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해
맑음. 분향을 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읍내에 가서 문 흥양文興陽, 상주喪主 김진옥金鎭玉, 상주 김☐☐金☐☐ 형제를 일일이 찾아보고, 오흠약吳欽若의 집에서 잤다. 치중致重이 서울 길을 그만두고 모레 서원의 재사에 와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조 양산趙梁山 어른이 10여 칸짜리 집을 동문 밖에 새로 지어서 가 보았다. 밤에 조장趙丈 및 흠약欽若 형제, 홍휴백洪休伯과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서 흩어져 돌아갔다. 친척 심득우沈得佑도 병영兵營에서 와 같이 모였다.
서울 소식을 들으니, 좌의정 류봉휘柳鳳輝가 먼저 체직되고, 정호鄭澔가 우의정이 되었으며, 민진원閔鎭遠이 이조 판서가 되었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우의정 조태억趙泰億 두 재상도 대장臺章(대간의 상소) 안에 들어 있어서 영의정 이광좌는 달포 전에 공주公州에 와 있다가 사직하니, 연이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간절하게 당부하였다고 한다.
시배時輩들이 접때 김씨 성을 가진 궁인宮人을 찾아내어 벌할 것을 청한 일로 소론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삼아 감히 비기지 못할 곳에 비기어 말의 뜻이 매우 음흉하고 참혹하다. 김의연金義淵이 소를 올려 변백辨白하였는데, 김의연은 곧 대왕대비註 001의 아우이다. 이 소에 힘입어 저들이 감히 다시는 흉악한 음모를 행사하지 못하였으니, 아주 다행이다.
3월 3일
새벽에 들으니, 강좌江左의 소란이 아주 심하다고 한다. 대개 그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적선이 무수히 영해寧海에 와서 정박하고 있어서 이로 인하여 영해의 사민士民들이 영양英陽·진보眞寶 등지로 달아나 머무른다는 것이다. 밥을 먹은 뒤에 안동·용궁龍宮에서 소문이 잇달아 들려오니, 괴이쩍다. 사리와 형편으로 헤아려볼 때 아마도 회오리바람에 떠밀려온 상선商船일 터이고, 또 아직 관문官文을 보기 이전이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것은 못된다.
서경瑞卿이 돌아가기에 성중成仲과 안군安君에게 답장을 써서 부쳤다. 국형國亨 집의 사람과 말이 와서 오후에 작별하고 돌아가니, 몹시 서운하다. 저녁에 치중致重이 약속대로 왔다. 다만 소란의 기세가 점점 심하여져서 이 근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피신하여 떠났고, 혹은 여러 피난 행장을 꾸리는 등 인심이 뒤숭숭하여 마치 끓는 솥의 물고기와 같으니, 너무 한탄스럽다.
3월 8일
정 재임鄭齋任이 연이어 사임 단자를 올려 병든 사정을 말하여서 어쩔 수 없이 체임시키고, 조경회曺景晦를 선출하였다. 원보源甫의 편지를 받았는데, 또 우복愚伏註 003 선생의 연설筵說(경연 석상에서 설한 내용)을 실은 초본草本 다섯 권을 보내어 상호 고증하여 바로잡아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전혀 감당치 못할 일이다.
치중이 애초 제사에 참석하려고 한 것은 일찍이 향사享祀의 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므로 나도 머무르기를 권하였는데, 갑자기 설사가 나서 여러 사람과 함께 거처하기가 어려워 어제 낮에 작별하고 돌아갔으니, 몹시 서운하고 한탄스럽다.
밥을 먹은 뒤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기어코 가록加錄하고자 하기 때문에 공사원公事員으로 신사운申思運·김상채金相采를 선정하고, 모인 사람이 각기 두 사람씩을 추천하고, 반수班首 및 주인主人이 별도로 두 사람을 추천하였는데, 저녁이 되기 전에 마쳤다. 향교에 통문을 내자는 의론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이는 시끄럽게 서로 따질 필요는 없으나 상주는 중요한 곳이므로 한 번 글을 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뜻도 그러하다.
3월 13일
이 상사李上舍 아저씨가 지난번 근암서원近嵒書院 원장이 되었는데, 단연코 원장의 임무를 행할 뜻이 없어서 여러 차례 사임 단자를 내어 체임되었다.
