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鍾泌, '정치는 虛業'
20 년 전 칩거 중이던 金鍾泌 전 총리를 만났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실업인으로 갔으면 돈관이나 모았을 텐데 정치가는 虛業입니다. 實業은 움직이는 대로 과실을 따니까 실업이지요. 경제하는 사람들을 왜 실업가라고 하냐면 과실을 따먹거든. 정치하는 사람은 이름은 날지 모르지만 속은 텅텅 비었거든. 나도 2~3년 후에는 어떻게 살까 걱정이여.'
'정치는 虛業이다'는 말이 5·16 군사혁명을 기획, 한국인들의 운명을 바꾼 大政客 입에서 나왔다.
'전쟁은 군인에게 맡겨두기엔 너무나 큰 일'
1차 대전 때 프랑스를 이끈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는 名言을 많이 남겼다.
가장 유명한 말은,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겨놓기엔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다'(War is too serious a matter to entrust to military men.)일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大정치가만이 전쟁이란 主題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전쟁은 실패의 연속이 승리에 이르는 경우이다(War is a series of catastrophes that results in a victory)'라는 말도 하였다. 지다가 보면 이긴다는 뜻이다. 전투에선 많이 져도 전략적인 決戰에서 이기면 된다는 의미 같기도 하다. '영국은 늘 마지막 전투에서 이긴다'는 말도 있다.
클레망소가 한 말 가운데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 본 듯한 게 있다. '젊었을 때 좌익이 되지 않으면 가슴이 없는 인간이고, 나이가 들어서도 좌익이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는 말의 語源쯤 되는 名言의 주인공이다.
'내 아들은 22세이다. 그 나이에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父子관계를 끊었을 것이다. 그가 나이 서른인데도 아직 공산주의자라면 꼭 같이 할 것이다.'
클레망소는 기복이 많은 人生을 산 사람이다. 그는 政治家가 되기 전엔 의사, 언론인, 그리고 反骨이었다.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적도 있고, 파리 꼼뮨에 참여하였다. 드레이퓨스 사건 때는 소설가 에밀 졸라를 도왔다. 그는 두번 총리를 하였다. 두번째 총리직을 맡은 1917년은, 1차 세계대전이 어마어마한 人命손실을 기록하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였다. 프랑스에선 厭戰(염전)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76세의 총리는 戰線을 수시로 방문하여 참호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을 격려하고, 反戰주의자들을 잡아넣으면서 프랑스의 사회 분위기를 바꿔나갔다. 프랑스 일각에선 독일과 평화협상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클레망소는 '총력전에는 총체적 승리뿐이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의 별명은 '호랑이' '승리의 아버지'이다. 클레망소는, 독일이 항복한 뒤엔 베르사이유 강화회의를 주도하였다. 드골과 함께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존경받는 정치가이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회고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의 人生이 주로 흥미로운 것은 실패하였을 때임을 잘 안다. 왜냐 하면 실패는 그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政商輩와 政治家
* 헨리 키신저(미국 외교가. 1923-)
: '犯法은 즉각적으로 이뤄지지만 헌법을 위반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걸린다.'
* 월터 리프만(미국 언론인. 1889-1974)
: '지도자에 대한 최종적인 시험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신념과 의지를 심어줄 수 있는가의 與否이다.'
* 조르쥬 퐁피두(프랑스 대통령, 1911-74)
: '정치가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고, 정상배는 자신을 위해 국가가 봉사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 毛澤東
: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이다. 혁명은 사람들을 저녁에 초대한다든지, 수필을 쓴다든지, 또는 그림을 그리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 헨리 테일러(1800-1886)
: '정치가에게 중요한 것은 매년 생겼다가 사라지는 20명의 친구가 아니라 20년간 苦樂을 같이 할 한 사람의 친구를 얻는 것이다.'
독일통일을 주도한 위대한 외교-정치가 비스마르크는 정치의 한계를 안 사람이다.
'정치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사람들이 大勢를 만들 수는 없다. 그 大勢를 타고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A.J.P. 테일러는 '문명은 보통사람들의 문명화된 습관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 현실에 있어서는 보통사람들이 통치자보다도 더 교양 있고 침착했다'면서 정치인들의 역할을 평가절하하였다. 그는 비스마르크를 비판하였다.
