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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입니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맘에 와닿네요!
배슬기 선수 화이팅
보도자료: [서호정의 킥오프]
배슬기, 무명에서 명문팀의 주전으로
삶은 늘 버겁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극적인 인생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분위기가 됐다. 그런 가운데 스포츠는 노력으로 삶의 궤적을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중 하나다. 그 믿음을 갖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굵은 땀을 흘리고 있다. 포항스틸러스의 센터백 배슬기는 집념과 노력이 인생을 바꿔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예다. 프로에 진입하기 위한 드래프트에서 두번이나 낙방하는 쓰디 쓴 좌절감을 맛 본 그는 실업 무대와 경찰청을 거쳐 2012년 만 27세의 늦깎이에 프로 선수가 됐다. 2군 생활을 거쳐 입단 2년 차이던 2013년 감격적인 데뷔전을 치른 그는 지난해 K리그 클래식 14경기에 출전해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올해는 김광석과 함께 포항의 주전 센터백 자리를 차지하며 15경기에 나섰다. 입단 4년차, 만 30세에 드디어 주전이 된 것이다. 철저한 무명 선수에서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팀으로 주전 선수로 거듭나기까지 배슬기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봤다.
안녕하세요, 포항 스틸러스의 24번 중앙수비수 배슬기입니다. 복고댄스의 그 가수 배슬기씨 아니고요. 하하. 아마 포항 팬이나 K리그를 깊이 챙겨보시는 팬들이 아니라면 제 이름을 그렇게 아실 수도 있겠죠. 저는 2011년 K리그 드래프트를 통해 프로 선수가 됐고요, 2012년부터 포항 소속으로 올해 프로 4년차입니다. 20대 초반의 선수냐고요? 아니요, 저 올해 우리 나이로 서른한살인데요. 고등학교 후배인 전남의 이종호 선수가 저보다 7살이나 어린데 프로 5년차로 프로 경력은 저보다 위에요. 요즘은 고졸 선수들이 워낙 많으니까, 프로 4년차 치고는 좀 많이 삭았죠?
제 축구 인생은 진흙투성이, 실패투성이였어요. 대학교 때까지는 나쁘지 않았어요. 축구 명문인 광양제철고를 졸업했고 건국대에 가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으니까요. 대학교 3학년 말에 무릎 수술을 받았는데 뭔가 잘못됐는지 의사 선생님이 알려준 복귀 시기까지 몸이 낫질 않더라고요. 취업을 위해 열심히 뛰고, 실적도 내야 할 시기를 놓쳐버린 거죠. 여름이 될 때까지 마냥 쉬었어요. 그래도 관심을 보여준 데도 있고 해서 낮은 순번이라도 드래프트에서 뽑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세상은 냉정하더라고요. 탈락했습니다. 실업 무대로 가서 1년차를 마치고 다시 한번 드래프트에 신청했는데 그때도 꽝이었어요. 두번째 떨어졌을 때는 오히려 심적 타격이나 실망은 덜했던 거 같아요. 당시엔 2부 리그가 없다 보니 지금보다 프로에 진입하는 문턱이 더 높았어요.
드래프트에서 떨어지고 내셔널리그의 인천 코레일(현 대전 코레일)로 갔습니다. 처음 드래프트에 떨어지고 상실감이 컸던 시기에요. 축구가 하기 싫었어요. 어린 시절 그런 얘기하면 아버지는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린다”며 혼을 내셨는데 그때는 부모님도 아무 말을 안하시더라고요. 마음을 잡아주신 분은 코레일의 김승희 감독님이셨어요. 제 축구인생의 가장 큰 은인이에요. 드래프트에 떨어진 걸 알고는 연락을 주셔서 오라고 하셨어요. 그러더니 “지금 뭐든 하고 싶진 않을 테니 놀고 싶은 만큼 놀고 돌아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내셔널리그는 보통 6개월 단위로 계약을 합니다. 저요? 감독님이 놀라고 하셔서 정말 6개월 동안 운동도 제대로 안하고 열심히 놀았어요. 운동할 때 되면 아프다고 핑계 대고 쉬고. 만날 날밤 까고, PC방에 다니는 폐인이었죠. 감독님이 그걸 다 알면서도 믿고는 모른 척 해주셨어요.
