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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4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제목: 성경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배경 이야기
https://youtu.be/-LM3GC_LYwQ?feature=shared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
설교를 위한 묵상
신우회원들과 복음의 말씀을 나누고 있다. 지난 주에는 홍익교회의 최영걸 목사님이 오셔서 ‘헛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이라는 주제로 전도서의 지혜를 소개해 주셨다. 그것은 기쁨으로 선을 행하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법을 배우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리기였다. 간단하면서도 마음에 와닿는 메시지였다.
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계속 소개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다. 이번 주에 그 세번째 시간인데 첫번째 시간에는 나에게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하는 주제를 다루었다. 그때 나는 예수님을 다섯 개의 키워드로 설명했다: 구원자 Savior, 후견인 Guardian, 인생 목적 Life Goal, 롤 모델 Role Model, 그리고 최고의 통치자 The King of the World. 두번째 시간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제목은 ‘네가 그리스도냐?’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다. 우리는 사실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세상이 판명한 그 분을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그렇게 선언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소개할 시간이다. 내가 이번 설교를 ‘21세기의 그리스도’라고 정한 이유는 과거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은가에 집중하고자 한다. 사실 이것은 톰 라이트가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예수님을 구원자로 소개하면서 그 구원을 사후에 영혼이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설명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플라톤의 철학에서 설명하는 것이며 사도 바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나 구원은 아니라고 톰 라이트는 강조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것은 ‘종말의 구원자’라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김세윤 박사의 설명이다. 그리스도를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설명이다. 그리스도를 택함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조금 더 들어간 설명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선택하셨고 그리스도는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은 성경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설명은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려는 목적은 그분의 가르침과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을 맛보고 그 구원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신앙이 그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이 세워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며 세상은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번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이라고 소개해야 할까? 기독교의 신앙이나 신학을 이야기할 때 결국에는 어떤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펼쳐 나가는가가 중요하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구원의 최종 목표로 정하고 이야기를 펼쳐 나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드신 이 세상을 늘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을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나 새창조의 완성이나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성경의 이야기와 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플라톤의 이원론에 따라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틀 가운데에서 비로소 바르게 그려질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새롭게 바로잡아 가시는 이야기로 전개될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몇몇 사람을 건져서 저 세상으로 데려가시는 이야기로 전개될 것인가? 하나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관심과 행동을 소개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자체를 건져내서 극락의 세계로 데리고 가는 것을 하나님의 최고 목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런 두 배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어 보면, 하나는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으로 드러나며,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음으로 사람들을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시는 분으로 그려진다. 우리가 믿는 구원자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마침내 사망 그 자체를 물리치시는 분인가 아니면 이 세상을 없애버리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분인가?
성경 이야기에 충실하자면, 우리는 창조와 새 창조, 그리고 창조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틀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설교 개요
1. 배경에 따라 달리 보이는 착시현상
2. 성경을 풀어가는 두 가지 배경 이야기
3. 배경에 따라 달리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
4. 21세기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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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에 따라 달리 보이는 착시현상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을 기독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의미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드렸습니다. 문자적으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맡기시려고 택하신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이 어떤 일을 맡기셨을까요?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고 생각해봄으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사람이 어떤 사물을 볼 때는 그 사물이 어떤 배경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래에 보는 바와 같이 같은 색깔의 모양이라도 배경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배경이 어두울수록 색깔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사람도 어떤 배경 가운데 그 사람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브리서 13:5).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배경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모습은 이런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고 저런 모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고 소개할 때는 어떤 배경 이야기를 먼저 들려줍니다. 다짜고짜로 예수님은 구원자라든지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일을 하셨는지를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배경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서 삶의 자세도 달라지게 됩니다.
