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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만난 교민 윤소희
20년만의 독일 여행이다. 아시아나 항공기의 비즈니스석은 2층이었는데, 10A 좌석은 왼쪽 창가였다. 항공기는 정확히 12시 30분에 출발하였다. 독일과 한국은 7시간 차이가 나서 11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면 5월 19일 오후 17시에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비행기가 장상괘도에 진입하며 마침내 기내가 조용해진다.
난생 처음 비즈니스석을 타보니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넓은 좌석 전체가 거북스럽다. 주의를 둘러보니 앞 뒤 좌석은 등받이에 가려 보이지 않고, 오른쪽 통로 건너 좌석은 2인석인데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는 의자가 침대가 되어 다리를 벋고 누워있다. 나는 의자를 당겨보고 밀어보지만 요지부동이다. 들여다보고 더듬어도 손잡이가 없다. 오른쪽 팔걸이 위를 보니 손바닥만 한 타원형 작은 판에 선으로 된 모형이 있다. 의자 모형이 직각에서 60, 30도 수평의 표시가 있다. 수평 밑의 버튼을 누르자 앉은 의자가 스르르 앞으로 밀려가 발걸이에 닿으며 그대로 침대가 된다. 의자를 원위치 시키고 손가방에서 5월호 시사 잡지를 꺼내 펼치는데, 영화배우 찜 쪄 먹을 미모의 승무원이 점심식사 주문을 하라고 말한다. 한식과 양식 중에 나는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4월 말경에 발행된 잡지는 온통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후보자
들 기사로 가득하다. 대통령 선거 전에 발행된 잡지지만 5월 9일 선거가 끝난 뒤에 대충 훑어봐도 읽을거리가 꽤 많다. 나는 이 잡지를 30년간 정기구독 하는데 절반은 읽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5월호는 17일간 여행 중에 심심풀이로 틈틈이 읽을 만한 내용들이라 즐겁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마침내 식사가 나왔다. 샐러드와 빵, 버터, 올리브유가 먼저 나온다. 2시가 넘어 늦은 점심이라 맛있다. 샐러드를 먼저 먹고, 비교적 단단한 빵에 버터를 발라 먹는다. 부드러운 빵은 올리브유를 찍어 먹는다. 처음 먹어보지만 정말 맛있다. 맛있는 식사에는 술이 있어야 구색이 맞는다. 승무원을 불러 위스키를 주문했다. 얼음이 많이 든 언더락이 나온다. 나는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데 이정도면 얼음물에 가깝다. 위스키를 가득 부어달라고 청하자, 예쁜 얼굴에 눈이 커지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하늘을 나르며 마시는 위스키 맛은 별나다. 빈속이 짜르르 반응한다. 그 감각이 또한 즐겁다. 메인메뉴 스테이크가 나온다. 호텔 스테이크 버금가는 크기에 소스 냄새도 좋다. 추가 소스로 매운 타바스코를 치고 고기를 자른다. 두터운 속까지 알맞게 익은 스테이크다. 역시 비즈니스석 식사는 다르다. 위스키 한 컵을 더 마시고 식사를 끝낸다.
칫솔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이 1억 원짜리 전세방만큼 넓다. 그런데 변기가 안 보인다. 서너 사람이 걸터앉을 만한 의자 같은 것을 다듬거리자 덜컹 뚜껑이 열리며 턱을 냅다 치는데 들여다보니 변기다. 빌어먹을, 일반석을 타야 할 서민이 고급석을 타서 별별 것에 놀라곤 한다. 작년 겨울에 독일에서 형님 부부가 왔었다. 형수가 비즈니스석을 타보니 편하고 기내식도 좋았다고 자랑을 했었다. 국내 굴지의 여행사 직원인 둘째 딸이 ‘큰엄마 뻐기는 꼴이 보기 싫었다며, 야코를 죽이기 위해 아빠 이번 여행에 왕복 비즈니스석을 예약했다.’고 으스댔다. 돈이 얼마나 더 들었는지 모르겠으되, 나도 은근히 싫지는 않았는데, 막상 타보니 분에 넘친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양치질을 하고 자리에 돌아와 창밖을 본다. 눈이 부신 햇살 아래 목화솜을 풀어놓은 듯한 구름 위를 비행기는 가는 듯 마는 듯 날아간다. 비행기를 타고 가며 창밖 구름을 볼 때마다 어릴 적 할머니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곰배팔을 휘두르자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하늘에서 별이 뚝뚝 떨어지고, 허공에서 응애응애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무엇이냐?”
할머니가 낸 옛날얘기 같이 긴 으스스한 수수께끼를 아는 손자 손녀들이 있을 턱이 없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가 목화솜을 타는 건넌방으로 간다. 방에는 어머니가 씨아틀로 씨아질을 하고 있다. 바구니에 담긴 목화송이를 씨아틀에 넣고 곰배팔 같은 손잡이를 돌리면, 목화솜은 틀 뒤로 흰 구름처럼 뭉게뭉게 밀려나 쌓이고, 목화씨는 앞으로 뚝뚝 떨어지며 ‘삐애삐애’ 소리를 낸다. 똑 애기 울음소리 같은 그 소리는 목화송이에서 씨를 발라내는 씨아틀 소리다.
예닐곱 살 적이던 그때부터 나는 해마다 가을이면 어머니가 목화솜을 타는 방에 들어가 곰배팔 같은 손잡이를 돌리며 환상적인 장면을 체험하고는 했었다. 우리 집은 목화를 많이 심어 가을이면 집안이 온통 목화 천지였다. 목화송이를 타서 목화솜을 만들고, 물레로 무명실을 자아 베틀에서 광목을 짠다. 우리 할머니는 며느리가 셋인데, 어머니가 둘째였다. 삼동서는 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목화솜을 타고, 물레에 실을 잣고, 베틀에 앉아 쩔꺽쩔꺽 광목을 짜는 것이 일과였다. 하루 온종일 삼동서가 겨끔내기로 베를 짜면, 사흘 만에 광목 한 통이 베틀에서 떨어진다. 광목 한 통은 120마, 약10미터가 넘는다. 그때 광목 한 통이 쌀 세 가마 값이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나 광목 한 통이 베틀에서 떨어질 때마다 할머니의 세 며느리 생명이 한 치씩 줄어든다는 사실을 당시는 알 턱이 없었다.
목화꽃은 무궁화만큼 크고 노란색 분홍색으로 탐스럽고 예쁘다. 꽃이 지면 열매가 맺히며 빠르게 커진다. 여름이 되면 열매가 다래만큼 커지는데, 그것을 목화다래라고 한다. 다래처럼 길쭉한 열매는 다래만큼 달고 수분이 많다. 그래서 아이들은 목화밭에 들어가 목화다래를 주머니 생긴 대로 따서 담다가 주인이 나타나면 냅다 줄행랑을 놓는다. 허기진 배에 목화다래는 점심 한 끼가 되곤 했다. 하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꼭두새벽부터 목화밭을 지키는 것이 일과였다. 그렇게 한 보름만 지켜 열매가 커져 씨가 생기면 먹지 못한다. 삼복이 지나 찬바람이 나면 열매가 저절로 터지며 하얀 솜이 꽃처럼 비어져 나와 목화송이가 된다. 그래서 목화는 꽃이 두 번 핀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13년(1364)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는데, 조선이 개국되며 목화는 전국에서 재배되어 조선 백성은 한겨울 추위를 면하게 되었다. 문익점은 혼란한 고려 말에 두 번이나 반역에 가담했으나 목화씨를 가져 온 공로로 살아남았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어 벼슬이 좌사의대부에 이르렀다. 조선 백성들은 포근한 솜이불을 덮고, 솜을 넣은 따듯한 옷을 입으며 문익점을 입이 마르도록 칭송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960년대에 우리 할머니는 목화솜을 탈 때마다 문익점 이야기를 손자들에게 들려주곤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세종대왕 보다 문익점을 먼저 알고 세상에서 젤로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책을 펼쳐도 집중되지 않고 어릴 적 추억만 떠오른다. 창문 커튼을 닫고 의자를 밀어 침대를 만들고 눕는다. 넓지 않은 기내는 조용하다. 금방 잠이 들것 같지만 정신은 말짱하게 옛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나를 마중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 형님이 생각난다. 나보다 일곱 살 위인 형님은 1971년 28세 때 광부로 독일에 갔다. 그때 나는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내가 월남전에서 귀국하여 군에서 제대했을 때, 형님은 3년 만기의 채탄광부에서 벗어나 독일 GM자동차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그해 국적을 독일로 바꾸고 한국 간호사와 결혼을 했다.
형님이 두 남매를 데리고 처음으로 한국에 온 것이 1982년 여름이었다. 형님이 독일에 간 지 11년만이었고, 큰 아이 딸이 일곱 살, 아들이 다섯 살 때였다. 나는 당시 서른세 살로 고등학교 국어교사였다. 형님은 그 뒤부터 2, 3년에 한 번씩 한국에 나오곤 하였다. 2005년 두 부부가 정년퇴임을 한 뒤부터는 처가 근처인 오산시에 작은 아파트를 사놓고는 매년 한반씩 와서 두서너 달씩 머물다 가곤하였다.
잠인지 꿈인지 비몽사몽간에 일어났는데, 여승무원이 저녁식사 주문을 청한다. 점심에 먹었던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나는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거나 몰두하면 좀처럼 헤어나거나 털고 벗어나지 못한다. 그 버릇이 내 직업인 소설 쓰기에는 큰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대인관계나 경제적으로는 적잖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외식으로는 매번 스테이크를 먹을 것 같아 지레 겁이 난다. 어느 나라건 스테이크는 비쌀 것이다.
한국에는 오후 8시면 밤이지만 비행기 창밖은 벌건 대낮이다. 아직 네 시간은 더 가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린다. 앞 뒤 좌석의 승객이 창문 커튼을 내리자고 한다. 나는 책을 보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왼쪽 옆의 창문 커튼을 내리면 수면에 딱 알맞은 조명이 된다. 하기는 이 시간이면 서울은 한밤중이다.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깨보니 독일 시간으로 오후 4시다. 이제 한 시간만 더 가면 될것이다. 커튼을 열고 밑을 보니 독일 어느 지역 상공을 날고 있다.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드넓은 땅에 밀림이 울창하고 간간이 노란 빛깔의 경작지가 보인다. 비행기에서 보이는 저 면적이면 땅에 서서 보면 그 끝이 안 보일 것이다. 간간이 집단 주거지가 보이지만 넓은 땅이 그저 숲이고 경작지다. 저 드넓은 밭에 무슨 농작물이 자라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농촌에서 자랐으니 당연한 궁금증이다.
마침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비즈니스석의 승객은 거의 외국인인데, 숨소리도 없이 조용하다. 이윽고 비행기가 착륙한다. 활주로를 한참 달려가서 비행기가 멎고 승객들이 내릴 준비를 하는데, 패밀리 서비스를 신청한 항공사 직원이 기내까지 들어와 나를 안내한다. 둘째 딸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엄청 넓다면서 패밀리 서비스를 신청해 놓았었다. 독일 말을 못하는 내가 짐 찾는 곳을 몰라 헤매면 큰일이겠다 싶어 나도 승낙했었다.