어느 날 감독님이 절 부르더니 “슬기, 놀만큼 다 놀았냐?”고 하시더라고요. 딱 6개월이 지났던 시기였어요. 모든 걸 감당하고 품어주신 감독님의 마음에 응어리졌던 설움이 풀렸어요. 그때 제 정신을 차렸죠. “내년에는 축구를 제대로 하자”는 감독님 말씀에 그때부터는 놀던 거 끊고 운동을 시작했어요. 후반기부터 열심히 했고, 2년 차에는 안 좋았던 팀 성적도 올라왔죠. 그 해 내셔널리그 3위였어요. 2년차를 마치고 군대를 가야 했어요. 사실 경력 상 상무는 말도 안되고, 경찰청도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프로에서 먼저 뽑고, 내셔널리그에선 많아야 1~2명을 뽑는 건데 그 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데 프로에서 온 선수들이 자격 미달로 1차 서류에서 많이 탈락했어요. 그 덕분에 저는 극적으로 경찰청 축구단에서 군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그때 경찰청에서 안 뽑아줬으면 전 막군(현역)으로 갔겠죠.
경찰청에서 2년차 때 조동현 감독님이 새로 부임하셨어요. 처음엔 선수들을 파악하시려고 프로에서 온 선수들부터 경기에 내보냈는데 잘 안 되니까 제게도 기회가 왔는데, 운이 좋게도 잘 봐주셨던 것 같아요. 덕분에 2군 경기(당시 경찰청은 2군 리그인 R리그 소속)에서 꾸준히 경험을 쌓을 수 있었어요. 제대를 할 때 즈음에 조 감독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프로 가는 것 어떠냐?”고 진로 상담을 해주셨어요. 사실 저는 프로 갈 생각이 없었어요. 드래프트에서 이미 2번이나 떨어져서 트라우마가 있었고, 실업으로 가서 최대한 오래 축구 하는 게 목표였어요. “저는 자신 없습니다”고 했는데 감독님께서 “내가 도와줄 테니까 프로에 가라. 너 경쟁력 있다”며 자신감을 심어주셨어요. 고민 끝에 세번째 드래프트에 참가했는데 고맙게도 포항에서 4순위로 선택해줬죠. 2011년도 말의 이야기에요.
말 그대로 중고 신인으로 프로에 와서 기쁘긴 했는데, 그게 하필 포항이어서 처음엔 주눅 들었던 사실이에요. 뽑히고 나서 포항 선수 명단을 봤는데 멤버가 너무 짱짱한 거예요. 처음엔 연습생만 되어도 도전해 보겠다는 마음이, 막상 뽑히고 나니까 그래도 내 경쟁력이 먹힐 수 있는 하위권 팀으로 갔다면 더 기회를 받고 인정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뀌더라고요. ‘하필 포항일까’하는 걱정요. 실제로 들어가 보니 자리 잡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저한테 기회가 올 수가 없었어요. (김)형일이 형이 상무에 갔는데도 (김)광석이 형, (김)원일이, 외국인 선수인 조란, (이)원재가 있었으니까요. 첫 시즌엔 완전 2군이었어요. 1군 명단에 여섯번 들어갔지만 출전은 1번도 못 했죠.
서른살이 돼 이룬 첫 주전
2013년에 드디어
데뷔전을 치렀어요. 경남 원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팀이다 보니 무난하게 치렀어요. 당시 포항이 AFC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느라 로테이션을 가동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 원재가 부상이었고, 광석이 형이랑 원일이도 지쳐 있으니까 경기 전날 황선홍 감독님께서 “몸은
어때? 뛸 수 있겠어?”라고 하시길래 무조건 좋다고, 최고라고 했죠. 그 다음날 명단에 선발라인업에 제 이름이 올라가 있더라고요. 첫 경기인데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얼떨결에 온 기회지만 그냥 열심히 하자고 했어요. 솔직히 기회가 올 거란 생각도 안 했던 시기였어요. 그 다음에
제주 원정에 교체로 들어가고, 홈에서는 전북을 상대로 처음 출전했는데 그때는 긴장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날 (이)동국이 형한테 골 먹고,
박희도 선수한테는 말도 안 되는 중거리 슛 먹고. 평상시 플레이 반도 못하고 나왔죠. 2013년은 그렇게 3경기로 끝났어요.
