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⑳ 길상사에서 원적에 들다 <끝>
금생의 허물 참회하고 시간과 공간을 버리다
해외여행 중 파리 길상사 창건
2003년 ‘맑고…’ 직책 내려놓고
대중의 한사람으로 뒤에서 도움
2007년 폐암 발병해 치료하다가
2010년 3월 홀연히 우리 곁 떠나
2010년 3월 서울 길상사에서 원적에 든 법정스님 영결식에서 스님의 법구가 극락전으로 옮겨지고 있다.
1995년에 접어들어 법정스님이 주창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김영한 보살이 거듭해서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네 차례나 사양하던 법정스님은 주변 사부대중의 간청을 수락해 김영한 보살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다만 스님 개인이 아닌 조계종단의 이름으로 수락했다.
법정스님은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주석처를 두고 길상사 보수공사를 진행해 수십 년 동안 요정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의 옛 이미지를 일소하고 사찰의 격식을 갖췄다. 우선 극락전과 설법전, 요사채, 후원, 시민선방을 만들었다. 그렇게 서울 길상사가 창건됐고, 그 이후 법정스님은 한 번도 길상사에 머물며 하룻밤도 절에서 기거하지 않았다. 일상 업무를 본 이후에는 강원도 오두막으로 돌아가곤 했다.
1997년 12월14일 서울 길상사 창건법회가 봉행됐다. 이날은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그 답례로 법정스님은 이듬해인 1998년 2월24일 명동성당 축성 100돌 기념 초청강연을 하기도 했다.
왕성한 시민사회운동을 펼치던 법정스님은 ‘맑고 향기롭게’와 길상사에 대한 거리두기를 하며 주변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원적에 들기 7년 전부터다. 2003년 12월, 월간 <맑고 향기롭게>에 ‘내 그림자에게’라는 글을 통하여 길상사 회주(會主)와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직책을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뒤에서 도울 것’이라 약속하며 길상사에서 짝수 달마다 해오던 법회를 봄, 가을 두 차례만 할 뜻을 밝힌다.
“한 평생 나를 따라다니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네 삶이 시작될 때부터 그대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햇빛 아래서 건 달빛 아래서 건 말 그대로 ‘몸에 그림자 따르듯’ 그대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니 그대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동반자다. 오늘은 그대에게 내 속엣말을 좀 하려고 한다. …(중략)… 그리고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남은 세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허락된 남은 세월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따라서 내 삶은 추하지 않게 마감해야 겠다고 다짐한다. 일을 벌이다 보니 나는 본의 아니게 ‘회주(會主)’라는 관사를 내 이름 위에 붙이게 되었다. 회주 스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회장님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속으로는 언짢았다. …(중략)… ‘맑고 향기롭게’에서 적당한 직책이 없어 상징적인 의미로 모임의 주관자란 뜻에서 회주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일찍이 없던 호칭이다. 길상사의 경우도 그렇다. 절은 주지에게 모든 소임이 주어져 있다. 회주는 불필요하다. 맑고 향기롭게가 됐건, 길상사가 됐건 내가 들어 시작한 것이므로 끝까지 뒷바라지할 책임이 내게 있다. 맑고 향기롭게는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내 남은 삶을 추하지 않고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한 말이니 그대가 받아주기 바란다.”
자리에 욕심이 없던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 홀연히 길상사 회주에서 물러난다. 당시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직함도 내려놓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임원들이 적극 만류해 사임의 뜻을 접기도 했다. 서서히 삶을 마무리 할 생각을 했는지 법정스님은 2004년부터 그동안 2개월 간격으로 봉행해 왔던 길상사에서의 대중법회를 연 2회로 줄여 4월과 10월 2회에만 진행한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창건법회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이 인사를 하고 있다.
오두막 생활을 하면서도 법정스님은 해외여행을 다녀온다. 송광사 불일암에 있을때도 해외여행을 했던 법정스님은 해외여행을 통해 자신의 인식세계를 넓히는 방편으로 삼았다. 스님에게 해외여행은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라 만행을 통한 자기 점검이자 관조의 시간이기도 했다. 여행을 통해 묵은 것들을 씻어내고 새것을 담아내어 생각의 그릇을 정화시키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수필집 <무소유>의 ‘나그네 길에서’라는 글에서 여행에 대한 생각을 쓰고 있다.
