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개혁주의라고 하면 칼빈의 견해가 지배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츠빙글리의 신학도 일정부분 개혁주의에 기여를 했습니다. 개혁주의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언약신학을 처음으로 본격화시킨 개혁자는 츠빙글리였습니다. 개혁주의는 주요 종교개혁자인 루터•칼빈•츠빙글리 중에서 루터를 제외한 칼빈과 츠빙글리의 신학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한국에서 루터•칼빈에 비해 츠빙글리에 대해서는 덜 알려져 있습니다. 넓은 의미의 개혁주의 안에서 칼빈과 그 후계자들의 신학은 득세를 하고 흥왕해져 갔지만 츠빙글리와 그 후계자들의 신학은 빛을 잃어 갔습니다. 그것이 츠빙글리에 대해 아쉬운 부분입니다. 구분선 아래의 내용은 개혁신학 용어사전에서 츠빙글리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소개한 것을 타붙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츠빙글리에 대한 핵심만이라도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울리히(홀드라이히) 츠빙글리(Ulrich(Huldrych) Zwingli,1484-1531)
루터, 칼뱅과 함께 개신교 종교개혁의 주된 창시자 중 하나인 인물.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태어난 그는 바젤과 비엔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북부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에라스무스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공식 학위 과정을 마친 뒤에도, 츠빙글리는 토마스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의 수업을 들으면서 인문주의와 신학에 관한 공부를 지속해 나갔다. 이 비텐바흐의 가르침을 통해, 그는 성경의 권위와 이신칭의에 관한 믿음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을 얻게 되었다. 1506년에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로 안수 받고 글라루스(Glarus) 교구에 부임했는데, 이곳은 스위스 정부가 다른 국가의 전쟁 활동에 참여할 용병을 모집하는 중심지였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교황을 위한 전쟁의 경우 외에는 이 용병 제도에 반대했다. 그는 1512년부터 1516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교황을 위한 용병 부대의 군목으로 사역했으며, 이를 통해 이탈리아를 여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이전의 방식을 따른 이탈리아의 미사에서 자신이 발견하게 된 고대의 관습과, 당대의 로마 가톨릭 관행 사이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했다. 군목 사역을 마칠 무렵 그는 교황을 위한 용병 활동을 부적절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지만, 그 사역 덕분에 이후 몇 년간 교황 측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교구 사제로서 혼자 공부를 계속했으며, 그리스어까지 독학했다. 그 자신의 언급에 따르면, 글라루스에서 사역한 마지막 해인 1516년에 츠빙글리는 성경에 관한 개혁파적 이해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이 해에 그는 아인지델른(Einstedeln)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곳은 마리아에게 봉헌된 예배당이 있는 유명한 순례지로서, 많은 순례자가 이곳에서 그의 설교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1519년에 츠빙글리는 그로스뮌스터 (Grossmuenster)의 담당 사제로 임명되었다. 다만 그가 아인지델른에서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일부는 그의 임명에 반대했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으며, 점점 더 깊어져가던 개혁파적 신념을 통해 그 문제에 맞설 힘을 얻었다. 그는 이곳 그로스뮌스터에서 신약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그가 루터의 주장과 함께 점점 더 널리 퍼져가던 종교개혁의 교리들을 지지한다는 것이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그는 수도원 제도와 연옥, 성지 순례, 마리아 숭배와 면벌부 등의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관습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근본 권위를 중시한 인물로 여전히 기억되는 그는 취리히 성경(1529)의 출간을 도왔으며, 이는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독일어 성경 번역본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의 지도력이 커져감에 따라, 츠빙글리는 특정 부분들에서 마르틴 루터와 의견 충돌을 빚게 되었다. 그들은 특히 성찬 시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해 상이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 문제는 츠빙글리가 루터의 공재설에 맞서 기념설을 옹호했던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핵심쟁점이 되었다. 또한 츠빙글리는 세속 국가의 권위를 강하게 지지했는데, 이는 초기에는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던 일부 재세례파들을 몹시 분개하게 만들었다. 그는 각 지역 정부가 교회 내의 모든 변화를 승인하게끔 했으며, 스위스 종교개혁이 진전됨에 따라 일부 주들은 츠빙글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주들은 개신교를 강제하였고 비성경적인 것으로 간주된 미사 등의 관습을 금지했으며, 이는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주들과의 충돌과 전쟁을 불러왔다. 1531 년 10월 카펠(Kappel)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 측의 군대에 맞서 취리히 군을 이끌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하인리히 불링어가 그로스뮌스터에서 그가 맡았던 직책을 감당하면서 취리히 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켈리 M. 캐픽 등, 『개혁신학 용어사전』, pp.144~145.
