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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역사 박물관 정도를 생각했던 나는 예상하지 못한 박물관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 졌다.
시마즈 박물관은 현대식 빌딩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랑곳 없이 꼿꼿했다. 후지와라상은 이 박물관은 시마즈 제작소 설립 당시 공장이었다고 했다.
돌아와 옛날 사진을 찾아보니 정말 그들은 설립 당시의 자리를 버리지 않고, 바로 거기에 그들의 발자취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정말 깔끔하게 잘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 장인정신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박물관은 공짜가 아니었다. 입장료가 300엔 이었다. 기업의 홍보를 위한 박물관에서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이 내 정서와 부합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특히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의 행렬이 인상적이었다.
입장료는 당연했다. 그 이유는 여기에서 시마즈 제작소 역사뿐만 아니라 일본 분석계측기 역사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마즈 제작소의 역사가 곧 일본 분석계측장비의 역사였던 것이다.
시마즈 제작소 박물관은 알찼다. 박물관은 모두 5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는데, 그 방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그 당시의 과학적 발견의 기쁨을 최대한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워야 할 서양과학기술을 최대한 빨리 체득하려던 고뇌도 담겨 있었다.
약 160개 정도되는 전시품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이 방대한 것을 모두 내 기억에 담을 순 없었다. 내 기억력의 한계를 탓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을 한번에 담아가겠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오랜 고행을 무시한 나의 얄팍한 속셈 같았다.
첫 번째 방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현미경’과 ‘엑스선(X-ray) 발생기’가 있었다.
현미경은 고풍스러웠다.
1781년 오사카에서 제조된 것으로, 본체는 목재이고 3가지 종류의 대물렌즈로 구성이 되었다. 그 당시 고급장난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급장남감이란 말에 후지와라상에게 시마즈 가문이 부자였냐고? 라고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정반대였다. 시마즈 가문은 창업자 시마즈 겐조 시니어의 대를 이은 시마즈 겐조 주니어가 초등학교 1학년밖에 공부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현미경은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 혹시 가난을 이겨낸 과학에 대한 열정이 경매를 통해 여기에 갖다 놓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엑스선(X-ray) 발생기는 유리, 나무, 철 재질로 구성되었다. 태생이 다른 원소들이 조화되어 인체의 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니, 참으로 경이롭다.
제조일은 약 1917년에서 1936년 사이라고 추정하였다.
설명문에는 수입품을 숭배하던 시대에 국산 범용 X-ray시스템을 제공하여 국내 시장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X-ray 시스템의 리더로서 시마즈의 명성을 확립했다고 적혀있었다.
당시 시마즈 연구원들은 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독일에 건너 갔으며, X선의 방사선 피폭에 무지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험을 하다가 원인도 모를 채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인류의 목숨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그들의 사명감에 숙연해졌다. 그리고 시마즈 제작소의 의료기기사업부도 오랜 역사의 희생을 통해 지금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방에는 ‘풍선비행 묘사도’, ‘소형 축전지’, ‘목재 선반’이 있었다.
‘풍선비행 묘사’는 창립자 시마즈 겐조 시니어가 교토부에서 의뢰한 수소풍선을 성공적으로 제작하여 1877년 12월 6일에 황궁 경내 축제에서 이를 시연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일본 최초의 성공적인 유인 비행이었다고 한다.
‘교토에서 시마즈 겐조 시니어에게 의뢰했다’는 문구에서 그 당시 일본과학계에서 시마즈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찾아본 자료에는 수소를 사용한 유인 비행 열기구의 실험은 1783년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때 시연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까지 참석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 당시에 하늘 위를 거닐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정말 큰 볼거리였나 보다. 하늘 위로 날아올라 땅에서 열광하는 관객들을 본 그들의 기분을 어땠을까? 아마 그때의 희열이 지금의 시마즈 항공관련 사업을 일으킨 단초이진 않았을까?
1897년에 제작된 ‘소형 축전지’는 용량은 약 10Ah로서 일본 축전지 산업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했다.
Ah라는 단위는 휴대폰이 보편화된 요즘에 익숙한 단위다.
보통 손바닥만 한 휴대폰 보조 밧데리 용량이 20000mAh이나 되는 것을 감안하면 밥통만한 크기에 10Ah용량은 답답할 수도 있겠으나, 영웅본색이 주윤발이 사용하는 벽돌폰에서 현재의 슬림한 휴대폰까지의 변천사를 지켜본 나로서는 이것은 답답함이 아니라, 영겁의 세월 속에서 언젠가는 도래할 휴대폰 시대를 내다본 시원한 통찰력이었다.
