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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교회를 대항한 이단운동들
--------------------------------------------도그마와 이단과의 관계성
도그마의 발전단계
도케오는 '생각하다','의견을 주장하다'는 뜻으로서,그리이스의 여러 학자들은 이미 이같은 도그마(Dogma)로 자기 학파를 구성하였다. 예를 들면,프라톤의 아카데미아파,스토아파,피타고라스파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초기 기독교계에서도 다른 여러 학파로 부터 자신을 구별 짓는 주장,즉 도그마가 있었다.
도그마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오류에 대한 저항으로 생겨났다. 즉 방어적 교의(protective doctrine)이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의 경우,제 1항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는 하나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또한 이원론적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후대에 제정된 교의일수록 더욱 부정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보다 더 엄격한 이론적 정식화를 위해 많은 철학적 개념이 기독교 도그마를 설명하는 일에 사용되게 되었다.
결국 이 도그마가 하나의 교회법(canon law)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모든 교인들은 이 법률에 복종해야 할 것이 강조되었다. 중세에는 교회의 법이 국가의 법(civil law)으로서 승인되기에 이르렀다.
교리의 형성과 발전은 이단(異端)과의 싸움에서 구체화되었다. 예를 들면 기독론은 에비온파와의 싸움에서 정립되어 갔으며,신구약 정경의 형성은 영지주의와 말시온파와의 투쟁을 거쳐 발전되어 갔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은 역동적 단일신론(Dynamistic Monarchianism)의 대표자인 사모사타(Samosata)의 바울이나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의 사벨리우스(Sabellius) 등과의 심각한 투쟁의 결과로서 정립되어져 간 것이다.
교회 내외의 사상적 강적들
고대교회에 직면하고 있었던 교회 내외의 사상적 강적들을 성격별로 분류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유대적 강적: 에비온파
● 이교적 강적: 영지주의
● 이교적/기독교적: 말시온파
● 기독교적: 몬타누스주의
이같은 사상적 강적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교회의 교리가 강화되고,감독권이 강화되었으며,정경 형성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에비온파
에비온이라는 말은 가난한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 말은 본래 예루살렘의 신자들을 향한 경칭이었다. 에비온파의 특징은 그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적 요소들을 자신들의 사상속에 혼합시킨 점을 들 수 있다.
에비온파는 모세 율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중의 한 파는 모세의 율법이 자기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또 다른 한 파에서는 이방인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까지도 모세의 율법은 복종되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에비온파의 가장 잘못된 점은 기독론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순전한 인간적인 차원으로부터 설명해 나간다. 그래서 예수가 세례 받을 때 혹은 부활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기 전까지는 실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해석에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신성에 대한 설명의 여지는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영지주의
영지주의의 배경
제 1세기로 부터 수세기에 걸쳐 기독교회를 크게 위협하였던 영지주의(Gnosticism)는 당시의 종교적 혼합운동으로서,이같은 사상이 유행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 알렉산더(Alexander) 대왕과 로마의 정복으로 모든 민족종교는 무너진다. 그러므로 사상적으로 강력한 종교 만이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너무 신화적인 요소가 많다고 불만하여,소위 신화라고 인정되는 부분들에 대하여 철학적이고 비유적인 해석을 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증언보다도 당시의 철학사상과 그 원리를 더욱 중시하였다.
●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단순한 예배형식을 너무 무미건조한 것으로 보아,예배에 심령적,마술적,동방종교적 요소를 재등장시켰다.