저는 오늘 신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두 가지 다른 배경을 소개하고 그 배경에 따라 예수님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를 비교하고자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는 신앙의 색깔과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2. 성경을 풀어가는 두 가지 배경 이야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성경 이야기를 읽거나 듣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을 이해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요? 성경이 들려주는 예수님 이야기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과 죽음, 부활과 승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이나 성탄절을 기념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축하하고 기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노래합니다. 예를 들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찬송을 보면, ‘온 세상 죄를 사하려 주 예수 오셨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도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이렇게 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합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려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히브리서도 이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성경이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씻어 주시려고 자신을 단번에 드리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드리신 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상징 중에서 십자가가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여주는 상징은 십자가 외에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 양 예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양떼를 돌보는 목자이신 예수님도 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큰 군대를 거느리고 백마를 탄 왕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그려집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참 빛으로,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그리고 영생하는 양식 곧 생명의 떡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모든 상징 중에서 십자가는 가장 두드러진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어떤 배경 이야기 위에서 소개됩니까?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배경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요약하는 방식이며, 예수님과 그 십자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으며 앞으로도 자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배경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전도자들이 자주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인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 사망의 결과로 육신의 죽음이 찾아오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어서 천국과 지옥으로 가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생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믿으면 누구나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죽은 후에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 배경 이야기는 사영리나 글없는 책 같은 전도 도구로 수없이 많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바로 이렇게 요약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바친 사랑과 희생의 상징이시며, 모든 인간을 지옥 형벌에서 건지신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 용서를 받아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이 첫번째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조금 덜 알려진 버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것도 성경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보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특별하게 지으시고 그 머리에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이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다시 혼돈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손으로 만드신 세상이 공허와 혼돈에 빠지는 모습을 보시고 다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들과 다시 약속을 맺으시고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과 더불어 언약하시며 이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백성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세상은 다시 어두워지고 가시와 엉겅퀴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다시 이 세상을 돌보고 관리할 자기 백성을 부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죄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 뜻을 받든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꿈꾸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들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 예수님의 제자들인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자신들을 부르셨음을 믿고 세상에 선한 일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이 세상은 정말 완벽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몸으로 다시 살아 새로운 세상의 일원으로 살 것을 기대했습니다.
3. 배경에 따라 달리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
저는 방금 두 가지 배경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좀 짧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좀 길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둘을 비교해보겠습니다. 그 두 배경 이야기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큰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도 이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좀 더 살펴보면 이 세상이 아름답게 지어졌지만 인간의 죄로 이 세상은 멸망하게 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있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으신 이 세상을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사랑하시며 그것을 반드시 바로잡아 아름답게 만드실 것을 믿는 관점이 있습니다.
두번째 차이점은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이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고 말하며, 다른 하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의 필요성도 달라집니다. 하나는 지옥의 형벌을 면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면서 그분의 대리인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세번째 차이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우리 죄가 용서되었다는 상징이자 증표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욕하는 사람에게 욕하지 않고 축복하며, 억울하게 누명을 썼어도 그것이 옳은 일을 위한 것이라면 참아야 한다는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방식은 자신이 지금 어떤 배경 이야기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마지막 차이점은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입니다. 하나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고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별합니다. 결국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지옥불에 떨어질 사람으로 구별된다고 사람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다른 배경 이야기로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이며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교회로 먼저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궁극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친구이며 가족입니다.
4. 21세기의 그리스도
저는 본래 오늘 설교 제목을 ‘21세기의 그리스도’라고 정했습니다. 그런데 설교안을 거의 다 정리했을 때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저는 금년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성경의 배경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포용적인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이 넘치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때로는 너무 독선적이고 배타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떤 배경 이야기 가운데 두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무서운 심판주로만 생각하여 결국 지옥과 천국 양단간에 결정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신앙인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종교나 비신자에 대하여 배타적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의 생각이 그에게 그런 결정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그것을 관리하고 돌볼 수 있도록 인간을 지으시고 그 인간을 부르시는 분으로 믿고 따른다면 그는 다른 종교나 비신자에 대하여 좀더 포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결국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맡은 공동관리자요 동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불러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더 다양한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함께 일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때 이 두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하면서 우리가 믿고 따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동구청의 표어는 스마트포용도시입니다. 누구도 소외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도시를 만드려는 목표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물론 사람을 어떤 배경에 놓고 보느냐에 따라 사람에 대한 자세와 태도가 결정됩니다. 우리의 정책이나 태도는 우리가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생각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사람을 어떤 배경 이야기 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성동구청 신우회에서 우리는 성경을 배우면서 사람과 사회, 그리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을 익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배경 이야기가 성경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눈으로, 또는 그리스도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배경 이야기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발견하면서 우리는 21세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그 소임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