과연 패밀리 서비스를 청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멀기도 하지만, 짐 찾는 곳이 두 군데였다. 아시아나 항공기 이착륙 지점은 공항 서쪽 끝에 있었다. 항공사 직원도 두세 번이나 전화를 하여 확인하고 나를 짐 찾는 곳에 안내했다. 사람들 틈에 서자마자 내 가방 두 개가 저만큼 보인다. 비즈니스석 승객은 27kg 가방 두 개를 갖고 갈 수 있어서 이것저것 가방을 채웠다. 한국 사람인 항공사 직원은 출구까지 안내했는데, 형님 부부가 나를 보고 달려왔다.
공항은 정말 넓었다. 기차를 타고 5분 쯤 가서 내려 주차장까지 10여 분을 걸어야 했다. 형님은 이 공항이 인천 국제공항만큼 넓다고 했다. 공항에서 복흠시 형님 집까지 자동차로 2시간 걸리지만 길이 막히면 3시간 이상 걸리기도 한단다. 승용차 운전은 형수가 한다.
왕복 8차선인 고속도로에는 차가 빼곡하게 달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많은 차들 중에 고속버스나 노선버스는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공사장 대형 화물차도 없다. 1‧2차로는 승용차나 승합차, 3‧4차로는 화물차가 달리는데, 화물차 모두가 대형 탑차였다. 하도 궁금해서 형님께 물었다.
“형님, 저 많은 화물차가 대체 뭘 싣고 다닙니까?”
“생활필수품은 물론 공업용 부자재도 독일은 탑차가 수송한다. 덮개가 없는 차에는 물건을 실을 수 없어.”
“그렇군요. 한데, 버스가 한 대도 안 보여요. 고속버스 운행도 안 하나요?”
“독일은 고속버스라는 게 없어요. 관광버스는 가끔 보이지만 고속도로에 한국처럼 노선버스는 없어. 그게 왜 그런지는 나두 모르지만, 집집마다 차가 식구 수대로 있으니 장거리 버스 탈 이유가 없겠지.”
한 시간 이상 달려와서 휴게소에 들어갔다. 넓은 주차장에 대형 화물차가 질서 정연하게 서있다. 승용차와 승합차는 그리 많지 않다. 참 대한민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나라라고 생각하며 형님 뒤를 따라 휴게소에 들어갔다. 쿠키를 굽는 구수한 냄새가 배고픈 속을 홀랑 뒤집는다. 그러나 화장실이 급하다. 화장실 앞에서 형님이 동전을 기기에 넣자 입장권이 나온다.
“형님, 휴게소 화장실인데 돈을 받아요?”
“그럼, 독일은 화장실 마다 돈을 받는다.”
“얼만데요?”
“7센트”
나는 깜짝 놀랐지만 급해서 형님이 주는 표를 받아 들어가는데, 우리나라 전철 개패기 같은 입구였다. 소변기 앞에서 지퍼를 내리고 소변 파이프를 꺼내 들고는 기겁을 했다. 내 소중한 물건이 소변기에 걸쳐야 할 만큼 변기가 높았다. 깨금발을 하고 오줌을 눌 수도 없어 양쪽 검지손가락으로 파이프를 받들어 올리고 볼일을 보며 계산해보니 오줌 버리는 값이 우리 돈으로 875원이다. 자기들 키만 계산해서 소변기를 이렇게 높이 설치하고 돈은 호되게 받아먹는다고 구시렁거리며 일을 보고 돌아서서 지퍼를 올리며 앞을 보니 이런 빌어먹을, 나지막한 소변기 4개가 나란히 있는데, 덩치가 나만이나 한 아이 둘이 히히덕거리며 우줌을 누고 있다. 내좁은 소갈머리가 스스로 민망스러워 화장실에서 나오자, 형님이 표딱지를 달라고 한다. 건네주며 물었다.
“그걸 뭐하게요?”
“휴게소에서 물건 살 때 표를 주면 5센트를 감해주는 거야.”
나는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결국 오줌 버리는 값은 2센트, 250원이었다. 세 사람이 소변을 보았으니 1유로 5센트, 1875원 돌려받는 셈이었다. 결국 장삿속의 한 단면이겠지만 내 소견머리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가 저절로 도리질이 되었다. 출출한 배에 음식 냄새가 좋아 저녁을 먹고 가자고 했다. 시간도 7시가 넘어 식대를 내가 낼 요량으로 말했는데 형수가 대답했다.
“간단하게 음료나 마시고 그냥 가요. 집에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어요. 한 30분 이면 집에 가는데 뭐.”
“그래요? 그럼 가야죠.”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출발했다. 그럴 것이다. 20년 만에 오는 작은아버지를 위하여 조카딸과 독일 여자인 조카며느리가 저녁준비를 하는 게 당연하다. 시장기는 음식 냄새와 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든든하던 뱃속도 남들이 먹는 모습과 그 냄새에 금방 뒤집어 지며 배가 고파진다. 그러나 잠시 뒤면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즐겁다. 양식일까 한식일까? 독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한식을 만들 턱이 없다. 세계적인 맛이라는 독일 소시지 구이 아니면 등심 바비큐일 것이다.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고기를 실컷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번 여행에서 고기 한번 원 없이 먹어볼 것이다.
7시 30분인데 차가 낯익은 길로 들어간다. 20년 전에 보았던 길과 주위 풍경이 그대로다. 복흠시 외곽의 주택가에 형님 집이 있다. 결혼 할 때 산 집인데 35년째 살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방을 내렸다. 가방을 밀고 집에 들어갔는데 조용하다. 조카들이 왔다면 손자가 셋일 것이다. 처음 보는 작은 할아버지라 서먹하겠지만 이렇게 조용할 수는 없다.
현관으로 들어가 형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도 인기척이 없다. 먼저 들어간 형수가 2층 주방에서 내려오는데, 그 뒤에 한국 여자가 서서 방긋 웃으며 말한다.
“어서 오세요. 함학준 선생님, 반갑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무르춤하니 서서 허리만 꾸벅하다가 인사를 받았다.
“아- 예! 저도 반갑습니다.”
인사를 하며 형님을 따라 가방을 거실에 놓고 주방으로 올라갔다. 식탁에는 과연 그릴에 구운 소시지와 바비큐가 차려져 있고, 야채와 소스 등이 앉으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형님과 내가 나란히 앉고, 형수와 여자가 마주보고 앉았다. 형수가 말했다.
“먹기 전에 우선 인사부터 해야죠. 삼촌, 이쪽은 내 고향 후배에요.”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얼핏 보아도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한데다 웃으면 보조개가 파이는 예쁘장한 얼굴이다.
“윤소희라고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내미는 작은 손을 잡으며 나를 소개했다. 덩치에 비해 손이 참 작다.
“함학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선생님 소설 많이 읽으며 존경스러웠습니다.”
형님 집에는 내 책이 20여 권 있을 것이다.
“고맙지만, 쑥스럽습니다.”
형님이 말가리 들었다.
“자, 이제 먹으면서 얘기하자구. 배고프잖아.”
가장 반가운 말이다. 나는 우선 노릇노릇 잘 구워진 베이지빛깔의 굵은 소시지를 포크로 찍어 접시에 담았다. 형님이 냉장고에서 발렌타인 21년산을 들고 와서 앉는다. 잔에 따르고 건배를 한다.
“반갑습니다!”
술맛도 소시지 맛도 기막히다. 역시 음식 맛은 분위기에 민감하다.
“형수님이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준비한다고 해서 조카들이 온 줄 알았는데, 잠시 놀랐습니다. 소희 씨 잘 먹겠습니다.”
여자는 금방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어머나, 제 이름을 남자가 불러주시니 황홀하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여자의 표정과 그 몸짓에서 꽤 오랜 동안 혼자 사는 여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과 함께 독일에 머무는 동안 상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데, 그 예감이 즐거워지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분출하는 기분을 찍어 눌러야 했다.
“삼촌, 애들은 바빠서 다음 주 토요일에 온다고 했어요. 월요일에는 베를린에 가는데, 호텔을 영수가 예약했어요.”
형수의 말을 형님이 받았다.
“월요일에 베를린에 가서 사흘 밤 자고 온다. 그리고 금요일 네덜란드에 가서 1박하고, 밤 여객선으로 영국 런던에 간다. 런던에서 1박하고 밤 여객선으로 네덜란드에 와서 집에 오는 여행계획을 잡았다. 파리나 스위스는 먼저 왔을 때 갔었으니까 그렇게 잡았는데 괜찮지?”
“그럼요. 제가 모두 가보고 싶던 곳입니다. 그런데, 교통편은 어떻게 하나요?”
형수가 대답했다.
“베를린은 우리 차로 가고, 네덜란드와 런던은 여행사로 가요. 그리고 퀼른은 가까우니까 기차타고 가서 하루 관광할 거예요 그것만 해도 일정이 빠듯해요.”
식사는 듣고 말하고 먹으며 계속했다. 소희가 좀 열쩍은 표정과 몸짓으로 말했다. 딴에 좀 미안한 말을 할 때는 손을 모아 잡고 몸을 약간씩 좌우로 움직이는 것은 버릇인 모양이다.
“선생님, 그 여행에 저도 따라가는데, 괜찮겠지요?”
나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포크에 찍어들고 잠시 멍했다. 여자에 대한 첫 느낌과 예감이 현실로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내가 구태여 싫어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내놓고 반기기는 멋쩍다.
“아, 그렇게 됐습니까? 저야 뭐 좋습니다.”
“소희가 삼촌 소설에 홀랑 반했다니까요. 삼촌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내가 말렸지만 굳이 가겠다고 하네요.”
“장거리운전을 두 사람이 번갈아 해서 좋고, 차도 네 사람이 타면 딱 좋으니까 나도 좋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형님, 잘하셨습니다.’ 하고 감사하며 대답했다. 사실 20년 만에 만난 형님 부부와의 여행은 좀 서먹할 수도 있는데, 소희가 끼면 윤활유 역할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형님, 잘 됐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겠군요.”
내가 너무 좋아했는지, 형님 부부가 이상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머쓱해서 술잔을 얼른 비우고는 식은 소시지 도막을 우적우적 씹었다. 형님도 젊어서는 술을 잘 했지만 일흔이 넘으면서부터 형수의 성화로 술을 자제하고 있다. 형수는 술을 별로 좋아지 않는데, 소희는 곧잘 마셔 얼굴이 발갛도록 술이 오르고 말이 헤퍼지는 듯싶었다. 결국 둘이 위스키 한 병을 비우고 식사를 끝냈다.
일곱 시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나는 푹 자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었다. 작가들은 밤에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나는 낮에만 작업을 한다.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나면 7시 30분이다. 한 시간 아침을 먹고 9시경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7시에 컴퓨터를 끈다. 그때부터 자유시간이다. 술도 마시고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본다.
여기서는 운동기구가 없으니 맨손체조를 한 시간 했다. 나는 운동 중독에 걸린 셈이다. 아침에 운동을 하지 않으면 하루 온종일 몸이 찌뿌드드하고 기분도 그렇다. 샤워를 하고 1층 거실에 내려가니 형님이 신문을 보고 있다. 인사를 하고 정원으로 나왔다. 20년 전에 어리던 나무들이 내 넓적다리만큼 굵어지고 숲으로 욱어졌다. 주변이 단독주택들이라 집집마다 나무가 울창하다. 울창한 밀림 속에서나 들을 법한 온갖 새들이 다투어 지저귄다. 그 중에 귀에 익은 새소리가 있다. 멧비둘기 소리가 분명한데, 버터와 치즈를 먹은 독일 소리로 울어서인지 맺고 끊음이 분명치 않고 얼버무리는 소리다. 형님께 물으니 분명 멧비둘기인데, 한국 비둘기보다 곱절은 크다고 한다.
