)로 우상을 삼고 또 민간 토호(土豪)배들이 모여 백성의 피를 빨아 먹고
어느 때는 조정의 시비를 논란하여 나라를 불안케 하는 자들이 모인 서원(書院)을 혁파하여 전국에 47처만 두게 하고 그 나머지는 다 회철(回撤)할 새 청주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안동묘(安東廟)로부터 각 고을에 첩설(疊設)된 곳은 다 헐어 버리니 사방에서 시비가 일어나 파괴니 멸망이니 하고 썩은 선비들이 떠들지만 일반 민중은 다 통쾌히 여기였다.
조선에 소위 군포(軍布)라는 것도 역시 민원의 한가지이다. 하급에 있는 상민만 물던 부담인데 병역(兵役)대신에 무는 것이라 이름을 호포(戶布)라 하여 양반들도 이것을 물게 하고 일정한 국세로 정하고 임진란에 불타버린 경복궁을 다시 중건하여 인민의 시청을 새롭게 할 새 중건에 거대한 물자가 들므로 왕족으로부터 백성까지 원납(願納)이란 이름으로 민간에 금전을 받아 드리는데 기간에 부정사건이 많아 민원이 많았고 또 당백전(當百錢)이란 돈을 만들어 백문을 일전으로 만들어 쓰게 하여 화폐의 신용이 떨어졌다.
공사의 자원이 고갈하여 함경 강원 벽지까지 목석을 운수하여 4년 12월에 준공하고 그 이듬해 5년 7월에 왕은 신궁으로 옮기시니 새로 이륙한 궁전은 교태전 경복궁 사문(四門) 근정전 경회루 등이며 신궁이 이륙된 뒤에 성문을 수축하고 또 팔도에 주요한 성문도 다 수보하였다. 대원군은 민원이 있는 것도 불구하고 가장 용단을 다하여 나라의 면목을 일신케 하였다.
4년에 왕비를 택할 새 종래 외척의 전횡을 싫어하여 일부러 국구(國舅) 없는 집안에서 택하노라고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맞아 왕비를 삼았으니 이 상대도 되지도 않았으나 모두 대원군의 용단으로 되었다. 이때 대원군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상소가 있었는데 대원군의 행정에 대한 비난이다.
이때부터 대원군에 대한 의혹이 생기기 시작되어 암운이 궁중에서 사람 몰래 떠돌았다. 군의 행정이 통쾌 과감한 반면에 너무 조폭방종(租暴放縱) 하여 오해를 사게 되었고 결국 민씨 하고 대원군과의 대립이다. 국구 없는 왕비가 도리어 더 어렵게 되기는 뜻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