'그는 최고봉의 정치적 천재였지만 건설적인 정치가가 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한 요소를 결여하고 있었다. 그는 미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곳간이 가득 차면 예절을 알고, 衣食이 족하면 榮辱(영욕)을 안다'
金正濂 씨는 비서실장으로 朴正熙 대통령을 9년 넘게 모셨다. 1969년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金 실장은 '저는 경제만 알 뿐 정치는 모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정치란 게 뭔데. 국민들이 배 부르고 등 따뜻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정치요.'
朴 대통령은 경제가 잘 돌아가고 안보가 튼튼하게 유지되도록 뒷받침해주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알았다. 이런 朴正熙 대통령의 정치관과 똑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중국 齊 나라의 재상 管仲이었다. 서기 전 7세기 사람인 그는 齊의 桓公을 도와 富國强兵에 성공하여 桓公을 여러 제후 중의 으뜸인 覇者(패자)로 만들었다. 그가 남긴 말을 모은 '管子'를 읽어보면 朴正熙, 鄧小平, 李光耀와 거의 같은 맥락의 實事求是的 정치관을 만나게 된다. 管仲의 수많은 명언들 중 가장 유명한 말은 이것이다.
'곳간이 가득 차면 예절을 알고, 衣食이 족하면 榮辱(영욕)을 안다.'
요컨대 인간은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인간답게 된다는 것이다.
백성정치의 실천자인 管仲은 그러나 대중의 약점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凡人은 남에게서 혜택받기만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미움의 시작이고 德은 원망의 바탕이 된다.'
인간심리의 통찰자인 管仲의 현대성은 그가 法治를 德治 위에 놓은 점이다.
'聖君은 나라를 통치할 때 法에 의존할 뿐 良識에 의존하는 일이 없다. 근거 있는 계수에 의존할 뿐 막연한 이론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公的인 기준에 의존할 뿐 개인적인 사정에 의존하는 법이 없다. 당당한 태도에 의존할 뿐 임시변통의 책략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도 헛된 이름을 얻으려고 헛된 언변을 일삼지 않게 된다.'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으면 화들짝 놀란다.'
프랑스의 영웅 샤를르 드골도 名言을 많이 남겼다. 그는 처칠에 못지 않는 대문장가였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다음 그는 영국으로 피해가 자유프랑스軍을 조직하여 저항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프랑스의 칼은 땅에 떨어져 조각이 났지만 나는 그 조각난 날들을 다시 들어올린다.'
'프랑스는 전투에 졌다. 그러나 프랑스가 전쟁에 진 것은 아니다.'
그의 신념대로 1940년의 프랑스는 패전국이었으나 1945년의 프랑스는 전승국이 되어 독일을 점령했다. 드골은 또 '246 종류의 치즈가 있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는가'라고 한탄했다. 프랑스 국민들의 변덕 심한 민족성과 정치의 변화무쌍함을 지적한 말이다. 그는 정치를 시니컬하게 보았다. 크레망소의 말을 뒤집어 이렇게 말하였다.
'정치란 정치인한테만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말한 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는 것을 보면 화들짝 놀란다.'
자유는 피를 마시며 자라는 나무
1787년 미국의 3代 대통령이자 독립선언서 기초자인 토마스 제퍼슨은 知人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심으로써 원기왕성해져야 한다. 이는 자유의 근본 속성이자 거름이기도 하다.'
제퍼슨은 1809년에 연설하면서 이런 말도 했다.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좋은 정부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목적이다.'
그는 1810년에 知人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成文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 선량한 시민의 고귀한 의무중의 하나임을 의심할 바 없지만 그것이 가장 고귀한 것은 아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지켜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의무이다.'
미국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제퍼슨은 1820년 윌리엄 찰스 자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사회의 궁극적 권력을 안전하게 예치할 수 있는 곳은 국민들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국민들이 충분히 開明하지 못해 신중하게 자신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 권력을 그들로부터 뺏을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하여 그들에게 신중함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런 제퍼슨의 철학이 담긴 글이 그가 기초한 독립선언서이다. 그 가운데 이런 문장이 유명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실들은 부정할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창조되었으며, 그런 평등한 창조로부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받았는데 생명의 보전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거기에 속한다.'