우리나라 멧비둘기 소리는 리듬이 있고 스토리가 있어 구슬프게 들린다. 모든 새들은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고, 짧은 고음에서 내려가는 끊음에 굴곡이 지지만, 멧비둘기는 굴곡 없이 리듬이 있고 지저귐이 길다. 그 울음소리를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계집 죽고 자식 죽고, 헌 누더기 목에 걸고 흑
-계집 죽고 자식 죽고, 서러워서 어찌 살꼬 흑
우리나라 멧비둘기 목의 좌우에는 정말 헌 누더기를 두른 것 같은 무늬가 있다. 멧비둘기는 봄에 짝짓기시기에 주로 많이 우는데, 옛날 아낙네들은 보리밭을 메며, ‘지집 죽고 자식 죽고…….’ 따라 하며 눈물짓곤 했다. 멧비둘기는 꼭 소나무에만 둥지를 트는데, 높은 나무가 아니라 사람 키 높이 정도의 소나무 가지에 엉성하게 집을 지어 밑에서 보면 알 두 개가 훤하게 보인다. 알이 부화할 시기가 되면 어미비둘기는 사람이 가까이 가도 날아가지 않아 사람이 덥석 움켜잡기 일쑤다. 그래서 수컷비둘기는 암컷과 알을 한꺼번에 잃고는, ‘지집 죽고 자식 죽고…….’ 구슬프게 운다. 비둘기는 알을 딱 두 개만 낳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비둘기고기나 알을 먹지 못하게 했다.
형수가 아침을 먹자고 부른다. 식탁에는 주먹만 한 타원형의 빵과 얇게 썬 치즈와 햄, 버터, 토마토, 삶은 계란, 바나나가 있다. 내가 갖고 온 따끈한 라면을 먹고 싶지만 생각일 뿐이다. 형님을 따라 나이프로 빵을 절반으로 가르고, 빵의 크기인 치즈와 햄을 함께 얹어 베어 먹는다. 맛이 썩 괜찮다. 목이 메면 슴슴한 원두커피를 국 국물 삼아 마신다. 이런 음식이면 식거나 굳지 않으니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에 제격이다. 나는 소희가 어떤 여자인지 물었는데 형수가 대답한다.
“내 고향 후배에요. 나이는 나보다 네 살 아래 예순 여섯인데, 내가 독일에 오는 것을 보고 간호대학을 나와서 병원에 1년 있다가 76년에 독일에 왔어요.”
“그렇군요. 제가 보기에는 혼자 사는 것 같던데, 아닌가요?”
“어머나,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형님이 거들었다.
“이 사람아, 그러니 소설가지.”
형수가 좀 심각한 얼굴이 되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그래서 은근히 걱정이 돼요. 15년이 넘도록 혼자 사는 여잔데, 성격으로 봐서도 그렇고 삼촌한테 어떻게 할까봐 겁이 난다니까요.”
형님이 깊은 눈으로 나를 본다. 부부가 그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나도 은근히 겁이 나면서도 기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속내를 보일 수는 없다.
“형수님, 제가 어린앱니까? 걱정 마세요. 한데, 결혼을 안했나요?”
“했지요. 독일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이혼했어요. 두 남매기 있지만 둘 다 독립해 나갔어요.”
나는 점점 묘한 기분이 든다. 여기는 한국에서 머나먼 나라다. 예순일곱이지만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다. 3년 전에 느닷없는 사고로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다. 소희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뭔 일이든 이루어 질 수도 있다. 간밤에 그 여자의 눈빛과 몸짓에서 나는 그 낌새를 눈치 챘다. 형님 부부도 당사자인 나도 소희도 홀아비 과부의 인지상정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저 몸과 마음이 동하는 대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대처하면 될 일이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나는 형수에게서 소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었다. 내가 그 여자를 어느 선까지 상대해야 할지를 가늠하려면 그 내력을 아는 것이 우선이고 중요하다.
점심을 먹고 형님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형수가 녹차를 들고 와서 앉으며 말했다.
“삼촌, 소희가 저녁을 대접하겠다며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는데 어때요?”
나는 잠시 멍했다. 이토록 빠르게 나올 줄은 몰랐다. 얼핏 생각해도 거절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먼저 선득 나서기도 멋쩍다.
“저야 뭐 괜찮지만, 형님은 어떠세요?”
“그럼 뭐야, 동생만 오라는 게여?”
형수는 펄쩍 뛰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내가 삼촌을 못 보내지.”
난 잠시 멍해진다. 혼자라면 못 보낸다니! 하긴 생각해보니 그렇다. 나 혼자 과붓집을 속 보이게 너털거리며 갈 수는 없겠다.
“에이, 형님. 저도 혼자 오라면 못 가겠네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우리 다 같이 간다면 좋잖어.”
“형수님, 집이 멀어요?”
“아니, 걸어서 10분도 안 걸려요. 내가 전화 할게요.”
소희의 집은 구조가 형님 집과 비슷하다. 꽃을 좋아하는지 집안 공간 마다 화분이 놓여 있는데, 화려한 꽃을 피운 군자란 화분이 셋이다. 내가 키우는 군자란과 똑같다. 혼자 사는 여자들 집에 대부분 화분이 많다는 걸 나는 안다. 식탁에 앉자, 소희가 녹차를 내으며 말했다.
“칼국수를 했는데 끓이기만 하면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나는 귀가 번쩍 띄었다. 대체 칼국수라니! 그러나 이내 시큰둥해졌다. 스물 대여섯에 독일에 왔을 여자가 장만한 칼국수라면 오죽하랴 싶었다. 잠시 뒤에 형수가 김치와 간장, 고추장을 차리고, 소희가 하얀 사기대접에 담긴 칼국수 두 그릇을 내왔다. 나는 국수를 보고 깜작 놀랐다. 어릴 적 고향에서 먹던 그 칼국수가 아닌가! 칼국수 냄새까지 그대로였다. 네 사람이 국수그릇을 놓고 마주앉았다.
“아니, 소희 씨가 어떻게 이런 칼국수를……!”
“삼촌, 소희 칼국수 솜씨는 우리 교민들이 알아주는 실력이라구요. 어서 맛을 보세요.”
나는 우선 국물 맛을 보고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올렸다. 알맞은 두께에 가는 면발이 칠칠하다. 먹어보니 강원도와 경상북도 사람들이 즐겨먹는 칼국수 맛 그대로다. 국물은 멸치와 다시마로 냈을 것이고,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었음이 분명하다. 서울 경동시장 지하 식당가에 있는 안동집 칼국수가 이 맛이고, 청계5가 방산시장 뒷골목의 홍두께 칼국 수집 맛이 딱 이렇다. 간장에 매운 고추를 다져넣은 것까지 똑같다.
“정말 놀랍습니다. 소희 씨가 대체 이런 맛을 어떻게 냅니까?”
“제 고향이 충북 제천입니다. 중학교 때까지 제천에 살았는데, 엄마가 지겹도록 칼국수만 해먹였어요. 한국에서는 냄새도 맡기 싫었는데, 여기서 살다보니 그 맛이 자꾸만 생각나서 아주 가끔 해먹어요. 맛이 어때요?”
“그렇군요. 아주 좋아요. 내 입맛에 딱이네요. 그런데, 콩가루며 이런 재료를 어디서 구해요?”
“한국에서 친정 식구들이 올 때 가져와요. 그래서 아껴두고 가끔 해먹어요.”
형님이 말가리 들었다.
“우리도 어릴 때 지겹도록 먹었던 칼국수 아니냐. 그때는 멸치 다시마가 어디 있어, 오직 간장과 소금이었지.”
“그럼요. 서울에 지금도 이런 칼국수 하는 집이 더러 있어요. 저는 시내에 나가면 가끔 일삼아 찾아가서 먹어요.”
저녁 식사에 술이 없을 수는 없다. 술은 조니 워커 블랙라벨에 안주는 견과류와 치즈였다. 소희는 술이 오르자, 친정 식구들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된 사정을 좀 지루하게 털어놓았다.
소희는 오빠 둘과 남동생, 여동생이 있는데 네 사람이 번갈아 하도 뻔질나게 와서 지겨웠다고 한다. 오면 보통 한 달, 때로는 두 달장간이나 묵삭이다 가곤 하였는데, 그게 매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5년 전에는 사업을 하던 둘째 오빠가 부도를 내고 독일로 도망을 왔다고 한다. 몇 십억 부도를 내고 곧바로 도망을 왔는데, 나중에 지명수배가 내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1년 반을 묵삭이자, 남편이 더는 못살겠다고 하여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빠는 결국 한국으로 잡혀갔지만, 이혼을 하자 막내 동생이 얼씨구나 하고 유학을 와서 이태나 치다꺼리를 했다면서 치를 떨었다.
소희는 독일에 온 뒤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두 번 한국에 갔었는데, 결국 형제들과 대판으로 싸우고 5년 전부터 발길을 끊었다며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참 착한 여자라고 생각되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게 마련이다. 두 남매가 잘 자라서 아들은 비뇨기과 의사가 되었고, 딸은 복흠시청 공무원이라고 했다.
여자의 신세타령을 듣다 보니 11시가 넘었다. 형님 부부가 그만 가자고 일어섰는데, 소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형수에게 말했다.
“언니, 선생님과 좀 더 얘기하고 싶어요. 형부랑 먼저 가세요. 술도 남았으니 마시고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나는 그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형수의 좀 높은 목소리가 들리고 소희의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형수가 물었다.
“삼촌, 더 있다가 오실래요?”
나는 어정쩡한 얼굴로 형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여자가 잡는 걸 뿌리치고 가면 남자가 체면이 말이 아니다.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그야말로 어렵사리 한 여자의 입장을 보아서라도 그렇다. 스스로 방패막이를 하고는 대답했다.
“먼저 가세요. 저도 금방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럼, 먼저 간다. 술 너무 먹지 말구 금방 와라.”
형님의 시원스런 말에 나는 긴 한숨이 나왔다. 짧지만 참 길고 난처한 시간이었다. 형수는 잔뜩 우거지상을 하고는 소희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간다. 나는 면구스러워 식탁에 앉아 위스키를 따랐다. 현관문까지 배웅한 소희가 마주앉으며 말했다.
“낯이 뜨겁고 속이 간지러워 혼났네요. 그렇지만 선생님과 더 얘기하고 싶은 걸 어떡해요. 제 욕심이었나요?”
잠시 당황했다. 대답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도 해야 한다.
“사실은 나두 그랬어요. 형수 눈치 보이고 민망스럽고, 근데 우리가 왜 그래야 하죠?”
“그러게 말이에요. 이제 생각하니 그렇네요. 암튼 잘 됐군요. 선생님, 우리 이제부터 맘놓구 술 마셔요.”
그 기분은 나도 그렇다. 맘 편히 마실 수 있는 술자리는 즐겁다. 소희가 내 잔에 술을 따르고, 얼음을 채운 자기 잔에 술을 따른다. 내가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우리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위하여.”
소희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까르르 웃으며 화답했다.