영지주의의 특징
영지주의의 일반적 특징으로는 우선 신화적인 페르시아의 이원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같은 이원론은 근본적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 하에 형성된 시리아(Syria) 사상으로 부터 유래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계를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로 나누어 생각하였다. 빛의 세계는 선한 정신의 세게요,어둠의 세계는 악한 물질의 세계라고 보았다.영지주의(Gnosticism)은 죄악이 모든 물질성 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성은 오직 육체가 파괴되어질 때에만 끝날 수 있다고 영지주의자들은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을 부인하였다. 그 대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높여 해석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심오한 영적 인간과 일시적으로만 결합하였다. 즉 신성(divinity)은 인성(humanity)과 일시적으로만 병존한 상태라고 보았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실제 육체로 당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이를 가현설(Docetism)이라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세 계층의 인간관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영적 사람(pneomatikoi)으로서,이는 그노시스(Gnosis)를 갖춘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둘째는 혼적 사람(psychikoi)으로서,이는 Gnosis가 없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고 셋째는 육적 사람(sarkikoi)으로서,이는 색욕적인 이교인(異敎人)들을 말한다.
영지주의의 위험
영지주의는 특별히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로 기독교 내에서는 수도원주의, 독신주의 등을 포함한 금욕주의의 여러 형태들이 발흥(勃興)하게 되었다. 이 금욕주의는 한마디로 말하면 고대 기독교회의 에로스 모티브(Eros Motive) 구원관을 대표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은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존립을 위해 많은 경각심과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예를 들면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 만이 참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보편적 종교 임을 저처했다. 그 결과 교회에서는 캐톨릭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해야 할 계기를 맞게 되엇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에 대한 성경적 입증을 위해 구약과 사도들의 저작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그러자 교회에서는 참된 정경 확정의 과제가 생기게 된 셈이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교리적 체계로 간주함으로서, 교회는 구체적으로 그 교리적 체계의 어떠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같은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에 의해 기독교회의 존립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교회는 이에 대한 방어를 위해 자연히 감독직이 발전되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 말시온파
생애와 끼친 영향
말시온은 흑해의 남쪽 해안에 있는 푼투스 지방의 시노떼 출신이었다. 그는 감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해 왔다. 그는 138년 내지 139년 경에 상당한 부자로서 로마에 왔다.(Kenneth Scott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I 125). 그는 그 도시에 있는 교회에 가입하여 많은 연보를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시리아의 영지주의자인 캐리도로 부터 실제적 이원론에 대한 이론적인 기초들을 전수받았다".(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II 484). 그러나 비록 그에게서 영지주의적인 개념들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그의 교훈의 대부분은 영지주의와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명성을 얻을만큼 특색있는 견해들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교회 안에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마음을 끄는데는 실패했으며 약 144년경에 교회로부터 축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추종자들을 끌고 나가 분리된 하나의 교회를 세웠다.
말시온은 또한 조직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는 일체의 성교를 금지시켰다. 남편들과 아내들을 서로 분리시켰으며, 그들에게는 순결과 독신주의가 요구되어졌다. 그리고 순교가 높이 평가되어졌다. 말시온의 막을 수 없는 호소력과 특히 그의 저술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졌고, 여러 세기 동안 꾸준한 감화력을 가져왔다.
말시온 주의자들의 교회는 로마제국의 동부에 특히 그 수요가 많았다. 독신주의의 요구때문에, 저들은 자손의 증식이 아닌 새로운 회심에 의해서만 계속될 수 있었다. 말시온 주의자들은 이태리, 에집트, 북아프리카, 사이푸러스, 그리고 시리아 등지에 퍼졌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분파로 갈라져 결국 5세기 말 경에 이르러서는 그 세력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말시온의 마지막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 없으나, 대체로 주후 160년 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핵심 사상
말시온은 영지주의 체계의 기독교 분파 중에서도 가장 진지하고도 실제적인 위험성을 끼친 위험스런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교회 교부들의 말시온에 대한 반대입장은 영지주의와의 갈등과 유사한 교리적 관점을 수반하였다.
신론
말시온은 근본적으로 둘이나 세 종류의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하나는 선하고 은혜로운 신이데 이 분은 그리스도께서 애초에 악고 계셨던 그분이다. 둘째는 이교도들이 속해있는 악에 의해 지배되는 악신,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그는 유한하며 불완전하며 진노하는 유대인의 여호와로서 그는 세상을 창조한 공의로운 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가르켜 데미우르게 신이라고 하였다.