헌법 안으로 들어온 제퍼슨
미국 독립선언서의 이 유명한 문장은 그 후 세워진 국민국가의 건국 및 헌법정신 한가운데 자리잡게 되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자신을 '제퍼슨 민주주의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 1904년 李承晩이 獄中에서 쓴 '독립정신'의 한 귀절: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活力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活力이 생겨서 몇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根本이다.'
* 崔南善이 기초한 1919년 3.1 독립선언서의 마지막 문단: '우리가 본디 타고난 自由權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 피우리라.'
* 李承晩이 建國을 주도한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人權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위의 역사적 文書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는 데 공통점이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 토마스 제퍼슨은 인간의 기본권을 생존권, 평등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으로 규정하였다. 국가도 개인의 이런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고 人權의 바탕이 되는 人間觀이다.
19세기 말 시작된 한국의 開化운동은 미국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자유민주주의를 理想으로 삼게 된다. 그 理想을 가장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가장 줄기차게 실천하였던 이가 李承晩이었다. 그가 온몸으로 담아내었던 開化의 꿈은 韓日倂合으로 좌절되었으나 그 불씨는 이어졌고 3·1 독립선언서로 재확인되었으며 드디어 대한민국 헌법에 자리잡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세금을 쓰는 것'
미국의 칼빈 쿨리지 대통령은 말이 없기로 유명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도 한 마디 않고 버티는 수가 많았다. 한 손님은 그런 쿨리지에 대해서 '그가 家具와 다른 점은 움직일 때였다'고 말했다. 쿨리지는 그러나 유모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그는 구두쇠로도 유명했다. 그런 쿨리지가 대통령을 하면서 한탄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예산을 쓰는 것이다. 公金은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쿨리지는 말을 적게 하면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다고 했다.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같은 말을 되풀이해달라는 부탁을 받지 않아서 좋습니다.'
쿨리지와 마주 앉은 사람은 대통령이 너무 말을 하지 않아 불안해져 쓸데 없는 말을 하곤 했다. 한 방문자가 할 말이 없자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을 쳐다보면서 무심코 '비가 언제나 그칠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쿨리지 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뗐다.
'걱정 말아요. 비는 항상 그친답니다.'
한 동료가 쿨리지에게 말했다.
'오늘 토론을 했는데 상대방이 저를 보고 '지옥에나 가라'고 말하지 뭐예요.'
쿨리지가 한 마디 했다.
'그래요? 내가 우리 헌법과 의회규칙을 다 읽어보았는데, 그럴 경우에 지옥에 가야 한다는 규정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전세집은 월세가 28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居室에 이런 글을 써붙여놓았다.
<지혜로운 늙은 부엉이가 참나무에 앉아 있다. 그는 많이 보일수록 적게 말했다. 그는 적게 말할수록 많이 듣게 되었다. 왜 우리는 저 늙은 새처럼 될 수 없는가.>
관용과 상식
《프랑스 혁명사》를 쓴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당대의 대표적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혁명과 선동을 싫어하고 상식과 관용을 권하였다.
'惡漢들이 뭉칠 때는 선한 사람들이 교류, 협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허망하게 싸우다가 동정도 받지 못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대로 쓰러져 갈 것이다.'
한국에서도 從北세력은 잘 뭉치는데 자유진영은 잘 흩어진다. 이런 속성을 잘 아는 李承晩의 歸國一聲(귀국일성)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다. '좌익은 자충수로 망하고 보수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요사이 유행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이런 말들도 남겼다.
'과거로써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다.'
'악을 너무 미워하다가 보니까 사람들을 너무 적게 좋아하게 되었다.'
'弱者의 양보는 겁쟁이의 양보이다.'
에이브라함 링컨(미국 대통령. 1809-1865)은 '부자들을 숙청하고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순 없다. 고용자를 내려앉히면서 피고용자를 올려세울 순 없다'는 말을 남겼다. 자유시장경제 이론의 창시자인 아담 스미스(영국 경제학자. 國富論. 1723-1790)는 이기심의 위대성을 간파하였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가게 아저씨의 善意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돈벌이 욕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류애에 호소하지 말고 그들의 自愛心에 호소해야 하며, 우리의 필요성을 설명하지 말고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20세기의 자유주의 경제사상가로서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똑같은 전체주의라고 간파한 프리드리히 폰 하이예크도 힘이 되는 名言을 많이 남겼다.