“우리 둘만의 시간, 참 듣기 좋은 말이네요. 이런 기분, 이런 시간 난생 처음이네요.” 듣고 보니 그건 나도 그렇다. 이런 시간 이런 기분을 어디서 또 가질 수 있을까. 그냥 즐기면 된다. 술은 반병이 넘게 남아있다. 저걸 다 먹으면 취할 것이다. 나는 새삼스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동그스름하니 복스럽게 생겼다. 술이 올라 발그레 하던 얼굴이 내 눈길을 의식하고 발갛게 달아오른다. 내가 면구스러워 술잔을 들자, 여자가 잔을 들어 부딪친다. 술잔을 단숨에 비운 여자가 빈 술잔을 들고 내 옆자리에 앉는다. 갑작스런 행위에 나는 흠칫 엉덩이를 빼지만 좁은 의자일 뿐이다.
여자의 잔에 술을 따르며 에멜무지로 물었다.
“소희 씨, 술이 세군요. 얼마나 마셔요?”
“맘 놓구 마시면 저거 반병. 기분 좋으면 더 마실 수도 있구요. 선생님은요?”
“나두 그래요. 젊어선 기분 좋으면 한 병두 마셨거든요.”
여자가 술잔을 들고 나를 빤히 들여다본다. 가슴이 울렁하고 얼굴이 화끈해서 얼른 술잔을 들어 부딪쳤다. 여자가 술을 입매만 하고는 내 목에 팔을 감으며 촉촉한 목소리로 말한다. .
“선생님, 저 한번만 안아주세요.”
나는 돌아앉으며 여자를 안았다. 가슴에 여자의 뜨거운 몸이 덜컥 실린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내 입술이 점령당한다. 긴 시간을, 숨이 막히도록 긴 시간동안 여자는 내 입술을 희롱했다. 마침내 얼굴을 뗀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가슴에 안기며 따뜻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오실 때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어요. 참 죄송한 말이지만, 사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그랬어요. 제가 나쁜 여잔가요?”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쳐다보는 얼굴이 처연하다. 오래 묵혔던 말이겠지만 참 대답하기 어려운 걸 묻는다. 그래도 남의 속마음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잘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머리만 천천히 내저을 뿐이다.
티셔츠 한 장만 입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한다.
“십오 년 만에 남자 가슴에 안겨보네요. 그리워하던 가슴이라 더욱 좋아요. 앞으로 계속 선생님을 사랑할 겁니다. 선생님이 싫어해도 어쩔 수 없어요.”
여자는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몸을 부르르 떤다. 세상에……! 먼 나라에 나는 상상도 못한 이런 여자가 있었다니! 여자를 가볍게 안아주고 바로 앉았다. 더 이상 나갈 수는 없다.
“소희 씨, 우리 이제 술 마셔요.”
달아올랐던 여자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음이 보인다.
“제 욕심 같아서는 선생님을 잡고 싶지만, 차마 그걸 수는 없네요. 내일 제가 운전을 할 거에요. 술 많이 마시면 피곤해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나는 가야한다.
“그렇군요. 가야지요.”
당연하지만 기분은 참 묘하다. 일어서서 따라놓은 술잔을 들고 말했다.
“마지막 잔입니다. 자, 내일을 위하여!”
잔을 부딪치고 소희가 말했다.
“선생님, 내일부터는 제가 하자는 대로 하셔야 해요.”
“예, 그게 뭔데요?”
여자는 까르르 웃고는 대답했다.
“내일 베를린에 가잖아요. 호텔방 셋을 예약했어요. 하지만 둘이면 되잖아요.”
말이 가슴에 팍 꽂혀 온몸이 화끈하다. 여자도 면구스러운지 와락 달려들어 안긴다. 얼결에 받아 안고 등을 두드리며 대꾸했다.
“그래, 하자는 대로 할게요.”
“선생님 고마워요. 내가 너무 이상한 여자는 아니죠?”
품에서 벗어나며 당돌하게 마주보는 여자가 가엽다는 느낌이 뭉클 든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받았다.
“아네요. 사실은 나도 그러고 싶었어요. 이제 갈게요.”
여자가 바래다주겠다고 나섰지만 나는 말렸다. 처음 온 길이지만 곧바른 길이라 찾아갈 자신이 있다.
이튿날 우리 네 사람은 아침 8시에 출발했다. 차는 소희의 벤츠중형승용차인데, 형님네 차와 똑같다. 작년에 같은 시기에 같은 차를 샀다고 한다. 베를린까지 여섯 시간, 길이 막히면 더 걸린다고 한다. 출발 15분 만에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독일의 그 유명한 아우토반이다. 아우토반의 우리말은 자동차전용도로이다. 아우토반의 최초 구상과 계획은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적 혼란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함부르크 북부와 프랑크푸르트 중부까지 공사가 완공되어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아우토반’이라는 명칭은 1929년에 정해졌다.
그 뒤에 1933년 나치당에 의한 정권이 설립된 후 아돌프 히틀러가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독일 동서를 가로지르는 아우토반 건설 계획을 세우고 건설 감독에 ‘프리츠 도트’를 임명하여 공사를 완공하였다. 아우토반은 세계에서 첫 고속도로 네트워크였다. 이때부터 아우토반은 독일을 세계 굴지의 자동차 대국으로 일으키는 토대가 되었다.
아우토반은 주행속도가 무제한이라고 하지만 암묵전인 제한이 있다. 대형트럭은 80〜100km/h. 승용차와 승합차는 130〜150km/h로 달릴 수 있다. 아우토반에는 통행료가 없지만, 2005년 1월부터 12톤 이상의 대형트럭은 유료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금소가 없기 때문에 GPS와 휴대전화를 통하여 요금을 부과한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는 오토바이가 올라갈 수 없지만, 아우토반에서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거의 대형 오토바이였다.
아우토반을 한 시간 이상 달렸는데도 산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숲이 우거진 평야다. 도로가에 건물이 보이지 않고, 농경지도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도로 양쪽으로 멀리 드문드문 농촌 촌락이 보이는데, 오렌지색 뾰죽한 기와집들이고 농경지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 가을의 논처럼 황금빛 경작지가 많은데, 그 작물은 모두 유채이고, 푸른 작물은 밀과 보리라고 한다. 그 많은 유채를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공업용 유류로 쓴다고 한다.
울창한 숲지대가 끝나는 허허벌판에는 대형 풍차가 줄지어 섰는데, 멀리 보이는 풍차는 볼펜만 하게 보이니 그 넓이가 아득하다. 날개 길이가 27미터라는 풍차는 태곳적부터 그랬던 것처럼 세월아 네월아 졸면서 돌고 있다. 곳곳의 풍차 밑에는 목장이 있는데, 젖소며 염소 육우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거나 엎드려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전자파로 가축이 죽고, 소음으로 짐승이 미친다고 난리가 날 것이다. 독일은 풍력발전이 11.9%를 차지할 정도로 풍력발전 대국이다. 가도 가도 울창한 숲이고, 풍력발전단지이고 목장이다. 참 볼수록 부러운 나라다. 우리나라는 이런 평야지대가 없으니 풍력발전은 그저 꿈일 뿐이다. 보면 볼수록 질투로 약이 오른다.
운전을 하던 소희가 말했다.
“휴게소에서 좀 쉬어가겠습니다.”
휴대폰으로 차창 밖의 경치 찍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을 달려왔다. 방광이 꽉 찼는지 소변이 급해진다. 5월 중순의 햇볕은 쨍쨍한데 공기는 맑고 신선하다. 휴게소 넓은 주차장에 탑을 씌운 대형화물가 가득하다. 승용차와 승합차 주차장은 거의 비어있고, 버스는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역시 휴게소 화장실은 기계에 동전 70센트를 넣어야 입장권이 나온다.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출발한다. 형수가 운전을 하고 형님이 그 옆자리에 탄다. 소희는 나와 뒷자리에 앉았다. 휴게소를 벗어나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고속도로에 버스가 한 대도 없어요. 독일 사람들은 버스 여행이나 다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나요?”
형님이 대답했다.
“관광버스가 있지만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는 나두 잘 몰라. 한국처럼 장거리 노선버스는 없고, 지방의 도시에는 노선버스가 있다.”
아우토반은 편도 3차선인데, 1차선은 추월선이고, 2차선은 승용차나 승합차, 3차선은 화물차 전용이다. 가끔 4차선이 되기도 하는데, 공사차량이나 특수차량전용이라고 한다.
“형님, 산이 없으니 터널은 당연히 없겠지만 다리도 없어요. 세 시간을 오도록 교량을 본 적이 없는데 독일은 강이나 하천도 없나요?”
형님은 잠시 뒤에 대답했다.
“글쎄, 그리고 보니 나두 이 도로를 대여섯 번 타보았지만 큰 다리를 본지 못한 것 같다. 작은 하천 다리는 더러 있지만 숲이 워낙 우거져서 잘 보이지 않을 거야.”
소희가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린다. 돌아보자, 마주보며 방그레 웃는다. 와락 안아주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나는 또 궁금증을 물었다. 가도 가도 평지의 숲이고 우리나라 소나무처럼 둥치가 붉은 적송이 빼곡한데 산이 아니리 벌판이 그렇다.
“저렇게 울창한 숲에 짐승이 없나요? 로드킬 당한 짐승을 볼 수 없네요.”
옆에 앉은 소희가 대답했다.
“그건 저도 알아요. 고속도로 양쪽에 철망이 쭉 있잖아요. 그러니 짐승이 못 넘지요.”
형님이 거들었다.
“짐승은 많지. 주택가 도로가 아닌 도로에는 모두 철망을 쳐서 로드킬은 거의 없지만 아주 가끔 사슴이나 들고양이가 치이는 경우는 있다.”
“이렇게 긴 고속도로 양쪽에 철망을 치다니, 참 대단한 나라군요.”
달리던 차의 속도가 줄고 앞에 차들이 빼곡하게 보인다. 옆 반대방향 도로는 정상이다. 궁금해서 물었다.
“차가 막히는 모영이죠?”
운전을 하던 형수가 대답했다.
“가끔 공사구간이 있어요. 곧 빠져나갈 거예요.”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는 없나요?”
“가끔 있지만 아주 드물다. 사고가 났다하면 대형 사고지”
차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옆 3차선의 대형 화물차들을 또렷이 볼 수 있다. 비슷비슷한 모형의 대형 화물차들이 앞뒤로 끝이 안보이도록 줄지어 서행한다. 중앙분리대 넘어 반대방향 도로는 정상운행인데. 역시 승용차보다 화물차가 훨씬 많다. 내가 감탄하자 형님이 말했다.
“저 많은 화물차들의 국적이 다양하다.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의 차들이 자국의 생산품을 실어오고 독일의 상품을 실어가는 거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유럽은 상권이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량 운송이 이토록 활발하니 나라경제가 탄탄하다는 증거다. 우리나라는 섬 아닌 섬나라다. 삼면이 바다고 북쪽은 바다보다 더 넓은 굳건한 철조망이 있다. 천지사방으로 확 터진 나라 독일! 노선버스나 관광버스를 한 대도 볼 수 없는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나는 아예 옆자리의 소희에게 왼손을 맡기고 창밖의 경치만 본다. 네 사간이 가까이 달리는 동안 산을 볼 수 없지만 평지에 소나무가 빼곡하고, 때로는 참나무며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울창한 숲이다. 아우토반 근처에는 도시도 없고, 주택지대도 없다. 가끔 광활한 농경지가 펼쳐지는 곳에 주택단지가 보이는데 아주 먼 거리다. 소희는 이제 내 손을 자기의 무릎에 얹어놓고 있다. 차는 이제 정상으로 달린다.
형수가 운전을 하며 말한다.
