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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예배
창35:12-36:19(신)
바이슐라흐 샤밭에 오신 여러분을 축복한다.
우리가 도 사모님을 모시고 문제풀이학교를 했었는데, 문제풀이 학교 하면서 어렵지 않았나? 도 사모님은 문제를 잘 푸시는 것 같은데 우리는 잘 못 푸는, 마치 고등학교 때 수학 공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수학 선생님은 공식 써서 착착 푸시는데, 우리한테 풀어보라 하면 이상하게 나는 풀 수가 없다.
사모님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문제를 풀까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원리는 문제가 저절로 풀리게 하는 것이다. 내가 문제를 풀면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생명이 자라면서 생명에 따라서 문제가 풀린다.
어렸을 때 기차 짐칸위에 올려져 있는 무거운 가방은 어린아이가 내릴 수 없는 무거운 무게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턱 내린다. 아버지는 그 엄청난 무게의 가방을 내리는 문제를 어떻게 풀었던 것일까? 그 아이가 그 문제를 풀려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이다. 아빠가 성장을 하면, 몸이 성장하고 생명이 커지면 문제는 저절로 풀리게 되어있다.
그래서 생명이 성장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핵심 이슈이다. 이것을 양식이라고 한다. 문제는 물론 생명이 있어야 하는데 생명이 있을 경우에는 양식을 먹으면 생명이 자란다. 그래서 양식을 말씀, 토라라고 한다. 토라의 말씀이 있으면 생명이 자라고, 나도 모르게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 여러분들이 토라공부 하면서 할 수 있는 간증이 이것이다. 예전에 문제였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문제는 이전에 문제가 됬던 것이 이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경지이다.
지금 저와 제 아내 사이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이것은 이전의 문제들이 아니다. 예전에 우리가 씨름했던 문제는, 2x3은 무엇일까? 1+1=2 인데 어떻게 해서 1+1=1 이라고 하느냐였다. 그런데 어느새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새 그 문제 속에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פְּנוּאֵל 프니엘
- 엘로힘, Mighty One,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엘로힘을 보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야곱이 본 엘로힘은 누구인 것일까? 왜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하는 것일까? 이번 주 토라포션의 가장 Exciting 한 구절이다.
창32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야곱이 다 건너가게 하고, 하마콤에 홀로 남았더니 누구와 씨름을 한다. 굉장히 미스테리한 사건이다.
וַיִּוָּתֵר יַעֲקֹב לְבַדּוֹ 바이바테르 야아코브 레바도 : 야곱이 혼자 남았는데
וַיֵּאָבֵק אִישׁ עִמּוֹ 바예아베크 이쉬 이모 : 한 남자가 그와 씨름했다 -> אָבַק 아바크 : 씨름하다, 레슬링하다, 싸우다, struggle하다
- 야곱은 이쉬, 한 불특정한 사람이랑 싸웠는데, 왜 나중에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일까? 야곱은 사람과 싸운 것일까, 하나님과 싸운 것일까?
창32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이 엘로힘과 파님 엘 파님, 얼굴과 얼굴을 맞댄 것, face to face, 브니엘 한 것이면 하나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처음 같이 싸운 것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 존재가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하나님이 된 것을 알려준다. 이 얘기는 곧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encounter 하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인카운터 하는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의 정체는 에서의 천사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바예쩨와 같은 맥락이다. 야곱은 하마콤에서 돌배게를 베고 잤는데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였다. 야곱은 분명히 홀로 남았다고 하는데 이 남자는 누구인가? 또 왜 날이 새면 가야하는 것인가? 날이 새면 가야하는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아니면 속옷 입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다가 도련님 가야돼요, 그것이 토라에 나오는 이야기일줄 몰랐을 것이다...
에서의 천사는 어둠을 주관한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이다. 우리 속에는 악한 경향성과 선한 경향성이 공존한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이다. 우주는 twin, 악한 경향성과 선한 경향성이라는 쌍둥이로 이뤄져있다.