'私有재산 제도는 자유의 가장 중요한 보증이다. 재산을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덜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보다는 좋은 원칙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不變의 규칙을 원하지 악덕 변호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나라가 일정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는 계층을 도와주어선 안된다.'
조지 오웰의 名言
공산주의의 본질을 드러낸 3大 名作(카탈로니아 讚歌, 1984, 동물농장)을 썼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위대성이 더욱 빛나는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이 狂信에 대한 처방까지 내어놓은 사람이다. 그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사기성'으로 봤다.
'詐欺(사기)가 판을 치는 시절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게 혁명이다.'
(During times of universal deceit, telling the truth becomes a revolutionary act.)
공안검사 시절 '민중민주주의'가 공산주의의 한 變種임을 論證, 利敵이념이란 판례를 이끌어낸 高永宙(고영주) 변호사는 '민노당 해산 청원' 관련 강연회에서 '좌익은 사기'라고 정의했다.
'좌익이념은 선전이론과 실천이론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보통사람이 볼 수 있는 건 선전이론이다. 당원들이 배우는 건 선전이론과 180도 다른 실천이론이다. 공산주의는 구조적으로, 본질적으로 사기이다.'
조지 오웰은 선전이론을 믿고 스페인 內戰 때 좌파 편에 참전하였다가 공산주의의 실천이론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파시즘과 꼭 같은 전체주의였다. 그는 親知(친지)한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공산주의 및 파시즘과 싸우려면 우리도 같은 정도의 狂信(광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는 同意(동의)할 수 없다. 狂信者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狂信者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이길 수 있다.>
그는 1946년 트리뷴紙에 기고한 글에선 이렇게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어도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들이 옳다는 주장을 한다. 知的으론 이런 과정을 무한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런 행동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가짜 확신이 확고한 현실과 충돌할 때인데, 보통 戰場에서 그렇게 된다.>
그렇다면 말장난과 僞善의 곡예를 펼치는 한국의 좌경적 지식인들이 꿈에서 깨어날 때는 그들이 불러일으킨 전쟁의 피비린내를 맡으면서일까?
오웰은 '나는 왜 글을 쓰나?'라는 수필에서 사람들이 글을 쓰는 네 가지 공통된 동기가 있다고 했다. 순전히 이기주의로 글을 쓰는 경우, 美學的 열정, 後代를 위해 기록을 남기려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의도. 그는 책을 쓰는 것은 '긴 鬪病생활과 같은 끔찍하고 기진맥진한 싸움'이라고 표현하였다. 오웰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惡靈에 씌워지지 않고는 그런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좋은 散文은 (세상을 잘 보게 하는) 통유리와 같다'고 했다. 그는 뒤돌아보니 정치적인 의도를 갖지 않고 쓴 글일수록 형식적이고 生氣가 없더라면서 글을 쓰려면 정치적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한다는 권고도 하였다.
레이건의 寸鐵殺人
링컨 다음으로 많은 우스개와 名言을 남긴 미국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다. 그는 기자가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되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즉답한 사람이다. 오랜 對좌익투쟁에서 체득한, 反共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에다가 위대한 인간성을 보탠 이다.
'狂信者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狂信者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이길 수 있다'는 오웰의 충고를 실천한 이다. 그는 말의 힘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다. 그것도 웃으면서.
로널드 레이건을 유명인사로 만든 것은 1964년 10월27일 미국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위하여 한 방송연설이다. '운명과의 랑데뷰'라는 제목의 이 연설에서 레이건은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 전쟁에서 진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를 잃게 된다면, 역사는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막기 위하여 한 일이 가장 적다는 사실을 가장 큰 놀라움으로 기록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면서 체제파괴 세력을 돕는 이른바 '강남좌파'를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1981년 6월 백악관 기자실에서 정례 회견을 하던 레이건 대통령에게 UPI 기자가 물었다.
'폴란드에서 지난 열달 동안 일어난 일들이 東歐(동구)에서 소련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단초가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레이건은 말했다.
'어떤 형태의 정부도 국민들에게 자유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고 그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우리가 그 첫번째 균열의 시작, 즉 종말의 시작을 목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8년 뒤 폴란드에서 선거를 통해서 공산당 정권이 밀려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이것은 동구뿐 아니라 소련 공산 제국의 멸망이란 연쇄반응을 부른 뇌관의 폭발이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웬사가 이끈 자유노조 운동이었고, 레이건은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레이건이야말로 무장한 예언가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불경기의 책임을 前 정권에 돌리는 듯한 말을 하자 한 기자가 물었다.
