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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왕이 될 운명이다>의 줄거리:
관상에서 손금에서 사주에서 풍수에서 사람들은 왕이 될 재목을 찾으며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믿기 힘드시겠지만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모두 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왕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나의 대관식이었습니다.
나는 왕이 될 운명이다
(마태복음 21:1~11)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는 왕이 될 운명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는 왕이 될 운명이다’
“관상”이라는 영화를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왕의 재목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누가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느냐를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운명이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정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왕의 재목을 알기 위해 관상과 손금을 보고 사주와 풍수지리를 살핍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보자면 우리도 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난 사람입니다. 이것이 운명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삶을 마지막까지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복음적 신앙이 일반적인 의미의 운명론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인생의 뜻들은 펼쳐져 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뜻대로 사는 것을 세상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들이 가진 운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뜻 속에는 우리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놀라운 특징을 가진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의 내용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구원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또 다른 별명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윗의 자손으로 만들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단의 교주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추종자들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거나 하나님에 견줄 위치에 있다고 하면서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추종자들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게끔 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가장 높으신 분이셨던 예수님이야말로 당신의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곧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께서 만천하의 왕 되심을 선언하신 대관식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그리스도이시며 왕 되심을 숨겨오셨는데 이때에 왕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십니다. 9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로마 식민지하에서 다윗 왕국의 재현이 이루어지는 것을 구원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구원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나라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구원은 바로 예수님이 왕이셨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한 주를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그 시작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왕 되심을 드러내시며 모든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함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실제로 왕이 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실제 왕이 되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직장에서 직원이지만 왕이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에서 배우자이고 부모이지만 왕이어야 합니다. 그 왕 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세주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구세주가 주시는 구원은 주님의 정체성이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주님이 왕이시기에 우리도 왕이 됩니다. 주님이 제사장이시기에 우리도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또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부활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셨기에 우리도 승천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에 우리도 하나님 우편에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독립된 인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주어진 모든 정체성을 똑같이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윗 왕국을 재현하시기를 기대하면서 백성을 다스리시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일반적인 왕과 백성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왕의 왕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고 만왕의 왕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는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왕이 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오해하였습니다.
한편 5절을 보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특징이 겸손하여 새끼 나귀를 탄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의 행색에는 왕의 면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했던 왕다움은 세상의 왕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어떠한 왕의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을 보면 솔로몬이 약관의 나이에 왕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모습이 나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되고자 했던 왕은 최종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솔로몬은 최종적 판결을 하나님께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가상히 여기셔서 구하지도 않았던 부귀영화까지 주셨습니다.
왕은 이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오직 말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이셨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왕의 말도 듣지 않으셨고 오직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말하는 만큼 듣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내가 말한 만큼 다른 사람을 왕으로 인정해서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예수님을 따라 왕이 될 때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고집스럽고 강퍅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만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 잡혔을 때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협박을 받게 되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 같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밀접한 관계이셨던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도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 되자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마치 헤드폰을 끼고 큰 소리로 음악을 들으면 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크게 듣는 사람은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왕이 말하는 자인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말하는 왕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까지 받아들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살아가게 됩니다. 천국 헤드폰을 끼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장님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표면적으로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말씀에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해서 집안을 다스리는 청지기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요셉이 순종한 대상은 보디발이 아닌 하나님이었습니다. 나중에 요셉이 형제들을 만났을 때에 창세기 45장 8절을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디발의 집으로 인도하셨고 그 집에서 주인 보디발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에 따랐을 뿐입니다. 요셉의 몸은 노예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듣는 노예가 아닌 말하는 왕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왕이 된 사람은 배우자의 말을 절대 듣지 않습니다. 천국 헤드폰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배우자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이기에 그대로 행할 뿐입니다. 왕은 이 세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대한민국 권위에 순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셨고 법을 준수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나는 대통령도 아니고 장관도 국회의원도 아니지만 세상사람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왕입니다.
명령을 받지 않는 왕은 자유롭습니다. 자유는 전문가의 조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풍습으로부터 자유롭고 세상 유행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천국 헤드폰을 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심지어 나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에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지식을 동원할 필요도 없고 전문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음성을 따를 뿐입니다.
몸의 질병 앞에서 왕이 됩니다. 삶에서 벌어진 재정 문제에 대해 왕이 됩니다. 어떤 전문가도 충고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여러분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최선을 알려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이 최선임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이와 동일하게 말씀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세상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최선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최선을 싫어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최선으로 따르고자 합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했던 왕의 모습은 새끼 나귀를 탄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국의 재현을 위해서는 날렵하고 강인한 준마를 탄 위엄이 넘치는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왕에게 스스로 지배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고 정복하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듣고 전하실 뿐 이 세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신다는 의미에서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들은 권력으로 자기의 생각과 뜻을 강압적으로 관철하고 정복합니다.
우리의 왕 됨 또한 예수님과 같은 겸손함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최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압하지 않고 관철시키려 애쓰지 않습니다. 단지 듣고 전할 뿐입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타인에게 어떠한 강요나 억압도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하나 됨 안에서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해관계는 타인에게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채우기 위한 관계입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없기에 하나님의 최선을 알려줄 수는 있어도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우리가 이러한 겸손한 왕이 되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됩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부활한 자가 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어서 승천하며,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가장 가까우셨기에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왕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내용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최선입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습니다. 물론 나 자신도 하나님께 들은 최선을 알려주는 일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말에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뺨을 맞을 수도 미움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최선을 만나는 사람에게 말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겸손한 왕의 모습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 중의 왕 되심을 만천하에 알리시는 사건인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왕이 될 운명임을 선언하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진짜 왕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 위해 천국 헤드폰을 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만을 들으며 세상에 대해서는 말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한 비결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왕이 될 사람임을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제 왕이었던 사람이었을지라도 오늘은 왕 됨을 잊어버릴 수 있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반복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 오늘의 번제 목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실천함으로써 천국 헤드폰을 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말하는 왕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부여받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천국 헤드폰을 끼고 오직 말하는 왕으로써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