2014년에도 챔피언스리그 덕분에 기회가 왔어요. 로테이션에 따라서 전북 원정에 형일이 형이랑 선발로 나서게 됐어요. 그때는 부담이 덜했던 것 같아요. 팀이 전북 원정에서 재미를 많이 봤고, 공격진에 많이 뛰어주는 (이)명주와 (김)승대도 있으니까 수비는 할 것만 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날 팀은 잘했고, 저도 꽤 했던 것 같아요. 그 경기로 황선홍 감독님의 믿음을 어느 정도 받은 거 같아요. 그 뒤에 고맙게도 챔피언스리그 산둥 원정에 데려가시더라고요. 해외 원정은 처음이었는데… 팀이 처한 사정으로 인한 로테이션 시스템 안에서 극적인 기회를 얻었죠. 그렇게 로테이션 멤버에, 확실한 백업 선수가 되면서 작년엔 리그 14경기를 소화했어요. 2013년까지는 내년에도 내가 프로에 뛸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2014년을 겪으면서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단 믿음이 조금 생겼어요.
2015년을 준비하면서 그 전과는 생각을 바꿨어요. 일단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면서 내 삶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책임감을 갖게 됐어요. 게다가 올해로 포항과의 계약이 끝나니까 승부를 보겠다고 다짐했어요. 재계약을 못하면 프로 생활은 거의 끝난다고 봤어요. 포항보다 안 좋은 팀으로 가는 건 확실하고. 만년 2군에 있다 보니까 몸도, 정신적으로도 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갔거든요. 작년의 경험을 토대로 올해는 만반의 준비를 했죠. 동계훈련부터 1군이고, 주전 경쟁을 한다는 생각으로 충실히 훈련을 했어요. 처음으로 몸을 착실히 만들어서 팀에 합류했죠. 체중을 줄였고 근육량을 늘렸어요. 그러니까 경기를 뛰는데 체력적으로 힘들지가 않더라고요. 예전에는 선발로 나가도 후반 20분이 지나면 근육경련이 왔거든요. 체력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집중력과 자신감이 올라왔죠. 그렇게 동계훈련부터 악착같이 하니까 감독님과 코치님들의 보는 눈이 이전과 달라진 걸 느꼈어요.
<#>부산전에서 웨슬리와 충돌하며 머리 옆 부분이 찢어진 배슬기는 곧바로 나흘 뒤 전북전에 선발 출전했다 (사진=배슬기 제공)
최근에는 잇달아 부상을 당했어요. 부산 원정에서는 헤딩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었어요. 순간 예전에 갑자기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선수들이 떠올라서 심각한 상태인가 싶었는데 잠시 후 깨어났어요. 옆에서 의무팀 선생님들이 “찢어졌네”라고 얘기하는 게 들렸어요. 크로스가 올라왔는데 저는 공만 바라보고 달려가다 쓰러진 거였어요. 팀 동료들한테 “나 왜 쓰러졌어?”라고 물어보니 부산의 웨슬리를 가리키며 “쟤가 와서 박았어”라고 하더군요. 뒤에서 웨슬리가 달려와 저와 머리끼리 충돌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기절했던 거죠. 풀타임으로 경기를 소화하고 병원에 갔는데 요즘은 바늘이 아니라 스테이플러로 박는다고 해서 5방 꽉꽉 박았어요. 마취를 하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그러면 더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나흘 뒤 FA컵에서는 전북과 붙었어요. 머리가 찢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옆이라서 헤딩을 할 땐 무리가 없으니까 나갔죠. 경기 중에 동국이 형이랑 헤딩 경합을 하다가 제가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떨어졌는데 늑골 부위부터 부딪혔어요. 통증이 오더라고요. 일단은 참고 뛰었는데 도저히 안 돼 10분 정도 하다 제가 사인을 보내서 나왔어요. 고향인 진도에 계신 어머니는 제가 다치는 걸 너무 싫어해서 중계도 잘 안 보세요. 그래도 전 이 부상들이 경기를 많이 뛰니까 얻게 되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라고 생각해요. 작년부터 운동하는 게 재미있어요. 올해는 몸을 만들고 나가니까 자신감이 더 붙고, 더 수월하게 경합을 하니까 부상도 늘어나는 거죠. 웬만한 부상은 끄떡없어요. 부모님이 튼튼한 몸을 물려주신 데 감사고 작은 부상은 참고 뛰어야죠.