“다음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을 거예요. 한 10분 걸립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네 시간을 달려왔다. 독일 고속도로 휴게소의 식사는 어떨까? 기대가 된다. 휴게소 건물은 자그마한데 주차장은 엄청 넓다. 비슷한 모형에 같은 크기의 대형 화물차들이 주차장에 빼곡한데, 승용차 주차장은 헐렁하다. 이러한 풍경 역시 우리나라와는 정반대다.
휴게소 안에 화장실이 있고 매점도 있다. 넓지 않은 휴게소 안쪽에 주방이 보이는데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른다. 때가 때인지라 안에는 앉을 자리가 없다. 밖에 나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한다. 나는 음식을 모르니 형님과 같은 것으로 했다. 독일에선 흔한 것이 맥주이고 값도 싸다. 이 사람들은 어디가나 앉으면 맥주를 마신다. 우리도 맥주 석 잔을 사서 마신다. 시원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형님과 소희가 식사를 들고 온다. 형님과 나는 20cm가 넘을 굵은 소시지 구이에 감자튀김이고 두 여자는 파스타에 감자튀김이다. 검붉은 소스에 찍어먹는 소시지 맛이 기막히다.
복흠에서 출발한지 여덟 시간만인 오후 4시에 베를린시 라디슨블루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들어서자 중앙에 거대한 원형 수족관이 단박 기를 죽인다. 대체 호텔에 대형 수족관이라니! 나는 수족관의 온갖 물고기들에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체크인을 끝낸 형님이 3층으로 가자고 한다. 우리 객실은 312〜314까지였다. 형수가 313키를 잡으니 나란히 있는 방 가운데였고, 소희가 312, 내가 314였다.
방으로 들어가니 맞은편이 통유리로 된 거대한 창이다. 우선 커튼을 젖히자, 호텔 바로 앞이 넓은 도로였고, 그 건너는 광장인 듯싶고, 광장 건너에 베를린 시청이 보인다. 창에서 정면으로 시청이 보이는 방이었다. 짐을 풀고 형님 방으로 가자, 주의를 준다. 냉장고의 음료수나 맥주는 절대 마시지 말고, 커피나 녹차는 먹어도 된다는 교과서적인 잔소리를 한다. 적어도 20개국 이상 여행을 한 나를 형님은 어린애로 아는 말투다.
아직 해가 한나절이므로 우리는 우선 앞에 보이는 시청 광장을 둘러보기로 하고 나섰다. 호텔 앞 도로는 왕복 8차선인데 통행하는 차는 별로 없고, 버스 두 대를 이은 굴절버스와 전차가 땡땡거리며 다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차는 왜 땡땡땡 종을 치며 달리는지 궁금하다. 게다가 말이 끄는 마차도 가끔 다니는데, 마치 60년대의 서울 거리가 떠올라 정신이 멍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으로 바글거릴 법한 시청 앞 도로에 차도 사람도 성깃하여 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길을 건너자 광장인데, 책을 펴든 모양의 작은 동상이 있다. 형님은 그 동상이 500년 전에 종교를 개혁한 마르틴 루터라고 알려준다. 2017년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인데, 그 행사가 내일 5월 20일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열린다고 한다. 동상 옆에 마르틴 루터가 지었다는 교회가 있는데, 지금은 성니콜라이 교회로 부른다고 한다. 시청 쪽으로 가자 넓은 알렉산더 광장에 관광객인 듯싶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거대한 포세이돈 분수는 하마, 물개를 비롯한 물짐승 형상들이 힘차게 물을 뿜고 있다. 베를린시청은 붉은 벽돌로 지었다. 중앙에 높은 시계탑이 있지만 광장에서는 그 규모를 알 수 없다.
호텔 저녁식사는 7시부터다. 우리는 샤워를 하고 2층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이미 사람들로 그들먹하다. 대충 돌아보아도 세계 각국의 인종들인데 동양인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연어구이를 비롯한 식성에 맞는 음식을 담아다 놓고 형님께 술을 마실 수 있는지 물었다. 식사는 투숙비에 포함되지만 맥주를 비롯한 술은 돈을 줘야 한단다. 우선 맥주를 한 잔씩 시키고 나는 위스키를 주문했다. 술은 즉시 돈을 지불하는데, 위스키는 우리 소주잔만한 한 잔이 10유로였다. 우리 돈으로 12,500원! 그나마 1인당 석잔 이상은 팔지 않는다고 한다.
“참 이상하네요. 돈을 즉석에서 주는데 왜 술을 안 팔아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은 어느 나라든 음식점에서 맥주 외에 독한 술은 석잔 이상 팔지 않는다. 위스키가 아닌 독일 술도 한 잔에 6센트 이상이야. 비싸서도 못 마신다.”
거 참, 알수록 이상한 나라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소희의 방에 모였다. 여자가 양주 발렌타인 17년을 내놓는다. 피스타치오와 케슈넛을 안주로 술을 마시지만 배가 불러서 술 맛이 썩 내키지 않는다. 형님 부부는 술 한 잔 씩 마시고는 피로하다며 돌아갔다. 남은 우리도 두어 잔씩 마시고 술병을 닫았다.
소희가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가지 마세요.”
마주 안으며 대답했다.
“가서 양치질 하고 한 시간 후에 올게요.”
“싫어요. 30분.”
나는 도리질 치며 말했다. 형수가 가운데 방을 차지한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저 방 잠든 뒤에…….”
여자는 입을 삐죽이 내밀고 투덜댄다.
“피-이, 자기들은 둘이 자면서…….”
가볍게 안아주고 내방으로 왔다. 옷을 갈아입고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눕자 많은 생각들이 난무한다. 여자 방으로 가여하나? 그 뒤에 벌어질 상황은 어떻게 될까? 예순 일곱인 내 몸이 내 맘대로 될까? 간절하게 나를 원하는 여자를 무시할 수도 없잖은가? 가지 않으면, 여자는 나를 병신으로 알 것이다. 형님 부부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내일 아침에 형수 얼굴을 어떻게 대하나? 생각할수록 난지난이다.
벌떡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보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거리가 조용하다. 차도 뜸하고 사람도 이따금 지나간다. 대형 호텔 앞이고 시청 옆인 중앙도로가 이토록 조용하다니! 참, 이해가 되지 않는 희한한 나라다. 다니는 차가 많지 않고, 도로 옆으로 고층건물도 없으니 거리도 어둑하고 조용하다. 경제대국 수도가, 그것도 시청 근처가 이토록 한가하다는 것이 신비스럽다.
조용한 방에 가느다란 노크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철렁한다. 시계를 보니 열 시가 되어간다. 문을 열까 말까! 잠든 척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발길을 내 몸을 문 앞으로 인도한다. 문을 열자, 여자가 열없는 표정으로 배시시 웃으며 얼른 들어온다. 반바지 티셔츠에 작은 가방을 들었다. 당돌하지만, 15년 독수공방했을 여자가 안쓰러워 선채로 안아주었다.
품에 안기며 등을 조이던 여자가 얼굴을 들었다. 큰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선생님, 내가 미친년인가요? 환장한 년인가요?”
나는 얼굴을 감싸 잡고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아주 정상적인 생각이고 당연한 행위야. 나도 즐거워요.”
여자의 입술이 뜨겁다. 여자가 내 잠옷을 벗기고, 내가 여자 셔츠를 위로 벗기고 반바지를 내리는데 속옷이 없다. 침대에 뜨거운 두 몸이 하나가 되었다. 66세인 여자의 몸은 난숙하다. 가슴은 풍만하고 하체도 탄탄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몸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서로의 몸을 알뜰하게 탐하던 여자가 마침내 주도권을 잡는다. 그러나 겨우 체면치레만 했을 뿐 나는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여자는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새근새근 숨이 거칠다. 불덩이 같은 여자를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제 작년이든가, 정기 구독하는 시사월간지에 어느 남자가 ‘사랑의 방법’이라는 글을 6개월간 연재한 적이 있었다. 사랑의 방법은 정말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았다. 알았으면 실행하는 것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의무이고 도리다. 난생 처음 해보는 봉사라서 서툴지만,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여자를 즐겁게 해주었다. 마침내 여자는 절정에 올라 몸부림친다.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웠다. 여자가 품에 안겨 속삭인다.
“선생님, 고마워요. 모든 걸 포기했었는데, 제가 아직은 여자였네요.”
“당연하지, 여자는 죽을 때까지 여자고, 남자도 죽을 때가지 남자야. 남녀 불문하고 지푸라기 잡을 힘만 있어도 사랑을 한다잖아.”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아무리 늙어도 그 황홀함을 어찌 잊겠어요. 선생님, 저 사실 한국남자 품에 안겨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치즈냄새 누린 고기냄새에 쩐 털북숭이가 아닌, 마늘냄새 김치냄새 물씬 풍기는 한국남자 품이 밤마다 그리웠어요. 그 소원 이제 풀었네요.”
왜 아니랴, 그랬을 것이다. 여자가 안쓰러워 꼭 안아주었다.
아침 다섯 시에 여자는 자기 방으로 갔다. 삼년 만에 여자를 옆에 눕히고 잔둥만둥 했더니 이제 졸린다. 침대에 누워 힘껏 기지개를 켜자 온 몸이 나른하다. 간밤의 행위가 떠오른다.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홀아비 과부가 아니라면 천벌을 받을 짓이다. 그러나 때와 장소도 그렇거니와 남녀 간의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아전인수! 스스로 위안을 하자 이내 잠이 엄습한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일곱 시다. 그루잠 두 시간을 달게 잤다. 문을 열자 형님이 서있다. 빙긋이 웃으며 아침인사를 한다.
“잘 잤니?”
“예, 편히 주무셨어요?”
“일곱 시부터 식사를 한다. 어서 세수하고 내려가자.”
독일 뷔페식사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그러나 나는 얼큰한 해장국이 그립지만 마음일 뿐이다. 각기 다른 음식접시를 놓고 네 사람이 마주앉았다. 눈치 빠른 형수가 은근슬쩍 눈치를 살핀다. 소희가 반지빠르게 방패막이가 된다.
“언니, 저쪽에 언니 좋아하는 아스파라거스구이가 있어요. 갔다 줄까?”
“아니, 이거 먹고 내가 가져올게.”
뷔페식사는 내 식성에 맞는 음식을 싫도록 먹는 재미가 있다. 나는 대식가 또는 미식가 소리를 들을 만큼 좀 먹는 편이다. 그러나 사실은 미련 맞게 먹지 않는데, 먹는 모습이 탐스러워 식탐으로 보일 뿐이다.
오늘은 베를린 시가지를 구경한다. 호텔 앞에서 직선으로 난 도로를 20분쯤 걸으면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다고 한다. 호텔 바로 옆이 슈프레강이다. 강을 건너면 베를린 대성당이 있다. 웅장하고 고색창연한 성당은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고 조용하다. 시내로 들어갈수록 중세의 석조건물들이 늘어섰는데, 사람을 비롯한 짐승형상의 석조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대식 건물은 없고 4〜5층 높이로 보이는 고만고만한 중세식의 석조건물들이 도로 안쪽까지 들어찼다. 금방이라도 말은 타고 창을 비껴든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듯한 분위기의 거리였다.
마침내 사진으로만 보았던 브란덴부르크 거대한 문이 있다. 운터덴린가 서쪽 끝이다. 통일 전, 동·서 베를린 경계선이 있던 근처였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진 베를린 장벽 바로 뒤에 있는 이 문은 1788〜91년에 세운 것이다. 베를린의 개선문인 이 문 위에는 4마리 말이 이끄는 2륜마차 동상 ‘승리의 콰드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 앞 광장은 내일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참석하여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식을 한다고 준비를 하느라 소란하다.
