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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43년인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7월에 구암(久庵) 한공(韓公)이 한사(漢師, 한경(漢京)과 같은 말)의 서쪽 교외(郊外)인 물이촌(勿移村)의 사제(私第)에서 고종(考終)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어진 공경대부(公卿大夫)는 같은 도(道)로써 슬퍼하고, 경생(經生)ㆍ학자(學子)는 고덕(考德)으로써 서러워하였으며, 평소에 호오(好惡)가 달라 서로 즐겁게 여기지 않았던 자와 어리석고 무지(無知)한 자와 이서배(吏胥輩)들까지도 모두 슬퍼하고 탄석(歎惜)하기를, “좋은 분이 작고하였다.” 하고, 전에 부임하였던 고을의 부로(父老)와 사자(士子)들도 앞다투어 달려와서 전(奠)을 올리고 부의(賻儀)를 하며 매우 슬피 곡을 하니,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공이 사람들에게 이러한 대우를 받은 것은 도(道)가 있기 때문이다. 천성이 단아하고 기품이 화애로우며 말은 온순하고 용모는 공손하며, 그 자상스러움은 족히 남에게 도움이 되고 그 정성스러움은 족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며 그 마음가짐은 평이(平易) 관서(寬恕)하여 이른바 한 사람에게도 원오(怨惡)가 없다 할 만하니, 그 죽음에 슬퍼하고 죽은 뒤에도 잊지 못해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아, 이는 참으로 공을 잘 보았다 할 만하나 공이 간직하였던 바는 오히려 이 말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바가 있다.
공의 휘는 백겸(百謙)이요 자는 명길(鳴吉)이니 그 선대는 청주인(淸州人)이다. 한난(韓蘭)이란 분이 있어 고려(高麗)의 초창기를 당하여 훈공(勳功)은 벽상 삼한(壁上三韓)이요, 관작은 삼중 대광(三重大匡)이요, 지위는 태위(太尉)인데, 자손이 관면(冠冕)으로 대를 이어 공업(功業)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덕행(德行)으로 저명하기도 하여 여사(麗史)에 줄을 잇다시피 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한상경(韓尙敬)이란 분은 개국훈(開國勳)에 책록되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영의정이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 한혜(韓惠)를 낳고, 관찰사가 좌찬성 한계희(韓繼禧)를 낳고, 좌찬성이 한성부 판관 한사무(韓士武)를 낳았는데, 공에게는 고조가 되고,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증조 한승원(韓承元)은 정선 군수(旌善郡守)에 증 좌찬성이요, 조부 한여필(韓汝弼)은 문천 군수(文川郡守)에 증 영의정이며, 고(考) 한효윤(韓孝胤)은 예(禮)로써 몸을 다스리어 당시에 추중(推重)한 바 되었으나 불행히 일찍 작고하여 벼슬이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그쳤는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비(妣) 정경 부인(貞敬夫人) 신씨(申氏)는 고려조의 충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인 예빈시 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훌륭한 바탕이 있었고 어려서도 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나이 17, 8세에 개연(慨然)히 구도(求道)할 생각이 있었는데, 습정(習靜) 민순(閔純)공이 은거하면서 의로운 일을 행하며 고도(古道)로써 후진(後進)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그 문하(門下)에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니, 민공이 공과 이야기를 나눠보고는 사랑하여 고하기를, “자네는 주부자(朱夫子)의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수신(修身)의 대법(大法)은 ≪소학(小學)≫에 갖춰져 있고, 의리(義理)의 정미(精微)는 ≪근사록(近思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성인(聖人)이 되는 근기(根基)는 이 두 책에 벗어나지 않으므로 선비가 학문을 하려면 의당 이 두 책에서부터 입문(入門)해야 한다.’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공은 척연(惕然)히 감발(感發)하여 드디어 그 문하에서 학업을 마쳐 학문하는 공정(功程)과 사우(師友)의 연원에 대하여 극히 친절하게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일찍이 뭇 사자(士子)들을 따라 과거 공부를 하여 소과(小科)에 합격하기는 하였으나, 공이 소중히 여기는 바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그 뒤에 외직에 제수되어 겨우 한 해가 지나서 또 승중(承重)으로 조모상을 당하여 여러 해를 애통 중에 지냈으나 절대로 외물(外物)에 이끌리지 않고 궁리 격물[窮格]의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계몽(啓蒙)하는 책에서부터 시작하여 엎드려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침잠(沈潛)하고 보고 익혀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그 상수(象數)의 근원과 변화(變化)의 묘리에 대하여 더욱 심득(心得)하고 신회(神會, 정신적으로 이해하게 됨)하여 이제는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재미가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는 