말시온의 견해에 의하면 구약의 신은 세계의 창조주였고, 그는 또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만을 돌보는 공의의 신이셨으며, 율법으로 혹사 하였다. 이 공의의 신은 선한 신 --- 즉 알려지지 않은 신, 최고의 신, 복음을 가져온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서 계시하신 사랑과 긍휼의 신 --- 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말시온에 의하면, 선의 신 또는 최고의 신은 복음을 가져온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긍휼의 신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이원론적 사상은 로마에서 영지주의자 케르도로 부터 받은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말시온은 신자의 죄악, 그리고 고난의 문제를 궁구하다가 이원론, 곧 이 세상의 신과 예수가 보이신 자비의 신을 대조시키게 되었다"(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54). 그는 우리 주변에서 보고 있는 고통과 잔인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가 어떤 악한 신의 조작이지, 선신의 은혜일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세상은 악하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영적인 본질에 있어서의 그 근원 속에는 그 악마성이 발견되어진다. 이 창조신, 또는 데미우르게가 구약의 신인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진다.
기독론
말시온에게 있어서 선한 신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셨으며, 이에 대항한 보복으로 공의의 신은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손에 붙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환상적인 몸을 입었기 때문에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음부에 내려가서 이방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가현설'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이스어의 `나타나다'라는 의미의 말에서 나온 말이다. 이 설은 곧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보인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현설에 대한 말시온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는 데미우르게에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않았기 때문에, 데미우르게의 피조물들이 인간들로 태어난 듯한 방법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만 육체를 가진 듯이 보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말시온이나 영지주의자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체나 물질적인 세계를 악으로, 정신을 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적으로 구속자가 육체를 소유했었다는 관념을 부인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와 가르치기 시작 했으며, 새로움 가운데 왕국의 선포를, 그리고 악의에 찬 데미우르게의 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였다고 말시온은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데미우르게의 충성된 자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부지불식간에 데미우르게를 패배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랑의 하나님이 데미우르게로 부터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댓가였으며, 그 결과 인간들은 데미우르게의 왕국으로 부터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시온은 그리스도를 선의 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단지 창조에 있어서만 성부와 구별되어진다. 성부와 성자의 동등한 관계는 마치 성자와 복음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J. L. Neve, 기독교 교리사, 106). 이렇게 볼 때 말시온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와 선의 신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를 밝히지 못했다는 큰 약점을 지니고 있다.
구원론
말시온은 인간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르치기를,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어떤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선의 신에 대하여 바울이 가르친바를 믿음으로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그는 당시의 복음이 교회에 의해 한심스럽게 왜곡되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말시온은 이 물질적 세계에 속한 몸은 구원 받을 수 없고 다만 영혼만의 구원을 믿었다. 또한 그는 창조주와 구속주를 별개의 것으로 보았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 육체의 부활을 모두 부인하였다.
이처럼 말시온은 고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자 또한 오해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사실 제 2세기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비밀스런 지혜를 추구하거나 율법을 착실히 준수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같은 인간의 선행과 공로의 무력함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믿는 말시온의 소명은 바울적 기독교의 재생된 숨결로서 다가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을 선의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완전히 악한 장소로 간주했고, 또 그리스도의 인간적 탄생을 부인하였다. 말시온은 말하기를, 이미 주후 29년에 그리스도가 성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은 의심 없이 받아 들였다.(William C. Placher, A History of Christian Theology, 51-52).
사도신경의 발전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도 역시 교회가 말시온주의자들과 분쟁한 때문이었다. 교부들이 말시온의 이원론을 배척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말시온이 가현적 그리스도(Docetic Christology)에 기초하여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한 것도 역시 거부하였다.사도신경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특히 그리스도의 가현설에 결정적으로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온 세계는 데미우르게의 창조가 아니요, 사랑하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었다.
