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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빛과 생명
빛은 관찰 방법에 따라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닐스 보어는 빛의 특성을 설명함에 있어, 회절 패턴(diffraction pattern)1)을 설명할 때는 빛을 파동으로 간주해야 하고,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2)를 설명할 땐 빛을 입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되는 것이며 그 두 가지 관점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3)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빛을 파동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빛의 회절패턴을 설명할 수 없고, 입자로 간주하지 않으면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즉, 빛의 서로 상반된 두 가지 특성을 우리가 가진 인식체계로 이해하기 위해선 인류가 관습적으로 사물을 인식해온 관점의 틀을 깨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빛은 입자로서의 특성과 파동으로서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참’으로 증명됐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서 입자는 ‘물질’이고 파동은 ‘현상’이므로 둘을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실험을 통해 참으로 드러났다 해도 우리의 인식체계가 그런 사실을 모두 ‘옳거니’ 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인간의 인식체계를 한두 가지 역명제(逆命題)로 뜯어고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습적 인식체계를 고수한다면 위의 경우와 같이 세상에 ‘참’으로 존재하는 여러 사실을 부정해야 하는 오류에 빠진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자니 인식의 한계에 부딪히고, 과거의 패러다임을 고수하자니 사실을 부정하는 진퇴양난의 경계에 내몰리는 것이다.
이에 보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과거의 관습을 유지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방법론으로 상보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입자는 파동일 수 없다는 생각, 즉 물질은 물질일 뿐 현상이 될 수는 없다는 전통적 인식의 틀을 무리해서 깨기보단,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을 임의로 사용하고, 그 둘을 통해 밝혀진 사실을 모두 참으로 인정한다면,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납득할 수 없는 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보어는 1932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빛과 생명’4)이란 강의에서 생명이 있는 유기체의 특성을 이해할 때도 빛과 마찬가지로 상보성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보어는 유기체의 ‘물질적 특성’과 ‘생물학적 특성’을 분석하는 실험은 기본적으로 ‘동시’에 실행될 수 없으며 그것이 두 가지 유형의 실험이 모두 필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5)
보어의 견해를 따르면 상보성의 원리는 생명 현상을 관찰함에 있어 인간이 가진 지각과 인식 그리고 언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으로 보인다. 또한 상보성의 개념을 이용하면 생명이 있는 유기체의 특성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하지만 언뜻 보면 완벽할 것 같은 상보성의 원리도 그 속에 감춰진 문제점 때문에 말뿐인 잔치에 머무른다.
2. 게슈탈트(gestalt)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전체의 속성은 분리된 부분을 분석해서는 추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게슈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6)을 이용하면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가 가진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인간의 뇌가 경험을 인식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학문으로,7) ‘게슈탈트(gestalt)’란 우리말로 ‘형태(form)’라는 말이지만 이 학파에서는 ‘패턴(pattern)’이나 ‘구성(configuration)’의 의미로 사용한다.8)
doi: 10.1038/s41598-021-88139-1
이 그림은 ‘나의 아내와 장모(my wife and mother-in-law)’9)라는 제목의 게슈탈트 그림이다. 우리는 관점을 변화시켜 이 그림을 젊은 여인으로도 볼 수 있고, 노인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젊은 여인과 노인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관찰자가 전체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지 결정하기 전에는 그림의 각 부분이 가지는 의미가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doi: 10.1038/s41598-021-88139-1
만약 관찰자가 이 그림을 젊은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그림의 ‘a’는 여인의 턱이 되고 ‘b’는 귀가 된다. 그러나 노인이라고 생각하면 ‘a’는 노인의 코가 되고 ‘b’는 눈이 된다.
만약 젊은 여인과 노인을 동시에 보고 싶다면 관찰자는 그림의 ‘a’를 턱이면서 동시에 코로 봐야 하고 ‘b’를 귀이면서 동시에 눈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하나의 부분에 복수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전체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체계로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유기체가 ‘사물을 인식할 때 개별 구성 요소가 아니라 전체의 패턴이나 구성을 먼저 인식한다.’고 강조한다.10)11)
사람들은 대개 게슈탈트 그림으로 관점의 차이12)나 착시효과13)를 설명한다. 하지만 게슈탈트 심리학은 상보성의 원리를 이용하여 생명체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단순한 노력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3. 경험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다양한 정보 중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14) 예를 들어, 위의 게슈탈트 그림을 태어나서 쭉 젊은 엄마만을 보고 자란 아이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해보자. 그 아이의 기억엔 노인의 이미지가 없다. 따라서 아이가 이 그림의 중복된 이미지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누군가 이 아이에게 그림의 a는 코, b는 귀라고 말하며 이 그림은 나이가 많은 여인(노인)을 그린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그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을 경험한 누군가에게 ‘참’인 명제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겐 ‘거짓’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참된 지식은 오직 감각적 경험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15)와 ‘경험을 근거로 일반적 사실을 추론’하는 ‘귀납주의’16)의 한계를 보여준다. 자연이 가진 중복된 함의(含意)를 개인이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개인의 경험과 지식을 무한대로 확장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보어가 주장하는 것처럼 상보성의 원리를 통해 유기체의 물질적 특성과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임의로 관점을 변화시켜 이해하는 것은 과학자가 곧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과거에는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과 철학이 분리되고 물리학과 생물학이 여러 하위 분야로 쪼개진 ‘협소한 전문가’의 시대에 유기체의 물질적 특성과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경험적으로 이해하는 ‘전문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4. 선택
게슈탈트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상보성의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중첩된 이미지 중 하나를 보기로 선택하는 순간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하나의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는 데 있다. 젊은 여인을 보기 위해선 노인의 이미지를 버려야 하고 노인을 보기 위해선 젊은 여인을 보는 걸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인지적 선택 과정의 결과이다.1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관찰하기 위해 하나의 관점을 ‘선택’하면 다른 무언가를 무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각각의 철학적 아이디어와 과학적 원리 및 이론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현실의 깊이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이론적 사고와 발견의 다른 길을 닫는다."18)라는 아돌프 마이어19)의 말이 이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우리가 생명체의 물질적 측면에 집중하기 위해선 생명체가 가진 유기적 특성을 무시해야 하고, 생명체의 고귀함에 몰두하다보면 그것을 이루는 물질적 특성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고의적 무시가 아니라 인지적 선택의 결과이며.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이다. 고도로 학습된 전문가는 두 관점을 오가며 각 상황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나, 그런 전문가조차도 하나에 몰입하기 위해선 나머지 하나를 버려야 한다.
