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인생의 설계도. 진달래님이 낼 첫 책 첫 페이지에 들어가야할 것 같아요. 큰 줄기가 읽힙니다. 그런데 글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춰야하므로 이걸 문장으로 풀어주면 좋겠어요. 설계도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나를 기르는 책들은 그동안 어떤 게 있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고를 건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돌보지 못한 상처’는 어떤 건지, 내가 느끼는 세상의 아픔은 현재 어떤 사안이 있는지 등등. 진달래님이 책을 쓰려고 하신다니 더 구체적으로 써보라 권하고 싶네요. 왜냐하면 책을 내는 일은 200자 원고지 800~1000매는 필요합니다. 생각의 뼈대에 살을 붙여서 서사를 만들어내는 훈련이 되지 않으면 어려워서요. 계획표와 반성문을 반복하는 게 인생이라는 어떤 소설가의 말이 생각나네요. 순수한 진달래님의 마음 결이 엿보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요가왕
제가 신혼 때 쓴 글 같아요. 왜 20년 전이랑 똑같은 가요. 요가왕님이랑 제 고민이 어째서 복사한 듯 같은 가요. ‘조용한 카페를 찾아가 책을 읽자했던 내 계획을 실천하기에는 애매하고 고단했다. 무심하게 토요일이 흘렀다.’ ‘혼자 짊어지고 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내의 역할이 버겁기만 하다.’ 문장이 정확하고 상황이 생생하게 전개되니 술술 읽힙니다. 감정을 과격하게 표현하지 않았는데도 울분이 넘칩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하는 물음이 남네요. 결혼 전에는 이럴 줄 몰랐는지, 어떤 남자였는지도 궁금하고요. 결혼 전 요가왕님의 가사노동의 전력도 중요한 요소에요. 상황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깊이있는 분석과 구조적인 관찰이 필요합니다. 나는 왜 여기서 못 벗어나는가, 이걸 화두로 삼아 더 성찰하고 글로 쓴다면 ‘이 구질구질한 일상’ 이후가 그려지겠죠. 사실과 생각이 적절히 어우러진 단정한 글입니다.
깻잎
모순을 간파하는 시선이 독특한 유머코드로 나와요. 가령 ‘잘 하지도 않는 회식을 삼가라.’ 여기서 한참 웃고 ‘가만히 말 잘들은 애들’이 죽은 사건이라는 구절에선 한참 찡했고 ‘무사귀가’라는 표현 하나에 마음이 바들바들 떨렸다에선 같이 떨렸어요. ‘내가 대답하는 ‘자격’의 기준에 대해서 들어줄 마음이 있는가?‘ 여기까지 나아간 인식도 날카로워요.
자격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글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자격을 부여하는가. 권력의 문제지요. 전영관 시인이 쓴 <슬퍼할 권리>라는 책 제목이 떠올라요. 자격이 아니라 권리가 맞다는 생각이 이 글을 통해서 느낍니다. 그런 폭력적인 질문을 내면화해서 자학하고 연대도 끊어버리는 지점. 그건 어쩌면 쉽게 문제상황을 벗어나는 수단이기도 하죠. 아이들과 시집 60권으로 한 세월호 수업도 울림이 큽니다. 이번 글은 한 가지 주제로 밀고나가는 힘이 생긴 거 같아요. 지루하지도 고리타분하지도 않은 어느 교사의 세월호 성찰의 기록. 귀한 글 다음 편 기다립니다.
그레이스리
라디오 사연2. 지난번에 이어 음성지원되는 글이네요. 그레이스리님이 오래 고민하고 하고 싶은 말이라서 그런지 절절하고 술술 막힘 없어요. 다음 생엔 현아로 태어나서 마음대로 살아가리라는 꿈. 누가 그러는데 다음 날이 다음 생이라고. 사람들은 ‘날날이’의 삶, 즉 노는 게 공부하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죠. 정해진 궤도를 이탈해서 살아가는 불안한 자유보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의 남들처럼 사는 안락을 다수가 택하는 것만 봐도 그렇고요. 훨씬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 같아요. 그레이스리님의 소심한 일탈, 연예인 배우와 기자의 이야기, 거기서 어떤 쾌감과 활력을 느꼈는지 왜 다시 생활의 자리로 돌아왔는지 그 감정의 결이 궁금해요. 거기에 다음 생이 아닌 다음 날부터 다르게 살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개미
“하는 일이 뭐야?” 이 질문 앞에 난감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자기소개가 힘들다는 말을 화두로 자기 삶의 터전인 아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엮어서 한국사회의 두터운 편견을 짚어준 좋은 글입니다. 조곤조곤 말투가 도끼처럼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네요. 언제 하루 날 잡아서 문장을 좀 간명하게 쓰는 연습을 합시다. 이 글 다시 출력해서 빨간펜으로 정돈하면 훨씬 가독성 높아지겠어요.
슝슝
저도 해보고 싶어졌어요. 내가 성 이야기를 쓰면 어떻게 될까. 어떤 남자사람이 저보고 성적보수성을 깨뜨리면 훨씬 글의 폭과 시야가 넓어질 거라고 조언한 적이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그 땐 잘 몰랐고 기분도 나빴는데 이제는 조금 와닿아요. 금기를 깨려는 시도. 더 나은 단어를 찾아 썼다지운 흔적이 역력한 글. 안전하고 무난한 글보다 난관이 예상되는 영역으로 뛰어든 시도와 모험이 그 자체로 좋은 글이죠. “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여전히 내 편인 시대와 은밀한 공모자가 될 수 있다.” 밑줄 긋습니다. 단어 하나로 시대의 모순을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글쓰기가 어렵지만 그래서 더 해볼만하다고 생각해요. 응원할게요.
