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리학자이자 대화론자인 데이비드 봄은 그의 저서에서 ‘자기수용감각’에 대해 한 챕터를 할해하였다. 대화와 의사소통에 대해 그의 말 중에 처음에는 그다지 다가오지 않는 말이었지만, 한 가지 강렬한 인상은 어둠에서 누군가 자기를 때리는 사람에 대해 저항하던 한 여인이 불을 켜고 보니까 자신이 자신을 때리고 있었다는 묘한 이야기가 긴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이 책(창조적 대화론, 지금은 대화란 무엇인가로 재인쇄됨)을 읽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학교폭력과 같이 당사자들간의 갈등 그리고 내면가족체계처럼 내면의 소자아간의 갈등에 대한 여러 훈련과 적용 경험이 쌓이면서 자기·수용·감각의 세 단어가 서로 각기 혹은 통합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눈에 다가오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에고로서 자기와 참자아의 역할과 관계, 저항의 말걸기인 주장, 비난, 방어의 뿌리깊은 무의식적인 메커니즘, 그리고 욕구·동기·의도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쓰인 느낌과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서 몸인식과 느낌·감각의 새로운 중요성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묘하게도 서클에서 ‘경청’의 영역인 존재로 듣기와 중심으로부터 듣기에 관련하여 그동안 놓친 실마리 혹은 열쇠를 제공한다는 영감을 받게 되었다.
사실 경청에 대해 퀘이커 창시자 조지 폭스의 ‘내 안의 신성한 그 무엇’에 대한 자기수용감각에 대한 영감을 나에게 주어 ‘분별’의 차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지는 오래 되었었다. 그는 학위마지막 학기인 펜들힐에서 머물면서 파커 파머의 글을 만나고서부터였고 경청에 대한 첫 자각이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읽었던 유진 젠들린의 몸감각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실천적인 관점에서 경청의 깊이를 열어줄 것이라는 통찰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전자가 영에 대한 경청이라면 후자는 몸인식에 대한 경청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두 시야를 열어줄 것이라는 예감이 최근의 여러 실습 현장에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경청에 대한 문제의식의 축척 기간에서 다시 출현하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좀더 근본적인 실습에로 들어가고자 내면 경청(나나 타자에 있어서)으로서 포커싱이란 이름으로 첫 학습모임을 연다. 대화실천가나 서클진행자들에게, 교육자나 상담자들에게 경청의 깊이와 부드러운 수용감각을 체득하기 위해 이 ‘포커싱’ 이론과 그 훈련이 또 다른 지평을 열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