집념과 간절함은 내가 K리그 1등이다
저는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수비수였어요. 중, 고등학교 때는 포지션 없이 감독님이 보라는 데 다 봤어요. 그 시절에는 축구를 좀 했거든요. 오늘 여기 보라고
하면 거기 가서 뛰고, 다음 날 저기 보라고 하면 거기 가서 뛰고. 수비수로 완전히 자리 잡은 건 광양제철고 1학년 때에요. 수비수로 뛰었는데
그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그때부터 감독님이 수비만 시킨 거죠. 고교 동기가 지금 전남의 주장인 방대종이에요. 수비수로서의 경쟁력? 지금은
힘만 남은 거 같아요. 원래는 느리지 않았는데 무릎 수술을 한 뒤엔 몸이 팍 나가질 않아요. 대학 때까지만 해도 발 빠르다고 칭찬 받았거든요.
원래 대학 시절에는 풀백이었어요. 절대 뚫리지 않는 풀백으로 이름 좀 날렸는데… 3학년까지 풀백을 보다 4학년엔 센터백으로 돌아왔어요. 아까
얘기한 무릎 수술 이후에 스피드가 안 나오면 중앙으로 갔죠.
지금 제게 제일 큰 무기는 간절한 마음 같아요. 엄청나죠. 하하. 황선홍 감독님과 강철 코치님이 제겐 화려한 거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세요. 그러면서 너에게서 간절함을 봤다고 항상 말씀하세요. 뛰고 싶다는 간절함이 마음 속에 깊이 박히다 보니까 상대가 슈팅을 때리면 몸을 날려서라도 막아야죠. 공 맞아봐야 얼마나 아프겠어요. 아기는 낳아야 하니까 급소만 안 맞으면 되잖아요. 아내랑 연애를 오래 했어요. 프로 선수로서 자리를 못 잡은 상태에서 결혼을 한 건데 아내가 복덩이에요. 제게 복을 가져다 준 거 같아요. 결혼하고 나서 잘 풀리네요. 가장이니까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내 사람 고생시키고 싶지 않거든요. 앞으로 애 낳고 키우고 가족 먹여 살리려면 이 정도로 해선 안 되겠다 싶어 마음을 바꿔먹은 게 작년 겨울이에요. 아내는 청주에서 회사를 다녀서 지금은 주말 부부에요. 주말엔 경기 보러 와요.
요즘에 맨마킹이 좋다고 팬들이 칭찬해주더라고요. 감독님도 상대팀에 뛰어난 스트라이커가 있을 때 제게 더 집중력을 요구하세요. 마냥 부딪히는 건 아니고요. 경기 전에 철저하게 분석을 해요. 동국이 형은 등지는 플레이가 워낙 좋으니까 절대 그걸 주면 안되죠. 한두발 가량 떨어져 있다가 주고 들어가는 걸 보고 막아야 해요. 영상을 보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준비를 착실히 하는 편이에요. 황의조 같은 경우는 신체조건이 저하고 비슷한데 뒷공간을 많이 파는 선수니까 커버를 확실히 해야죠. 광석이 형과 서로 확실히 신호를 주며서 뒷공간을 미리 잡아둬요. 킥이 길면 뒤로 물러나고, 짧으면 사이드로 몰아서 막는 식이죠. 게다가 의조는 왼발 슛이 좋으니까 페널티박스 안에서는 절대 슈팅 거리를 주면 안돼요. 준비를 잘하면 어느 팀이든 자신이 있어요.
