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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말씀에 붙잡혀 영적 슬럼프 탈출하기>의 줄거리:
운동선수처럼 성도 각 사람에게도 슬럼프가 있습니다. 슬럼프의 증상은 약함과 두려워함과 심히 떨림으로 나타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상 현상이 그렇게 느낌으로 증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말씀에 붙잡히면 됩니다. 방법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일어나는 움직임을 자꾸 들으면 됩니다.
말씀에 붙잡혀 영적 슬럼프 탈출하기
(사도행전 18:1~17)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말씀에 붙잡혀 영적 슬럼프 탈출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말씀에 붙잡혀 영적 슬럼프 탈출하기’
운동선수처럼 성도에게도 슬럼프가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평생을 영적인 슬럼프에 빠져서 헐떡거리며 살다가 생을 마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도 영적인 슬럼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영적인 슬럼프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면 바울은 아덴에서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고린도에 와있던 바울은 아덴에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영적인 슬럼프에 빠져있었습니다. 바울이 겪은 영적 슬럼프의 증상은 약함과 두려움과 심히 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발생한 현상이 삶의 현장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약하기에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워하기에 심히 떨게 됩니다. 그렇기에 영적 슬럼프의 핵심에는 약함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약함이 무엇이고, 약함으로 대표되는 영적 슬럼프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덴이 철학과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면 고린도는 항구도시로 상업과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발칸반도 남쪽에 위치하여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던 번영과 풍요의 도시였습니다. 한편 고린도는 이러한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윤리적 도덕적으로는 극심한 타락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방탕함과 음란함이 온 도시를 지배하였습니다. 실제로 이곳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는 천여 명의 여사제들이 종교적으로 매음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늘 기운이 정말로 강력하지 못하다면 도시의 번영과 풍요와 타락의 기운을 뚫고 복음이 전달되기는 쉽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이나 머물면서 전도활동을 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의 고린도에서의 활동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집니다. 전반기는 아덴 선교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면서 안식일에만 말씀을 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천막 깁는 일을 하며 생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였습니다. 후반기에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와서 합류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영성을 회복한 바울은 말씀에 사로잡혀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고 이로부터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의 전반기에는 아덴 전도의 후유증으로 영적 슬럼프에 빠져서 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약함이란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출입을 허락받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일은 잘되든 못되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약해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님은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몸이 죽는 것조차도 대단한 일이나 큰 피해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돌로 침으로써 스스로의 죄악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용서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이게 강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던져져서 그 발이 차꼬에 채워졌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이들은 감옥에서 절망하기는커녕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어려움과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까지 끌어올립니다. 이것이 바로 강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와있던 사도 바울에게서는 이러한 강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꽃가루나 환절기의 차가운 기운에 목의 기도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기침이 나고 숨이 막힙니다. 다른 사람보다 호흡기가 약합니다. 호흡기가 강한 사람들은 꽃가루나 차가운 기운을 얼마든지 이겨내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처한 약함은 바로 마음의 알레르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주 조그마한 일만 생겨도 강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조차도 별것이 아닌 것처럼 여겼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마음에 이러한 약함이 있을 때는 끝없이 두려워하며 걱정하게 되고 그 증거로 심히 떨게 됩니다.
이러한 약함이 생겨나는 이유는 마음이 진정한 좋음으로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은 곧 마음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영이신 하나님과 마주하게 해줍니다. 이 자리를 벗어나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약해집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간 상태에서는 설령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조차도 개의치 않게 강해질 수 있는가 하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조차 끊임없이 화를 내고 분을 내면서 반응하게 됩니다. 이 화와 분노 속에 약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약함으로 인해 근본적인 마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떨면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정의하자면 약함은 영인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영이신 하나님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벗어날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러한 약함의 상태에 처해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아덴에서의 전도 실패 때문입니다. 아덴은 행복추구에 있어서 세상에서 일등인 도시였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지혜를 동원하였고 바울은 이러한 아덴의 특징을 강하게 의식한 나머지 복음을 사람의 지혜에 호소하게 됩니다. 복음을 사람의 지혜 위에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사도 바울의 마음이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자리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그 결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떠는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약한 상태에서 주중에는 생업을 위해 천막 깁는 일을 하다가 안식일이 되어서야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과 합류하게 됩니다. 아덴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때에 바울은 실라를 빌립보로 보냈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은 고린도로 오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각각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로 갔었던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세 사람이 만나자 바울은 비로소 영성을 회복하고 말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로부터 시작되는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이전과 같은 약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약함이 사라지니 두려움과 심히 떠는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영적인 슬럼프를 완전히 벗어나 강력하게 말씀을 전하던 이전의 모습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5절을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과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을 때 곧이어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셨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내용이 말씀이고, 이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씀에 사로잡혀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교리나 사상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건에 바울의 마음이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사건에 붙잡혔다는 것은 표현대로 이 사건과 사도 바울의 인격 사이에 틈새가 없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으려면 내 손과 그 사람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면 손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붙잡아서 다른 것이 들어올 틈새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장님께 불려가 사장님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 생활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평소에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있다가도 사장님과 마주하는 순간에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떨어져 사장님과 접촉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상태는 말씀에 붙잡힌 상태가 아닙니다. 말씀에 붙잡혔다면 몸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마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육체의 오감에 포착되는 대상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바울의 의식과 십자가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의식은 언제나 십자가와 밀착되어 있었고 그러한 상태에서 오감을 통해 세상을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마주하고는 있으나 세상이 마음까지 전달되어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가 돼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히게 될 때 오감으로 마주하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이 마음까지는 전달되지 못하기에 마음은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로워진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영이신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을 마주하는 자리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약함이 사라지자 두려움과 떨림도 사라지게 되었고 복음을 강력하게 전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돈 문제가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 문제로 인해 두려워하고 떱니다. 