과거 공부를 집어치우고 문을 닫고서 휘장을 내리고 의리(義理)의 공부에 힘을 써서 위로 육경(六經)ㆍ어맹(語孟, ≪논어≫ㆍ≪맹자≫)의 뜻과 아래로 염락관건 1)(濂洛關建)의 말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점차로 파고들고 차츰차츰 쌓아가고 반복하여 참고하였는데, 그 연구의 정심(精深)함과 견식(見識)의 투철함은 세유(世儒)의 미칠 바가 아니었고, 오로지 위기(爲己)의 학문을 주로 하고 문달(聞達)을 바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항상 자신을 숨기기에 힘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이 독학(篤學)하는 선비임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에 천거해 준 사람이 있어 중부 참봉(中部參奉)이 되고, 조금 후에는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나갔으며, 얼마 후에는 또 선릉 참봉(宣陵參奉)이 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역옥(逆獄, 정여립 옥사(鄭汝立獄事))이 일어나자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이 사람을 끌어들이기에 힘써 한때의 진신(搢紳)들이 무함과 오욕(汚辱)을 많이 당했는데 공도 호남(湖南)에 있을 때에 이진길(李震吉, 정여립의 생질)과 알고 지낸 일로 연좌(連坐)되어 모진 고략(拷掠, 고문)을 당하고 귀양 갔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대사(大赦)에 풀려났으나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마침 변방 백성이 난동(亂動)을 부려 왜병(倭兵)과 호응하니, 관군(官軍)은 궤멸되고 산주(散走)하여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 사이에 공이 귀양온 한두 사람과 함께 눈물로 호소하여 병사를 모집하여 주동자를 체포하여 죽이니, 한 지방이 진정되었다. 그 일이 행재소(行在所)에 알려지자 특명으로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처음으로 조정에 나가니 한성부 참군으로 이배(移拜)되었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선대왕(先大王, 선조를 지칭한 말임)이 강연(講筵)을 열어 ≪주역(周易)≫을 진강(進講)하게 하였는데, 이때는 광복하여 경시(更始, 새로 시작함)하는 초두(初頭)였다. 조정의 제공(諸公)이 함께 천거하여 공이 역학(易學)에 정심(精深)하다 하고, 파격(破格)으로 입시시켜 강설(講說)에 도움되게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일이 비록 중지되기는 하였으나 당시에 크게 영화롭게 여겼다.
대신이 인재(人才)를 구하기에 급하자 자격(資格)에 구애받지 말고 10조(條)로 사람을 가려 난리를 수습할 소용으로 쓰자고 건의하였는데, 공은 학술이 있고 시무(時務)를 안다고 하여 맨 먼저 천거되어 호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에는 형조로 옮겼다가 안악 현감(安岳縣監)으로 나갔는데 치적이 항상 으뜸이어서 함종 현령(咸從縣令)으로 승전(陞轉)되자 안악 백성들이 공거(公車, 장주(章奏)를 받아들이는 곳)에 나아가 호소하였으므로, 명하여 품계를 높혀서 유임시켰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는 불편한 일이 있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고, 이듬해 경자년(庚子年)에는 형조 정랑에서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되었으며,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는 공의 아우인 상서공(尙書公, 한준겸(韓浚鎌))이 체부(體府)의 차관으로 본도(本道)에 오게 되자, 법례상 피혐(避嫌)해야 하기 때문에 교체되어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선대왕께서 ‘≪주역(周易)≫의 역전(易傳)과 주역 본의(周易本義)에 서로 같지 않은 데가 있어 구두(句讀)와 음석(音釋)을 둘 다 두어야 하는데, 학자들이 유독 정전(程傳)만 주장한다’고 하여, 중외(中外)의 유신(儒臣)을 모아서 국(局)을 설치하고 이정(釐正)하라 명하였는데, 출신(出身, 급제자)이 아닌 사람으로서 그 선발에 뽑힌 사람은 공과 홍가신(洪可臣)공ㆍ정구(鄭逑)공 등 몇 분 뿐이었다. 얼마 후에 조사(詔使)가 온다고 그 일을 중단하고 공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내보냈다가 조사가 돌아가자 파발마를 보내서 소환하여 사도시 정(司導寺正)으로 승진시켜 토론하고 교정하게 하였는데, 일이 끝나자 일등연(一等宴)을 내려 주었다. 그때에 공은 이미 청주(淸州)로 부임하였는데 특명으로 불러 참석하게 하였으니, 이 역시 특이한 은우(恩遇)라 하겠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 본도에서 실적(實績)을 올리니 교서(敎書)를 내려 포상하고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려 주었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에 들어와서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가 호조 참의로 옮겼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선대왕께서 승하(昇遐)하였는데 병란(兵亂) 뒤에 의궤(儀軌)가 모두 유실되었으므로 예관(禮官)이 대상(大喪)을 당하여 졸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신이 공이 예(禮)에 익숙함을 알고 서둘러 들어와서 빈전(殯殿)의 일을 다스리게 하니, 그 때문에 염습(斂襲) 등 여러 절차에 실수가 없이 치루어졌다.