5. 의료
현시대의 의료 시스템은 보어가 말한 상보성의 원리가 현실에서 작동하기 어렵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현대의학의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가 주관적 불편(illness)이나 사회적 불편(sickness)을 호소해도 검사실의 물질적 해석을 통해 질병(disease)으로 인정되지 않으면,20)21)22) 아무 문제가 없는 건강한 사람으로 진단한다. 또한 아무 불편이 없는 건강한 사람도 정기 검진으로 확인한 물질적 수치가 통계적으로 정해진 “정상” 범위를 벗어나면 환자 취급을 받는다.
이런 의료시스템에 불만을 느낀 환자는 전통의학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물질적 검사를 통한 물리적 해석을 경시하고 환자의 주관적 감각을 근거로 환자가 호소하는 모든 불편을 질병으로 진단하거나, 환자가 느꼈던 불편이 사라진 상태를 회복이라고 판단하는 전통의학도 유기체로서 환자가 가진 물질적 특성과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온전히 고려한 의학이라고 볼 수 없다.
닐스 보어의 말처럼, 유기체를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생명으로 보는 상호 보완적인 두 가지 관점은 환자라는 유기체와 질병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모두 필요하며,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명의 의료인이 양쪽의 의료 시스템을 두루 섭렵할 수 없는 ‘경험’의 한계와 한쪽을 ‘선택’한 의료인이 자신의 분야에 몰입되어 다른 한쪽을 무시하는 ‘인식’의 한계 때문에, 정작 도움이 필요한 환자는 건강의 사각지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100년 전 보어는 상보성이란 용어를 통해 물질과 생명이란 상호 배타적인 두 관념이 상호 보완적임을 역설했다.23) 그러나 우리는 100년이란 시간 동안 타인의 견해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보단 자기의 우월함을 뽐내며 상대를 무시했고, 그 결과 생명체를 바라보는 인류의 관점은 균형을 잃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상보성의 원리를 통해 보어가 요구한 인식의 수준은 애초에 인간의 능력으로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슈뢰딩거 이야기는 6편에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1) https://en.wikipedia.org/wiki/Diffraction
회절
2) https://en.wikipedia.org/wiki/Photoelectric_effect
광전효과
3)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868532/
생물학의 상보성 Complementarity in biology
4) https://www.nature.com/articles/131457a0
Light and Life
5)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868532/
생물학의 상보성 Complementarity in biology
6) https://en.wikipedia.org/wiki/Gestalt_psychology#cite_note-:3-7
게슈탈트 심리학
7) https://www.simplypsychology.org/what-is-gestalt-psychology.html
게슈탈트 심리학이란? 정의, 원칙 및 예
8) https://www.britannica.com/science/Gestalt-psychology
게슈탈트 심리학
9) https://en.wikipedia.org/wiki/My_Wife_and_My_Mother-in-Law
나의 아내와 장모
10) https://www.simplypsychology.org/what-is-gestalt-psychology.html
게슈탈트 심리학이란? 정의, 원칙 및 예
11) https://en.wikipedia.org/wiki/Gestalt_psychology#cite_note-:3-7 게슈탈트 심리학
12)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728284/
시각적 인식 II에서 게슈탈트 심리학의 세기. 개념 및 이론 기반
13)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482144/
시각적 인식에서의 게슈탈트 심리학의 세기 I. 지각적 그룹화 및 도형 기반 구성
14)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4116780/
인간이 만든 환상을 통한 인간의 지각 이해
15) https://en.wikipedia.org/wiki/Empiricism
경험주의
16) https://en.wikipedia.org/wiki/Inductivism
귀납주의
17)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944661/
선택하기 위해 태어났다: 통제 욕구의 기원과 가치
18)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BF01602632
생물학 상보성의 원리
19) https://de.wikipedia.org/wiki/Adolf_Meyer-Abich
아돌프 마이어-아비치
20) https://mh.bmj.com/content/26/1/9
Disease, illness, sickness, health(건강), healing(치유) and wholeness(온전함):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개념 탐색
21)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5816293/
역사, 과학 및 사회의 건강과 illness
22)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6327539/
Illness and disease: 경험적 윤리적 관점
23)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유영미 역. 부분과 전체. 서커스 출판 상회. 2016. P 210 – 212.
첫댓글 오늘도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양자역학을 게슈탈트 심리학에 접목시켜 의료로 넘어오는 논리가 기가막힙니다
바이러스도 생물과 사물의 중간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요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조사하면 무생물적인 관점을 무시하게되고 무생물적인 관점으로 조사하면 생물학적인 관점을 무시하게돼서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기 어렵겠네요
감사합니다 😄
응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읽고 읽으며 공부합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