약해짐을 경험하는 직접적 원인이 건강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구조를 염두에 두자면 원인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든 그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서 약함이 생겨나고 두려워하고 떨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영적인 슬럼프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영입니다. 이 마음으로부터 좋음과 싫음의 판단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은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찾아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있기에 약함이 생겨나고 두려움과 떨림도 나타나게 됩니다. 본래 세상은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건강이 좋든 나쁘든,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든, 직장의 일이 어떻든지 간에 본래 마음의 채움과는 무관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유일한 하나님이시기에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마주하는 자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마주 대하는 자리야말로 사람의 마음에 주어진 유일한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을 때 마음은 온전한 채워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음이 틈새 없이 채워지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라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기에 약해지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조차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떨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와의 재회를 계기로 말씀에 붙잡히게 됩니다. 고린도에 온 실라와 디모데가 사도 바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말씀에 붙잡힐 수 있었던 것일까요? 빌립보에서 돌아온 실라와 데살로니가에서 돌라온 디모데가 사도 바울에게 전한 소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구절들이 존재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1~4절을 보면 마케도니아 지방에 속한 빌립보 교회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우리말 성경을 참조해보자면 “형제들이여, 우리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 그들은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헌금을 했습니다. / 내가 증언하는데 그들은 힘닿는 대로 했을 뿐 아니라 힘에 부치도록 자진해서 했습니다. / 그들은 이 은혜와 성도 섬김의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실라에게 들은 빌립보 교회의 보고를 기록한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지방에 속한 빌립보 교회는 끊임없이 박해가 주어지는 중에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와 시련과 궁핍함이 교인들을 주눅 들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이들이 박해를 두려워했다면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돈을 걱정했다면 궁핍한 가운데 헌금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라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상태를 바울에게 전달해주는데 끊임없는 박해와 시련과 궁핍에 반응하지 않았고 마음도 약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해 준 그리스도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 사건과 밀착해 있었기에 약해지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고 떨지 않았다는 영적인 상태를 바울이 듣고 힘을 받았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가져온 소식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데살로니가전서 3장 7절을 보면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서 도망갔던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붙잡지 못하자 야손이라는 사람의 가족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려고 했다가 보증금을 받고서야 풀어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박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던 곳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어야 했던 사도 바울의 심정은 심히 괴롭고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가져온 소식은 바울의 염려를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작당과 탄압과 박해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영성이 강하여 탄압과 박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기쁨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가져온 이러한 소식을 듣고 아덴의 전도 실패에서 비롯된 후유증을 이겨냅니다. 약함과 두려움과 심히 떨림 가운데 있던 사도 바울은 슬럼프를 박차고 일어섭니다. 자신이 전했던 말씀 즉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건에 붙잡히고 밀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인 슬럼프를 벗어난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더 이상 육체의 오감으로 마주하는 일들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 영이신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되자 더는 삶의 현장에서 약하고 두려워하며 떨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영적 슬럼프의 탈출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걱정은 약함의 증거입니다. 돈이 없어서 걱정이 생겼다면 마음의 약함이 돈을 계기로 삼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호흡기가 약해서 꽃가루나 차가운 기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건강이 안 좋다는 상황에 대해서 두려움이 생긴다면 약함의 증거입니다. 약해진 이유는 마음이 본래의 자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끝없이 약하고 두려워하며 떨리는 영적인 슬럼프의 원인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들이 계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실질적 원인은 마음의 자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마주하는 자리를 잃었기에 마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마음의 약함으로부터 회복은 말씀에 붙잡힘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에 붙잡힌 상황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 시련과 박해와 궁핍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상황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마음이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는 운동성과 방향성을 사도 바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사로잡히고 의식이 밀착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마음이 오감을 통해 접하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강력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서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마음이 땅에서 하늘로 가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움직이는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세상을 탈출해서 하늘로 가는 움직임에 대해 자꾸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따른 세상 탈출기를 들음으로써 마음은 말씀에 붙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동안 간증이라고 들어온 이야기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듣는 동안 우리 마음의 체질은 강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오히려 영성은 슬럼프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 성공담이 아니라 세상 탈출기입니다. 세상에서 몸이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고, 자녀가 형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도, 자녀가 형통치 못할지라도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향하는 방향성과 움직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사건에 붙잡히고 틈새 없이 밀착하게 됩니다.
성숙한 교인이라면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 이제는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설교 속에서 세상 탈출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탈출의 움직임 없이 세상에서의 성공담이나 단순히 듣는 이들의 감동을 지향한다면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그것은 설교가 아니며 복음의 말씀이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감동이 있느냐 없느냐는 설교 청취의 포인트가 아닙니다. 설교 청취의 포인트는 그 설교 속에 세상 탈출의 방향성과 움직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감동을 주는 설교일지라도 세상 탈출의 움직임이 없다면 일반적인 문학작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성을 강화시켜주지 못하고 영적인 슬럼프를 빠져나오게 도와주지도 못합니다.
삶에서 생기는 모든 걱정과 불안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영인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자리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슬럼프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 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 성공담이 아니라 세상 탈출기입니다. 세상 성공담은 마음을 세상에 묶이게 하는 사탄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세상을 탈출해야만 합니다. 성공했다면 성공했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탈출해야 되고 실패했을 때에도 실패했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탈출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 탈출기의 말씀을 듣고 간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말씀의 내용인 그리스도 사건에 붙잡히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과 나의 의식이 틈새 없이 밀착하여 말씀에 붙잡힌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약함과 두려워함과 심히 떠는 영적 슬럼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어떻게 하든지 세상 탈출기를 담고 있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 틈새 없이 붙잡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자리를 유지하게 하시고 영적 슬럼프가 없는 강력한 하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