그때에 정경 부인(貞敬夫人)은 상서공이 봉양(奉養)하여 평양부(平壤府)에 있었는데 몸이 불편하였다. 공은 즉시 말미를 청하여 달려가 뵙고 소장(疏章)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며, 인하여 공물(貢物)의 폐단이 백성들의 큰 폐해가 되고 있음을 극론하고 아울러 개선책을 아뢰었는데, 절목(節目)이 매우 상세하니 일이 묘당(廟堂)으로 내려졌다.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공이 바야흐로 총리(總理)하고 있으면서 그 말을 좋게 여기고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먼저 기전(畿甸)에 시험하였는데, 지금 기전 백성들이 어깨를 펴고 안도(安堵)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5월에는 상(喪)을 당하였고,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에 복을 벗자 관례대로 서반직(西班職)에 제수되니 위연(喟然)히 탄식하기를, “내가 본디 병이 많아 벼슬길에 나서기를 즐겨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늙고 부모도 안계시니 어찌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여생을 마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앞서 상서공이 서호(西湖) 아래 수이촌(水伊村)에다 전답을 사서 공에게 주어 공이 작은 집을 짓고 살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곳에다 서실(書室)을 꾸미고 날마다 그 안에서 거처하면서 구업(舊業, 전에 하던 공부라는 뜻)에 침잠(沈潛)하여 이르지 못했던 경지를 더욱 탐구하니, 조예는 더욱 깊어지고 즐거움은 더욱 참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을 이름을 물이촌(勿移村)이라 고치고 기(記)를 지어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 겨울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또 버틴다는 말이 듣기 싫어 억지로 부임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인수(印綬)를 던지고 돌아왔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의 변고(變故)에 상서공이 중한 견책(譴責)을 받게 되자, 세상에 더욱 뜻이 없어 파주(坡州)의 해유장2)(解由狀)을 집에다 감추고 깊이 들어앉아 시사(時事)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날마다 자질(子姪)들과 경사(經史)를 담론(談論)하고 의리(義理)를 탐구(探求)하면서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몇 끼나 거르면서도 태연하였다. 2년이 지난 유두일(流頭日)에 가묘(家廟)에 시물(時物)을 올리면서 더위를 먹어 이내 병이 더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향년 64세이다. 상서공이 상제를 데리고 상여(喪轝)를 동으로 옮겨가 이해 9월에 원주(原州)의 치소(治所) 서쪽 가마도(佳麻島)의 선조(先兆) 아래에 장사지내니 유언(遺言)에 따른 것이다.