성경론
말시온은 자기의 입장을 사도 바울이 이해했다고 보았다. 그는 바울에게서 율법과 은혜의 날카로운 구별을 발견했으며, 또 이것이야말로 말시온이 열정적으로 확신했던 내용이었다. 그는 사도들과 또 사도들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순수한 교훈들을 이들의 옛 유대교 신앙과 혼합함으로서 오염시켰다고 주장 하였다.
이처럼 그는 실로 예수 자신이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구약 신의 굴레로 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말시온 자신은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진리의 선포를 선의 하나님으로 부터 위탁 받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오염된 서신들을 진정한 원문대로 복구시켜야만 할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 그는 바울의 서신들을 수집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후대에 가필(加筆)되었다고 보이는 온당치 못한 부분들을 삭제해 버렸다. 이렇게 서신들의 삭제 작업을 한 후에, 그는 복음서 중에서는 오직 누가복음만을 첨가하여 편집하였다. 그가 만든 이 새로운 정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복음서'라고 불리웠는데 그 내용은 누가복음을 말시온 자신의 견해에 맞도록 수정한 것이 였으며,`사도서'라 불리운 두번째 부분은 바울의 첫번째 열개의 서신들을 이와 유사하게 수정한 것이었다.
말시온에 대항한 정통적 교회들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우리들은 구약성경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성취시키시고 그의 권위로서 인정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의 신적 권위를 갖는 경전들은 구약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다." (F. F. Bruce, 초대교회 역사, 290).
말시온의 정경화 작업에 대하여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르신온이 오직 한개의 복음서 만을 정경이라고 주장한데 반하여, 말시온이 훼손한 누가복음을 포함해서 모두 네개의 복음서를 인정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도서는 바울서신 가운데 단지 10개만이 아닌 13개를 포함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외의 다른 서신들도 포함한다고 했다.
현대 성서비평주의에 관련된 말시온의 정경 편성 작업에 대해서도 의미가 있다. 즉 그는 현대의 성서 비평주의와 정경에 대한 의문성과도 하나의 먼 관련을 갖고 있다. 그는 구약성서와 목회 서신(Pastoral Epistles)에 대한 합리적인 반항을 일찌기 시도한 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서안의 대상적인 차이점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 그 깊은 조화는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시온의 정경 편집 작업이 주는 큰 의미는 그의 노력이 초대 기독교 문서를 권위있는 하나의 집대성으로 만들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 있다. 일찌기 사도들의 저작을 간추려 공인된 하나의 정경을 편집하려던 말시온의 시도는 교회로 하여금 정경의 형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태도를 밝히도록 자극해 주었던 것이다. 말시온이 성서에 대한 우의적 해석을 배척한 것은 교회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근원자료들을 면밀히 재검토해서 원시적 복음으로 되 돌아가도록 자극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영지주의와의 대조
교부들에 의하면, 말시온의 위치는 사상적인 면에서 볼 때 영지주의자로 간주되어지곤 했다. 그가 영지주의자로 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가 영지주의자로 분류되어질 수 있는 이유로서 말시온 사상의 다음과 같은 면은 이러한 견해를 충분히 뒷받침 해준다.
● 그의 교설이 공의의 신과 선의 신이라는 이원적 체계를 깆추었다는 점
●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가현설을 주장한 점
그러나 말시온의 견해는 영지주의의 주장과 전혀 대조되는 점도 있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해서 말시온은 영지주의지와는 다른 독자적(獨自的)인 체계를 이룩한 사람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 말시온은 형이상학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오직 구원론적 관심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구원이 그노시스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 그는 유출설을 인정치 않았으며, 죄의 기원에 대한 영지주의적 견해를 용납치 않았다.
