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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하나님의 관계를 이식받자>의 줄거리:
심장 이식, 간 이식 등과 같이 관계도 이식이 가능합니다. 진정한 십자가 생활화의 결과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나와 하나님의 관계로 이식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부부관계처럼 나와 하나님 관계는 새롭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관계가 이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관계를 이식받자
(요한복음 14:6~15)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하나님의 관계를 이식받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관계를 이식받자”
본문에 이어서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을 보면 참 굉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다니 엄청난 말씀입니다. 다만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관계가 그대로 나에게 이식되어진 상태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식(移植)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장기이식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심장, 간, 신장을 이식할 수 있고 심지어 눈도 이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진정한 십자가 생활화의 결과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나와 하나님의 관계로 이식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이식의 성공여부는 내 몸에서 다른 사람의 장기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어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내게 이식될 때에도 거부반응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식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면 친구관계가 형성되고 결혼을 하면 부부관계가 형성됩니다. 부부가 되어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로부터 부모자식 관계가 새롭게 형성됩니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는 심장, 신장, 간, 폐, 눈과 같이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오리지널한 장기와 같습니다. 한편 이식되는 장기는 다른 사람의 장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한편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오리지널하듯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또한 오리지널합니다. 그러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리지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났는데 신장이 없이 태어났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의 신장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오리지널한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오리지널한 관계를 이식받지 않고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1절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3년간 좇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가룟 유다가 제외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1명의 제자들에게 새삼스레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고,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고동락과 믿음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식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가지시는 관계가 나에게로 이식됩니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좇았고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가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식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삼스레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너희에게도 이식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한편 앞서 장기이식과 관련하여 거부반응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서도 거부반응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식될 수 없도록 예수님에 대해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주제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온다는 것은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식받자”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리자면 “아버지와 진정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버지께 오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길과 진리와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더해 7절에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께로 오기 위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알았다면 당연히 아버지에 대해서도 알았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7절의 하반부에서는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알았다는 표현은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서로에 대해 알게 됨을 뜻하는 히브리어 야다(ידע)에 준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연합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면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를 모른다면 예수님과 연합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녔어도 예수님과 연합하지 못했습니다.
7절에서는 봄과 앎이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면 아버지를 아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께로 온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아버지를 보았다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께로 온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소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제자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도 알고 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알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보고 아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8~9절을 보면 빌립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빌립과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을 보았고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보는 상태는 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본 적도 없고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요?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나를 믿고 나를 알았으면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안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여러분께서는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정확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대표로 말하고 있는 빌립은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세 개의 눈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의 눈, 의식의 눈,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가지의 눈을 염두에 두시고 본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의식은 존재감을 느낍니다. 어떤 대상을 의식한다면 그 대상에게 의식의 눈을 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좋음을 느낍니다. 어떤 대상이 좋게 느껴진다면 그 대상에게 마음의 눈을 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총각인 최 과장이 있습니다. 최 과장은 언제부터인가 김 대리가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김 대리라는 여성의 존재감을 의식함으로 의식의 눈을 뜬 것입니다. 또한 김 대리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김 대리에게 좋음을 느껴서 마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본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보는 과정을 염두에 두자면 먼저 육체의 눈이 봅니다. 이때에 육체의 눈으로 본 대상의 존재감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의식의 눈으로도 보게 된 것입니다. 육체의 눈에 비쳐도 의식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의식의 눈에 보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에서는 의식한 대상에 대해 좋음과 나쁨을 분별합니다. 좋게 여기든 나쁘게 여기든 마음의 눈이 뜬 것입니다. 그래서 나쁘면 거부하고 좋으면 끌어당깁니다.
이러한 봄을 하나님께도 적용해봅니다. 만약에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육체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때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변화산의 제자들을 통해 예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투과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빛을 보게 되었고 세상일을 다 망각할 정도의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실제로 본다면 의식은 100%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의식의 눈이 아버지에 대하여 뜬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좋음을 망각하고 아버지만의 좋음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해 마음의 눈이 뜬 것입니다.