처음에 찬성공(贊成公)이 작고하자 공이 살림을 맡아보았는데 정경 부인을 모시고 즐거운 얼굴빛으로 뜻을 받들어 곡진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미가(未嫁)한 여매(女妹)가 넷이나 있었으나 교양에 방향이 있었으며, 혼가(婚嫁)도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때에 왕모부인(王母夫人, 할머니)도 계셨고, 기공(期功, 기복(期服)과 공복(功服). 가까운 친족의 뜻)이 집안에 가득하였으나 능히 좌우로 주선하여 앙사(仰事)ㆍ부육(俯育)의 채비로 조금도 정경 부인에게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았다. 항상 장공예(張公藝, 당(唐)의 구세동거(九世同居) 한 사람)의 풍도(風度)를 사모하여 구족(九族, 고조 이하 현손까지의 직ㆍ방계 친족의 총칭)이 함께 살고 싶어하여 사마가의(司馬家儀)를 대충 모방하여 책 한 권을 만들어 재용(財用)의 관리와 의식(衣食)의 공급 등에 관한 제도를 규정하였다. 비록 힘이 모자라고 사정에 구애되어 뜻대로 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상서공과는 반평생을 재용을 같이 하였는데 안속으로 동서들과 노복(奴僕)까지도 모두 그 성의에 감복하여 집안이 정숙(整肅)하였다. 또 제행(制行)과 처사(處事)에 매양 고인(古人)을 본받아 이를테면 관혼 상제(冠婚喪祭)의 예절 등에 반드시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정문(情文, 정리(情理)와 의식(儀式)) 양면에 서운함이 없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평소에도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고요한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글을 읽어도 입에서 소리를 내지 않아 바라보면 장중(莊重)하여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정작 사람을 대하면 화평(和平)하고 낙이(樂易)하여 정성을 다 쏟았으므로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모두 환심을 샀다. 후생(後生)과 소년들을 만나면 그들을 위하여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는데, 그 말이 명백하고 간절하며 간이(簡易)하고 조창(條暢)하여 양단(兩端)을 두루 연역(演繹)함으로써 기어코 선(善)의 경지에 들도록 하려고 하였다. 대체로 호선(好善)하는 정성이 자타(自他)의 간격이 없었기 때문에 군읍(郡邑)을 맡아서도 이런 마음으로 행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무예(武藝)를 익힘에 있어서도 반드시 교양(敎養)을 먼저 하였다. 백성을 다스리고 아전(衙前)을 어거함에도 한결같이 은신(恩信)으로써 대하고 한번도 매로써 닥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무릇 설시(設施)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성을 들여 원대(遠大)하게 계획하고, 목전의 효과만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다사 다난하여 다투어 엄급(嚴急)을 일삼는 때를 당해서도 능히 체통을 유지하고 정의(情意)로 믿음을 주어 일은 성공하고 백성들은 원망하지 않았는데, 그 규모(規模)와 포치(布置, 배치)는 항상 다음에 오는 사람이 본받게 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조용하고 간정(簡靜)하여 아무런 소능(所能)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상밀(詳密)하고 조리가 있었는데, 이는 경의(經義)를 궁구하여 행사(行事)에 응용한 힘이라 하겠다. 공의 학문은 사색(思索)을 주로 하여 글자에서는 그 색음(索音)을 구하고 글귀에서는 그 뜻을 구하여 뒤얽힌 곳에서는 융회(融會)코저 하고 의심이 나는 곳에서는 타파(打破)하려 하고 막히는 곳에서는 꿰뚫으려 하였는데, 반복하여 궁리함으로써 이루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육경(六經)의 문자(文字)는 주소(註疏)에 가린 바 되어 점차 그 본 뜻을 잃어가고 있으니, 배우는 사람은 너무 주소에 얽매일 것이 없으며, 마음에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지면 비록 선현(先賢)의 말이라 하더라도 굳이 같이 할 것은 없다. 이를테면 ≪맹자(孟子)≫의 원모장(怨慕章)에서 말한 효자의 원망[怨]은 바로 부모를 사모[慕]하는 것으로서 원래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못하는 것과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章)과 소변장(小弁章, ≪시경(詩經)≫ 편명(篇名))에서는 다같이 먼저 원망하는 뜻을 말하여 모(慕)자에 귀결시킨 것이니, 맹자의 뜻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어찌 유독 자식이 부모에게만 그러할 것인가? 신첩(臣妾)이 자기의 주인을 섬김에도 이러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이는 종풍(終風, ≪시경≫ 편명)ㆍ이소(離騷, 굴원(屈原)이 지은 글)에서 충신과 열녀가 먼저 부르짖은 말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윗전[上殿]을 비방하고 남편을 꾸짖은 것이라고 훼방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원망하는 율(律)을 부도(不道)에 견준 것은 한가(漢家, 한나라 때의 뜻)의 심문(深文, 문의(文義)에 얽매임)이지 선왕(先王)의 충후(忠厚)한 뜻은 아니다.” 하였는데, 참으로 이른바 전인들이 발설하지 못한 것을 발설한 것으로서 세교(世敎)에 큰 공이 있다 하겠다.