우리는 천사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없다고들 한다. 홀로 남았는데 남자가 있다는 표현도 같은 것이다. 우리 안에 한 남자가 있는데, 이 남자는 에서의 천사, 우리의 어둠, 악한 경향성이다. 야곱은 여기서 아바크, 씨름 했다고 한다. 너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고 에베소서에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혈과 육과 보이는 것과 싸운다. 바예쩨에서부터 무엇인 실제인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고 배우는데도 말이다.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그 악한 영들은 내 안에 있는 에서의 천사, 에서의 메시지와의 싸움이다. 그 메시지는 다 나에 대한 것,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에서의 고백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술람, 사닥다리 비전을 보고, 약속을 받고, 하마콤에 와 있다. 심지어 오는 길에 라반이 쫓아오다가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서 따지지 말라고 하셨고,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의 영접도 받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진리를 본 야곱인데, 이 야곱이 지금 에서를 두려워하고 있다. 말이 되는가? 논리 상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여러분은 이제 4년째 토라를 배우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토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어도 에서의 천사가 나타나면 무서워 죽으려고 한다. 내 육신에 대한, 나에 대한 얘기, 험담 한 마디로 말이다. 저도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 같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 두 사람이 나에 대한 험담을 했었다. 그런데 그 때의 느낌이 온 예루살렘이 나의 험담을 하는 것 같았다.
아바크, 야곱이 한 씨름은 에서의 천사와의 씨름, 악한 경향성, 나의 죽음을 걱정하는 것과의 씨름이다. 이것이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아바크, 씨름하는 것은, 홀로 남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이미 내 안에서 내가 홀로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의 천사와 싸워 승리를 해야 한다. 자기 사랑, 자기 중심적 경향, 모든 것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 - 이것과 싸우지 않으면 에서와 만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고, 이 물질세계와 화해할 수 없다.
에서는 이 물질세계이다. 이 물질세계, 에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에서와 야곱이 만나지 않으면, 이 물질세계는 사탄이 다스리는 곳이 된다, 에서가 사탄의 손에 넘어가버린다는 것이다. 야곱이 에서를 끌어안지 않으면 이 세계는 어둠으로 뒤덮인다는 것이다.
야곱은 이 싸움을 해야만 한다.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려면 홀로 남아 이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물질세계가 여러분을 잡아먹는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여러분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공격하고 여러분은 끊임없이 방어해야 한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내 안에 이것과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 싸움을 하고 나면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분명히 이쉬, 내 안에 있는 악한 경향성, 내 안에 내 중심, self-centered, selfish, 내 위주의 해석,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나의 이기심과 싸웠는데, 그 과정 중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하나님을 인카운터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현, 나타나심은 바로 에서의 천사와의 싸움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이기심, 나의 해석과 싸울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그래서 suddenly 하나님과 파님 엘 파님, face to face 했다는 것이다. 이 비밀이 여기 숨어있다.
사람의 영혼은 이 싸움을 통해 성장한다. 이 싸움은 아바크, 아버지의(אב) 형상과 모양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을 소망하지 않는 자들은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고, 이 싸움을 할 수 없다. 내가 잘 살아야 한다면, 늘 행복해야 한다면 이 싸움이 왜 필요하겠는가? 오직 아버지 형상이 되려는 자들만이 이 싸움을 한다. 아버지를 소망하는 자들의 영혼은 이 싸움을 하면서 그 형상과 모양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싸움을 할 때마다 아버지는 얼굴을 드러내신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아야 닮아갈 수 있다.
פָּנִ֣ים אֶל־פָּנִ֔ים 파님 엘 파님 : Face to face 라고 하지만, 얼굴들, 사실 복수형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 계속해서 단계에 맞는 아버지의 얼굴을 봐야 닮아갈 수 있다. 그래서 단계에 맞는 싸움을 할 때 그 속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아버지 내가 이렇게 착하니까, 이렇게 말씀 잘 읽고 기도 잘 하니까 나를 만나주세요, 이것이 절대 아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자기의 이기심, 죄인됨을 발견할 때 거기에 아버지의 현현이 있는 것이다. 트필라, 기도하고 영적전쟁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잘못을 돌리는 기도를 하면 절대 성장할 수 없다.
이 싸움은 하나님을 나타나게 함으로 인간의 영혼을 성장시킨다. 인간의 영혼이 성장하는 싸움의 단계들이 있다.
1. נָ֫פֶשׁ 네페쉬 - 혼의 단계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 혼이 보존되었다, 내 혼이 살아남았다 한다. 혼의 단계를 성취했다는 것이다. 혼의 단계는 생명, 사람 등으로 번역된다. 혼의 단계를 성취하지 않으면 영혼의 여정을 걸어갈 수 없다. 혼이 건강해지고 회복되어야 한다.
거듭나기 전에는 혼이 파괴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짐승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혼이 살아남는 싸움, 아베크를 하여도 사탄에게 미혹되어 평생 자기의 살아남는 싸움을 전개한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파님 엘 파님 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싸움이 아니라 정욕적인 삶인 것이다.
혼은 인간의 생명이라 하여 이해의 영역을 담당한다. 부활에 대한 이해,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이해이다.