브란덴부르크 문 뒤에는 거대하고 고색창연한 석조건물이 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독일 국회의사당이라고 한다. 건물 중앙의 꼭대기에는 거대한 유리돔이 있는데, 입장권을 사면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소희가 매표소에 가서 입장권을 사왔다. 줄을 서서 들어가며 입구에서 경찰이 전자봉으로 몸 검사를 한다. 엄청 큰 승강기를 타고 의사당 건물 옥상에서 내렸다. 다시 줄을 서서 유리돔으로 들어가 거대한 나선형의 계단을 걸어 꼭대기로 올라간다. 잔체가 유리라서 나선형 계단을 돌면서 올라가면 베를린 시내 전체를 볼 수 있다. 고층건물이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다.
도심을 구경하고 10분 쯤 걸어가자 그 유명한 소니센터가 있다. 소니센터는 일본 소니사의 투자로 2000년 6월 개장했는데, 모두 7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독일 굴지의 각 회사 사무실, 40여개 스크린을 갖춘 영화관, 호텔 등이 있다고 한다. 건물 내부의 광장을 덮고 있는 돔은 일본 후지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2008년에 소니는 대한민국의 국민연금공단에 투자 관련 방법으로 매각하였다. 그러니까 소니센터는 우리나라 국민연금공단의 건물이다.
우리는 소니센터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형님은 이곳은 돼지 족발구이가 맛있다고 하여 먹기로 했다. 족발구이는 너무 커서 하나를 두 사람이 먹어도 충분하다고 한다. 두 개를 주문하고 우선 시원한 맥주를 시켰다. 식사가 나왔다. 돼지 앞다리 족인 구이는 정말 커서 둘이 먹을 만하다. 삶아서 기름이 빠지도록 알맞게 구워 소스를 끼얹은 족발은 정말 맛이 희한하게 좋다.
오후에는 호텔 옆 슈프레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출발하자 직원이 오디오가이드를 주는데 한국어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게는 무용지물이다. 유람선에 맥주를 팔기에 나는 맥주를 마시며 눈으로 풍경을 본다. 유람선은 박물관섬을 왼쪽으로 끼고 물살을 가른다. 박물관섬 안에는 고대박물관, 페르가온박물관, 보데박물관 등 박물관 건물만 있다고 한다. 박물관 섬의 석조건물이 모두 중세의 건물 그대로라고 하지만 나는 이번에 박물관은 볼 수 없어 아쉽다.
슈프레강 유람선을 타면 도심의 주요 건물과 관광지가 강변에 많이 있어 베를린 주요 포인트중 여러 곳을 볼수 있어 좋다고 한다. 슈프레강 양안의 건물들과 풍경은 정말 고풍적이고 고즈넉하게 낭만적이다. 물빛은 칙칙하지만 냄새는 없다. 40분쯤 왔는데 멀리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거기서 돌아 다시 출발점으로 온다.
시간은 4시 반이었지만 많이 걸어 피로하여 호텔로 돌아왔다. 각기 자기 방으로 가서 쉬다가 7시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간밤에 잠을 설쳐 금방 졸린다. 오늘 밤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핸드폰 알람을 6시 40분에 맞춰놓고 잠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잠이 깨었다. 두 시간이지만 깊고 편안한 잠이었다. 잠잔 얼굴을 대충 씻고 형님 방으로 갔다. 일흔 다섯인 형님은 작년부터 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운전도 형수가 하고, 잘 먹던 술도 많이 자제한다.
“형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 괜찮다. 매일 아침저녁 두 시간씩 집 주변 숲을 걸으니까 다리는 튼튼하지.”
형님 집 바로 옆은 평지지만 숲 지대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빼곡한 숲속은 서늘하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아름다운 숲이다.
“삼촌은 괜찮아요?”
“저야 뭐 젊잖아요. 형수님은 어떠세요?”
“나두 형님 따라 매일 걸으니 괜찮아요.”
이제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나이 먹은 사람들이 걷는 광경을 많이 보게 된다. 걷기가 가장 쉬운 운동방법이면서 그 효과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소희가 들어왔다. 말끔한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한 모습이 아름답다. 165cm라는 알맞은 키에 나이답지 않게 앳된 얼굴에 몸매도 탐스럽다. 낮에 돌아본 여행담을 잠시 나누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외국여행에서 식사시간은 보너스적인 즐거움이다. 특히 저녁식사는 느긋하게 일행과 대화를 나누며 식성에 맞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여행의 백미다. 맥주도 마시고 위스키도 마신다. 저녁 식사에 느긋하게 마시는 술은 비할 데 없는 즐거움이다.
객실에 올라오자 형님이 일침을 놓는다.
“피곤한데 일찍 자자. 술 더 마시지 말고…….”
말끝을 사리며 소희를 힐끗 본다.
“네, 편히 주무세요.”
형님 부부가 방으로 들어가자, 소희가 내 뒤를 따라온다.
“이따가 제 방으로 오세요.”
고개를 끄덕이자 뒤도 안돌아보고 나간다. 나는 핸드폰 로밍을 하지 않아서 통화를 할 수 없다.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거리를 내려다본다. 오늘 종교개혁 500주면 행사가 있어서 그런지 거리며 알렉산더광장에 사람이 많다. 마르틴 루터 동상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성니콜라이 교회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9시에 야간예배가 있는 모양이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소희 방으로 가야하나? 가지 않으면 또 이리로 올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참 당돌한 여자다. 하긴, 40여 년 한국남자 품을 그리워하던 여자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저 여자는 진정 나를 사랑해서 원하는 것일까? 여기 있는 동안 맘껏 써먹다가 가면 그만일까? 그렇다! 나는 지금 여자에게 써먹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즐거운 써먹힘이다. 나중에야 어찌 되던 써먹히려 가야한다. 열 시가 되어간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형님 방 앞을 지나 소희 방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린다. 여자는 매미날개 같은 잠옷을 입고 있다가 달려든다. 서로 뜨거운 몸을 탐한다. 절정을 넘긴 뒤의 입맞춤은 달디 달다. 여자는 나를 참으로 알뜰하게 써먹는다.
좀 귀찮기도 해서 말했다.
“편히 자요. 갈게.”
여자는 온몸으로 감겨들며 코 먹은 소리로 대답한다.
“싫어, 같이 자요.”
이런 제길 할, 우리 부부는 환갑이 넘으면서부터 각방을 썼다. 늘그막에 된 시어미를 만난 격이다. 뿌리치고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시하고 마음 편히 자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시티투어를 한다. 호텔 앞에서 빨간색 2층 시티투어버스를 탄다. 하루 종일 탈 수 있는 티켓이 1인당 18유로, 22,500원이다. 지붕이 없는 2층 버스 앞에 자리 잡고 시내를 구경한다. 유명한 건물이나 관광지에 차가서면 내려서 같은 회사의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주위를 구경한다. 그렇고 그런 시내를 돌아보고 전승기념탑이 있는 그로쎄티어가르텐 공원에 도착했다. 전승기념탑은 프로이센 왕국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64〜1873년에 세워진 전승 기념탑이다. 탐의 높이는 69m로, 꼭대기에는 황금빛이 찬란한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상이 있다. 나선형의 285개의 계단을 오르면 탑 전망대다. 전망대에서 보면 탑을 중심으로 十자형의 넓은 도로가 있고, 광장 끝에서부터 숲이 울창한 공원인데, 十자형 도로의 길이가 사방으로 4km라고 한다. 공원에는 비스마르크의 동상을 비롯하여 대여섯 개의 동상이 있고, 볼거리가 많다.
시내로 들어와 점심을 먹기로 한다. 대형 레스토랑마다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그중 좀 한가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사람이 많은데, 우리 바로 앞자리에 두 부부가 앉아있고 유모차에 바비인형 같이 예쁜 아기가 있다. 예쁜 아기에 비해 그 부모가 참 대조적이다. 40대로 보이는 아빠는 멀쑥한 키에 국물멸치처럼 비린내 나도록 말랐는데, 엄마는 그야말로 드럼통이다. 가슴이 하도 커서 조금만 움직여도 일렁일렁한다. 나는 부부의 잠자리를 떠올리며 자꾸 입이 벌어져 딴전을 피우지만 머무는 눈길은 어쩔 수 없다.
식사는 소희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독일 정식 스테이크는 고기가 크고 부드러워 맛이 그야말로 끝내준다. 어제 행사가 오늘까지 이어져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식당마다 줄을 서서 여유 있게 식사를 할 수 없다.
오후에도 시내투어를 계속했다. 베를린 겉모습은 그런대로 보았다. 그러나 정작 내가 보고 싶은 많은 박물관이나 중요 유적지는 보지 못한다. 다섯 시에 호텔에 돌아왔다. 7시 30분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의 방으로 간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소희 방에 모였다. 오늘 베를린 여행이 마지막이므로 형님이 마트에서 독일 전통 술 도펠콘을 한 병 사왔다. 1500전부터 생산된다는 도펠콘은 보리와 귀리가 원료인데 38%의 독한 술이다. 형님은 작은 잔으로 두 잔을 마시고는 피로하다며 갔다. 나는 오늘 밤 취하고 싶다. 독일에 와서 취하도록 마시지 못하기도 했지만, 오늘밤에는 소희에게 써먹히기 싫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소희가 석 잔을 마시고 나머지를 내가 모두 마셨다. 700ml이지만 그다지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러 취한 척 하며 말했다.
“소희 씨, 오늘은 편히 자요. 난 갈게, 아직 여러 밤이 남았잖아.”
이건 내 진심이다. 여자도 내 의중을 짐작하고 있었던지 선선히 받아들인다.
“그러세요. 많이 취하셨어요.”
가볍게 안아주고 내 방으로 왔다. 침대에 누우니 긴장이 풀리고 느긋해진다. 취기도 알맞다. 3박 4일간의 베를린 여행, 많은 것을 보고 느꼈고 깨달았다. 중세의 분위기와 그 냄새까지 느껴지는 독일 수도 베를린! 우리나라 수도 서울과 너무 다른 환경과 생활상이 부럽다. 시내 뒷골목 어디를 봐도 쓰레기가 없는 것이 부럽다. 도심의 중앙차선 분리대나 공지에 조성된 화단에 꽃이 피기는 했지만 잡초가 무성한 것도 너무 자연스럽다. 잡초도 그대로 두면 꽃이 피고 인공화초와 어우러져 또 다른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17일간 독일 여행을 하고 6월 7일에 집에 돌아왔다. 베를린 여행에 이어 독일과 접경인 네덜란드에서 일박하고, 오후 7시 네덜란드 항구에서 대형 여객선을 타고 영국 런던에 갔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영국 어느 항구에 여객선이 정박해 있었다. 런던에서 1박하며 하루 한나절 관광하고, 타고 갔던 여객선을 다시 타고 네덜란드에 돌아오는 4박 5일간의 여행을 윤소희도 함께 했다. 이번 여행에서 3개국 수도와 독일 퀼른시, 포츠담시, 뒤셀도르프시를 돌아본 알찬 여행이었다.
