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한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DMZ라는 글자만 보이면 눈이 번쩍 뜨인다. 세계에서 마지막 남아 있는 비무장지대이기도 하지만 1970년대 초반에 내가 근무한 DMZ 철책선의 전경이 생생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제 1사단에 도착했다. 이틀째 되던 날, 30여명의 신병들이 도열했다. 건장한 상사 한 명이 나타나, 왔다 갔다 하면서 쭉 둘러보고는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예, 이병 장석재!”
“너, 인사 기록부에 기계전공이라고 적혀있던데 맞지?”
“예!”
생전 처음, 야전 지프차에 탔다. 운전병 옆엔 상사가 자리 잡고 나는 운전병 뒷좌석에 앉았다. 1사단 정문을 통과하여 30여분 달리니 육중한 철제 게이트가 나타났다. 헌병이 차량을 세우고 상사에게 경례한 후, 탑승자인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는 곧바로 통과시켰다. 거대한 철교 다리가 보였다. 바로 임진강이었다. 임진강을 내려다보며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 어려웠다.
“너는 제1사단 00연대 0중대 발전 병이다. 알겠지?”
“예? 발전 병이요? 저는 육군 보병입니다.”
“알아, 그렇지만 이곳 전방 방책선 중대에는 발전기를 돌리는 발전 병이 꼭 있어야 하는 데, 마침 잘되었다. 지금의 우리 발전 병이 제대특명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발전 병이 필요하다.”
내가 발전 병의 후임이 된 것은 기계공학도라는 내 기록 때문인 듯 했다. 중대본부 소속의 발전 병 조수가 된 나는 다음날부터 사수인 박 병장을 따라 다니며 인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철책 선에서 뒤로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발전기 2대가 나란히 설치되어있는 간이 발전소가 있었다. 매일 발전기 점등시간과 소등시간을 확인하여 정확한 시각에 발전기를 가동시켜 등을 밝히는 일이 발전 병의 주 임무이었다. 발전기는 두 대가 있으니 혹이나 한 대가 고장 나면 다른 한 대를 가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매주 2회의 점검 가동을 해야만 했다. 한 달은 금방 지나가고 박 병장은 제대하였다.
혼자, 발전기 앞에 섰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잠재우고 드디어 발전기 1호기의 시동 벨트를 힘차게 잡아 당겼다. 한 번에 안 되어 두 번째 더 힘껏 당겼다. 부릉, 부릉 큰 소리와 함께 발전기 엔진이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점등 스위치를 올렸다. 방책선의 첫 번째 등이 희미하게 밝아지기 시작한다. 이어 두 번째 등이, 그리고 세 번째 등이 켜지기 시작한다. 세 번째 등이 켜지기 시작하면 첫 번째 등은 완전히 밝아진다.
내 앞에서 오르막 내리막하는 철책 선에 걸려있는 전등에 불이 밝아지는 것은 내가 미쳐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어둠을 밝히는 신비한 광경이었다.
가보지 못한 독일 어디선가 에서는 늙은이가 장대로 가로등에 걸려있는 가스등에 하나하나 불을 붙여가며 골목길을 비춘다고 하던데, 그런 낭만보다 더 짜릿한 감동이 솟아올랐다.
내 구역 모든 전등의 불이 밝혀지면 나는 손전등을 들고 초소 초소를 걸어가며 방책 선에 걸려 북쪽을 향해 비추고 있는 등을 살펴본다. 비바람으로 등의 방향이 틀어진 곳이 있으면 기록하고 다음 날 낮에 제대로 고쳐 놓아야만 한다. 또한 등이 깨져 있으면 신속히 발전소로 돌아가 새 등으로 교체해야 한다. 초소에 갈 때 마다 고참 들은 나를 반갑게 대해주곤 했다. 나와 군번이 비슷한 졸병들은 슬그머니 내손을 잡고 웃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남방송도 어김없이 들려왔다. 이렇게 우리 중대 구간을 모두 돌고 발전소에 도착하면 어느덧 자정이다. 중대 본부로 돌아와 입은 복장 그대로 개구리잠을 취한 후, 방책선 소등시간에 맞추어 다시 일어나 발전소로 향한다. 한여름도 으스스 했다. 눈 내리는 겨울철은 온몸이 얼어 걷기도 어렵다.
하루의 시간 중, 가장 깜깜한 시각은 바로 동트기 직전이다. 조금 기다려 동이 트기 시작하면 발전기 가동을 멈춘다. 고요함과 함께 발전 병의 하루 임무는 완성된다.
시드니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7시간 달려 자카란다 축제가 열린다는 그라프톤 Grafton에 왔다. 그라프톤이 자랑하는 자카란다 거리를 걸었다. 거대한 자카란다 2000여 그루가 활짝 펴, 땅도 하늘도 온통 보라 세상이다.
자카란다 축제는 이만 삼천의 인구가 살고 있는 이 조그마한 도시의 최대 행사이다. 이 도시엔 신호등도 없고 경찰차도 안 보인다. 말을 타고 천천히 지나가는 남녀 경찰이 보인다. 거리를 오가는 여자들은 대부분 보라색 모자를 쓰고 다닌다. 오후엔 각종 행사가 시계탑을 중심으로 이곳, 저곳에서 벌어진다. 그 옛날 우리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는 듯 했다.
구경 인파를 벗어나 조용한 강가로 발길을 옮겨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공원에 왔다. 아름답고 조그마한 공원에 바람이 솔솔 불어 자카란다 보라 꽃잎이 내 머리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공원 중앙에서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탑을 만났다. 아니, 우리나라 전쟁에서……. 한국전 참전 용사 추모탑이다.
탑에 각인된 이름을 하나, 하나 읽었다. 17명이었다. 이 아름다운 그라프톤에서 살았던 20살 안팎의 젊은이들이 멀고먼 이국땅 코리아에서 전사했다니……. 이들이 전사하지 않고 돌아왔다면 지금쯤 90세 초반의 할아버지들이 되셨을 것이다. 6.25 한국 전쟁에 호주는 8,407명의 군인들이 참전하여 339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 중 이곳 그라프톤에서 살았던 17명의 청년들이 코리아의 어느 전선에서 눈을 감았다. 그들은 입대 전까지 살았던 천국 같은 그라프톤의 퍼플 세상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자카란다의 꽃말은 ‘화사한 행복’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화사한 보라색 꽃잎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우리 고국이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도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들이 전사하던 때에 태어난 나는, 여기에서 다시금 그들의 이름을 가슴으로 읽었다.
고국의 DMZ 철책선 등이 하나, 하나 밝아 온다.
* 위 작품은 2022년 강원일보 주최 ‘DMZ 문학상’ 산문부문 장려상 수상작임
장석재 (문학동인 캥거루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