“훨훨 떨치고 나그네 길에 오르면 유행가의 가사를 들출 것도 없이 인생이 무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자신의 그림자를 이끌고 아득한 지평(地坪)을 뚜벅뚜벅 걷고 있는 나날의 나를 이만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구름을 사랑하던 헤세를, 별을 기리던 생텍쥐페리를 비로소 가슴에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낯선 고장을 헤매노라면 더러는 옆구리께로 허허로운 나그네의 우수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간다.”
스님은 여행이 단순히 낯선 곳을 찾아가는 취미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편이 된다는 것을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고 표현했다.
“나그네 길에 오르면 자기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내 속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이 단순한 취미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자기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소유> ‘나그네 길에서’
유럽여행을 하며 파리 길상사 창건의 인연도 맺는다. 법정스님은 1991년 프랑스 방문을 했는데 프랑스에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정신적인 안식처를 마련하겠다는 프랑스에 사는 한인 불자들의 의지와 법정스님의 발원이 길상사 창건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학생, 화가, 교민들은 파리 시내의 식당 및 신도 가정에서 자발적인 불교 모임을 가져왔으며, 당시 프랑스 수도원에서 수행하던 향적스님(전 해인사 주지)과 영국 연화사에서 법회를 지도하던 지수(智首)스님의 지도로 파리 시내에서 정기적인 법회를 진행해 왔다.
파리 길상사 측에 따르면 “이같은 모임이 점차 프랑스 교민불자들의 화합과 희망으로 발전하여 1991년 5월19일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을 겸한 가칭 ‘재불교민불자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0월 방혜자 화백의 초청으로 법정스님을 프랑스에 모시고 법회 및 교포 강연회가 개최되었으며, 이 때 방 화백을 중심으로 재불교민불자들이 법정스님께 종교를 떠나 타국에 나와 사는 한국인들에게 귀의처가 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에 법정스님은 교민 및 유학생들에게 정신적인 안식처를 제공하고, 프랑스에 한국불교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사찰 건립의 발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1992년 6월5일자로 ‘프랑스한국불교협회’를 프랑스 행정 당국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프랑스 길상사 건립을 위한 한-재불 미술작가전시회와, 법정스님이 ’길상사 건립 모금 강연회’를 열었다.
이렇게 마련된 기금으로 1993년 7월 현재 길상사가 위치하고 있는 톨시(Torcy) 소림로(Rue du Petit Bois) 32번지의 가옥을 매입하였고, 쓰러져가는 집을 재가불자들이 힘을 모아 단장을 하였다.
1993년 10월 프랑스 파리 교외에 해외포교의 결실로 길상사를 창건한 법정스님이 창건행사에 참석했다.
십시일반 서툰 손으로 단장한 도량에 인간문화재 박찬수 선생의 본존불이 봉안되었으며, 현판은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이 글을 쓰고, 방혜자 화백이 그린 후불탱화를 불상의 뒤에 모시는 등 창건 준비를 위해 많은 불자들이 노력해 사찰의 면모를 갖췄다. 같은 해 10월10일 법정스님을 모시고 ‘송광사 파리분원 길상사’ 창건법회를 봉행, 해외포교의 결실을 맺는다.
2007년 법정스님이 세수 76세가 되던 해 폐암진단을 받는다. 스님은 “병고도 나를 찾아온 친구 중 하나”라며 “어르고 달래며 지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인과 상좌들의 간곡한 청에 의해 치료를 받기로 한다. 이듬해인 2008년 미국으로 병 치료를 위해 출국해 치료시술을 받고 귀국해 길상사에서 대중법문도 하고 글쓰기도 한다. 하지만 2009년 병고가 재발해 제주도를 비롯해 여러 요양처를 다니며 요양한다.
법정스님은 폐암이 깊어진 뒤에도 침상에서 예불을 거르지 않았다. 그러던 2010년 3월11일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며,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긴 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랍 55세, 세수 78세였다.
[불교신문3640호/2020년12월23일자]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