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적으로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시험준비를 시작할 때 나는 알파벳도 몰랐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석 달 만에 영어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무리였는데, 아홉 과목 중 한 과목의 과락도 없이 합격했다. 원래 영어는 다음 시험에 과목합격을 노릴 요량이었다. 그런 내게 영어선생님이 비책을 가르쳐줬다. ‘4지선다형 문제에선 긴 답이나 3번 보기가 정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덕분에 영어는 다 찍었음에도 45점이나 받았고 전과목 평균이 70점을 넘어 중졸자격을 얻었다. 확률의 과학을 벗어나는 이런 게 바로 기적이다! 엄마와 형제들이 축하해주었다. 아버지도 조금 뿌듯하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다시 단과 학원에 드나들자 아버지는 빨리 공장을 알아보라고 독촉했다. 취업에 미적거리고 있으니 아버지는 새벽 3시에 나를 깨워 쓰레기 청소에 데려갔다. 상대원 시장통과 동네를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수거하고 폐지와 고물을 골라내야 했다. 아침에 등교하는 여학생과 마주치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려면 공장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홍 대리의 왕국으로 돌아갔다. 중졸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양실업은 여전했다. 권투경기도, 빳따도... 한 번은 공장에서 소원수리를 받았는데, 순진한 소년공 한 명이 빳따와 권투경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적어냈다. 다음날이 되자 홍 대리가 현장을 돌며 반장과 고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좀 잘하자아.” 홍 대리의 그 말은 서늘했다. 소원수리에는 공장을 칭송하는 말만 있어야 했다. 분위기 파악 못한 그 민주적인 건의가 이제 막 참사를 만들어낼 참이었다. 홍 대리가 떠나자 폭행이 시작됐다. 작업불량, 복장불량, 청소불량. 고참과 반장들은 온갖 이유를 들어 빳따를 휘둘렀다. 쓰나미처럼 한 차례 매타작이 지나간 다음, 홍 대리가 다시 등장했다. 그는 우아한 자세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공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폭력을 사주하고 행하는 자였다.
얻어터진 소년공들은 어떤 녀석이 그런 쓸데없는 걸 적어냈는지 서로 의심하며 눈을 부라렸다. 나도 다짐했다. 홍 대리처럼 고졸이 되어 손도 대지 않고 군림하는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분노와 억울함은 내 안에 그런 지옥도 만들어냈다. 공장에서 맞는다는 얘기를 집엔 한 적이 없다. 나중엔 맞아서 갈비뼈에 금이 간 일도 있었다. 그때는 치료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알렸다. 재영이 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재명이가 그렇게 공장에서 맞고 다녔는지 까맣게 몰랐어요. 난 걔보다 먼저 공장에 들어갔지만 나이가 있어서 그렇게 맞지 않았죠. 재명이가 집에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안 하니까 전혀 몰랐어요.” 홍 대리가 되겠다는 다짐과 달리, 나는 서서히 직접 때리는 반장이나 고참보다 그걸 용납하고 사주하는 상급자의 위선이 더 나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장과 공장장, 아니 홍 대리라도 마음만 먹으면 폭력은 없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은 폭력으로 유지되는 질서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달랐고 말과 행동이 달랐다. 앞에서는 소년공들을 때리지 말라고 했지만, 뒤에서는 더 많이 때리도록 부추겼다. 그들은 우아한 위선자들이었다. 약자에게 더 가혹했고 소년공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나빴다. 결국 나의 목표는 천천히 수정돼 갔다. 홍 대리 되기가 아니라, ‘홍 대리들’이 없는 세상이어야 했다.