여행은 즐겁다. 그러나 아무리 친형제라지만 형님 집에 신세를 지는 것이 부담스럽고 형수 눈치를 안볼 수가 없어 불편했다. 다시 이런 여행은 하지 않겠다고 속다짐하며 17일간 여행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되던 7월 17일이었다. 소희가 카톡을 보냈는데, 7월 20일 오후 다섯 시에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는 문자였다. 그동안 수차 카톡과 메일을 주고받았지만 한국에 나온다는 언급은 없었다. 참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은근히 겁이 난다.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다면 참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혼자 살지만 딸 둘이 겨끔내기로 사나흘에 한 번씩 와서 청소도 하고 밑반찬도 만든다. 그 사정을 소희는 알고 있다. 알면서 집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숙소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대놓고 물을 수도 없다. 걱정을 미리 하는 것도 대책 없는 스트레스다.
여자가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큰 덩어리로 가슴에 얹힌다. 며칠은 반갑고 즐거울 것이다. 독일에서 소희와 열이틀 밤을 함께 지냈다. 부담스러운 밤도 있었지만 즐거움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분위기도 기분도 많이 다를 것이다. 생각 할수록 대책 없는 여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버겁다.
7월 20일, 차를 끌고 공항에 나갔다. 5시 40분에 소희가 출구로 나온다. 큼지막한 가방이 두 개다. 장기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여자가 사정없이 달려들어 안긴다. 여기는 유럽이 나이다. 사람들이 쳐다보아서 강제로 떼어내고 가방을 받았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소희가 말한다.
“엄마 돌아가셨을 때 왔으니까 11년 만이에요. 내 조국에 오니 기분 좋아요.”
“조국? 40년 넘게 독일에 살면서 조국이 그리웠어요?”
“그럼요. 태어나서 스물다섯 살까지 자란 조국이잖아요. 이사를 자주 다녀서 고향이라는 애틋함은 없지만 어릴 때 자란 제천 송학에는 가보고 싶어요.”
제천시 송학면은 내 고향 강원도 영월과 같은 생활권이다.
“제천시 송학면은 이제 많이 변했어요. 고향 냄새 맡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렇겠지요. 50년이 흘렀으니까요. 그런데 선생님, 제가 어디로 가는지 왜 묻지 않으세요?”
이런 제기랄, 난 지금 그게 궁금해 밑이 근지럽던 참이었다.
“지금 물으려던 참입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밀레니엄힐튼호텔 예약했어요. 작년에 친구가 그 호텔에 묵었다면서 좋다고 해서요. 남산 밑이고 남대문시장도 가깝다고 했어요.”
“그래요. 비교적 조용한 호텔이죠.”
소희가 예약한 방은 11층이었다. 남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방인데 더블침대가 있고 싱글침대도 있다. 소희가 팔을 벌리고 다가선다. 선채로 부둥켜안았다. 여자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한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매일매일 그리웠어요.”
대답할 말이 궁하다. 맞장구치자니 속이 간지럽고, 양심에도 찔린다.
“잘 왔어요. 나두 보고 싶었어요.”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며 응석을 부린다.
“정말요. 정말 소희가 보고 싶었어요?”
“그럼, 왜 아닐 것 같아요?”
다시 내 등을 조여 안으며 좀 달뜬 목소리로 말한다.
“그게 아니라, 사실은 선생님 대하기가 좀 무안한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좀 씻어야 겠어요. 서울, 정말 엄청 덥네요.”
여자는 속옷을 챙겨놓고 거침없이 옷을 훌훌 벗는다. 내가 면구스러워 슬그머니 돌아섰다. 이내 물소리가 들린다. 마누라 샤워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더니, 내가 지금 그 짝이다. 동감내기 아내와 40여 년을 살았지만,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번조롭다. 저 여자가 나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 다 익은 음식에 차려진 밥상이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
여자가 타월을 몸에 두르고 나온다. 볼이 발그레한 화사한 민낯이 참 예쁘다. 가볍게 안아주고 셔츠와 바지를 벗고 욕실로 들어간다. 나도 하루 종일 34도의 열기에 땀을 흘렸다.
여자의 몸은 불덩이였다. 남자의 물건은 오랫동안 써먹지 않으면 귀가 먹는다고 한다. 술을 즐기고 글쓰기에 빠진 지난 3년간 내 몸을 방치했었다. 그래서 귀먹은 내 물건을 독일에서 소희가 귀를 뚫었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몸과 마음을 다해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소희가 ‘자신이 아직 여자였다’는 말마따나 나는 아직 건장한 사내였다. 비행기에서 잠을 설친 여자는 이내 새근새근 잠이 든다. 예순 중반의 여자답지 않게 고운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여자는 아직도 한밤중이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즐거운 꿀잠일 것이다. 살며시 침대에서 내려섰다. 아홉시가 되어간다. 호텔에서 저녁 먹기는 틀렸다.
내 기척에 여자가 눈을 떴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여자의 가슴이 풍만하다. 가서 안아주고 싶지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기 십상이어서 참아야 한다. 호들갑을 떨며 속옷을 챙겨 입고는 언제 잣더냐 싶게 맑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나, 밤이네요. 몇 시나 됐어요?”
“아홉시가 넘었어요. 호텔 저녁식사는 이미 끝났으니 나가서 저녁 먹어요.”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대답한다.
“그러게요. 호텔 근방 시장골목에 생선구이집이 많다고 친구가 말했어요. 거기 아세요? 고등어나 갈치구이 먹고 싶어요.”
“알아요. 어서 갑시다.”
호텔을 나와 남대문시장 갈치골목으로 들어갔다. 갈치구이와 조림냄새가 구수하다. 여자가 반색을 하며 호들갑을 떤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좋은 냄새란다.
“어머나, 어머나 이 냄새! 어서 들어가요.”
저녁 시간이 지나서인지 식당은 조용하다. 우선 갈치조림을 시키고 구이도 주문했다. 여자는 정말 환장을 하며 갈치를 잘도 발라 먹는다.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내가 먹어봐도 맛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열 시가 넘었다. 여자가 팔짱을 끼며 여전히 즐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난생 처음 보는 서울 밤거리라니 즐겁기도 할 것이다.
“선생님, 우리 소주 마시러 가요. 어디 잘 가시는데 없어요?”
없기는, 남대문시장 골목골목 알지만 금방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 않는다.
“소희 씨, 생선회 먹어봤어요?”
“어려서 아버지가 잡아온 붕어나 잉어회는 먹어보았지만, 50년이 넘어서 맛은 기억나지 않아요. 먹고 싶어요. 어서 가요.”
내가 가끔 가는 자매회집으로 데리고 갔다. 술손님이 대여섯 팀 있지만 비교적 조용하다. 주인여자가 반기며 너스레를 떤다. 젤로 맛있는 회를 찾았더니, 오늘 올라온 뱅어돔이 있다고 한다. 좀 비싸기는 하지만 두말할 필요가 없다. 뱅어돔은 요즈음이 제철이지만 자연산이라 먹기 어려운 횟감이다. 난생처음 바다생선회를 먹는 여자에게 양식생선회를 먹일 수는 없다.
나도 오랜만에 먹어보는 뱅어돔회는 쫄깃쫄깃하고 고소하니 참 맛있다.
“선생님, 생선회가 모두 이렇게 맛이 있어요?”
“그건 아니에요. 뱅어돔은 자연산으로 여름 한 철이 가장 맛있는 회라구요.”
여자는 독일에서 독한 술만 먹어서인지 소주를 물마시듯 꼴깍꼴깍 잘도 마신다. 천천히 마시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끝내 혀가 고부라진다.
“선생님, 소주가 이렇게 맛있는 술인 줄 이제 알았네요. 아주 알아요, 달아.”
15년간의 외로움을 술로 달랬다는 여자의 주량은 나에 못지않을 정도였다. 소주 여섯 병을 비우고 호텔에 들어왔다. 정신을 못 차리도록 취한 여자를 두고 갈 수는 없다. 곯아떨어진 여자를 침대에 눕히고 나는 옆의 싱글침대에 누웠다. 술은 취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이 여자가 언제 돌아갈지 모르지만, 예측할 수 없이 당돌한 여자가 마음에 걸린다. 친정식구들과 결별을 했다니, 머무는 동안 내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아니다. 아예 돌아가지 않고 함께 살겠다고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리 되면 나는 참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딸아이들은 아비가 재혼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적격일 수도 있음이다.
아침 여섯 시면 저절로 잠이 깬다. 그건 십 년이 넘은 습관으로 전날 아무리 취했어도 어김없이 잠이 깬다. 여자는 아직 한밤중이다. 오늘은 고스란히 비워둔 날이니 구태여 깨울 필요가 없다. 소리 안 나게 맨손 체조로 몸을 풀고 샤워를 했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나와 보니 여자가 깨어있다.
“어머, 선생님. 저를 깨우시지 그랬어요. 술에 떨어져 자는 모습 다 보셨잖아요.”
“안 볼 수가 없잖아요.”
“어머나, 입을 헤벌리고 침을 흘리며 자던가요?”
“아니, 자는 모습이 천사 같던데…….”
애도 어른도 예쁘다면 반색을 한다. 속옷만 입은 채 품에 달려들며 아양을 떤다. 우리 부부는 신혼 때도 이러지 않았다는 생각 불쑥 든다.
“정말요? 애기두 아닌데 설마…….”
“정말 애기처럼 새근새근 잘도 자더군요.”
이제 생각하니, 여자가 자는 모습을 자세히 본 기억은 없지만 미상불 자는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고 곱기는 했었다.
그날은 서울구경을 시켰다. 경복궁, 창덕궁, 남산을 구경하고 청계천을 한 시간 걸었다. 대구에서 대학 다닐 때 서너 번 서울 구경을 했다는 여자는 서울이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라면서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순적으로 그 표정을 살폈는데,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닌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대체 현실로 드러난 것도 아닌데 왜 겁이 나는 것일까?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청계5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내가 가끔 가는 혜화동 카페에 가서 양주를 마셨다. 나는 의도적으로 술에 취했다. 호텔에 돌아왔을 때, 오랜만에 흠뻑 취한 나를 거울에 비추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여자에게 봉사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왜 기분이 좋을까? 여자는 어제 과음을 해서인지 오늘은 술을 사려 덜 취했다. 덜 취한 정신으로 기대를 했던 남자가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자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 것을 눈치 챘으니, 나는 곤죽이 되지는 않았음을 스스로 느끼며 침대에 쓰러졌다.
아침 6시에 잠이 깨었는데, 눈을 뜨니 여자가 옆에 앉아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표정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잠자는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음을 느낄 수 있다. 불끈 신경질이나 일어나 앉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분은 정말 더럽다. 술 취해 자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가 없을 터이고, 들여다보는 여자의 표정이 떠올라 화가 난다. 결혼하여 같이 산 여자가 아닌, 남의 아내였던 여자가 대책 없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여자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충북 제천시 송학면에 갔다. 여자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는 마을은 많이 변했지만, 다니던 초등학교는 그 자리에 있었다. 송학산 밑에 있던 태어난 집터는 젖소농장으로 변했는데, 놀랍게도 주인이 여자의 재당숙이었다. 여자보다 다섯 살 위인 재당숙이 50여년 만에 용케도 칠촌 조카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그 집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서울로 올라왔다.
여자를 내 차에 태우고 동해안, 서해안, 부산을 구경시키는데 보름이 결렸다. 여자는 한 달 고국여행 일정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누가 봐도 다정한 초로의 부부였고 잠자리도 그랬지만, 피차간에 의도적으로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은 많은 갈등으로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서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부담스럽거나 서로의 행위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은 가끔 들었다.