출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וַיִּנָּפַֽשׁ 바이나파쉬 : 쉬었다
- 일을 마치는 것은 샤밭이다. 일을 스탑하고 쉬는 것이다. 네페쉬했다고 한다. 이를 샤밭하고 6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한 이후 샤밭하고 바이나파쉬, 네페쉬했다는 것이다. 7일째, 샤밭은 창조와 상관이 없다. 7일째는 이해, 진리가 온다. 창조에 대한 진리 - 하늘과 땅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네페쉬의 싸움을 전개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위해 살게 된다. 몸뚱아리가 생명인줄 알게 된다.
그래서 두려움과의 싸움의 단계가 네페쉬의 단계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하면 무엇을 이해하는 것인가? 드디어 입장이해를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네페쉬를 얻기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도 사모님의 스킬을 배웠다 해도 네페쉬를 얻기 전까진 나를 더 의롭게 하는 스킬에 지나지 않는다. 에서의 천사와의 싸움을 통해 죽지 않는 존재라는 이해를 하게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을 내려놓으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네페쉬를 얻게 된다. 7일째 하나님께서 하신 바이나파쉬는 놀라운 신선함, 놀라운 새로움이라고도 번역된다.
제가 저의 아내와 입장이해를 해보기 위해 같이 밥 먹다가 그대로 핑퐁을 해보았다. 내 안에 새로운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하자 그 생명의 충만함이 흘러오는 것이다. 이전에 나의 머리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등 나에 대한 생각만 꽉 차서 머리가 아팠다. 신선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자 그 신선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2. ר֫וּחַ 루아흐 : 영의 단계
루아흐 단계는 영, 마음, 심령, 바람 등으로 번역된다. 얻기 어려운 단계이다. 야곱은 루아흐를 얻기 위해 라헬을 얻는데, 라헬의 완성은 야곱의 씨름이 훨씬 지나서 이루어진다. 창세기 35장에 해산하다가 죽게되는 때이다.
루아흐를 얻게 되면 삶이 바람과 같다. 영으로 난 사람은 바람과 같다고 한다. 여러분은 바람과 같은가, 우상과 같은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 너무 분명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딱 아는가, 아니면 바람과 같아서 잘 모르는가?
양자의 세계는 바람이다.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만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고 한계가 없다. 이것이 루아흐이다. 이 싸움을 전개하지 않겠는가? 자기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는 한 사람은 루아흐를 절대 알 수 없다. 사람이 네페쉬를 통해 생존에 대한 싸움을 중단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기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모든 세상을 용서한다. 네페쉬 단계의 핵심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 나에 대한 이야기, 외적인 나를 이야기하면 온 세상은 외적인 것, 나를 공격하는데, 이것을 다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루아흐 단계에 오게 되는 것이다.
루아흐 단계에 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데, 이것을 통해 사람은 자기 정체성을 얻게 된다. 지금까지는 내 정체성이 다 조각되어지고 정해져 있는 우상과 같았다. 나 같은 놈, 하면서 자기비하를 하고 1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루아흐는 신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내 정체성이 된다. 어떤 상황이 와도 신의 성품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루아흐 단계로 오기 전에 자기 정체성을 가진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자아의식, 또는 자기본성이라고 한다. 이것은 영으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 즉 뱀으로부터 가지게 된 의식이다. 우리가 바예쩨부터 배운 이 세상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은, 즉 이 세상의 경험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을 통해 하는 고백은 뱀으로부터 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루아흐 단계에 오면 사람은 드디어 하나님의 본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가지게 된다. 이것을 가지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라헬이 뒤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이 부어지면, 라헬이 완성되어지면 사람은 신성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창35: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אֶפְרָ֑תָה : 에프라타, 신의 열매가 완성되는 것
- 라헬이 드디어 약속의 땅에 와서 해산하게 된다. 야곱이 벧엘에 올라오고, 에프라타, 신성의 열매가 완성되는 것이다. 해산하면서 심히 고생하게 된다.
창35: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 영의 단계의 핵심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창35: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 죽음은 완성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서의 할 일을 완성한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죽는 것이 아니다. 내 할 일을 완성해서 이제 영원히 살러 간다. 완성을 통해 영원으로 넘어간다, 이것이 죽음이다. 그렇다면 라헬은 무엇을 완성한 것일까?
창35:18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בֶּן־אוֹנִ֑י : 벤오니, 신성의(א) 실제화하는(ו) 것에 신실한(ן) 것이다.
