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울로 향한다
아들들을 볼 겸 석훈이 로스쿨 원서에 필요한 자료를 전달해주기 위해서였다
아들들을 만나 대학가에서 정훈이가 추천한 솥밥으로 식사를 하고 바쁜 석훈이는 보내고 정훈이만 데리고 가까운 창경궁에 들렀다
한동안 조선의 궁궐에 관심을 갖고 자주 찾았었는데 근래엔 거의 오지 못했다 그중 창경궁은 더욱 몇 번 찾지 않은 궁궐이다
조선궁궐 중에서 창덕궁 옆에 꼽싸리 낀 것 같아서 일부러 창경궁을 따로 찾은 적이 거의 없어서이다
국민학교 때 서울 당숙 집에 놀러 와 동물원을 관람하기 위해 창경원을 찾은 것이 그중 첫번째일 것이다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고 차멀미 때문에 다들 즐겁게 먹던 아이스크림 콘 냄새가 역했던 기억만 난다
그러다가 초등학생 현장학습 인솔로 두서너번, 혼자 개인적으로 한번 정도 찾았던 것 같다
대학가에서 서울대 병원 정문 맞은 편으로 걸으면 홍화문이 나타난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천원이었다
홍화문은 보물 제384호로 1484년에 건립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16년에 중건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 건물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비슷한 모습이다.
창경궁은 본래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었다. 그후 1483년 수강궁 자리에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태종의 후궁들은 태종 사후인 세종 대에도 여전히 수강궁에 거처하였으며, 단종 역시 문종이 경복궁에서 죽은 이후 누이인 경혜공주의 집으로 옮기기 이전까지 잠시 수강궁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세조는 죽기 며칠 전 수강궁으로 이동해 며칠 후 사망했고, 예종도 수강궁에서 즉위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 다시 세웠으며,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을 또다시 1633년에 중건하였다.
1909년 일제가 조선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궁궐터를 훼손시켰는데 그중 가장 최악으로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가 철거했던 문정전과 월랑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으로 환원했다.
그러므로 내가 어릴 때 왔던 때가 1981년경이었으니 그 때는 창경원이라 했던 때였다
사적 제123호로 이 궁궐에서 장조·정조·순조·헌종(憲宗) 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하고 있으나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하여 있다.
국보 제266호인 명정전 월대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돌리지 않아 돌난간을 두른 경복궁과 비교할 때 격이 낮아 보이는데, 이것은 창경궁이 정궁이 아니라 이궁(離宮)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여러차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다. 한때 동향으로 세워졌던 명정전을 남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김일손의 상소가 있었으나 도감에서는 만약 남향으로 할 경우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의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맥이 함춘원의 남쪽 지맥을 끊게 된다면서 그대로 둘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이 불 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창경궁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이 완전히 전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난리통에도 명정전, 문정전, 여휘당, 환취정 등 일부 전각이 살아남았기에 인조 11년 인정전 하나만 남아있던 창덕궁보다 먼저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창경궁은 비교적 화재 사고가 잦았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난향각·취요헌·계월각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 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 박물관)를 통하여 1830년대의 창경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등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효성 지극한 궁궐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제19대 숙종 때는 장희빈이 창경궁 통명전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제21대 영조 때는 휘령전(문정전) 앞마당에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쌀담는 뒤주 속에 갇혀서 8일 만에 요절한 비극의 장소이 기도 하였다.
또 제22대 정조가 1800년 6월 이곳 영춘헌에서 승하하기도 한 어쩌면 조선 왕실의 몰락을 가져온 장소이기도 하다.
본궁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경궁은 엄연한 궁궐이고, 또한 단순한 지방의 행궁이 아닌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서 중요한 행정적 역할을 하던 곳이다. 왕조와 왕가에 있어서 궁궐이라는 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경성도시계획 공원표'를 보면, 일제는 창경궁 외에도 대한제국의 궁궐들을 각각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으로 변경하여 대중에게 공개할 의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심지에서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편이 즉각적으로 공원을 조성시킬 수 있고, 또 상징적 의미가 있는 궁궐을 유원지화시키고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기존 질서를 부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해외에 일본이 대한제국 왕가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근대건축도면집에 실린 1907년 창경궁 도면을 보면, 일본은 건물 몇 개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창경궁 전부를 공원으로 개조할 생각이었고, 왕실의 개인 정원으로 둘 생각도 없었다.
1909년 11월 창경궁에 박물관까지 완공을 하자마자 창경궁을 일반 대중에 공개해버렸고, 조선총독부는 거듭할수록 기존의 전각들을 허물고 일본식으로 개조하며 '궁궐의 유원지화'를 심화시켰으며 더욱이 순종이 명시적으로 반대한 부분들(창경궁과 종묘의 연결로 파괴 등)에 대해서도 개조를 강행하는 등 애초부터 창경궁의 개조는 순종의 의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순종은 어느 정도 창경궁에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꼭두각시 황제인 순종 입장에서는 반대를 하기도 어렵거니와 궁궐에 무료로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을 지어주겠다는데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창경원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계속 남게 되었고, 주말이나 공휴일에 가족 단위 나들이 장소로 시민들에게 가장 각광받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잔재이므로 궁궐로 복원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에 창경궁 복원 계획 및 서울대공원 이전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제가 뿌려놓은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없애고 역사 사료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아쉽게도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2019년까지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지상 보행길 복원에 들어가 율곡로(왜 율곡로인지 모르겠다)는 지하 터널로 이어지고 지상에는 담장과 보행길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창경궁에서 아들과 헤어지고 종로3가로 내려와 종묘 앞을 걸어 산책했다
그리고 다시 천안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