여자의 여행 20일차 되는 날 제주도에 갔다. 제주도에서는 내가 운전을 하지 않으니 자유롭고 즐겁다. 택시로 때로는 버스로 제주도 곳곳을 일주일간 구경했다. 나도 제주도를 이렇게 구석구석 돌아보기는 처음이다.
내일 서울로 돌아가는 날 저녁, 여자가 품에 안겨 내 가슴의 털을 쓰다듬으며 촉촉하게 젖은 음성으로 느닷없이 말했다.
“선생님, 저 이제 한국에서 살고 싶어요.”
순간적으로 가슴에 찌릿한 전류가 흐른다. 올 것이 마침내 왔다. 결론이 어떻게 나던 나도 기다리던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잠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얼핏 든다. 금방 대꾸가 떠오르지 않아 여자의 등을 쓸어주다가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여자는 애초부터 작정했던 듯 선뜻 대답했다.
“선생님이 좋아서요. 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자는 모습 보고 싶어요.”
이런, 웬 유행가 가락! 여자가 그 노래를 알 턱이 없다고 보면 이 말은 진심일 것이다. 가슴이 무겁고 답답해진다. 내 마음 저변에는 여자가 이렇게 나오기를 은근히 바랐음을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그렇다. 우리가 부부가 된다고 하여 그 누구도 탓하거나 만류할 이유도 그럴 사람도 없다. 그런데 내 마음의 한가운데는 아직 아내의 잔영이 남아있고, 애틋한 정이 남아있고, 못 다한 사랑이 고여 있다. 그런 마음과 정신 상태로 외국에서 40년 넘게 살다온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과연 내게 있을까? 나는 할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바로 누워 정리한 대답을 했다.
“소희 씨, 그건 일시적인 감정이 아닐까요? 정말 자식들이 있는 독일을 버리고 내 모습만 보며 살 수 있겠어요?”
“전 선생님이 독일에 오셨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는 결심을 하고 한국에 왔어요. 우리 아이들 잘 살고 있어요. 제가 옆에 붙어있지 않아도 문제없어요. 제게 두 아이도 중요하지만, 선생님도 남은 제 인생에 있어서 중요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 보다 더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어요?”
대답이 금방 나온 것으로 보아 오래 생각했을 여자의 진심임이 분명하다. 공은 이제 내게로 넘어왔다. 그러나 나는 여자처럼 금방 대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한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안다. 여자는 나와 재혼하면 독일의 재산을 처분하고 나올 것이다. 내게 생활상 재정적인 부담을 줄 여자는 아니다. 외려 내가 덕을 볼 것이다. 그렇더라도 내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 이유를 정말 나도 알 수가 없다. 궁상맞은 홀아비 생활이 지겹다는 생각을 가끔은 했기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세 딸도 아비의 재혼을 권유하던 터였기에 내 마음은 더욱 갈등한다. 이건 중요한 문제다. 남은 내 여생을 당사자인 여자를 품에 안고 금방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래요. 사실은 나도 그런 기대와 생각을 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에요. 우리 지금부터 신중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만 합니다. 소희 씨, 우리 술 마시러 나갈까요? 아직 열한시 전이에요.”
“그래요. 저도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어요.”
그랬을 것이다. 서로 뱃속도 마음도 헛헛한 분위기이고 어색함을 넘기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밤늦은 횟집은 이제 조용하다. 초저녁에는 손님이 늘어서서 회 먹기를 포기했었다. 늦은 밤에 양이 많은 회보다는 전복과 해삼을 시키고 소주를 마신다. 내일 오후 4시 비행기를 타면 된다. 시간이 넉넉하니 마음 놓고 마실 수 있어 기분도 좋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날 밤 나는 집에서 잠을 잤다. 8일 만에 집에서 혼자 침대에 누워보니 참 편안하고 홀가분하다. 어수선하고 소란한 호텔방보다 오래 길든 내 집 내방이 천국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잠을 청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정신이 멍하다. 꿈을 꾸다가 깨어보니 새벽 4시였다. 꿈을 더듬다가 그루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6시다. 몸을 풀고 운동을 해야 하지만 간밤의 꿈이 육신을 잡아 누른다.
꿈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다. 꿈에 더러 아버지 어머니를 보기는 했지만, 양주 분을 같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쉰여덟에 홀아비가 되어 7년을 혼자 살다가 예순다섯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쉰일곱에 진폐증(塵肺症: 먼지가 폐로 들어가 호흡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진폐증의 원인이 바로 내가 철이 들면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존경하던 문익점의 목화솜 때문이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며느리 셋이 모두 진폐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 삼형제도 일흔을 못 살고 모두 저세상으로 갔는데 결국 목화솜 먼지가 원인이었다.
할머니 세 아들과 며느리 중 어머니가 가장 먼저 돌아가셨다. 내가 서른 살이던 1980년 어머니는 폐가 굳는 진폐증이라는 병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같은 증상으로 호흡곤란과 기침으로 골골하던 큰어머니와 숙모가 진폐증으로 밝혀지며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따라서 아버지 삼형제도 종합 진단을 했는데, 여자들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모두 진폐증환자였다. 집안은 온통 난가가 되었다.
우리 집안은 40여 년간 삼베와 목화길쌈을 하여 돈을 벌어 동네 부자소리를 들었다. 길쌈을 하자면 집이 넓고 베틀을 앉힐 방도 커야 한다. 하여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베를 짤 수 있도록 실에 풀을 먹이고 도투마리에 감자면 마당이 넓어야 한다. 늦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삼베길쌈을 하고, 늦가을부터 목화를 따기 시작하면 이른 봄까지 목화길쌈을 한다. 큰방 두 칸에 베틀 두 틀을 앉히고 밤늦도록 쩔걱쩔걱 바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동네 아낙네들도 매일 두셋씩 와서 일을 했으니, 요셋말로 하면 우리 집은 방직공장이었다.
껍질은 깐 목화를 씨아틀에 돌려 목화씨를 빼고 거핵을 내면,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은 거핵(去核: 씨를 뺀 목화솜)을 커다란 활시위에 매겨 당겼다 놓으면 활시위가 목화솜을 탁탁 치면서 탄력을 받아 부풀어지며 보드라운 솜이 된다. 그 과정에서 눈에 보일 정도의 보얀 먼지가 이는데 방안이 자욱할 정도였음이 어린 시절이던 내 기억에도 생생하다. 때로는 솜을 타면서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기도 하지만 갑갑하다면서 그것도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일 정도의 목화솜 먼지는 그대로 호흡을 통에 폐에 들어가면 배출되지 않고 그대로 폐에 들러붙는다. 하여 폐는 섬유질화 되어 점점 굳어지고 끝내 목숨을 잃는다. 그 병에는 약도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밝혀졌다. 속수무책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상황은 당사자나 가족들 모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 큰어머니가 작고하였고, 그 이듬해 숙모마저 목화의 한을 품고 저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이태 뒤에 큰아버지가 작고하시고 이듬해 숙부가, 그리고 이태 뒤인 198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연년이 줄초상을 치르고 우리 집안에 진폐증 소동은 끝났다. 결국 내가 철이 들면서부터 세종대왕보다 먼저 알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존경했던 문익점의 목화 때문에 우리 할머니의 아들 삼형제와 며느리 셋이 명대로 못 살고 앞서거니 뒤서니 저세상으로 갔다.
내가 열다섯 살이던 1965년 예순 다섯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매년 음력 2월 초여드렛날 한밤중에 장독대 된장 항아리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절을 하며 비손이를 했는데, 그 날이 문익점 제삿날이라고 했다. 필경 진폐증으로 돌아가셨을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 원인이 조상처럼 받들던 문익점의 목화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세 며느리에게 목화길쌈을 계속 시켰을 것이다.
쉰여덟에 홀아비가 된 아버지는 7년을 혼자 살았다. 넓은 집을 헐고 우리 사남매가 아담한 양옥집을 지어드리고 새 장가를 들라고 지성껏 권해도 끝끝내 혼자 살았는데, 살림살이를 아낙네처럼 깨끔하게 잘 했다.
잠자리에 누워 꿈을 더듬던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나는 형제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물론 성격도 닮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에 돌아가셨다. 꿈에 커다란 목화활로 솜을 타시던 어머니를 보았고, 알뜰하게 혼자 사시던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다.
여자가 독일로 가기 전날, 가방을 챙겨 우리 집에 데려왔다. 서초동에 혼자 사는 내 아파트는 54평이다. 그래도 책이 방 두 칸을 차지하여 일상 쓰임새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여자는 집안을 둘러보며 연실 감탄을 한다. 이런 집에서 둘이 알콩달콩 살고 싶다는 표정과 감정이 말 마디마디와 행위에서 드러난다.
내가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고, 아끼던 고급 양주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홀아비와 과부 간에 중요한 대화가 될 것이라 분위기가 비교적 무겁다. 제주도 호텔방에서 내가 넘겨받은 공을 이제 돌려주거나 게임을 끝내야 한다. 애타게 대답을 기다리는 여자의 모습이 안타깝다고 느껴진다.
“소희 씨, 아직도 나와 재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나요?”
말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이 예쁘고 처연하다고 느끼는 순간, 큰 눈에 눈물이 맺힌다.
“제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선생님 생각은 아니라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어요. 제 짐작이 틀렸으면 좋겠어요.”
난제일수록 속전속결이 중요하다.
“틀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침에 깨어 잠든 얼굴을 매일 볼 수는 없어도 일 년에 두세 달 정도는 매일 볼 수 있는 방안을 내가 제시할게요.”
여자는 굳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뜨며 온몸으로 말없이 재촉한다.
“나도 소희 씨를 사랑해요. 그 몸과 마음 매일 갖고 싶어요. 그러나 67년 내 삶이 크게 변동되는 게 난 겁나요. 그리고 우리 사랑이 끝끝내 지금처럼 뜨거울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부담스러워요. 게다가 난 누구의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에 길들여졌어요. 이건 내 쪽의 사정이고, 소희 씨 사정으로 보아도 40년간 살던 독일 생활을 하루아침에 접고 한국에 온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아무리 잘 자라서 각기 제 삶을 산다지만 두 자녀를 그렇게 잊을 수는 없을 거예요. 이제 남매가 결혼하여 손자를 보게 되면, 지금보다 엄청난 변화가 옵니다. 내가 보는 소희 씨는 그 변화를 피할 수 없어요. 그리되면 우리 재혼은 지금처럼 행복할 수 없을 겁니다.”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러나 저는 선생님을 잊을 수 없어요. 매일 보고 싶어 아마 병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어쩌지요?”
“그건 나도 그럴 거예요. 그래서 제안을 하지요. 내가 매년 한 번씩 독일에 가고, 그대가 역시 매년 한국에 와요. 그러면 두세 달은 같이 지낼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즐거운 이별, 행복한 만남이 아닐까요? 게다가 이 집이 그대 집이고, 독일 그대 집이 내 집이 되니까 우리 재산도 지킬 수 있어요.”
마주 앉았던 여자가 일어나 내 품으로 달려든다. 목을 껴안고 사정없이 입술을 탐한다. 향긋한 위스키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얼굴을 뗀 여자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행복하게 웃으며 말한다.
“어쩌면, 그런 행복한 방법이 있었네요. 즐거운 이별, 행복한 만남! 선생님 고마워요. 죽을 때까지 함학준 선생님 사랑할 거예요.”
“나도 죽을 때까지 소희 씨 사랑합니다.”
위스키 한 병이 바닥났다. 이제 여자의 여행에서 마지막 밤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