● 말시온의 정경은 일부 삭제된 누가복음과 열개의 바울 서신에 국한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진리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 그는 교회안에 사변적 교의를 지닌 신비주의 단체를 형성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캐톨릭적 교의와는 반대되는 대립적 집단을 설립함으로써 따로 교회를 형성하려고 하였다.Neve, 기독교 교리사. op. cit., 105
특히 하르낙(Harnack)과 같은 신학자에 의해 말시온의 견해는 영지주의와는 분명히 구분되어지고 있다. 즉 말시온은 한 사람의 교회개혁자로서 간주되어 진다. 그래서 그는 신학에 있어서 도덕주의가 급속히 퍼지고 있던 시대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높이 들어 평가한다면, 말시온은 그 당시에 어둠속에 묻혀 있던 바울의 교리를 어느 정도 광명속에 드러낸 사람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영지주의들의 신화론을 배격하고, 기독교를 오직 단 하나의 참된 종교로서 신임하였다. 그렇지만 만일 말시온의 가르침을 당시의 기독교가 허용했었더라면, 구약성서는 사라지고, 또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무의미하게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오늘의 교회 내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몬타누스주의
몬타누스주의(Montanism)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교회의 세속화와 영적 침체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어났다. 몬타누스(Montanus)는 156년 경에 요한복음 14장에 약속된 보혜사 성령이 자기에게 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추종자인 막시밀라(Maximilla)와 프리스길라(Priscilla) 두 여선지자도 그들의 남편을 떠났다. 그녀들은 특별한 형식의 예언과 계시가 그들에게 임한다고 주장하였다.
몬타누스주의의 교리적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성령의 강림을 매우 주장하였으며, 신자들에게는 새 예언이 주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단식을 즐겨 하였으며,육식(肉食)을 폐지하고,임박한 종말과 성결한 생활을 위하여 독신생활을 하는 등의 금욕주의를 그들의 신앙생활속에서 엄격히 실천하였다. 또한 그들은 성결한 자들 만으로 교회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 급박하였다고 전파하였으며,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으로 발전해 나갔다.
몬타누스주의의 영향
몬타누스주의 운동이 급속히 퍼져 소아시아의 감독들이 그 세력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160년 이후로 교회는 수차례의 회의를 열어 몬타누스주의를 비난하고, 마침내 200년에는 이단(異端)으로 정죄하였다. 그런데 몬타누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게 된 것은 교회 내에 여러가지 영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영향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볼 수 있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에서 먼저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몬타누스주의 운동에 대한 반격을 위해 교회는 정경(正經)의 위신을 강화하게 되었다. 동시에 구원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이끄는 감독의 지위를 높여 주었다. 그리고 이 운동을 배격함을 통해, 세상으로 부터 교회가 편협한 종파라는 비난을 벗게 되는데 도움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본 교회에 대한 영향 역시 심각하다. 우선 교회의 정경은 새로운 계시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배제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통찰을 언급한 요한복음의 사상은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예언자의 영(靈) 대신 계층구조체제(hierarchia)가 확립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영은 이제 종파적인 운동으로 도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교회의 의의가 정립되어감에 따라 종말론의 중요성이 감소되어갔다.그리고 역사적 종말론 대신 개인적인 종말을 보다 더 강조하게 되었다. 더욱더 아쉬운 것은 교회 안에 윤리가 점차 느슨해져감에 따라 도덕적 생활의 구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죄론(罪論)에 있어서 '죽을 죄'(mortal sin)와 '가벼운 죄'(venial sin)의 구분이 점차 짙어져 가게 되었다.
신몬타누스주의
고대교회에 나타난 몬타누스주의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가 경직화될 때마다 언제나 제 2의 몬타누스주의가 생겨날 소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역사의 교훈으로 깨닫게 된다.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이같은 형태의 분파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특히 현대교계 내에서도 이같은 성격의 집단을 보게 될 때 이를 일컬어서 신몬타누스주의(Neo-Biblical Montanism)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신몬타누스주의의 특징은 대개 다음과 같다.
● 성경의 정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계시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 가능한 한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지 않는 차원에서의 예언을 주장하는 성령운동.
● 임박한 종말론적 메시지를 강조한다.
● 알미니안(Arminian)교리의 재현: 이같은 집단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의 성결에 강조점을 둔 나머지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나 이차적 은총(Second Blessing) 등의 교리를 도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