K리그에서 제일 막기 어려운 선수는, 아직까지는 동국이 형이랑 에두 같아요. 에두는 몸이 더 커져서 돌아온 거 같아요. 힘이 너무 좋아요. 동국이 형은 어우 무섭죠. 페널티박스에서 한 순간 찬스 주면 슈팅 10개 중에 7~8개는 들어간다고 봐야 해요. 늘 무서워요. 그런데 그거 티 안내고 자신감으로 막을 수 있다 생각하고 덤벼야죠. 경기 중에 몇 번 잡았는데, 그거 때문에 짜증 나신 거 같더라고요. 경기 후에 죄송하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어요. 동국이 형을 막아야 하는 수비수는 그렇게 해야 해요. 동국이 형 장기가 앞으로 주는 척 하다가 뒤로 순간적으로 빠지면서 발리슛 날리는 건데 그거 주면 골이라고 봐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뒤로 빠지지 못하게 막아야죠. 수비수 입장도 이해해주세요, 동국이 형.
나는 우아하지도, 지능적이지도, 빠르지도 않지만
훈련 때 늘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해요. 어느 팀에 갔을 때나 그래요. 어릴 때는 소심했는데 크면서 성격이 바뀌더라고요.
운동을 할 때나 다른 뭘 할 때나 분위기가 침체된 것보다는 즐거운 게 좋아요. 제 한 몸 희생해서 재미있게 해서 분위기를 올리면 경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팀에서 나이 상으로도 제가 무드메이커를 해야죠. (황)지수 형, (김)태수 형, (박)성호 형, (김)광석이 형, (신)화용이 형이
위에 있으니까 분위기는 형들이 잡아주죠. 저는 파이팅 한번 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야죠. 그렇게라도 팀이 좋아진다면 제가 있는 의미는 있다
생각해요. 물론 그런 역할로만 끝나고 싶진 않아요. 2군에 그렇게 오래 있어 봤으니까 다시는 아래로 가고 싶지 않아요. 더군다나 이 나이라면,
그렇게 내려 가면 끝이죠. FA컵 때도 사실 다쳤지만 더 뛰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0분 넘게 더 뛰었는데 도저히 호흡이 안 되는 거에요. 그냥
참고 뛰자 참고 뛰자 했지만 도저히 한계가 와서 손을 들 수 밖에 없었고요. 그런 모습을 보고 감독님도 인정을 해주시는 것 같아요.
지금 꾸는 꿈이요? 옛날에는 꿈 많이 꿨는데 요즘엔 꿈이 안 나오네요. 뱀 꿈을 자주 꿔요. 드래프트 되기 전날에도 꿈을 꿨는데 초록색 뱀이 나온 거에요. 갑자기 제 팔을 물더라고요. 너무 생생해서 꿈이 아닌 줄 알았는데 다음날 드래프트에서 뽑혔죠. 그 다음부터 뱀 꿈을 기다리는데… 아 그 꿈 아니에요? 목표요. 아… 지금 현재는 계속 팀에서 자리를 잡고, 더 확실한 주전으로 도약하는 거에요. 올해 계약이 끝나니까 재계약을 해야죠. 포항에서 계속 뛰다가 은퇴하고 싶어요. 많이 늦게 시작했지만 포항의 원클럽맨으로 남는 게 목표에요. 그 다음은 부상 없이 계속 뛰는 것. 지금 이 순간이 한 때는 제가 도저히 이루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꿈이었으니까요.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1경기를, 저는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하고 뛰어요. 그 차이를 누군가는 분명 알아준다고 믿고요. 국가대표 같은 거창한 꿈은 아니지만 제겐 다음 경기에 나서는 것, 그리고 다음 시즌에도 이 팀에 있는 게 제일 큰 꿈이에요. 어느 순간 기다린 큰 기회가 오고 뭐가 맞아 떨어졌지만 그걸 지키려면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단 걸 이제 알아요.