이러한 밧데리의 소형화에 대한 연구개발이 선행되지 않았더라면, 구석기시대의 돌도끼 같은 현시대의 휴대폰도 우리 손에 쥐여지지 못했을 것 같았다.
‘목재 선반’은 현재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형 목재 선반이라고 하였다.
설명문에 따르면 Wagener 박사가 1875년 비엔나 국제전시회에서 일본으로 가져와 1881년 교토를 떠날 때 시마즈 겐조 시니어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설명문을 읽고 나서 시마즈 겐조 시니어가 이 장비를 서양으로부터 들여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막후교섭을 했을지 상상된다.
선반은 공작물을 회전시키면서 날이 달린 공구로 가공하는 기계공구이다. 제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부속품들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장비다. 이런 굉장한 장비를 얼마나 손에 넣고 싶어했을까?
이 목재 선반은 공작물을 회전시키기 위해 발의 누름 힘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발판을 누를 때 마다 휙휙 돌아가는 공작물에 날카로운 공구를 갖다 대기를 반복하며 정교한 부품을 만드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교한 부품제작을 위해 그들의 발과 손이 교차하며 탄생시킨 리듬의 간극이 고작 몇 밀리미터 이내 일 거란 생각이 드니, 만약 그들이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정말 대단한 드러머가 됐을 거라는 재미난 상상을 해본다.
세 번째 방에는 시마즈제작소에서 1882년에 발행한 ‘제품 카탈로그’가 있었다.
이 문서는 시마즈 제작소에서 가장 오래된 제품 카탈로그인데, 그 무렵 약 110종류의 장비를 판매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카탈로그 뒷면에는 고객이 원하는 장비를 제조하겠다는 제안이 있는데, 이는 고객 중심의 경영철학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제품 카탈로그의 제품 그림은 어떻게 그리고 인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밀하고 정확한 그림들은 일본이 왜 애니메이션 강국인가를 실감했다.
네 번째 방에는 ‘윔셔스트(wimshurst) 정전기 유도발생기’, ‘교육용 X 선 장치’, ‘인체해부모형’이 있었다.
‘웜셔스트 정전기 유도 발생기’는 1884년 9월 시마즈 겐조 주니어가 일본 최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정전기 유도를 사용하여 고전압을 생성하는 장치로 ‘시마즈 전기’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전압은 직류에서는 750볼트 이상, 교류에서는 600~7,000볼트 이상의 전기이다. 분석화학 분에서는 이온 빔 주입, 전자 빔 용접, 전자 빔 증착, 이온 밀링, 중성자 발생기, 플라즈마 점화기, X선 발생장치 등에 고전압 전원 장치들은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고전압발생장치는 첫 번째 방에서 봤던 ‘X선 발생기’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제작년도로 추정해보면 ‘정전기 유도발생기’가 ‘X 선 발생기’보다 최소 33년 정도 앞섰다. 상관관계와 전후 관계를 살펴보면 내 예상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정전기 유도발생기의 선행 발명이 없었다면 결국 X선 발생기 탄생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소재 부품이 시스템(장비)에 미치는 중요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교육용 X 선 장치’는 물리 및 화학 실험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X선 실험에 필요한 모든 구성요소를 컴팩트한 디자인에 갖추고 있었다. 과학강국을 꿈꾸며 이 장치를 통해 X선 생성과 관련된 원리와 메커니즘을 학생에게 교육했을 것이다.
호기심에 구글에서 ‘교육용 X선 장치’와 ‘Educational X-ray’를 검색해 봤다.
검색을 통해 최신 X선 발생 교육장치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상업화된 X선 장비만 있을 뿐 교육장치는 찾지 못 했다. 지금은 거의 X 선 발생장치의 원리를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찾지 않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인체해부모형은 정교하고 색감의 조화가 현란했다.
‘인체 해부 모형’은 1891년경에 종이 제조방법을 개선하여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러한 제조방법은 건조한 공기와 습도에 강한 모델이 되었고, 1911년에 특허를 획득한 후 시마즈는 이 섬유 제조방법으로 많은 인체 해부 모형을 생산했다고 한다.
왜 그들은 인체 해부모형을 만들었을까?
이유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아래 문서의 원문을 해석하면서 이 해부모형이 마네킹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재미난 일을 알게 된다.
“마네킹 산업의 원류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Shimadzu는 일본 마네킹 산업의 선구자입니다. 인체 해부 모형을 제작하면서 축적 된 기술을 사용하여 Shimadzu는 1925 년에 프로토 타입 마네킹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30 년에 Shimadzu는 일본 고유의 섬유 소재로 만든 마네킹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절정기에 Shimadzu는 일본 시장의 약 85 %를 차지하는 주요 제조업체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1943 년에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전쟁 후 사업은 재개되지 않았지만 시마즈의 마네킹 기술은 다른 회사의 전직 직원을 통해 일본 마네킹 산업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일본 유니클로 매장의 마네킹에 옛 시마즈의 인체해부모형의 DNA가 있다고 생각하니, 이게 진정한 통섭이지 않은가 싶다.
