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가 던져졌던 그날로부터
고정애 시인
1987년 추위를 이겨낸 매화가 곱게 피어나는 어느 날 구독하는 신문 한 곳에 시선이 꽂혔다. 을지로 청소년문화회관에서 주 1회 문학 강의가 있겠다는 기사였다. 비록 나이가 많다 해도 시도는 할 수 있는 것, 숙고 끝에 문화회관에서의 문학 강의를 신청하였고 약 2년 동안 수강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와 더불어 덕성여대 평생교육원과 한국문인협회 문예대학에 등록하여 홍윤숙 시인을 비롯 뭇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하여 방산 박제천 시인을 만나 비로소 나의 방황은 끝을 맺었다. 1990년 초가을 오후 L씨를 따라 마로니에공원 문예진흥원 앞으로 갔을 때 첫 만남에서 나는 “바로 이분이야”고 맘을 굳혔다. 알지도 못하는 42세의 청년시인에 왜 이끌렸는지 모르지만 단지 나의 촉觸에 의존했던 거 같다. 어떻든 내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던 그날로부터 무려 33년에 이르는 동안 일편단심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시인 문하門下로 살아오게 되었다. 나는 애초부터 “어떻게 시를 잘 쓸 것인가”에 목적을 두었지 별다른 욕심은 없었다. 말하자면 하늘의 별과 같은 천재시인들과 만나볼 수 있는 거조차 고마울 따름 부끄럽고 염치없는 입장인 게 본심이었다.
주 1회 수업시간 나는 개근을 했고 너무 열중을 하던 나머지 내 시간도 아닌데 쫓아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배워갈수록 어려워지는 시작법 그 험난한 길은 나를 찾아가는 나와의 싸움이었다. 잡념과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제자를 앞에 두고 젊은 스승께서 답답하고 황당함에 “묘사와 표현도 모르다니!”라는 둘러앉은 딸과 같은 문우들 틈에서 가차 없는 나무람을 듣고 귀가 길에 썼던 시가 있다.
초승달
어제는 어스름/눈물 젖어 따라오더니/오늘은 금방/수줍은 웃음/머금고 앞장선다.//
숨은 제 빛 찾고 싶어/온전하게 둥글고만 싶어/날마다 날마다/안간힘으로/조금씩
키를 돋는 그대 보려/초승이면 고개 들고/밤길 걷는다.
얼마 후 계간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1991년 6월에는 월간 『문학과 창작』 지의 출판이 시작되었다. 선생님과 문우들이 끌어주고 밀어주는 가운데 세월은 흘러 1995년 2월 20일,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선생님을 집으로 초청했었다. 아이들을 모두 분가시키고 서대문구 북가좌동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을 때였다. 미니멀리스트인 나는 꼭 필요한 것 이상은 갖지 않았다. 생각이 구식이라 성의껏 집으로 모실 줄만 알던 나는 휑뎅그렁한 안방에 교자상 2개를 이어놓고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방산 선생님과 김여정 시인을 주객으로 박승미, 전영주, 이섬, 노명순, 이창화, 김미연 시인, 여덟 멤버가 화기애애和氣靄靄 환담을 나누었던 그 소박한 행사를 잊을 수 없다. 더 이상 나이 들기 전에 그렇게라도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싶은 나의 심정이었다.
그 해 일기를 보면 ‘1995년 8월 5일 CP 구입. 116만원. 일어번역 시작’이라 쓰여 있다. 비록 독수리 타법이지만 그때까지 워드 프로세서에 불편함이 없는데 선생님께서 날마다 구입을 종용하셨다. “내가 이 나이에 뭐 하러 CP까지 사느냐고!” 구시렁거리면서도 마지못해 비싼 값을 치루고 구입했었다. 그런데 구입이 문제가 아니라 사용법이 문제였다. 4각 모니터를 앞에 두고 악전고투하는 날이 이어졌다. ‘한글과’부터 일어로 번역하기 위한 한글, 영어, 일어 ‘글자판 선택 바꾸기’까지 나 홀로 습득習得할 난제難題들이 태산이었다. 가방끈이 짧은 나에게는 능력 밖의 일인데 선생님께서 끊임없이 숙제를 안겨주셨다.
그리고 또한 어렸을 때 일본서 살았던 원어민으로 주로 일본서적을 읽어왔을 뿐 부족한 나에게 연이어 명시들을 일역하도록 독촉하셨다. 시 쓰랴 번역하랴 살림하랴 바쁘고 고달픈 나날이지만 내가 좋아해서 선택한 문학의 길이었고 “나를 믿어서 맡겨주시는 거니까” 라는 생각에 군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일한, 한일, 숙어사전들을 펴놓고 더욱더 고품격高品格인 일역을 위해 분투奮鬪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2007년 국제 펜 한국 지부에서 번역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진심으로 존경하는 김종길 교수님께서 훌륭한 번역이라 칭찬해주셔서 조금은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오기 어언 29년, 거기에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소묘까지. 6년에 걸쳐 아마튜어 소묘를 80점 가까이 그려놓게 되었다. 그 동안 가끔은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회의를 느낄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일역에 대해 말하자면 일본과의 사이도 멀어져 노력에 비해 성과가 별로인 것 같기만 했다. 그러나 본인도 알지 못한 채 숨겨진 달란트를 끄집어내어 도구로 활용, 모두에 도움이 되도록 하신다고 뒤집어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져 나름대로 성의를 다 하였다. 그러는 동안 선생님과는 허구한 날 메일을 주고받았고 메일함에 번역시도 소묘도 차곡차곡 저장되었다. 그에 따라 『문학과 창작』지에 실려 온 항목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다. 사제師弟의 인내와 협조의 소산인 결과물, 그 모든 자료들을 어떻게 그대로 사장死藏시킬 수 있나. 시대를 앞서가는 선견지명으로 이미 그 마당을 마련하여 싣도록 해주셨다. 다음카페는 2007년에 비롯되었고 카페지기는 선생이셨다. 그 후 새로이 내 멋대로 고정애 네이버 블로그의 시작 날자는 2020년 5월이었다. 자료의 보존을 위하고 또 필요할 때 여러 문인들이 내려 받기 쉽도록 공용으로 모두 실어놓았다.
갈수록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누구를 만나 동행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모습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30년 전 그 때 선생님의 연이은 독촉이 아니었던들 CP를 구입하지 않았고 블로그는커녕 나는 컴맹이 되었을 것이다. 시대에 앞서지는 못할망정 정보화 시스템을 활용하며 집에서도 편하게 살 수 있게 되다니! 이제와 생각컨데 1990년 초가을 오후 문예진흥원 앞 방산 선생님과의 첫 대면, 그에 따른 내 선택은 야구시합에서의 만루 홈런이라며 자족自足을 한다. 선생님과는 별다른 대화가 필요치 않았다. 남다른 투시력으로 내 바닥까지 훤히 꿰뚫고 시를 통해 즉시즉시 파악을 하시니까 기나긴 세월 함께 해온 그 두께만큼 쌓인 사제師弟의 지극한 신뢰와 감사지심이 그 이상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서울 중구 청구동에서 이곳 양평 수능리 산속으로 이사해 오기 직전 여름에 그리고 이사해온 이듬해 온 사방에 벚꽃 만발하던 봄날에 찾아뵈어 인사드렸다. 아무 때나 방문하면 은근한 미소로 반겨주시던 방산 선생님, 생각이 날 때마다 눈물샘이 자극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