경기를 계속 뛰니까 TV중계에 나온다고 부모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세요. 진도에서는 광양 빼고는 어디든 다 먼 거리니까 쉽게 경기를 보러 오지 못하시죠.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전국대회에 출전하면 회사에 휴가 내고 자주 오셨는데, 이제는 나이도 있으시니까 중계로 보시라고 해요. 밤에 운전하고 다니면 위험하니까. 처음엔 아버지가 야구 시키시려고 했어요. 제가 싫다고 했죠.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모두가 다 할 수 있는데 그게 더 좋다고, 야구는 절대 안 한다고 했더니, 그럼 축구를 하라고 하셨어요. 초등학교 때 진도에서 열린 대회에 나갔는데 광양제철초등학교 감독님이 그 경기를 보러 왔다가 뽑아주셨어요. 처음 합숙생활 할 때는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나네요. 집합하고 기합 받는 게 늘 무서웠어요. 재미있게 축구만 할 줄 알았는데 단체 생활은 역시 어려웠죠. 제가 생각했던 생활이 아니라 축구를 그만둔다고 얘기했더니 아버지께서 한번 더 그 얘기 하면 다리 분지른다고 화를 내셔서 무조건 참고 하자고 해서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어요. 아버지께서 화내신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죠. 어머니는 제가 다치는 걸 너무 싫어해요. 부산전 때도 다치는 거 보고 부들부들 떠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경기 끝나면 전화해서 “축구 하다 보면 다치는 거야 비일비재하니까 괜찮다”고 얘기해야 해요.
프로는 역시 한 만큼 보상을 받나 봐요. 이렇게 긴 인터뷰도 하게 되네요. 이 마음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 같아요. 아내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얘기하거든요. 간절함과 절실함을 절대 잊지 말고 경기 하라고. 경기 전날 밤에 저한테 전화를 하고 끊을 때 늘 “초심! 사랑해. 잘자”라고 얘기해줘요. 그럼 저도 “초심”을 외치는데 그러면 다음날 몸을 날려서 하나라도 더 막게 되더라고요. 저는 우아한 수비수도 아니고, 빠른 수비수도 아니고, 아주 지능적이지도 않아요. 하지만 축구는 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 옆에는 그런 역할을 해 줄 선수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제가 해야 하는 건 그들이 하지 못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서른살이 넘어서 드디어 이런 기회를 잡았으니까 제가 빛나는 역할에 더 최선을 다해야죠. 나중에 팬들에게 “늘 최선을 다하던 선수. 집념이 강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수비수”로 기억에 남는다면 좌절 많았던 제 축구 인생에 후회는 남지 않을 것 같아요.
황선홍 감독이 배슬기에게
우리 수비의 축은 일단
광석이다.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슬기가 원일이와 경쟁을 하는데, 슬기는 그만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우선은 침착함이다. 보기와 다르게 커버
플레이가 좋고 공도 잘 찬다. 빌드업도 나쁘지 않은 선수다. 경기 흐름을 잘 읽으니까 안정감이 있어서 계속 광석이와 슬기를 짝으로 내 보내고
있다. 힘 싸움에도 능한 선수다 보니까 포스트 플레이가 무기인 전형적인 스트라이커와의 중심 싸움에서는 슬기가 경쟁력이 높다. 이동국, 스테보
같은 지금 K리그 톱 클래스 스트라이커들과 충분히 상대할 만 하다. 포항의 중앙 수비에 약점을 슬기가 잘 메워주고 있다.
나는 슬기가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걸 안다. 프로에서 잘 안 될 때 다시 실업 무대로 가고 싶었을 거다. 선수는 프로에 왔으면 어떻게든 꽃을 피워야 한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살리는 건 그 선수의 의지 문제다. 나이는 많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슬기가 가진 그 헌신적인 자세를 정말 높이 평가한다. 늘 팀을 먼저 생각하는 선수고 분위기를 끌어올려주는 선수다. 긍정적인 바이러스를 지녔다고 할까? 지도자 입장에서는 공 잘 차는 선수들만 있다고 팀을 완성할 수 없다. 융화라는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 슬기의 그런 진면목을 안다면 지도자라면 누구나 데리고 있고 싶을 거다. 자기 관리를 잘 해서 그라운드에서 제 몫을 하는 선수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희생해 팀 분위기를 만드는 선수가 중요하다. 내게 지금 배슬기가 그런 선수다. 서른이 넘어 빛을 보기 시작했으니 어렵게 쌓은 것을 쉽게 무너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자신의 성공적인 역사를 만들길 바란다.
인터뷰, 정리=서호정 기자
사진=프로축구연맹,
대한축구협회
첫댓글 포기하지 않고 한경기 한경기 최선을 다하니 빛을 보내요^^멋지네요~
공감입니다
지도자로써도 이런 선수가 맘에 듭니다 ㅎㅎ
다 잘 할 수는 없지만
노력과 인내가 많은 것들을 극복 하게 해주는 거 같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