'대통령 각하, 각하는 불경기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의 잘못이나 의회에 책임을 돌렸습니다. 지금 각하가 책임질 일은 없습니까?'
레이건은 즉답을 했다.
'제가 책임 질 일이 있고 말고요. 저는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거든요.'
1980년 大選에서 현직 대통령 카터를 이길 때 그가 만든 유명한 구호는 이러하였다.
'경제불황은 내 이웃이 失職者(실직자)가 되는 걸 의미한다. 경기침체는 내가 실직자가 되는 걸 뜻한다. 경기회복은 지미 카터가 실직자가 되는 것이다.'
역사를 바꾼 名言 '벽을 넘어서'
레이건 대통령은 그 바쁜 중에도 일기를 꼬박 꼬박 썼다. 1988년 1월14일 목요일에 쓴 일기.
<백악관 안보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스파이 이야기가 보고되었다. 바레인에서 잡힌 24세의 여성은 대한항공 폭파 용의자인데,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며 올해 열리는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안기부가 대한항공기 폭파범 金賢姬를 세상에 드러내면서 사건 진상을 발표한 날의 일기였다. 1988년 6월28일(화요일)자 일기에도 서울 올림픽이 등장한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휴전선에는 북한군이 10개 사단을 더 배치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위협하는 도발을 할지 모른다. 소련은 그런 도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한 바 있다.>
레이건은 서울올림픽이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예감을 가졌는지, 그 성공을 위하여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서울올림픽의 정신을 담은 主題語는 <벽을 넘어서>(Breaking down the wall)였다. 이는 李御寧씨의 작품이다. 東西이념의 벽을 넘어서 이루어진 서울올림픽은 그 다음해 동구권 공산체제가 무너지는 일에 一助를 하였다. 동독의 민주화 시위대는 서울올림픽 主題歌(주제가)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를 불렀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그 현장에서도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名言이 역사를 바꾼 경우이다.
위대한 욕설
1950년 6월24일 저녁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에 가 있던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38도선 全域에서 공산군이 남침하였다고 전화로 보고하자 이렇게 내뱉었다.
'딘, 그 개새끼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the sons of bitches'는 영어의 가장 심한 욕이다. 이 욕설은 한국인을 살렸다. 당시엔 韓美동맹이 없었다. 남침 1년 전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美 군부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이 핵폭탄을 갖게 되었으니 한국을 지킬 수도, 지킬 가치도 없다고 판단, 병력을 뺀 것이다. 이게 전쟁을 불렀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이 화를 벌컥 내니 미군이 참전하고 한국은 구출되었다. 우리로선 가장 위대한 名言이자 가장 위대한 욕설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전화를 받고 점잔을 빼면서 '그, 참, 불행한 일인데, 합참의 판단도 있고 하니, 유엔 및 우방국들과 상의하여 신중하게 대처합시다'라고 말하고 전화기를 놓았으면 한국은 그해 여름 赤化되었을 것이다.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직후 연설에서 朴正熙 대통령도 김일성을 향하여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올해 초 육군 3사단에 갔더니 '김정일 父子는 미친 개. 북괴군의 가슴팍에 총칼을 박자'란 구호가 붙어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퇴임後 '시련과 희망의 시대'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회고록을 썼는데 序文(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초등학생의 事後분석도 가장 위대한 정치가의 事前예측보다 낫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분석하기는 쉽지만 정치인은 혼돈상태에서 불충분한 정보를 놓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설명이다. 사실이 다 밝혀지고, 사건이 다 진행된 뒤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事後평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충고를 남겼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오르는 일과 같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잡혀 먹힌다. 대통령은 항상 사건의 머리 위에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사건이 그의 꼭대기에 앉게 된다. 한 순간이라도 안심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의 無限 책임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돌아오지 않는 책임은 없다. 대통령은 한시라도 자신이 대통령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최측근 참모나 가족들도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지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사람 속에는 그래도 惡보다 善이 더 많다는 믿음으로 대통령職을 수행했다. 善이 惡을 누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역사적 先例를 연구했다. 모든 문제는 과거에 그 뿌리가 있다. 나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결정을 내리려 했다. 내가 왜 역사를 읽고, 또 읽었느냐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23.6.8, 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