들으니, 월초에 정호鄭澔가 소를 올려 역당逆黨이 다시 신원되어 복관復官을 하여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이 먼저 체직되고 민진원閔鎭遠이 우의정이 되었으며, 신임申銋과 이의현李宜顯도 정승에 추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삼李森이 어영대장御營大將에서 체직되고 장붕익張鵬翼이 대신 뽑혔으며, 훈련대장訓鍊大將 김중기金重器는 패牌를 받고도 나아가지 않아 파면되고 이봉상李鳳祥이 대신 임명되었으며, 호조 판서는 신사철申思喆, 이조 판서는 이의현李宜顯이라고 한다. 시사時事가 이와 같으리라고 진실로 예상은 하였으나 듣고 보니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진다.
3월 15일
치중과 원보源甫의 답장을 받았다. 내가 도남서원에 보낸 사임 단자가 돌아왔는데, 홍 영동洪永同·이 해남李海南이 발미跋尾하고 또 편지를 보내어 극진한 뜻으로 유임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산安山 김 진사金進士·홍 익위洪翊衛 두 어른이 근래에 향중鄕中의 일로 사례하였는데, 발미는 없으나 담긴 뜻은 모두 매우 도타웠다. 3년 동안 원장의 직임을 맡고 있었으면서 하루의 책임도 다하지 못한 데다 또 목전의 좋지 못한 모습을 볼 때 다만 문을 닫아걸고 인사를 사절하여야 하나, 이 한 가지가 쉬 수습하고 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아주 답답하다. 천장天章의 편지를 받고, 또 국형國亨의 답장을 받아 보았다.
3월 19일
오늘 새벽에 근암서원의 향사를 지냈다. 그 참에 수석首席을 선출하기 위한 권점圈點을 하였는데, 대단히 불미스런 악습이 있었다고 들리니, 세도世道가 한심하다.
3월 20일
상주 목사의 답장을 받았다. 또 치중의 답장을 받아 보았는데, 서로 권면하는 말이 많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익우益友’이고 ‘외우畏友’이다. 여러 번 읽어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서울 소식을 보니 다음과 같았다. 류경유柳景裕 등 다섯 사람註 004에 대한 옥사에서 아직은 독수毒手를 뻗치지 않고 있는데, 심수관沈壽觀은 ‘수受’와 ‘수壽’가 잘못 나왔다는 이유로 납초納招에서 수긍하지 않고 있으며, 장우상張宇相 아저씨는 이름자가 같지 않다는 이유로 아직 취리就理하지 않고 있다.
옥천 군수沃川郡守 김사달金士達은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승진 임명되었는데, 포상의 은전이 이미 내려왔으니, 정체政體가 참으로 그러하다. 강릉은 산이 많고 바다에 닿아 있어 관리로 은거하기에 충분하다.
형옥衡玉의 편지를 받았다. 또 벌써 세 번째 사임 단자를 올렸으나 나도 다시 사임 단자를 내려고 하는 중이어서 처리할 수 없다고 답장을 쓰고 사임 단자를 돌려보냈다.
3월 22일
두 번째 사임 단자를 써 보내고, 또 안산安山·은성銀城·유천酉川에게 편지를 써서 반드시 체임되고자 하는 뜻을 간절히 진술하였다.
들으니, 이번 도목정사에서 나학천羅學川이 사성司成 자리를 얻고, 조덕린趙德鄰 어른이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난날 소론少論이 집권할 당시 이미 홍문록弘文錄에 피선되었으나, 기어코 홍문관 관직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이 자칭 공론이라 하여 그리하였던 것인가? 괴이쩍다.
3월 27일
들으니, 수찬 권두경權斗經註 005 척숙이 세상을 버렸다고 한다. 너무 애통하다. 문장과 지위와 명망이 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 금년에 72세이나 기력이 강건하였는데, 4~5일을 앓고 갑자기 운명하였다니, 이것이 우리 영남 대가의 운수인가? 지평을 지낸 경주 손덕승孫德升註 006 역시 지난겨울에 초상이 났는데, 전배들이 날로 하나둘 돌아가시니, 애통한 심정을 더욱 견디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