다섯번째 방에는 ‘가스크로마토 그래프’ , ‘다나카 고이치가 받은 노벨상’, ‘여러 가지 과학 교구재’가 전시되어 있었다.
1957년에 제작된 가스크로마토 그래피는 시마즈가 분석계측산업의 서막을 올리는 것 같았다.
이 가스크로마토 그래프는 용매, 제약, 석유제품, 식품 성분 등.. 여러 물질의 성분분석에 사용되는 분석장비로, 시마즈는 일본 최초로 상업화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또한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과학산업이 서구에 비해 크게 뒤쳐져 있을 때 제작된 장비로서 당시 일본 분석장비 산업을 이끈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가스크로마토 그래프에 위치한 많은 조절자, 인쇄출력기, 게이지 등에서 연구개발자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기기의 모든 반응을 살피기 위해 조절 자들을 얼마나 많이 돌렸을까? 출력된 인쇄물의 결과를 보고 얼마나 많은 희비가 교차했을까? 복잡계가 증가한 근래의 과학에 부흥하느라 그들은 분명 내 상상보다 곱절은 더 노력했을 것이다.
2002년 다나카 고이치가 받은 노벨상은 화려하면서도 부러웠다.
시마즈는 이 당시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와 그에 따른 엔화 강세로 인한 경기 침제에 대응하기 위해 생명공학 및 기타 고성장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을 실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2001년 생명과학연구센터가 설립되어 이러한 노력을 지원하였고, 이듬해 이 센터에서 일하던 다나카 고이치 대리가 생물학적 거대분자의 질량분석을 위한 소프트 레이저 탈착 이온화 방법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는 1875년에 설립된 시마즈 제작소가 127년만에 이룬 쾌거이다. 창립자 시마즈 겐조 시니어가 목표했던 세계 과학의 리더 자리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카메라의 초점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다나키 고이치 대리의 사진에서 인간의 초인적 몰입능력에 대한 위대함을 느낀다.
여러 과학 교구재들은 정교하며 정결했다.
영화 작동 방식-Stroboscope, 구식 3D 안경-입체경, 매직 미러, 빛의 반사-원통형 및 원추형 거울, 무게 중심 실험기, 겐조의 충돌 공 기구물, 탄성 / 비탄성 볼 세트, 진공 실험 장비, 공명 튜닝 포크, 3 차원 자기장 생성기, 공기에 떠있는 자석, 백열등과 LED 조명의 차이 실험기 등......
이처럼 수많은 과학 교구재들은 시마즈 제작소가 자국의 과학교육을 아주 중요시 했다는 것을 반증했다. 어떻게 흠집 하나 없이 이 많은 것들을 이리도 잘 보관하고 있단 말인가? 어떤 상태나 상황을 그대로 보존하거나 변함없이 계속 지탱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시마즈의 정신 같았다.
감탄과 함께 마지막 다섯 번째 방을 나오며 한편의 드라마였던 시마즈 박물학 견학을 끝냈다. 교토에서 지낸 며칠은 그 동안 미쳐 생각 못했던 분석장비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일깨워주었다.
-분석장비는 오랜 숙고의 시간과 경험의 축척이 집약 되야 한다.
-분석장비는 인류발전에 대한 분명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모든 실험자료와 시제품은 기술보전을 위해 잘 관리되어져야 한다
-외부에 앞선 기술이 있다면, 최대한 그 기술을 빨리 습득하고 응용해야 한다.
느낀 것을 정리해 보니, 이는 결국 과학의 본질에 대한 정의와 너무 흡사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과학을 평가하는 일인 만큼 한 단계 더 철두철미하게 지켜져야 할 것 같았다.
시마즈 제작소를 다녀 온지 몇 년이 흘렀다.
요즘 소재, 부품, 장비에 대한 정부지원연구과제 신청공고가 많아 졌음을 느낀다.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의 소재 부품에 대한 규제가 생기자,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많은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반가운 소식’이란 생각과 함께 시마즈 제작소의 추억이 떠오른다.
바로 시마즈 제작소가 소재, 부품, 장비에 대한 기술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경험한 시마즈 제작소처럼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을 바라보고, 145년동안 사명감을 갖고 그들이 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도 소재/부품/장비의 강국이 될 날은 멀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https://www.shimadzu.com/visionary/memorial-hall/
출처: https://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322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