북변(北邊)의 험난하고 위태로운 빈사(瀕死) 중에도 오히려 책으로 즐거움을 삼아 같이 살고 같이 죽자는 그러한 독실함이 있었다. 바야흐로 철현(徹懸, 풍악을 매달음. 대고(大故)가 있음을 뜻함)할 때에 상서공이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사생(死生)의 이치에 대하여 물으니 공의 기식(氣息)이 이미 접속이 되지 않은 중에도 오히려 ≪주역≫의 원시반종(原始反從, 시작을 궁구하여 종말을 반성함)의 설(說)을 들어 목구멍에서 맴도는 말로 답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참으로 글에는 남에게 뒤지지 않아 한 점의 밝은 데가 있으나 한스럽게도 병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 여기에 이르렀다.” 하였다. 그 시종 학문에 전념한 성의가 위급한 중에도 두 마음이 없었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확고하였으니 아, 참으로 독실히 좋아하였다 하겠다. 저서(著書)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는데, 말에 조리가 있어 전할 만한 것이 많다. 또 계몽설시변(啓蒙揲蓍辨)ㆍ다방해(多方解)ㆍ빈풍설(豳風說) 등은 모두 선현(先賢)의 논설 밖에서 입언(立言)한 것으로서 그 정조(精粗)와 천심(淺深)은 비록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깊이 생각하고 힘써 탐색한 공력은 책만 펼치면 저절로 알게 된다.
공은 능성 구씨(綾城具氏) 사인(士人) 구사중(具思仲)의 딸을 선취(先娶)하여 1년도 못되어 몰(歿)하였고, 함창 김씨(咸昌金氏) 산계(散階) 김정준(金廷俊)의 딸을 재취(再娶)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한흥일(韓興一)은 진사(進士)로 판서 오억령(吳億齡)의 딸을 취(娶)하였고, 딸은 사인(士人) 홍비(洪棐)에게 출가하였는데, 영원군(寧原君) 홍가신(洪可臣)의 아들이다. 공이 졸한 지 5년이 되는 해에 상서공이 적소(謫所)에서 서신으로 나 정경세(鄭經世)에게 명(銘)을 부탁하기를, “우리 형을 아는 사람은 많으나 깊이 알기로는 그대 만한 사람이 없으니 종말을 도모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종유(從遊)한 지 오래이다. 듣지 못했던 바를 들은 것이 매우 많아 후일 나의 공부가 조금 나아지면 질정(質正)하려고 하였는데, 이제는 생각했던 것이 다 틀려버렸다. 오직 그 평생을 정직하게 서술하여 후세에 알리는 것은 화사(華奢)하지 않은 자의 책임일진대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삼가 상서공의 가장(家狀)에서 간추리고 평일에 보고 들은 바를 참고하여 그 줄거리만을 위와 같이 적고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온공(溫恭)은 덕의 기초라고 대아(大雅,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에 가르침이 있는데, 전에 공은 이를 들어 학문의 근본이라 하였네. 내 곰곰이 생각하니 진실로 의미가 있어, 더불어 말을 하니 말이 일치하여 뜻을 공손히 하고 닦았네. 이윽고 공을 보니 이 말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사상과 학문이 아울러 진척하여 겸손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네. 숨고 드러나고 크고 작은 팔색 구구(八索九丘, 고서(古書))ㆍ오전 삼분(五典三墳, 고서)을, 모두 탐색(探賾)하여 한 근원으로 모았다네. 이미 간직하여 꽉 찼어도 없는 듯 빈 듯하였으나, 신명(神明)은 안으로 살찌고 화기(和氣)는 밖으로 풍겼네. 사람들은 그 외광(外光)만을 즐기고 축적된 바는 엿볼 수 없었는데, 그 축적 어떠했는가. 시행하여 운용(運用)할 만하였네. 조금 고을에서 베풀고 많은 것은 시험하지 못했는데, 가슴에 안고서 길이 갔으나 공으로서는 무슨 가책이 있겠는가. 더할 수 없이 오래갈 비언(匪言) 불후(不朽)한 것 있나니, 이 뒤에 참고하고 싶거든 이 각문(刻文)에서 징거할지어다.
각주
[네이버 지식백과] 한백겸 [韓百謙]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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