- 사람이 영의 단계에 오면 신살한 이유는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시다. 그래서 이미지나 조각상을 만들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변하신다. 새 영은 계속 변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정해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 변화되고 가능성만 가지고 있으면서 그때 그때 계속 파님 엘 파님, 단계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나를 만들어놓고 변하지 않는 우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온은 신의 형상을 실제화하는 파워와 능력이다. 그래서 기력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카르, 장자에게 주어진다. 라헬이 벤-오르, 하는 것은 막내가 나의 기력이다, 나의 장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 더 놀라운 소리를 한다. 벤야민이라고 부른다.
בִנְיָמִֽין : 벤야민, 오른쪽의 아들
- 오른쪽의 아들, 즉 하나님 우편에 앉는 아들이다. 메시야,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다. 벤온이 벤야민이라는 것이다. 드디어 라헬이 영을 완성하면서 진정한 장자는 영, 루아흐, 영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진짜 장자는 신성을 실제화 하는데 신실한 것이다. 신성, 알렙은 소리가 없다. 자기 목소리를 높이 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화한다. 이것이 온이다. 영이 부어져야 벤온 내 기력이다, 장자권이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고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창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라헬이 완성되고 벤온이 태어나는데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다. 르우벤은 장자이다.
영의 싸움은 장자가 가장 큰 이슈이다. 여러분은 왜 바람과 같아지려고 하는가? 나의 필요를 구한다. 그것을 호흡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은 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온, 오니라고 한다. 기력.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나중에 베냐민에게 이 모든 힘이 나온다.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여 이스라엘을 데려오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데 르우벤은 외적인 장자이다. 아버지의 첩, 라헬의 여종 빌하와 눕는다. 르우벤은 아마 레아에 대한 애착이 컸을 것이다. 르우벤은 엄마에게 합환채를 가져다 준다. 일종의 마마보이이다. 라헬이 없어지니까 라헬의 그림자도 제거하여 엄마에게 사랑이 오도록 한 것이다.
인간이 성장하기 위한 세 요소가 있는데, 아빠 엄마 쉐키나이다. 엄마는 외적 생명을 살게 한다. 엄마의 단계에서 나라는 주체가 생겨야 한다. 자기사랑이 생기게 하는 단계가 엄마의 단계이다. 엄마의 사랑으로 사람이 자라난다. 그러다가 아빠는 내면세계를 준다. 이웃을 위해 살라고 한다. 장자는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의 장자, 아버지에게 나와야 한다. 그런데 르우벤은 여전히 엄마속에 잇다. 여전히 내가 중요하고 자기를 돌보는 단계에 있는 것이다. 자기를 돌보고 자기 연민에 빠져있으면 아버지의 침상을 범하게 된다. 아버지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라헬이 완성한 영의 단계로 나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르우벤은 나중에 장자권을 잃게 된다. 영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ימ הבכורימ : 오순절을 욤 하비쿠림, 장자들의 날이라고도 한다.
-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웃을 돌보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어마어마한 기력, 힘을 받게 되는 것을 영의 단계라고 한다. 영의 단계로 오시기를 축복한다. 마마보이와 싸우게되시길 축복한다. 자기연민은 장자권을 잃게, 자기생각에 갇히게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침상을 범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한다. 훗날 르우벤은 끓는 물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리를 적용하는데 실패한다. 자기연민에 휩싸여서 그렇다.
기도
주님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시오. 성령, 영을 받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영으로 태어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영으로 사는 것은 바람과 같이 다른 존재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산소처럼 다른 존재를 살리는 것입니다. 공기는 자기가 살려고 산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존재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영의 단계로 나아기가 위한 싸움을 하지 않겠는가? 자기연민, 자기를 보호하는 것으로부터 , 더 이상 어린아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더 이상 아버지의 침상을 범하지 않고 일어나야 한다. 주님 나에게 성령을 부어주십시오 . 나에게 장자권을 사용할 수 잇는 엄청난 온의 힘을 부어지게 하여 이웃을 살리게, 나를 돌보지 않는 영의 세계로 넘어가게 하여주십시오
죽음을 너머 영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여 주십시오 자기를돌보는 연민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제 장자권을 사용하는 나를 돌보지 않고 다른 삶을 살리는 놀라운 삶으로 가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바이슐라흐를 통하여 싸움을 할 줄 아는 자들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싸움을 전개하겠습니다. 내 속에 잇는 에서의 천사와 싸우겠습니다. 악한 경향성과 싸우겠습니다. 그래서 네페쉬의 단계 올라서, 루아흐의 단계로 올라서겠습니다. 바람처럼 공기처럼 다른 생명을 살리는 자가 되겠습니다. 늘 성령을 몰고 다니는 자가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기름부으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슐라흐, 이제 내가 너희들을 보내노라, 성령을 받을 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을 지어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샤밭샬롬
다비드리 목사
작성자 Daniel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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