이로부터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의미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육체의 눈으로 아버지를 보는 대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는 동안 의식으로는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아버지의 좋음을 느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육체의 눈, 의식의 눈, 마음의 눈이 하나의 대상에게 통일될 때 진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을 육체의 눈으로는 보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존재감과 좋음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한 앎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올바르게 연합하게 되면 의식은 하나님만의 존재감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을 하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하나님의 좋음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했고 믿는다고 좇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서도 이들의 의식 속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은 없었습니다. 의식의 눈으로는 자신들의 번영하는 미래를 보았고, 마음의 눈으로는 장관 자리를 얻고 살아가는 모습을 좋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보았으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봄은 예수님과의 연합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들의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이 되고,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좋음이 1등이 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연합할 수 없었기에 육체의 눈으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다”라고 할 때 “우두커니 보다” 혹은 “멍하니 보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면서 의식과 마음에는 전달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면 그 대상은 육체의 눈에 비치고 있을 뿐입니다. 호수의 표면에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비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수가 나무를 보고 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비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눈이 호수의 수면과도 같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면 육체의 눈에 비치고 있을 뿐입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 따라가야만 비로소 봄은 완성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기입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 맺기가 불가능한 거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거리를 극복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처럼 예수님과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식의 눈으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보지도 못하고,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1등을 보며 열망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었다면 당연히 의식의 눈은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감에 눈뜨게 됩니다. 또한 마음의 눈은 하나님의 좋음에 눈뜨게 됩니다.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내게 이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을 자신들이 꿈꾸는 미래에 적용하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어떤 분인지를 알아보고자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생, 자기 자신의 문제, 자기 자신의 소원, 자기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열망에 빠져있었지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차원 하늘에 계실 때에 하나님과 하나이셨습니다. 그 틈새 없는 관계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하늘에서의 관계가 마치 고무줄처럼 늘어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상태에까지 적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해서 하늘에서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기 때문에 육체의 눈이 있으셨고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것들과는 상관없이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은 언제나 하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의식의 눈으로 아버지의 존재감을 100% 보고 계셨고, 마음의 눈으로 아버지의 좋음을 100%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아버지 외에 다른 관심거리가 없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조금만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3년간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이러한 객관적 관찰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들의 의식과 마음이 전부 인생의 관심사와 문제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된 분으로 의식과 마음이 언제나 아버지를 담고 계셨고 아버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끌어당겨서 핑크빛 미래를 의식하고 마음에서 열망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제자들과 예수님의 거리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식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밀착되어 하나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거리가 멀었기에 이식되어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돈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식이 돈 문제에 사로잡혀서 마음에서는 돈 문제의 해결을 좋음으로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연합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상태이기에 강한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만 성립되고 이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식에는 아버지의 존재감만이 100% 담겨져 있고, 예수님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좋음만이 100% 열망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의식과 마음에는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대상의 존재감이 있고 다른 좋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이 될 수도 있고 돈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건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에 담겨있는 하나님과 나의 의식과 마음에 담겨있는 세상 것들이 다르니 거부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뿐인데 나는 이 세상에서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이 많으니 하나가 될 수 없기에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평생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 이식되지를 못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상태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일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의식의 눈으로 이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보고 있고, 마음의 눈으로 이 세상 것들의 좋음을 보고 있는 상태로는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아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의식의 눈으로 아버지의 존재감만을 보고 계시고, 마음의 눈으로는 아버지의 좋음만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과 이 세상의 좋음을 담게 된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계신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은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향해있던 제자들의 의식과 마음도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세상에 대한 죽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저주에 내려오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좋아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세상을 의식하고 좋아하는 인간이 죽어야 할 자리입니다. 죽으면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저주의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저주입니다. 아버지의 좋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저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저주의 자리로 던져지셨습니다. 아버지의 존재감과 좋음만을 느끼시던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이 죽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 자리였습니다. 그 십자가는 세상의 존재감과 좋음을 느끼던 내가 함께 죽어야 할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사람과 함께 죽으시고자 저주의 자리인 십자가까지 내려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연합한 나도 같이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나와 아버지의 관계로 이식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상태로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만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거부반응 없이 정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나의 의식에서도 아버지의 존재감은 1등이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처럼 나의 마음에서도 아버지의 좋음이 1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로 옮겨갈 수 없다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나와 아버지의 관계에 이식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시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아는 것은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연합하지 않고 예수님과 한 그룹이 되면 제자들처럼 백날 천날 예수님을 좇아도 의식의 눈이 아버지의 존재감에 눈뜰 수 없고, 마음의 눈이 아버지의 좋음에 눈뜰 수 없습니다. 제자들 또한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에야 성령을 통하여 십자가 사건을 자기 죽음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비로소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식받게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상태가 되어서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야말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조차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했으니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였던 셈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베드로에게로 이식되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면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의 눈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의 눈이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분명하게 의식으로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끼고 마음으로 아버지의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정확하게 연합하는 것입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인생의 문제나 우리 관심의 문제에만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미래에 있을 돈 문제에 의식과 마음이 빠져있다면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관찰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존재감과 좋음으로 가득하셨다. 그런데 지금 나의 의식과 마음은 돈의 존재감과 좋음으로 가득하다. 이 예수님과의 간격은 없어져야만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존재감과 좋음만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나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대해 더는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관심하시는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아버지만 관심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 문제는 아버지께서 관심하십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습니다.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경제는 도탄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독점하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부패하고 더럽기가 그지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태들을 놔두고 의식에는 아버지의 존재감만을 채우셨고 마음에는 아버지의 좋음만을 채우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예수님과 하나 되는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문제에 빠진 상태에서 예수님과 아버지의 이름을 백날, 천날 불러봐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이식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아버지의 존재감으로 가득 찬 의식과 세상으로 가득 찬 의식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좋음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마음과 세상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은 연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만 예수님과 나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셨고 나도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가 될 때 여러분께서는 “나의 의식의 눈에 아버지의 존재감이 100% 보인다! 나의 마음의 눈에도 아버지의 좋음만이 보인다!”라고 아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거부반응 하나 없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나와 아버지의 관계에 이식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같은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복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