세콰이어
시어머니와 사는 갈등이 내용의 주를 이루는데, 그 부분이 너무 평평하게 설명되었어요. 청소를 잘 안 한다 정도. 그래서 시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성격(캐릭터)이 잘 안 드러나고 필자의 고민도 확 안 느껴져요. “노력하는 동안 갈등이나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참을만한 일’로 정리된 채 말끔한 언어로 제시되니까요. 지금은 매일 청소해서 각자 삶의 방식을 놓고 불편해하기만 하는데 그 장면이 안 그려져요.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자기 생각과 느낌을 조금 더 후련하게 있는 그대로 겉꾸미지 말고 써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충동적인 글쓰기-의식의 흐름기법으로 한번 쏟아내보세요.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해요.
밤밤
설탕과 버터는 섞이지 않는다. 글의 복선 같은 문장이 강렬했어요.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있는데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싶기도 하고 안 하고 싶기도 한 고민의 지점이나 심리상태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아쉬워요. 요리를 좋아했다.->요리를 안한다.->요리를 다시 시작한다. 이 부분에 대한 연결고리가 없고 단절적입니다. 요리라는 소재를 통해 하는 말들, 결국 내가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요리 해주고픈 선한 의지가 평생 질곡이 되어버릴 수 있는 삶에 대한 불안. 그런 거 더 섬세하고 솔직하게 풀어가면서 어떤 지점이 찾아질 것도 같아요. 아무리 가족을 사랑해도 집에서 요리하지 맙시다를 글의 결론을 삼고싶진 않았을 테니까요.
옥수수
결별한 사람은 결별에 대한 글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별하고 싶은데 잘 안 되니까 힘든 거고. 그런 어수선한 마음을 들여다본 용기 있는 글이었습니다. 다만 서사의 맥락이 헐거워서 ‘고민’이나 ‘성찰’의 지점이 모호해져버린 게 아까워요. “나는 그에게 네가 혼자 옷을 갈아입으러 가던 그 복도, 그 길에서 함께 걷는 기분으로 편지를 읽었다.” 이 감정, 함께 걷는 기분으로 독자도 이 글을 읽으려면 조금 더 충분한 정보, 세세한 결을 살린 속내가 들어가야겠지요. 감정이 많이 들어간 문장은 독자에게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한다는 것.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써나가면 찬찬히 서사를 꾸리는 능력이 더 빛날 거 같아요.
푸실
기독교 자아. 육적 자아. 해릴린 루소 글의 형식을 빌어서 써본 시도가 좋았습니다. 자기이야기를 편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건 중요하거든요. 제가 종교생활을 하지 않아서 궁금했어요. 종교의 힘은 무얼까. 신앙은 삶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까. 나에게 책 같은 걸까. 그걸 이해하기엔 정보나 사례가 부족했네요. 죄, 사랑, 영광, 방언, 기도, 눈물 등 그 안에선 익숙하지만 바깥에선 낯선 말들이 많으면 글이 힘을 잃어요. 자기 세계로 초대할 때는 친절하게 유혹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보면 좋겠지요. 글은 판결문도 반성문도 아니니까 자기를 심판하지도 너무 쉽게 반성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내보인다는 정도면 됩니다. 지금처럼 솔직하게요.
첫댓글 저는 선생님의 리뷰만 읽어도 힐링이 되네요. 괜찮다고 밀하고 있지는 않은데 글을 읽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눈물도 나는게, 참.
이런 글쓰기, 이런 고민이 헛되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건 남편에 대한 비난이나 원망이 아닌 더 나은 관계로 만들어가는 거니까요. ~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전 슝슝님이 누구도 꺼내놓고 할수 없던 이야기를 풀어준것은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전 아무래도 감정에 아직은 솔직하지 못한것 같아서 그 점을 배우고 싶어요.
은유선생님! 빠른 피드백 감사해요~~
전 낼 출국합니다. 모두 추석 잘 보내시고 10월에 봬요~~~ ^^
잘 댕겨와요. 잉꼬 세콰이어님. 이 푸르른 가을날, 이태리와 파리라니 눈물나게 부럽습니다. ^^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하는 나쁜 사과는 안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네요. 슝슝님 글을 보고 남자들이 성에 대해 그만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제 말은 남성 중심의 성에 대한 언설이 너무 넘쳐나니까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고, 슝슝님에게 이런 글을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피해자, 남자는 가해자 아니면 잠재적인 피고인 그런 구도의 이야기를 벗어나는 말을 하고 싶은데 바쿠님 말대로 여자는 이미 피해자는 전제 하에 제가 이야기를 거칠게 한 것 같아 죄송하네요. 합평 시간에 좀더 신중하고 정확한 말을 할 수 있도록 고민하겠습니다. 은유샘의 꼼꼼하고 다정한 리뷰의 경지를 감히 본받고 싶네요.
글은 내용보다 맥락인데, 저는 어제 상황이 슝슝(글)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 글을 계기로 해 평소 젠더 이슈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거라고 생각해요. 한 사람이 한마디씩만 해도 십수마디가 되었으니, 듣는 사람은 '공격'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난처했을 거 같아요. 같은 남성으로서 심판대에 세워진 기분이 들 수도 있었겠구나, 이해가 되니 더욱 미안해집니다. 이러면서 하나씩 배웁니다. ;
아직 제 안에서도 모호한 단어들인 것 같아요 ㅠㅠ 꼼꼼하게 꼭 필요한 부분을 잘 짚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