첫댓글 공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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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질의 안에, 밑에, 함께 (in, under, along with) 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임재를 믿었고, 공간 속에 연장된 몸 (body extended in apace) 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다 라는 주님의 제정어에서 ...이다를 윤리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과 화체교리를 거절했다. 루터의 성찬에 대한 견해는 여러번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1519년 성찬에 관한 교설 을 쓴 때이고, 둘째는 1520-1529년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쓴 때(쯔빙글리와 말부룩 회담을 하기까지)이고, 세째는 말부룩 회담 이후이다.
첫째, 성찬에 관한 교설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 아래 두고, 성물인 떡과 포도주는 도장(siggel)으로 그 아래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성례는 본체의 표징이라고 했다.
둘째, 교회의 바벨론 포로 에서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찬의 결정적 요소는 신앙이라고 했다. 성찬은 약속이며, 성찬의 은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라고 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째가 우리의 신앙이며, 세째가 사랑이라고 했다.
@장코뱅 세째, 말부룩 회담이후에 성찬에 관한 루터의 견해는 공재설로 형성되었다. 또한 그는 쯔빙글리의 견해에 반박했는데, 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표상한다는 것과 ② 이것은 내 몸이다를 이것은 내 영적 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박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를 제외시키는 행위는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황 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장코뱅 루터의 개혁이 츠빙글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베 네, 로마교의 회체설 흔적이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공재설이라고 하겠습니다.
@장코뱅 이 둘째 포인트에 매우 공감을 합니다.
@천이다 공감합니다22
조금 더 긴 글로 츠빙글리에 대해 아시려면 아래 포스팅 속의 pdf 파일을 클릭해서 열람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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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스위스 종교개혁(진지훈)
https://cafe.daum.net/1107/Y4PR/32
다신 한번 진지하게 읽어 보겠습니다.
@노베 네, 저도 그리 하겠습니다.
기념설 = 상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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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설(memorialism)
성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믿음. 울리히 츠빙글리는 미사의 거행에 담긴 제사의 개념과 더불어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하신다는 주장이나 그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바뀐다는 화체설을 강하게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성례를 단순히 회중 안에 존재하는 신앙의 징표로 여기는 해석을 옹호했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회중의 성찬 참여와 자국어 예배를 강하게 주장했으며, 그가 개정한 예전에서는 기념의 행위가 뚜렷이 강조되었다. 츠빙글리 파의 이 상징적인 견해는 지금도 많은 개혁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켈리 M. 캐픽 등, 『개혁신학 용어사전』, p.37.
기념설도 개혁주의 안에서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베 네, 요 앞선 포스팅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1107/Y4OK/57
@장코뱅 네, 공감합니다.
불링어 = 불링거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가 작성한 스위스 제2신조(Confessio Helvetica Posterior)는 오늘날까지 하나의 중요한 개혁교회 신앙고백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아래 한국어 위키 백과를 읽으시면 불링어에 대해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링크 클릭).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C%9D%B8%EB%A6%AC%ED%9E%88_%EB%B6%88%EB%A7%81%EA%B1%B0
덕분에 불링거에 대해 배웠어요. 불링거의 역할이 매우 컸네요. 그의 의장과 목회 활동을 보면 매우 현대적이고 건강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장기 집권(?)했군요. 제자나 후배들이 없었던 이유가 되었겠죠.
@코람데오 좋은 포인트를 짚어 주셔서 제게 도움이 됩니다.
@코람데오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츠빙글리를 다뤄주시니 감사합니다. 칼빈에게 베자가 있었듯이 츠빙글리에게는 불링거가 있었던 것 같네요. 개혁주의에 츠빙글리의 지분이 ㄱㅕㄹ코 작지 않다고 봅니다.
읽어 보니 저도 그렇게 느껴지네요.
네, 공감합니다.
츠빙글리의 언약신학과 기념설은 루터는 물론이고 칼빈보다도 더 진보한 측면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츠빙글리와 칼빈의 후계자들이 연합을 하여 넓은 개혁주의 전선을 구축한 것에 주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