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분열의 상처 가운데 또 하나는 성애원의 폐쇄 사건으로 불거져 나왔다. 성애원은 김은섭(金恩燮) 원장이 혼신을 다해 운영하던 고아원이었다. 원아는 70여 명. 경기도 내에서 모범고아원이라는 칭찬을 받아오던 성애원이었다. 그런데 대전총회(총회장 강성주 목사) 측 간부들은 선교사들과 합세하여 포항총회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성애원 원장인 김은섭 씨와 가족들을 그곳에서 추방하기 위해 김동창 씨를 새 원장으로 임명하여 파송했다. 그러자 싸움이 붙었고, 이 일로 사직당국에 고소장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고아들을 충동하여 데모를 사주하고 온갖 난동을 일으키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 바람에 당국은 성애원의 폐쇄령을 내렸다. 그곳에 있던 70여 명의 아이들은 다른 고아원으로 인계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곳에서도 불량아동 취급을 받아 적응하지 못해 거리를 떠도는 부랑아로 전락해 버린 예가 적지 않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일은 대전파와 포항파가 얼마나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 갈등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교단 분열이 우리에게 안겨준 하나의 쓴 잔이었다. 이 사건은 1966년 5월 20일 총회에서 낱낱이 보고되었고, 지각있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분열된 교단을 꼭 합쳐야 한다는 마음을 굳게 다짐하게 했다.
또한 인천의 시온중학교에서도 이곳을 강제로 점령하려고 일부 직원들을 사주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쟁탈전을 벌여 많은 물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총회기관지인 「침례회보」는 대전파에 가담하여 악용되는 불의의 도구가 되었다. “매돌”란에서 허위, 날조, 인신공격 등을 일삼고 심지어 명예훼손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싸움은 교단 발전에 백해무익했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 막았다. 그런 일을 감행한 자들은 그야말로 이성을 잃은 자들이었으며, 악한 자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싸움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은 상처를 입었고, 상호간에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고사하고 주님이 계시지 않은 사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인데, 그와는 정반대되는 불만과 불평과 모략과 중상이 있을 뿐이었다.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분열은 그야말로 철학도 신학도 없는 것이며, 주의 뜻이 아닌 것이 너무 명백했다. 인간의 이해관계나 교권 등으로 주의 몸된 교회에 상처를 입히고 교단발전을 저해하는 행위였다.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일은 심히 두려운 일이었으며,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시 한국 교계를 회고하면 1954년 감리교는 호헌파와 총리원파로 분열했고, 1958년 장로교는 통합파와 합동파로 갈라졌다. 성결교는 기독교성결파와 예수교성결파로 나뉘었다. 유행병처럼 번지는 이런 분열시대에 우리 교단도 대한기독교파와 기독교대한파로 분열된 것이다. 이 분열들은 대부분 정당한 명분도 없이 단지 인간들의 사리사욕과 야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신성한 교회들이 여지없이 찢어지고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웃지 못 할 사실은 이것이 예수와 그리스도의 싸움이었다는 데 있었고, 성도들 간의 분쟁이었다는 데 큰 아픔이 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크신 일부터 가장 낮고 천한 일까지 공변하신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존엄한 교회 일엔 기도없이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임의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탄의 시험에 빠진 자들이다. 자고로 기독교 역사상 교회에 이롭게 했거나 해롭게 한 일들에 대해서는 그 행위의 경중에 따라 거기에 해당한 보응이 반드시 내려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